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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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스티브 바이(Steve Vai)
'''본명'''
Steve Siro Vai
'''출생'''
1960년 6월 6일, 뉴욕시
'''국적'''
미국
'''학력'''
버클리 음악대학
''' SNS'''
트위터
1. 개요
2. 유년 시절
3. 음악 활동
4. 솔로 활동
5. 연주 스타일
6. 그의 기타
7. 영상
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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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록 음악 기타리스트. 본격 '''기타한테 말을 시키는 남자'''.[1] 혹은 기타에게 오르가즘을 느끼게 하는 남자. 한때 유명했던 일본의 '지옥의 메커니컬 기타 트레이닝' 시리즈에서는 대놓고 변태라고 묘사한다. 확실히 라이브하는 영상을 보면 범상치는 않다.[2] 혁신적인 기타 플레이로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구축한 록 기타계 최고의 거장 중 하나.

2. 유년 시절


스티브 바이는 1960년 6월 6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음악을 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던 그는 6살때 오르간을 배워 기초이론을 익혀갔다. 그러다가 9세 때 우드스탁 라이브 영화에 나오는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연주를 보고 강한 충격을 받고, 12살 때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공연을 접하고 일렉트릭 기타를 잡기 시작했다. 이 시절 조 새트리아니에게 사사한 것으로 유명하며, 보스턴의 명문 버클리 음악대학을 다니기도 했다. 초창기에는 지미 헨드릭스, 지미 페이지, 브라이언 메이, 앨런 홀즈워스, 제프 벡 등에게 영향 받았다고 한다.

3. 음악 활동


그는 유명 기타리스트의 곡들을 카피하며 실력을 연마해 맨하탄 익스프레스(Manhattan Express), 레인지(Range), 서커스(Circus) 등의 밴드를 조직하기도 했다. 또한 이 무렵인 14세 때 스퀘어(Square)의 기타리스트였던 조 새트리아니를 알게 돼 그로부터 얼마 간 기타교습을 받기도 했다. 고교 졸업 후에는 보다 깊게 음악을 배우기 위해 78년 9월 버클리 음악대학에 입학, 음악 이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다.[3] 그는 이 학교에 다니면서 프랭크 자파의 난곡 중 하나인 <Black Page>를 완전 채보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며, 그 실력으로 이후 '기타 플레이어(Guitar Player)'지의 채보를 맡기도 했다.
80년 6월 그는 프랭크 자파 그룹의 기타리스트로 가입하게 되었고 81년에는『Tinsel Town Rebellion』앨범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프랭크 자파 그룹에서『Them Of Us』등 몇 장의 진귀한 앨범 제작을 함께하였다. 84년 잉베이 말름스틴의 후임으로 알카트래즈에 가입해 이들의 3번째 앨범『디스터빙 더 피스(Disturbing The Peace, 1985)』를 공동제작 했다. 스티브 바이는 이 앨범 수록곡 전부를 어레인지하여 음악적 감각의 우수성을 입증 받았고, 태핑과 아밍 기술에 의한 기상천외한 주법으로 잉베이 이후의 알카트래즈 사운드 공백을 메웠다. 일본공연에서 그는 인트로부터 오버네크의 태핑솔로를 연주하여 잉베이의 애드립을 완전 카피한 뒤, 그것을 태핑으로 여유있게 연주하기도 했다. (사실 이 부분은 좀 논란이 있는데, 스티브 바이가 잉베이 말름스틴 수준의 피킹을 구사하지 못 해 자신의 장기인 태핑으로 연주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물론 잉베이 역시 바이와 같은 트리키한 태핑 연주는 구사할 수 없기 때문에 전체적인 실력은 엇비슷하지만 스타일 차이로 인해 주법을 바꿨다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 뒤 LA의 한 언더그라운드 바에서 데이빗 리 로스를 만나 서로 뜻이 통하자 스티브는 그의 그룹에 가입하게 된다. 데이빗 리 로스 밴드에서 스티브는『잇 엄 앤 스마일(Eat' Em And Smile, 1986)』,『스카이스크레이퍼(Skyscraper, 1988)』등 2장의 앨범에 참여, 그의 눈부신 트리키 기타 플레이를 과시했다. 하지만 그는 이 밴드에서도 오래있지 못하고 화이트스네이크(Whitesnake)에 가입해 1989년『슬립오브 더 텅(Slip Of The Tongue)』앨범을 통해 뛰어난 테크닉의 기타 실력을 남겼다.

4. 솔로 활동


프랭크 자파 그룹에서 탈퇴하고 솔로 기타리스트로 독립 한 후 자신의 독자적인 스튜디오를 만든다. 이렇게 해서 제작된 앨범이 첫 솔로 데뷔작『플렉스-에이블(Flex-Able, 1984)』이다. 여기에는 <The Attitude Song>, <Call It Sleep> 같은 획기적인 연주곡들이 수록되어 80년대 락 기타 연주의 새 장을 여는데 일조했다.
1990년 발표한 두번째 앨범 'Passion and Warfare'는 당시 록 기타계에 잉베이 말름스틴의 'Rising Force' 이후 최대의 충격을 준 기타 솔로 앨범으로, 현재까지도 그의 최고 앨범으로 꼽히고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아티스트와의 협연,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사운드트랙, 컴필레이션 앨범 등 매우 활발한 커리어를 쌓았으며, 특히 1996년 시작된 G3 콘서트 투어의 고정 멤버로 활동하면서 국내에도 그를 동경하는 수많은 팬들이 있다.
또 2011년에는 버클리 음악대학의 온라인 기타 강좌를 개설했는데, 최대 규모의 온라인 기타 강좌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5. 연주 스타일


이론적 기반과 테크닉이 매우 확실한데, 이를 바탕으로 한 각종 실험적이고 변칙적인 플레이가 장기이며 기묘한 멜로디 진행과 화음, 트레몰로 암과 와우 페달의 독창적인 활용으로 특유의 4차원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더블넥이나 7현 기타를 활용한 실험적인 시도 또한 그의 트레이드 마크. 유니크함과 개성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가장 독보적인 기타리스트 중 하나이다. 한편 비상식적인 멜로디와 코드 진행은 동시대의 수퍼 기타리스트인 잉베이 말름스틴의 대척점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잉베이에게 '이놈 청각장애인 것 같다'라며 까이기도 했다. 뭐 나중에 G3 공연도 같이 하면서 친한 사이가 되긴 했지만.
자기 스타일이 아니면 까고 보는 잉베이 말름스틴[4]과 달리 다른 유형의 음악을 매우 개방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심지어 3코드 펑크 기타리스트인 그린데이빌리 조 암스트롱을 극찬하기도 했다. '팝적인 코드 진행 감각이 엄청나다'[5]고. 나인 인치 네일스 같은 밴드 또한 '내가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있어봐서 아는데, 이렇게 만들기 진짜 어렵다'라면서 높이 평가하기도.

6. 그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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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색 아이바네즈 JEM은 그를 상징하는 기타이다. 위의 모델명은 JEM7V로, JEM시리즈에서 가장 대표적인 모델이다. 손잡이 모양의 구멍 '몽키그립'과, 장미 줄기모양의 'Tree Of Life' 인레이, 그리고 하이프렛 일부에 스캘럽 처리가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생김새가 예쁘고 가격도 하이엔드 기타 치고는 지나치게 비싸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전성기 시절에 인기가 매우 많았던 악기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격이 많이 올라서 빠심이 어지간히 강하지 않으면 사지 않는 기타로 전락해버렸다.
JEM시리즈를 잘 정리해놓은 블로그를 참조하길 바란다.(단 2010까지의 자료이다.)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imchi1234&logNo=10090677066&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여기에서 그가 소유하거나 소유한적이 있는 모든 기타 400여개의 사진을 열람할 수 있다.
2013년 8월, 스티브 바이가 안산 록페스티벌 공연 후 다음 스케줄을 위해 이동하던 도중 자신의 Ibanez 커스텀 'BO'가 항공사의 화물관리 부주의로 넥이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United breaks guitars와 똑같은 취급을 당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탄 비행기가 대한항공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자신이 올린 글에 첨부된 사진의 GPS 태그는 중국이라고 되어있었다. 아이폰5로 찍은 사진이라 빼도박도 못하였는데, 바이는 이 사실을 알고 난 후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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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뜬금없이 Ibanez가 JEM 시리즈를 단종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그의 상징하는 기타이니만큼 사람들은 스티브 바이가 아이바네즈를 떠나는 것이 아닌지 걱정했지만 JEM모델을 더욱 발전시켰다고 하는 그의 새로운 시그니쳐 시리즈인 PIA 제품군을 선보인다. 출시된지 26년된 기존 JEM시리즈와 비교해 확실히 모던한 디자인을 지니고 있다. Vine 인레이가 새로운 디자인으로 출시되었으며, 기존의 멍키그립은 PIA의 디자인을 전반적으로 꿰뚫고 있는 Vine디자인으로 바뀌었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업그레이드를 선보였는데, 특히 바디 뒷쪽 트레몰로 커버를 기존에 (거의 모든 기타가 사용하던) 나사로 조이던것을 자석으로 탈부착할 수 있게 한것이 특징이다.

7. 영상



그의 곡 중 가장 인기가 많은 For The Love of God. 전주가 길어서 1:45부터 시작한다.

1986년작 영화 'Crossroads'에서 음악 및 악의 기타리스트로 출연해 랄프 마치오[6]와 영혼을 건[7] 기타 배틀을 펼치기도 했다.[8] 삑사리 내는 연기를 해야 하는데 내고 싶어도 못 내서 일부러 삑사리 내는 연습을 했을 정도로 촬영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헤일로 2에서 기타 부분 솔로를 맡았다. 스티브 바이는 헤일로 시리즈의 광팬으로 알려저 있다. 비디오 게임 라이브에선 직접 등장해 연주하기도 했다.

스티브 바이가 그의 절친 조 새트리아니의 생일축하 영상 두 사람이 얼마나 친밀한 사이인지 알 수 있다.

8. 여담


만화 공태랑 나가신다! (밴드편 단행본 36권-44권)에 스티브 바이를 오마주한 스티브 파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미국에서 공태랑 부모님과 인연이 있어서 공태랑 집에서 신세를 지게되는 인물. 대부분 기타 리프로 말을 하고 대화를 이어간다. 공태랑이 밴드와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일조한 인물 . 그리고 공태랑의 친구 음미의 우상이기도 하다. 자신의 재능으로 인해 악역인 카이저가 동료들을 상처입히고 협박하자 일부러 밴드를 떠나 은둔하였지만 공태랑과 음미와의 만남으로 다시금 밴드를 하려고 마음먹고, 이와중에 카이저가 자객을 보내고 , 일본으로 오면서 밴드편이 진행된다. 천광사나 마유미 그리고 여월 정도 말고는 친구로서 인정하지 않는 공태랑이 유일하게 친구로서 인정하게 되는 두인물이 스티브 파이와 음미다. 그리고 스티브 파이는 공태랑 아버지의 놀랄만한 음악적 재능? 일찍이 겪어봐서 공태랑의 리듬감이나 연주 실력에 놀라다가도 바로 수긍했다. 미국에서 옆집 도장에 있던 공태랑 아버지가 잠깐 놀러와서 스티브 파이의 악기를 연주했는데 놀랄만한 실력을 보여 스티브 파이는 충.공.깽.
취미가 양봉이라고한다.
캘리포니아로 이사 온 뒤로 시작했다는데 작게 시 각한 것이 규모가 커졌다고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까지 꿀을 수확하는 과정에 끌어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꿀로 번 돈은 스티브바이와 Richard Pike가 설립한 “Make A Noise Foundation”이라는 혼자 음악 하기 힘든 어린 뮤지선들을 도와주는 제단의 기금이 된다https://viraliq.com/16-weird-unusual-celebrity-hobbie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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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일로 2 리마스터인 애니버서리에서도 몇몇 OST를 다시 피처링했다.
헬스키친 시즌15 8화 초반에 등장한다.https://www.guitarworld.com/artists/watch-steve-vai-shred-foxs-hells-kitchen
2017년 4월에 내한이 확정되었다.(제네레이션엑스)
그리고 2019년 11월에 제네레이션엑스로 다시 내한했다.
2019년에 움직이는 토끼모자를 썼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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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쯤 근황을 올렸는데 평소 모습과는 달리 수염을 길러서 중년신사의 포쓰를 뽐내고 계신다.

[1] Passion And Warfare 앨범의 'The Audience Is Listening'에서 특히 잘 보여준다.[2] 참고로 이 영상에서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댓글은 ''저 기타가 16살은 넘었길 바란다''.[3] 팻 메스니에 따르면 자신의 형 마이크 메스니가 당시 버클리 음악대학에서 강사를 하고 있었는데 스티브 바이를 가르쳤다고 한다. 마이크는 스티브 바이가 이미 버클리 재학 시절 도를 넘어선 재능 (Off-the-scale talented)라고 극찬을 했다! 팻 메스니 본인도 스티브 바이를 대단한 음악적 재능의 소유자라고 극찬했다.[4] 이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분 꽤나 쇠고집이시다.[5] 정확히 얘기하면 빌리 조 암스트롱이 치는 코드는 '하나하나가 다 활기찬 느낌을 주는데,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는 느낌을 준다'고 표현하며 그렇게 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해당영상[6] '가라테 키드'(국내명 베스트 키드)로 당시 유명했던 하이틴 스타.[7]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영혼을 담보로 하고 펼치는 대결'''이었다.[8] 참고로 영화내의 이 부분은 모두 스티브 바이의 연주. 단 기타 배틀중 랄프 마치오가 보틀넥 연주하는 부분만 슬라이드 기타의 거장 Ry Cooder의 연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