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시다 마사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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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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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8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취임회견 때.
'''이름'''
나시다 마사타카 (梨田昌孝)[1]
'''생년월일'''
1953년 8월 4일
'''국적'''
일본
'''출생지'''
시마네현 하마다시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학력'''
시마네현립 하마다 고등학교
'''프로입단'''
1971년 드래프트 2순위
'''소속팀'''
킨테츠 버팔로즈 (1972~1988)
'''지도자'''
킨테츠 버팔로즈 1군 작전·배터리코치 (1993~1995)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2군 감독[2] (1996~1999)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감독[3] (2000~2004)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2008~2011)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2016~2018.6.)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역대 감독'''
사사키 쿄스케
(1996~1999)

<color=#373a3c> '''나시다 마사타카'''
'''(2000~2004)'''

'''팀 해체'''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흡수합병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역대 감독'''
트레이 힐만
(2003~2007)

<color=#373a3c> '''나시다 마사타카'''
'''(2008~2011)'''

쿠리야마 히데키
(2012~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역대 감독'''
오쿠보 히로모토
(2015)[4]

'''나시다 마사타카'''
'''(2016~2018.6)[5]'''

히라이시 요스케
(2018.6~2019[6])
1. 개요
2. 현역 시절
3. 지도자 생활
4. 기타


1. 개요


前 프로야구 선수로 킨테츠 버팔로즈프랜차이즈 스타 포수였다.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그리고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최후의''' 감독이기도 하다.
본명은 나시다 마사타카('''梨田 昌崇''')로 발음은 같으나 한자가 다르다. 입단한 1972년부터 1983년까지 본명을 등록명을 썼으며, 현재 이름 한자인 '''梨田 昌孝''' 는 1984년부터 사용.

2. 현역 시절


시마네 현립 하마다 고등학교 시절인 3학년 때 춘계·하계 고시엔 대회에 연속으로 출전(제43회 선발 대회, 제53회 선수권 대회)했지만 모두 1차전에서 패했다. 그 뒤 1971년 드래프트 2순위로 킨테츠 버팔로즈에 입단했다.
그 뒤 1972~1988년까지 긴테츠 버팔로즈에서 현역 선수로 뛰며 포수로 활약했다. 현역 시절 땐 통산 .391, 도루저지 5할을 2차례 기록할 정도의 뛰어난 도루저지율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수비와 일발 장타력을 지닌 공수를 겸비한 리그 최고의 포수로 인정받았다.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지휘 아래 상승기에 있던 킨테츠의 주축 선수로서 스즈키 케이시 등과 함께 1979년 일본시리즈, 1980년 일본시리즈와 같은 큰 무대에서 뛰기도 했다. 같은 팀에서 뛰던 동료 포수 아리타 슈조와 주전포수 자리를 두고 동료이자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면서 '아리나시 콤비' 라 불리기도 했다. 이 둘의 기량이 모두 출중해 다른 구단으로부터 "킨테츠에는 주전 포수가 두 명 있다." 라는 부러움을 받았을 정도. 결국 아리타가 그를 전담 포수로 자주 협동한 스즈키 케이시가 은퇴함과 동시에 경쟁에서 밀려 198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며 나시다가 최종적으로 킨테츠의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하고[7]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은퇴까지 했다.은퇴 경기가 그 유명한 10.19 더블헤더였던 것으로도 기억에 남는다. 자세한 활약은 여담 부분에 서술되어 있다. 골든글러브 4회, 베스트나인 3회 수상. 1979년 기록한 도루저지율 .5362(32도루허용/37도루저지)는 퍼시픽리그 최고 기록이다.[8]
또한 양팔을 구불구불하게 움직이는 폼인 일명 '''곤약 타법(コンニャク打法)'''으로도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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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그 곤약 타법.

3. 지도자 생활


은퇴 후인 1989년 NHK에서 야구 해설위원이 되어 일하다가[9] 1993년 긴테츠 버팔로즈의 코치, 1996년 2군감독을 거쳐 2000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1999년 연고지 오사카를 팀명에 도입)의 감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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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최후의 감독.
감독 첫 해엔 퍼시픽 리그 꼴찌를 차지했으나 이듬해인 2001년, 터피 로즈, 나카무라 노리히로 등이 포진한 막강타선의 힘 으로 리그 우승을 하며 킨테츠의 4번째이자 마지막 리그 우승을 이루었다. 그러나 일본시리즈 에선 이시이 카즈히사, 타카츠 신고 등의 투수진에게 강타자들이 꽁꽁 틀어막히면서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1승 4패로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긴테츠는 그 후 영원히 일본시리즈 우승을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에도 감독직을 맡으며 2위-3위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2004년에 오사카 돔 사용 등으로 인한 연 15억엔 가량의 막대한 적자를 감당 못한 킨테츠 버팔로즈의 모기업 킨키 일본 철도가 팀을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합병하기로 하면서 그로 인한 혼란 등으로 인해 5위를 기록하고 말았다.
그리고 킨테츠의 2004년 시즌 마지막 경기이자 킨테츠 버팔로즈 역사상 최후의 경기 전날 그는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는데...[10]

'''모두들 가슴을 펴고 플레이해라. 너희들이 달고 있는 등 번호는, 모두 킨테츠 버팔로즈의 영구결번이다(みんな胸を張ってプレーしろ。お前たちが付けている背番号は、すべて近鉄バファローズの永久欠番だ).'''

정말 간지폭풍이 담긴 이 말은 일본프로야구의 명언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 말은 명언/야구 항목에 적혀 있기도 하다. 다만 마지막 경기에선 패배하고 말았다는 게 흠이지만(...)[11]
그 마지막 경기 뒤, 팀은 결국 2004년을 끝으로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합병해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나시다는 그렇게 킨테츠의 마지막 감독이 되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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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시절의 사진 (2010년)
그 뒤 나시다는 다시 NHK 등의 야구 해설위원이 되어 일하다가, 2008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이 되었다. 닛폰햄 시절엔 4년 간 퍼시픽리그 3위-우승-4위-2위의 성적을 기록했고 2009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승리해 팀을 일본시리즈 진출로 이끌었으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패배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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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시절의 사진 (2016년)
그 뒤 2011년 감독직을 사임. 또다시 야구 해설가/평론가로 일하다가 2015년 시즌의 성적 부진 책임을 지고 사임한 오쿠보 히로모토의 뒤를 이어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라쿠텐이 긴테츠의 해산으로 인해 생기게 된 구단이란 걸 생각하면 좀 아이러니하고 묘하다. [14]
부임 첫해에는 전임 감독인 오쿠보 히로모토가 말아먹은 팀을 추스리느라 5위에 그쳤다. 그러나 2년차에는 본인의 두번째 해 징크스를 재현이라도 하듯 시즌 초반부터 선두로 치고 나가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한 때 승률 7할을 넘을 정도로 압도적 성적을 거두고 7월 말까지 선두자리를 유지하면서 도호쿠의 팬들에게 혹시나하는 기대를 가지게 했으나 시즌 초반 쌀쌀한 도호쿠 지역의 날씨를 고려해서 일정을 느슨하게 짰던 대가로 8월 이후의 과밀일정을 버티지 못하고 DTD를 시전하면서 3위로 추락했다. 그래도 우승 이후 3년동안 6-6-5를 찍었던 팀을 다시 포스트시즌으로 진출시켰으나 8월 이후의 DTD가 워낙 심했던 까닭에 지휘 능력에 의문을 품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경질설까지 나오기도 했다. 분위기 상으로는 클라이맥스 시리즈의 결과가 본인의 거취에 큰 영향을 미칠 듯 하다.
2018년에는 지난 시즌과는 너무나도 대비되는 행보. 41경기까지 14승 26패를 기록하면서 퍼시픽리그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임 이전부터 몇 년간 꾸준히 문제로 제기되었던 라쿠텐의 여러 가지 불안요소가 터졌다고 봐도 무방한 모습이 현재까지 계속 흘러나오고 있는 모습이다. 결국 교류전에서도 퍼시픽리그의 다른 5팀이 상위권을 석권하는 동안 혼자만 최하위에 쳐져서 점점 격차가 벌어지는 모습을 보였고 6월 16일 한신 전에서 8회말까지 1대0으로 앞서고 있었으나 에이스 노리모토 다카히로를 무리하게 9회까지 끌고가다 역전패하면서 21승 41패로 승패마진이 벌어졌다. 경기가 끝난 직후 라쿠텐 구단에 사임의사를 밝히고 결국 팀을 떠나게 됐다. 사임 직후 인터뷰에 이하면 승패마진 -20을 마지노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세번째 감독을 맡은 팀에서도 일본시리즈 우승을 맛보지 못하고 다소 씁쓸한 결말로 감독직을 끝내며 다시 야인으로 돌아가게 됐다.
퇴임 후 다시 2019년부터 NHK에서 야구 해설자를 역임하게 되었다.

4. 기타


  • 전설의 10.19 더블헤더 1차전에서 3:3으로 맞선, 자신이 안타를 치지 못하면 그 상황에서 팀의 우승이 좌절되는 9회초 2사 2루에 대타로 나와 극적인 역전 적시타를 쳤다. 그것이 나시다의 현역 마지막 타석이자 마지막 안타였다. 그렇게 해서 겨우겨우 우승의 가능성을 살려놨는데, 우승여부가 결정되는 2차전에서 요시이 마사토아와노 히데유키한블두를 시전하면서 결국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고 긴테쓰는 우승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 경기가 나시다의 현역 마지막 경기였다.[15]
  • 호시노 센이치니시모토 유키오 등에 가려지긴 하나 이 분도 꽤 콩라인. 감독을 맡은 팀(긴테츠, 닛폰햄)에서 리그 우승을 거두긴 했으나, 일본시리즈 우승은 1번도 거두지 못했다(...) 더 웃긴 게 선수/감독 생활 때도 리그 우승만 2번 했다(...) 나이도 이제 꽤 넘었으니(환갑이 꽤 지났다) 라쿠텐에서 콩라인을 탈출할지 아니면 영원히 콩라인으로 남을지가 정해질듯..?
  • 일본어의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말장난 개그(다자레)가 주특기로 기자들과의 인터뷰 때도 종종 활용하고 기자들도 좋아한다. 하지만 문제는 아재개그가 돼버리는 일이 많아서 젊은 선수들은 썰렁하다는 반응 일색.

  • 2020년 3월 말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진 판정을 받았는데,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는 중증인 상태였으나 다행이 호전되어 5월 20일 퇴원하여 자가격리했다가 현재는 해제되었다.
[1] 1972~1983년까진 나시다 마사타카('''梨田 昌崇''') 란 이름을 사용. 발음은 같으나 한자가 다르다.[2] 팀명에 오사카가 붙은 건 1999년부터[3] 아래에 나오다시피 킨테츠 버팔로즈 최후의 감독이기도 하다.[4] 2015년 시즌 도중 사임[5] 2018년 시즌 도중 사임[6] 2018년 시즌은 감독대행[7] 다만 주전 포수 자리에는 1년도 머무르지 못했는데, 야마시타 카즈히코, 후루쿠보 켄지, 미츠야마 히데카즈 등의 젊은 포수 유망주들이 대두하면서 이 세명의 주전 포수 경쟁에 밀려버렸기 때문.[8] 참고로 아리나시 콤비를 이뤘던 아리타 슈조도 1976년 도루저지율 .5360(45도루허용/52도루저지)을 기록했다. 소수점 3자리까지 세면 나시다와 동률이지만 4자릿 수까지 계산 시엔 나시다에게 2모 차로 밀리는 기록이다.[9] 1989년 월드 시리즈를 취재하러 갔다가 그 때 갑자기 발생한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때문에 졸지에 재난 취재 특파원이 된 일화도 있다. 우연일지 몰라도 감독 취임이나 퇴임한 해에 지진이 일어나는 징크스가 있었다.[10] 공교롭게도 최후의 경기 상대 팀이 흡수합병 대상이었던 오릭스 블루웨이브였다.[11] 그 날 승리투수가 바로 '''구대성'''이었다. 즉 오릭스 블루웨이브 최후의 승리투수인 셈.[12] 근데 이게 좀 슬픈게.. 이 해 퍼시픽리그에서 1973년~1982년에 있던 플레이오프를 다시 도입해 리그 3위까지 일본시리즈 진출권을 부여해 플레이오프 승리팀에게 경기 진출권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을 하였는데,(참고로 1973~1982년 플레이오프는 전/후기리그 1위끼리 겨뤄서 한쪽이 이기면 일본시리즈 진출. 전후기리그 전부 1팀이 우승시 일본시리즈 직행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즉 '''긴테츠가 만약 3위 이내에만 들어갔어도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해 일본시리즈 진출해서 우승할 수도 있었다.''' 근데 하위권 성적으로 내려앉으면서... 참 안습하기 짝이 없다.(참고로 이 제도는 나중에 센트럴리그에서도 도입해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되었다.)[13] 여담으로 닛폰햄 파이터즈는 도쿄 시절 교진군의 홈구장인 고라쿠엔 구장-도쿄 돔을 거의 세들다시피 해서 쓰고 있었기 때문에, 2009년 일본시리즈는 '''집주인 VS 옛날 세입자 戰''' 이 되었다(...) 특히 도쿄 돔에선(...) 이것은 2012년 한 번 더 재현된다.[14] 실제로 라쿠텐 감독으로의 취임이 결정되고 나서 한 인터뷰에서 '''"긴테쓰 소멸이후 라쿠텐을 긴테쓰의 후신처럼 생각해 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라쿠텐 감독 취임 전 오릭스 버팔로즈 측에서 개최한 긴테츠 OB 행사에 참석한 적도 있는지라, 그냥 감독 취임을 한 겸 말한 립서비스인 듯 하다.[15] 참고로 9회말에 대수비로 들어왔고 타석이 돌아오지 않아서 타석은 1차전 9회초의 타석이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