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파노스 콘토스테파노스
'''Στέφανος Κοντοστέφανος'''
'''Stephanos Kontostephanos'''
1107~1149
1. 개요
로마 제국의 장군이자 정치가, 요안니스 2세 ~ 마누일 1세의 치세 동활약했다.
2. 초년
그는 알렉시오스 1세 치세인 1107년에 세바스토스(Sebastos)인 이사키오스 콘토스테파노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주로 해군 사령관으로 군경력을 쌓았는데, 불분명한 여러 기록들중 가장 유명한 것은 남이탈리아에서 침공해온 노르만인들과 벌인 아드리아해에서의 해전이었다. 군사 귀족가문으로 유명했던 그의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스테파노스도 어릴적부터 군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19살이 되던 해인 1126년, 그는 요안니스 2세의 차녀 안나 콤니니와 결혼해 사회적 지위를 다졌다. 이 결혼으로 그는 판히페르세바스토스(panhypersebastos) 칭호를 하사받았고, 안나와 결혼해 낳은 여러 아이들은 각각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안나 콤니니의 아들들과 결혼하는 등 혈연적으로 콤니노스 왕조와 매우 가까워 지게 되었다. 그는 장성하고 나서 거인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큰 키로 유명해졌는데, 그가 42세에 전사했을 때에도 키가 너무 커서 관에 맞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3. 마누일 1세의 치세에서
요안니스 황제의 치세에서 그의 군공은 잘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베로이아 전투에 참전한 정황, 투르코폴레스 장군인 부르수크와 연합하여 안티오키아 공국 응징전에 참가해 수십 곳의 촌락을 약탈했다는 것[1] , 다니슈멘드와의 5차례 회전에 종군한 것, 룸 술탄국에 대항한 이코니온 공성전에서 요안니스의 막내 황자 마누와 함께 반격나온 수비군을 격퇴했다는 것 등의 단편적인 설명만이 나타나있다. 그가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바로 킬리키아에서 급사한 요안니스 황제의 유지를 따라 마누일 1세를 옹립하였을 때였다. 그는 원래부터 황제의 막내 아들 마누일을 보좌해 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제위 경쟁에서 마누일을 지지한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스테파노스는 제위경쟁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코스마스(Kosmas)가 선황의 삼남이자 마누일 황제의 경쟁자였던 이사키오스를 동정하자, 시노드를 개최해 그를 실각시킨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총대주교를 공격한 여파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는 마누일 1세 치세에 있었던 수군 재건에 일축을 담당했다. 그의 재임기간중 로마 해군은 수백척의 대형 드로몬과 수송선을 건조했는데, 이는 선황의 정책을 계승해 수군 병력을 2~3만명 이상 증건시킨 성과였다.[2]
또한 궁정 음유시인이었던 프로드로모스는 그가 마누엘 치세 초반에 있었던 쿠만족 정벌전, 달마티아, 세르비아에서 있었던 라스키아 족장 볼칸 토벌전에도 참전해 군공을 세웠다고 한다.
4. 코르푸 정벌전과 죽음
1148년, 그는 해군 총사령관 메가스 둑스가 되어 코르푸를 불법점유하고 있던 노르만 왕 루지에로 2세를 치러 출정했다. 아드리아 해 인근의 주요 요새였던 코르푸는 오랫동안 튼튼한 성벽과 노르만인들의 해상지원으로 근 1년째 버티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해군 지원에도 코르푸에는 물자와 식량이 꾸준히 들어가고 있었고, 요안니스 악수흐와 황제의 중앙군은 쿠만족의 침공과 마케도니아의 겨울 폭설로 인해 늦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 더해 서방 황제 콘라트 3세가 마누일 황제를 만나 동맹 논의를 하느라 시간은 지체되고 있었다. 결국 악수흐와 스테파노스의 군대는 황제의 중앙군이 없는 상황에서 코르푸의 요새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르푸의 성채는 고지에 있었고, 제국의 트레뷰셋이 아무리 진보되었다고 해도 맞추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스테파노스는 적의 수성병기가 포화를 뿜어대고 있는 동안 직접 전선에 나가 공성 장비 이동과 건축을 진두지휘하였다. 이를 본 노르만 방어군이 캐터펄트를 이용해 그를 쓰러트리고 말았다. 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는 바랑인 친위대를 이끌고 부상당한 아버지를 끌고 와 함대의 기함에서 치료했지만, 이미 부상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는 그날 숨을 거두었다.
5. 후일담
그의 가족들도 대부분 콤니노스 왕조시기에 군공을 세웠다. 아들들 모두가 힘께나 쓰는 요직에 앉았는데 요안니스는 테살로니키의 둑스(Doux)가 되었고, 알렉시오스는 크레타의 스트라테고스가 되고, 시르미온 전투에서 헝가리를 상대로 승전보를 울린 안드로니코스는 그의 사후 수군 총사령관직을 승계했다. 그의 동생인 안드로니코스는 훗날 남이탈리아 정벌에서 1년간 혁혁한 전공을 세워 이탈리아에서 제국의 판도를 150년 전으로 되돌리는 기염을 토했지만,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들의 후손들은 모두 마누일 1세와 그 가계에 충성심이 높았는데, 이 때문에 제위 찬탈자 안드로니코스 1세를 타도하려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가세가 기울기도 했다. 이 때문에 1204년 4차 십자군의 풍파 이후에도 살아남은 여러 가문들과 달리 이들은 요안니스 3세 시절 테오도로스 콘토스테파노스가 판세바스토스 직을 수여받은 것을 제외하곤 토지 소유 목록이나 서리 정도에서나 나오는 정도로 축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