카네다 마사이치

 

'''카네다 마사이치의 수상 이력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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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1958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벳쇼 다케히코
(요미우리 자이언츠)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스왈로즈''')

무라야마 미노루
(오사카 타이거스)

''''''마이니치/다이마이/도쿄/롯데 오리온즈''' 역대 감독'''
오사와 케이지
(1971~1972)

'''카네다 마사이치'''
'''(1973~1978)'''

야마우치 카즈히로
(1979~1981)
아리토 미치요
(1987~1989)

'''카네다 마사이치'''
'''(1990~1991)'''

야기시와 소하치
(1992~1994)



[image]
'''요미우리 자이언츠 No.34'''
'''카네다 마사이치 (金田(かねだ 正一(まさいち / Kaneda Masaichi)'''
'''본명'''
김경홍(金慶弘) → 카네다 마사이치(金田 正一)
'''출생'''
1933년 8월 1일, 일본 제국 아이치현 나카지마군 헤이와촌[1]
'''사망'''
2019년 10월 6일, 일본 도쿄도
'''국적'''
[image] 일본
'''신체'''
184cm, 73kg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소속팀'''
'''코쿠테츠 스왈로즈 (1950~1964)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5~1969)'''
'''지도자'''
롯데 오리온즈 감독 (1973~1978, 1990~1991)
[image]
[image]
고쿠테쓰 스왈로즈 시절
2010년에 찍은 모습. 왼쪽은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 연수를 받던 송진우
1. 개요
2. 상세
3. 선수 경력
4. 지도자 경력
5. 통산 성적
6. 여담
6.1. 재일교포 2세
6.2. 천재
6.3. 명구회 설립 주도
6.4. 가족들
6.5. 최동원과의 관계
6.7. 식성
6.8. 몸관리 비법
6.8.1. 컨디션 조절
6.8.2. 트레이닝
6.9. 쇼맨십
6.11. 이모저모


1. 개요


한국명 김경홍.[2] 재일교포 출신의 일본프로야구(NPB)에서 활약한 야구 선수(투수).
일본프로야구 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로 불리는 전설적인 선수이다. 특히 일본프로야구 통산 최다승(400승) 기록으로 유명하며, 그 외에도 통산 최다 탈삼진(4490개), 통산 최다 완투(365회), 통산 최다 이닝(5526과 3분의2 이닝) 기록도 갖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저런 엄청난 누적 기록을 쌓으면서 거둔 통산 ERA가 2.34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별명은 '카네다 천황'.
선수 생활 초기에는 한국 국적을 유지했지만, 일본 구단과 정부의 압력에 의해 결국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2019년 10월 6일, 오전 4시 38분에 담관염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86세. #

2. 상세


일본프로야구 사상 사와무라 에이지, 이나오 가즈히사 등과 함께 '''가장 위대한 투수 중 한 명'''으로 뽑히고 명예의 전당에도 전시되었다. 특히 절대 깨지지 않을 기록들을 수없이 보유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통산 5526.2이닝, 통산 400승, 통산 4,490탈삼진, 14년 연속 20승의 일본 최고기록'''이다. 승수는 전설의 대투수 사이 영월터 존슨에 이어 3위에 올라 있다. 왕정치(오 사다하루)의 홈런기록은 압축배트 등과 지나치게 작은 홈구장을 사용했다는 까닭으로 세계기록으로 인정하지 않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사무국에서도 가네다의 탈삼진 기록은 인정하여 기념구와 글러브를 미국 뉴욕 쿠퍼스타운의 명예의 전당에 전시하였다.
2005년까지 놀란 라이언에 이은, 국적과 리그를 불문한 세계 프로야구 탈삼진 역대 2위였으나 2005년 시즌 종료 후 메이저리그의 투수 로저 클레멘스가 통산 4,502탈삼진을 기록하면서 3위로 밀렸다. 2019년 시즌 종료 기준으로 라이언에 이은 탈삼진 2위는 통산 4,875개의 랜디 존슨. 로저 클레멘스는 4,672개로 3위. 하지만 로저 클레멘스가 약빨인 것이 들통나고 배리 본즈 수준의 비난을 받으며 맥과이어 수준의 바보 소리를 듣는 지금은 판국이 어떻게 날지 모른다.
400승이 얼마나 엄청난 수치인지 감이 잘 오지 않는 사람들은 일본 프로야구 승수 2위인 요네다 데쓰야(한큐 브레이브스)가 350승, 그리고 한화 이글스송진우가 210승을 거두고 은퇴한 것을 보면 짐작이 가리라 믿는다. 로테이션 개념이 부실했던 예전이었기에 가능한 기록이므로 아마도 다시는 나오지 않을 대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1983년 장명부의 30승처럼 말이다.
선수 생활 중에 가장 보람찬 일로 '''"선수생활 하면서 단 한 번도 연봉이 떨어져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꼽았다. 구단과 연봉협상을 벌일 때 전년도의 성적이 아니라 해당 시즌 자신의 목표를 내세워 금액을 정했는데 연봉이 떨어지지 않았던 게 보람찼다는 것은 결국 선수생활 중 항상 자신과 맺은 약속을 지켰다는 말에 가깝다. 하지만 연봉이 내려가는 일이 없었다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37살이라는 약간은 이른 나이에 은퇴하고 말았다.[3] 고쿠데쓰 스왈로즈에서 전성기를 보냈고 선수 말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 V9에 힘을 보태며 예전 명투수의 위용을 어느 정도 보여주었다. 고쿠데쓰 시절엔 지독한 약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투수였기 때문에 사실상 감독 머리 위에 있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원맨 카네다'와 '카네다 천황'.
롯데 오리온즈 감독을 1973~1978년(제1기), 1990~1991년(제2기)까지 맡으면서 제1기 감독 시절인 1974년 시즌에 팀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고 사실상 선수보다 더 큰 인기를 누렸던 롯데의 간판스타였다. 성격이 워낙 불같아서 심판에게 일갈한 적이 많았고 폭력도 자주 써서 '''퇴장의 대명사'''로 불렸다. 선수 및 감독시절을 모두 합쳐 총 8회 퇴장으로, 2005년 5월 요미우리 자이언츠터피 로즈가 경신할 때까지는 NPB 최다 퇴장 기록이었다.
1990년 6월 23일 세이부 라이온즈전에서 롯데 투수였던 소노카와 가즈미[4]의 보크 판정이 나오자 자기가 글러브끼고 마운드에 올라가서 그 동작을 해보이면서 '이게 어째서 보크냐!?'라는 제스처를 보여줬다. 이 때 항의하면서 구심을 폭행해 퇴장명령이 떨어졌었다. 경기가 끝나자 가네다 마사이치는 "어쨌든 심판이 엉터리다. 자기가 말한 것만 옳다는 식의 심판이 없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더 하겠다"라고 말했고, 그 날 구심을 맡았던 심판이 "이런 인간이 있는데서 어떻게 심판을 하겠느냐"며 격분하자, 급기야 1990년 시즌 도중에 사표를 내는 일이 발생했다. 여담으로 이 날 구심을 맡았던 심판인 타카기 토시아키는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퇴장이다, 심판만이 아는 프로야구"란 책을 발간함으로써 자신의 심경 등을 책에 적었다.
그리고 1991년 5월 19일 킨테츠 버팔로즈의 외국인 선수 짐 트레버가 자기팀 투수인 소노카와의 사구를 맞고 벤치 클리어링을 일으킨 후 돌아가던 중 분을 못 참고 또다시 달려들다(해당 영상엔 나오지 않으나 벤치 클리어링 이후 분을 못 참고 또다시 달려들은 상황이었다.) 넘어지자 짐 트레버의 머리를 걷어찼다.

3. 선수 경력


아이치현 교에이 상업고교 1학년 당시 고시엔 대회에서 구원투수로 크게 활약하여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다음 해 지구예선에서 탈락하자 2학년 수료 후에 학교를 중퇴하고 1950년 고쿠테츠 스왈로즈에 입단했다. 센트럴 리그, 퍼시픽 리그를 통틀어 최연소선수였으나 3~4년 후에는 프로야구 최장신 선수로 자라게 된다.
[image]
코쿠테츠 스왈로즈 입단 당시의 카네다 마사이치.
입단 첫 해 가을, 다이요 웨일즈전에 선발 등판하여 완투승을 거두어 약관 17세의 나이에 프로 첫 승리를 따냈다. 이는 일본프로야구의 입지전적 인물로 꼽히고 있는 연습생 출신의 전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고 니시사와의 16세에 이어 두 번째 최연소 승리투수 기록이다. 결국 그 해 시즌 후반에만 8승을 올렸고, 수뇌부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당당하게 투수 로테이션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입단 2년째인 1951 시즌에는 한신 타이거스노히트노런으로 제압하여 '''최연소 노히트노런 투수'''라는 기록을 세우며 시즌 동안 22승을 거두었다. 1957년 8월 주니치전에서는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당시 일본프로야구 사상 세 번째이고 최연소로 기록한 퍼펙트 게임이었다.[5] 그러나 이 경기 9회말 노아웃에서 주니치 대타의 하프스윙을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났다. 퍼펙트 직전의 궁지에 몰린 주니치가 주심의 하프스윙 삼진판정에 불복하여 격렬한 항의를 거듭하면서 경기 속행을 거부하고, 나고야팬들이 극도로 흥분했다. 관중들이 그라운드로 대거 난입해 들어올 것 같은 공포 분위기로 바뀌자 결국 주니치가 승복해서 경기를 속행했으나 후속타자의 연속삼진[6]으로 9회말을 3연속 삼진으로 끝내버리며 퍼펙트 경기의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사태는 경기 종료 후에 벌어졌다. 관객들이 일제히 뛰어들어와서 미처 구장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라운드에 고립돼 있는 심판을 무차별적으로 집단폭행했다. 물론 주심이 가장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관중에 의한 불상사로는 최악의 사건으로 꼽히고 있다.
우선 타이틀은 최다승리 3회, 최우수방어율 3회, 최다탈삼진 10회이고, 표창은 사와무라 상 3회, 베스트나인 3회, 일본기록은 통산최다승리 400승, 통산최다탈삼진 4,490, 최다 시즌 20승 이상 14회, 통산최다완투 365, 통산최다투구이닝 5526 2/3이닝, 연속이닝무실점 64 1/3이닝, 최다탈삼진 10회, 통산최다패전 298, 통산최다피볼넷 1,808이고 센트럴리그 기록은 최우수방어율 3회, 최다승리 3회, 시즌최다완투 34, 통산 최다무실점승리 82, 한 경기 최다탈삼진 16, 통산최다피안타 4,120, 통산최다실점 1,705, 통산 최다자책점 1,434, 시즌최다피볼넷 197이다.
희대의 대투수로서 피땀이 서린 고투 끝에 이룩한 찬란한 기록이 있는가 하면, 워낙 많은 경기에 나가다 보니 명예스럽지 못한 워스트기록[7]도 적지 않아서 기록을 살펴보는 데도 실로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여기 열거한 기록 중 거의 전부가 경신될 공산이 전무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 기록을 깰 만한 역량을 가진 투수가 없기도 하거니와 지금은 에이스투수 한 사람에게 과다한 등판을 요구하지 않고, 투수의 역할을 분담해서 전황에 따라 제한적으로 등판시키는 시대이므로 언감생심 누구도 도전을 시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통산 400승 및 4,490 탈삼진은 말할 나위 없이 위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값진 기록이 14년 연속 20승 부문이다. 그는 입단 2년 만인 1951년의 22승을 시작으로, 14년간 내리 20승[8] 이상씩을 올렸다. 투수가 아무리 몇 경기씩 연투를 예사로 하던 시절이라 하더라도 단 몇 시즌을 이어가기 어려운 20승이라는 벅찬 기록을 14년 동안 중단 없이 유지한 경이로운 업적은 차라리 기적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참고로 통산 400승 중 132승은 계투로 얻은 승리였고, 200승을 달성한 나이는 겨우 24세 10개월이었다.
사실 저 400승 중에는 정상이 아닌 구원등판으로 선발투수 몫이 돼야 할 승리를 빼앗다시피 한 것도 있어서 일부에서는 빈축을 사기도 했다. 실제로 선발승 횟수(268승)는 스즈키 케이시(288승)와 고야마 마사아키(273승)보다 적다. 일례로 정확히 20승을 채운 1960년의 19승째는 9월 30일에 선발 투수인 시마타니 이사오가 4이닝 무실점으로 잘 막던 것을 구원등판해서 5이닝 무자책 1실점으로 막아 승리를 챙긴 것이고, 결국 시마타니는 프로 통산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은퇴한다. 참고로 카네다는 바로 다음날인 9월 31일 선발등판해 9이닝 무실점 완봉승을 거둬 20승을 챙긴다. 통산 400번째 승리이자 마지막 승리를 기록한 1969년 10월 10일 경기도 선발 투수인 조노우치 구니오가 4이닝 1실점으로 잘 던지고 있던 것을 벤치에서 내리고 남은 5이닝을 1실점으로 막아 챙긴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승리 뺏기라고 비판을 받기도 하며 극단적으로는 가네다의 400승을 인정하지 않는 의견도 소수 있지만, 당시 기록 몰아주기 행위의 수혜자가 가네다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승리투수의 기록 조건 자체가 투수의 투구 내용과 별 상관이 없는 기록이므로 기록 몰아주기라는 행위를 비판할 수는 있어도 기록 자체를 없는 것으로 취급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통산 최다 0-1 완투패 21회를 기록하는 등 워낙 약한 팀 타선 탓에 통상적으로는 승리투수가 될 수 있을 만한 경기를 놓친 것도 만만찮게 많지만, 그런 경기를 승리 수에 포함시켜 계산하지는 않는다. 공식 기록은 아니지만 20년 동안에 38개의 홈런을 침으로써 양리그를 통틀어 투수 중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치기도 했었다. 이 기록은 2016년 오타니 쇼헤이가 경신한다.
카네다가 소속된 코쿠테츠 스왈로즈는 매 시즌마다 B클래스(리그 4위 이하 하위권)만 찍는 약체팀이었다.(첫 A클래스도 1961년에야 겨우 달성했다) 간판상품이라야 카네다와 그 당시 프로야구계의 초강호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대결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무적을 자랑하던 전성기의 거인군 타선이 카네다만 만나면 맥을 추지 못하고 승수를 늘리는 제물이 돼 주었다.
카네다는 고쿠테츠 스왈로즈의 명운을 짊어지고 있는 에이스답게 자존심이 유달리 강했고,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감독 의도와 관계없이 선발이든 구원이든 던지고 싶으면 던졌고, 내려오고 싶으면 내려왔다. 평소 연습은 물론 스프링 캠프에서도 자기가 짠 스케줄대로 독자연습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반찬은 자기가 조달해서 맘에 맞는 동료와 함께 따로 떨어져서 먹기도 했다. 그의 행동거지는 안하무인으로 비춰질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는 '카네다 덴노(金田天皇)'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1958년 희대의 거물신인 나가시마 시게오가 데뷔할 때의 유명한 에피소드는 40년이 흘러간 지금도 일본프로야구계의 이야깃거리로 돼 있다. 그해 스프링 캠프의 연습경기와 시범경기(이른바 오픈전)에서 자이언츠에 입단한 골든루키 나가시마는 양리그의 각팀 주전급 투수들을 사정없이 두들겨 큰 파문을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그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개막전 상대가 바로 고쿠테츠 스왈로즈였는데 흥분한 언론들이 "카네다도 나가시마에게는 별 수 없을 것이다"라는 투로 카네다의 자존심을 긁었다. 당대 최고투수를 자부하고 있던 그는 결연하게 선언했다. '''그런 애송이한테 당하면 이 카네다의 이름이 운다. 전 타석 삼진으로 때려잡아 프로의 매운맛을 보여 주겠다.'''
드디어 전국 야구팬의 뜨거운 관심 속에 대망의 역사적 대결이 벌어졌다. 결과는 가네다의 예언대로였다. 나가시마는 난생 처음 경험해 보는 스피드와 컨트롤 그리고 타이밍을 전혀 맞출 수 없는 절묘한 피칭에 4타석 4연속삼진의 참담한 패배를 맛봐야 했다. 4차례 타석에서 나가시마의 배트를 스친 투구는 파울볼 3개가 전부였다. 대전 영상
[image]
1969년 10월 10일 VS 주니치 드래곤즈 戰에서 400승을 달성후 400승 우승볼을 들며 인터뷰하는 가네다. 참고로 이 날이 그의 마지막 우승일이 되었다.
그러나 카네다는 1965년 오랫동안 봉으로 삼아 왔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서 그 해에 일본시리즈 우승의 환희도 맛보고 그 뒤 V9[9]에도 나름대로 공헌을 하였다.
카네다는 1969년에 4승을 올려 통산 400승을 달성한 뒤 현역을 은퇴했다. 1950~1969년의 20시즌 동안 944경기에 등판해서 5,526회 2/3 투구에 400승 298패, 승률 0.573, 피안타 4,120, 피홈런 379, 방어율 2.34의 통산성적을 남기고 떠났다.

4. 지도자 경력


[image]
그 뒤 카네다는 1973년 롯데 오리온즈 감독으로 부임해 1974년 퍼시픽리그 후기리그 우승을 달성, 그 뒤 플레이오프에서도 전기리그 우승팀 한큐 브레이브스를 3연승으로 격파하고 뒤이어 일본시리즈에서도 교진군의 V10을 저지한 주니치 드래곤즈를 격파하여 우승을 차지했다.[10] 그 뒤 1978년까지 감독직을 하며 1977년 또 다시 퍼시픽리그 후기리그 우승을 하기도 하였다.[11]
그 뒤 1990년 또다시 롯데 오리온즈의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그 때 당시 롯데는 약체팀이 되어버렸는지라 5위-6위란 처참한 성적을 남겼고 결국 1991년 시즌 종료 후 해임당했다(...) 참고로 그 해를 마지막으로 롯데가 연고지를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서 치바현으로 옮기며 이름을 치바 롯데 마린즈로 바꿨기 때문에, 카네다는 롯데 오리온즈 시대의 마지막 감독이 된다.
한편 그는 여러 해 동안 불펜에서 자신의 연습투구를 받아 주다가 왼손 엄지손가락 마비의 후유증을 얻은 고교동창생 포수가 고향에서 주유소를 차릴 때 적지 않은 자금을 쾌척해서 개업을 도와준 미담도 지니고 있다. 그는 야구해설과 잡지사 대담프로 사회를 맡아 능숙한 화술과 송곳 같은 직설로 현역시절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 때도 있었으나 요즘은 나이 때문인지 활동이 뜸하다. 카네다는 1988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이 됐다.

5. 통산 성적


NPB 통산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1950
코쿠테츠 스왈로즈
30
20
9
1
164⅔
8
12
-
0
3.94
132
128
143
1.57
1951
56
44
25
4
350
22
21
-
0
2.83
257
198
233
1.28
1952
64
41
23
7
358
24
25
-
0
3.17
280
207
269
1.33
1953
47
33
24
6
303⅔
23
13
-
0
2.37
222
143
229
1.18
1954
53
39
28
2
345⅔
23
23
-
0
2.63
290
120
269
1.17
1955
62
37
34
9
400
29
20
-
0
1.78
279
109
350
0.95
1956
68
29
24
5
367⅓
25
20
-
0
1.74
222
83
316
0.82
1957
61
35
25
5
353
28
16
-
0
1.63
256
95
306
0.99
1958
56
36
22
11
332⅓
31
14
-
0
1.30
216
63
311
0.83
1959
58
25
14
4
304⅓
21
19
-
0
2.54
222
82
313
0.99
1960
57
31
22
4
320⅓
20
22
-
0
2.58
238
95
284
1.04
1961
57
32
23
6
330⅓
20
16
-
0
2.13
257
83
262
1.02
1962
48
30
24
1
343⅓
22
17
-
0
1.73
265
88
262
1.00
1963
53
30
25
9
337
30
17
-
0
1.98
234
87
287
0.94
1964
44
31
22
4
310
27
12
-
0
2.79
250
72
231
1.03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1965
요미우리 자이언츠
28
17
9
3
141⅔
11
6
-
0
1.84
95
36
100
0.92
1966
19
12
1
0
84⅓
4
6
-
0
3.42
72
28
58
1.15
1967
33
22
6
1
170
16
5
-
0
2.28
146
64
132
1.19
1968
32
19
4
0
138⅓
11
10
-
0
3.45
124
72
87
1.40
1969
18
11
1
0
72⅓
5
4
-
0
4.23
65
36
48
1.38
<color=#373a3c> '''NPB 통산'''
<color=#373a3c> 944
<color=#373a3c> 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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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담



6.1. 재일교포 2세


아버지의 고향이 경상북도 상주시, 어머니의 고향이 경상북도 경산시라고 한다.[12] 선수생활 중인 1959년에 일본에 귀화했기 때문에 과거 한국에서 평이 좋지 않았다. 예전에 장훈백인천이 있던 토에이 플라이어즈와 같이 롯데 오리온즈를 이끌고 한국에 왔을 때 장훈이 열렬히 환영을 받은데 비해 자신은 스스로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본으로 귀화한 개’라는 비난받고 신문에도 일본인이라고 소개되어서 서운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귀화한 것도 본인의 의지가 아닌 일본 법무성의 반강제적인 조치였다고 해서 더 아쉬웠던 듯하다.
뼈저린 소외감을 느낀 일에 대해선 1962년 가을 코쿠테츠 스왈로즈가 시범경기를 위해서 장훈이 있던 토에이 플라이어즈 팀과 함께 서울에 원정을 왔을 때의 일이다. '관객들이 장훈 선수는 대단한 박수갈채로 환영을 해주면서도 비록 귀화는 했을지언정 어엿한 한국계인 자신은 일본인 선수와 똑같이 대접해 줘서 섭섭한 느낌을 받았다'는 심경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귀화했지만 나름대로 고국에 대한 정이 있었던 듯. 어쨌든 그는 일본야구계가 한국야구계와 무슨 일을 계획할 때마다 “아시아 야구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한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라고 일본야구계를 설득했다고 한다. 또한 "내 몸과 심장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것은 당연하다. 꼭 한번 부모님의 고향을 찾고 싶다" 라고 말했고 "한국 선수들은 군대도 다녀오고 무엇보다 엄청난 파워를 갖고 있어서 세계야구를 제패할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당연히 재일교포들의 우상이었고, 일본에서 사업을 일으킨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및 일본에서 유학을 했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도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다고 한다.[13] 현역 은퇴 후 롯데 오리온즈에서 감독을 역임한 것도 신격호 롯데 회장과의 인연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 천재


피나는 노력과 자기관리로 유명한 그였지만 일단 타고난 재능부터가 특출났다.

야구를 시작한 시기가 굉장히 늦었는데, 그때가 '''무려 고등학교 1학년. 프로 데뷔는 바로 그 다음해(!)인 2학년'''이였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되게 희귀한 경우냐면, 야구를 제대로 시작하려면 초등학교 3학년도 늦고, 4-5학년에 야구부에 들어가면 남들은 중학교 야구부 준비하는 동안 수비랑 캐치볼부터 연습해야 한다. 이미 기본기가 다져졌을 학우들은 넘사벽 수준이기 때문에 퇴출은 거의 확정적이다. 이런 치열한 경쟁속에서 예나 지금이나 무수한 유망주들이 '''유년기때부터''' 1-2년 앞다투어 조기교육을 받고 노력해도 프로 근처에도 못 가는 걸 감안하면... 그리고 프로까지 가도 살아남는 유망주는 소수다. 심지어 당시의 일본은 인프라는 비교적 열악했어도 옛날의 미국처럼 최고의 스포츠 유망주들이 야구에 몰려들던 시기다.
또한, 야구는 규칙이 대단히 많기 때문에 투수, 야수를 막론하고 모든 포지션의 역할과 상황을 몸으로 인지하고 대처해야 한다. 주루, 보크, 병살 등의 상황은 머리로만 공부하는게 아니라 실제 상황시 반사적으로 몸이 반응을 해야 되는데 이것이 1-2년만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오죽하면 야구의 천재이자 화신 그 자체로 여겨지는 베이브 루스조차도 야구는 조기교육 없이는 안된다고 '''고별사에서''' 딱 잘라 말했을 정도다.[14]
이 상식적인 절차가 없었던 카네다는 야구부에 들어간지 '''2년만에''' 프로무대에 올랐다.[15] 겨우 3주전 17세 생일을 맞이했던 고등학교 2학년의 소년이 1950년 8월 23일에 프로 데뷔를 하고, 다음 첫 선발등판에서 완투승을 거뒀다 (잔여경기 포함 8승). 18세가 된 다음 시즌엔 '''NPB 최연소 노히트노런(18세 35일)'''과 22승을 거두고, '''14년 연속 20승 투수가''' 되었으니, 정말 현실의 스포츠 만화 주인공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타격에도 재능이 있었는데, '''17세 2개월의 나이에 친 첫 홈런은''' 지금까지도 깨어지지 않는 NPB 최연소 홈런 기록이다 (투수 야수 포함).[16]

6.3. 명구회 설립 주도


명구회 설립을 주도했고 한때 일본에선 명구회가 거의 가네다의 사조직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한동안 명구회 사무실도 가네다 소유 건물 안에 있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명구회의 정식 명칭은 사실 '쇼와 명구회'로, 굳이 '쇼와'라고 한 까닭은 카네다보다 나이가 많은 '''메이지나 다이쇼 시대 출생한 야구 선수들의 가입을 막기 위해서(...)''' 그래서 실제로 일본 프로야구 초창기의 레전드들은 명구회에 가입이 안되어 있다(...). 최근에는 헤이세이 시대 출생한 야구선수들이 데뷔함에 따라 회칙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헤이세이 출신 야구 선수들이 명구회 가입조건을 충족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다만 영 좋지 않은 사정으로 지금은 명구회에서 나온 상태. 자세한 사항은 명구회 항목 참조. 그 후 명구회 사무소의 위치도 다른 곳으로 바뀌었다.

6.4. 가족들


친동생인 1946년생 카네다 토메히로도 프로야구 선수였다. 형이 감독으로 있던 롯데 오리온즈에서 뛰기도 했고, 한 시즌 20승 경력도 있는 에이스급 투수였으며, '''다승왕 2회, MVP 1회''' 수상에 통산 128승에 3.25의 방어율이란 일본 야구에 이름을 올리는 대단한 성적을 남겼지만, 형인 마사이치는 동생을 A급 투수는 아니었다고(...) 인터뷰에서 언급하였다. 비교대상이 자기 자신 이라면 할말 없지만... 토메히로는 2018년 10월 2일 형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마찬가지로 1938년생 친동생인 카네다 타카요시와 1941년생 친동생인 카네다 호시오도 프로야구 선수였지만 이 둘은 1군 기록 없이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조카인 카네이시 아키히토(金石昭人) 역시 프로야구 선수가 되었다. 197cm의 장신을 무기로 80~90년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투수로 활약했으며, 72승 61패 80세이브 방어율 3.38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첫 아내는 일본의 유명 가수였던 9살 연상의 에노모토 미사. 동거를 먼저 시작했으며 에노모토는 결혼을 위해 연예계를 은퇴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카네다의 불륜으로 혼외자식으로 장남 켄이치가 태어나자 결국 이혼했다. 에노모토는 그 이후 가수로 복귀하여 탑클래스의 반열에 오른다. 이후 두 번째 아내와의 슬하에 2녀를 더 두었다. 그 중 장남 카네다 켄이치, 차녀 카네다 사치코는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6.5. 최동원과의 관계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의 고등학교 시절을 보고는 자신의 양자로 들어오면 일본에서 뛸 수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는 루머가 돈 적이 있다. 본인은 인터뷰에서 그런 적 없다고 부정했다.
2012년 10월 26일 방영한 MBC 스포츠 스페셜 다큐에서 김시진의 증언을 보았을 때 단순히 일본 진출방법을 설명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6.6. 오치아이 히로미츠와의 관계


오치아이가 롯데 오리온즈 루키 시절 확립한 다른 야구인들이 보기에 독자적이다 못해 이상해 보였던 타격폼인 신주타법(神主打法)을 두고 가네다가 '''"아마추어도 저렇게 스윙하지는 않는다"''' 라며 악평했고,[17] 이에 감정이 상한 오치아이는 이후 다른 야구 선배들을 지칭할 때 이름 뒤에 꼬박꼬박 '상(さん 우리나라 말로 "~씨")'을 붙이며 예우했지만 카네다만은 그냥 상도 안붙인 채 그냥 이름을 부르는 등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고, 통산 2000안타를 넘겼음에도 카네다가 주도한 명구회에 가입하지 않는 등 악연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오치아이도 카네다의 통산 400승에 대해선 "일본 프로야구에서 왕정치의 868홈런과 함께 영원히 깨기 힘든 대기록" 이라며 추켜세운 바 있다.

6.7. 식성


여담으로 삼계탕을 굉장히 좋아하고 또한 잘 만든다. 그의 어머니에게 직접 배웠다고 하는데, 니시테츠 라이온즈에서 고쿠테츠 스왈로즈로 이적해온 토요다 야스미츠는 그 맛에 감동하여 김경홍에게 부탁해 그 제조법을 배우기도 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후에는 도이 소죠나 다카다 시게루 등이 김경홍의 모친에게 김치찌개를 비롯한 여러 한국 요리를 배워서 체력 증진에 활용하기도 했다.

6.8. 몸관리 비법


스포츠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 자신만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몸 관리 방법을 창안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프로야구 초기의 장호연을 떠올릴 수 있을 듯.

6.8.1. 컨디션 조절


카네다는 왼팔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서 일상 생활에서도 꽤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왼팔 전체를 절대로 식히지 않았고, 생활 속에서도 왼팔·왼손 사용을 극도로 자제했다. 다음은 그와 같은 예시들.
  • 잠을 잘 때, 왼팔의 팔꿈치를 보호하기 위해 온도 저하에 대비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 현역선수 시절 경기 도중에 난투극이 벌어졌을 때에도 왼손에 수건을 감아 보호한 채로 덕아웃에서 뛰쳐 나왔다. 술을 마시고 있거나 탁자를 두드릴 때에도 언제나 왼손에는 수건이 감겨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 카네다의 아들이었던 켄이치는 방송에 출연하면서 “아버지는 절대로 왼손으로 안아준 적이 없다”고 밝혔다.
  • 직접 운전하게 되면 이런 저런 신경이 쓰이자 컨디션 저하가 될 것을 꺼려 운전기사를 고용해서 경기장까지 왔다. 차를 탈 때에는 차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왼쪽 어깨나 왼쪽 팔을 차갑게 할 것에 대비해서 절대로 왼쪽에 앉지 않았다.
  • 수염을 깎을 때도 손끝이 베일 우려가 있는 면도기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에 전기면도기를 사용했고, 외출시에도 발끝이 드러내게 하는 샌들을 절대로 신지 않았다.

6.8.2. 트레이닝


하체 단련에 중점을 두고 현역 선수 시절에 러닝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하체가 튼튼하면 위기도 없다. 하체가 약한 선수는 결코 투수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체 훈련 방법은 꽤나 혹독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는데, '연습벌레'로 유명했던 한신 타이거스의 '자토펙' 투수 무라야마 미노루도 올스타전에서 카네다를 만나 그의 트레이닝법을 배우려 했지만 너무나 혹독한 방법임을 알게 되자 죽는 소리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감독 시절에도 선수들에게 하체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데이터와 수싸움을 중시하는 두뇌파였던 노무라 카츠야는 카네다의 야구를 '달려라 달려 야구'라고 비아냥거렸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하체중심의 투구 메커니즘을 가진 투수라면 하체단련은 필수다. 이쪽에 중점을 둔 투수로 놀란 라이언이 유명하다. 놀란 라이언을 롤 모델로 삼았던 박찬호도 마이너리거시절엔 경기장과 숙소를 달리기로 오가며 하체 단련을 했다고 한다. 장호연은 아직 몸관리라는 개념이 제대로 잡히지도 않던 1980년대 프로야구 초창기 비시즌 겨울마다 스키를 타면서 하체 근육을 단련시켰다. 참고로 스키는 속근과 지근의 고른 사용과 더불어 평형감각의 정점을 찍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올바른 자세를 배운다는 전제를 두고 하체의 단련에 매우 도움이 된다.

6.9. 쇼맨십


선수시절과 감독시절 쇼맨십이 대단했다. 삼진을 잡고 셀러브레이션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런왕 오 사다하루와 맞대결할 때는 오의 외다리 타법을 따라한 '''외다리 투구법'''을 시전하여 플라이 아웃으로 그를 잡아낸 바 있다
https://youtu.be/t5sbuhhMgMg
비인기구단 롯데 오리온즈 시절에는 상술했던 대로 사실상 팀을 대표하는 슈퍼스타였고, 팀이 안타를 치거나 점수를 내거나 호수비를 펼칠 때, 아니면 선수들이 어이없는 실수를 하거나 심판의 판정에 항의할 때,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졌을 때에도 커다란 제스쳐로 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1기 감독직 사임 후에 참가한 거인-한신 OB전에선 전설의 한신 명타자들을 상대로 시속 100km가 넘는 고속구로 스트라이크를 선물해주다가 마지막엔 선수 머리를 넘기는 시속 50km대의 초슬로볼을 던져서 관객들을 폭소시킨 적도 있을 정도(...) 감독 시절의 영상. 특히 상술했던 감독 시절에 자기 투수의 투구에 맞고 리미터가 해제된 짐 트레버가 몆차례나 달려들다 넘어지자 냅다 달려들어 인생 최고의 사커킥을 날린 것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명장면(?)이라 할 만하다.
롯데 감독 시절인 1973~74년, 검은 안개 사건등으로 관중 동원에 어려움을 겪던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의 아오키 사장이제안한 연극(?)에 동참했다. 이게 무슨 말이나면 팬들의 관심을 끌기위해 롯데 카네다 감독은 다이헤이요 팬들의 속을 긁는 비난 발언을 계속하고, 서로 막역한 롯데 카네다 감독과 다이헤이요의 감독을 맡던 이나오 가즈히사는 말싸움을 하는 의도적인 연출이었다. 두 팀 간의 경기 때 홈플레이트에서 선수들끼리 충돌했던 장면을 촬영한 사진에 「今日も博多に血の雨が降る!('''오늘도 하카타에는 피의 비가 내린다''')」라는 문구를 넣은 포스터를 제작하기도 했다.

6.10. 노무라 카츠야와의 관계


가네다가 롯데 감독 시절,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해 주전포수 + 4번타자 + 8년간 감독겸임까지 수행한 노무라 카츠야가 롯데로 이적해 왔다. 이적 전 까지 프로야구 선수로는 25년의 경력을 가진 42세의 "평생포수"였으나 롯데에서는 신인이나 다름 없는 입장으로 훈련이나 연습경기 당시 지적을 많이 받곤 했다. 난카이에서 워낙 주전포수로 오랫동안 활동하다보니 폭투 시 원바운드 공을 몸으로 막지 않는 나쁜 버릇과 교만한 마음이 생겼는데 롯데에서 그런 모습을 계속 보여주니 2살 연하의 동생뻘에게 가네다가 목소리를 높인 것이었다.
노무라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카네다는 러닝 위주의 훈련을 도입했는데 하반신의 피로가 한계에 도달해서 노무라도 공을 따라가지 못했다.난카이를 떠날 때 그래도 먼저 기회를 준 사람은 카네다 감독. 난카이 시절의 ID야구와 사고 베이스볼야구에서 카네다의 달려라 달려라 근성 야구로 스타일을 바꾸고 야구장에서 흡연 금지, 아침 산책 시 다른 선수들과 같은 운동 메뉴 부과등을 순순히 따랐다.
카네다는 노무라를 영입한 궁극적인 이유는 난카이, 한큐 타도를 위해 노무라의 풍부한 지식과 경험, 수년간 축적된 데이터를 손에 넣고자 함이었다. 카네다는 코치 겸임를 꺼리는 노무라을 설득하여 어드바이저 대우를 해주고 기술지도에 관해서는 코치와 동등한 권한을 허용했다. 통산 700호 홈런을 목표로 하고 있던 노무라도 그 대가로 연봉이 약 1800만엔으로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데이터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본시리즈 3연패를 달성한 한큐도 카네다와 노무라의 합체를 우려했지만 두 사람은 역시 물과 기름이었다. 개막 직후, 카네다는 노무라를 선발로 계속 사용했지만, 4월이 끝날때까지 타율 0.152, 0홈런, 2타점으로 이미 포기했다. 말하지 않아도 태도에 "카네다의 노무라에 대한 비판"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팀내에서 고립된 노무라는 1956년 주전자리를 차지한 이래 최소경기출전(64경기)에 그치고 말았다. 난카이에는 시즌 대전 성적에서 우위를 기록했으나 한큐에는 여전히 약했다. 시즌이 끝난 뒤 카네다는 감독직을 사임했고 노무라는 전력에서 제외되었으나 세이부 라이온즈의 오퍼를 받고 이적한다.

6.11. 이모저모


인물이 좋고 키도 큰 덕에 은퇴 이후 탤런트로도 활동했다.
결혼은 2회, 이혼은 1회했다. 9살 연상의 와카 가수 에노모토 미사에와 1955년에 동거에 들어가 1959년에 일본 국적을 취득한 후 1960년에 결혼했다. 그러나 1961년에 애인이었던 다카라즈카 가극단 졸업생과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 것 등이 원인이 되어 1963년에 이혼하였다. 에노모토와의 자식은 없고, 후처에게서 자식을 3명 얻었다. 그의 조카인 카네이시 아키히토도 프로야구 선수로 활동했다.
투수로 출전한 경기에서 통산 36개의 홈런을 때렸는데, 이는 역대 1위의 기록이었지만 2016년 오타니 쇼헤이가 경신했다. 그 밖에 두 차례의 대타 홈런을 기록하면서 총 38개의 홈런을 기록하였다. 심지어 고의사구도 7회나 당했다.
약팀인 코쿠테츠에서 뛰면서 타선 지원을 못 받은 경기가 많다. 82번의 완봉 중 1/4 이상을 차지하는 23게임에서 1-0의 스코어로 승리하며 통산 1위를 기록했다. 노히트 노런, 퍼펙트 게임 때의 스코어도 모두 1-0이다. 0-1 완투패 21회도 1위이다 (0-2 9경기,1-2는 17경기)


[1] 現 아이치현 이나자와시.[2] 일본식 이름 마사이치의 한자 때문에 귀화 후 한국식 이름이 김정일(金正一)이라 알려지는 경우가 많았으나, 귀화 전 이름은 김경홍이었다.[3] 투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던 그 시절에 37세면 아주 이른 것은 아니었다.[4] 2012년~2014년에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 인스트럭터 코치를 맡았었다.[5] 퍼펙트 게임 달성 당시 최연소였지만, 이후 1960년 8월 11일 시마다 겐타로(다이요 훼일즈)가 한신 타이거스와의 홈게임에서 1-0 완전시합을 이끌어내어 현재까지 최연소 달성(20세 351일) 기록으로 남아있다. 여담으로 가네다는 일본프로야구의 퍼펙트 게임 달성자 중 유일한 좌완투수다.[6] 그냥 삼진도 아니고 연속 삼구삼진이다. 경기 중단 이후 한가운데 속구로 다 잡아내겠다는 다짐을 한 것을 지킨 것.[7] 대표적인 것이 15년 연속 두 자릿수 패전. 헌데 사실 이건 스왈로즈가 당시 엄청난 약팀이었는지라...[8] 선발 20승 이상은 55년(22선발승)이 유일[9] 1965~1973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9년 연속 센트럴리그-일본시리즈 제패기''' 를 일컫는 말. 이때의 요미우리는 정말 레전설이었다.[10] 본인은 승리 후 인터뷰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이 해 세리그 2위)와 못 붙어서 아쉽다고 말하기도 했다.[11] 그러나 1977년엔 플레이오프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패배해 일본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12] 연고팀은 삼성 라이온즈인데 그 삼성의 자매구단은 김경홍을 영구결번에 등극시킨 요미우리 자이언츠이다. 다른 자매구단은 같은 라이온즈라는 이름을 쓰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김경홍의 조부모 산소가 대구 인근에 있다.[13] 카네다 본인의 본적지와 이건희의 고향이 같다. 요미우리 저리가라 할정도로 돈지랄로 매우 유명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구단주인 손정의 본적지도 같다.[14] 사람들은 애들한테 풋볼이나 야구공을 쥐어주면 자연스레 선수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야구에선 불가능합니다.''' 6-7세부터 시작해야되고 14-15세면 늦은겁니다. 야구를 하면서 자라나야 하고, 열심히 하면 프로가 될 수도 있는거죠." / "As a rule, people think that if you give boys a football or a baseball or something like that, they naturally become athletes right away. But you can't do that in baseball. You got to start from way down, at the bottom, when the boys are six or seven years of age. You can't wait until they're 14 or 15. You got to let it grow up with you, if you're the boy. And if you try hard enough, you're bound to come out on top, just as these boys here have come to the top now." [15] 소속팀이 고시엔에서 탈락하자 바로 중퇴 후 프로 입단 [16] 현재로서는 깨지기 어려운 기록. 일단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아무리 빨라도 만 18세. 근데 요새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17] 반면 장훈은 "저 정도 타격폼 이면 충분히 잘 칠수 있다" 며 그 타격폼을 지키라고 격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