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페이지

 





'''지미 페이지
Jimmy Page
'''

'''OBE'''
[image]
'''본명'''
제임스 패트릭 페이지(James Patrick Page)
'''출생'''
1944년 1월 9일(80세), 잉글랜드 런던 헤스턴
'''국적'''
'''영국''' [image]
'''활동'''
1957년 ~ 현재
'''소속'''
레드 제플린
'''학력'''
버클리 음악대학(명예 박사)
'''직업'''
음악가, 기타리스트
'''장르'''
, 블루스, 포크송
[image]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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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어린 시절
3. 초기: 세션 맨 시절과 야드버즈 시절
4. 전성기: 레드 제플린 시절
5. 이후의 솔로 활동
6. 그의 기타 연주에 대한 견해와 평가
7. 사생활
8. 기타


1. 개요


영국기타리스트. 1944년 1월 9일 생.
'''영국의 전설적인 하드 록 밴드인 레드 제플린의 리더'''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주로 쓰는 기타는 레스폴으로, 그 기타의 상징격 인물이자 영국 하드록, 헤비메탈의 상징으로도 통한다.
'''60-70년대, 영국 하드 록의 최전성기를 이끈 기타리스트들 중 한 명'''이며 '락 역사 전체에서 최고의 기타리스트'를 뽑으라면 늘 거론되는 인물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순위를 꼽는다면 3위 안에 들 정도로 최정상급 인지도를 갖는 인물이다. 영국 음악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기타리스트인 동시에 영국 음악계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도 자주 꼽힌다.

2. 어린 시절


1944년 1월 9일 공장의 인사 담당자(personnel manager)였던 '제임스 패트릭 페이지 시니어'와, 의사의 비서였던 '패트리샤 페이지' 사이에서 영국의 미들섹스에 위치한 허스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성격은 내성적이면서도 재치있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외동아들로 자란 게 조금 영향을 미친 모양.
[image]
어린 시절 성가대에서 활동하던 모습.

3. 초기: 세션 맨 시절과 야드버즈 시절


50년대 중반 미국에서 로큰롤 열풍이 불자 어린 지미 페이지 역시 로큰롤에 빠져들었다. 특히 엘비스 프레슬리의 Baby Let's Play House란 곡에 매료돼서 기타를 본격적으로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후 동네 친구, 형들이 하던 스키플 밴드에 들어갔고 13~4살경이던 1957~8년엔[1] BBC의 Huw Wheldon's All Your Own talent라는 일반인 장기자랑 프로에 밴드와 함께 출연까지 하게 된다.
연주가 끝난 뒤 인터뷰할 때 수줍어 하는 귀엽고 앳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아래 영상

여담으로, 이 영상에서 인터뷰어가 커서 무슨 일을 하고 싶냐고 하자 어린 지미는 생물학 연구(...)[2]를 하고 싶다고 대답한다.
전문 뮤지션이 되겠다고 결심한 그는 1960년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로이스턴 엘리스, 닐 크리스챤[3] 등의 가수의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62년경 림프선 선열을 심하게 앓고는 건강이 악화되어 음악일을 그만 두고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집 근처의 2년제 예술전문대학에 등록하여 미술을 공부하며 휴식기를 가졌다.
1963년경부터 다시 음악계로 뛰어 들어 전문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964~5년경엔 영국에서 가장 바쁜 세션맨이 되어 있었다. 당시엔 록밴드 결성 붐이 대대적으로 일때여서 웬만큼 실력 있는 뮤지션은 죄다 밴드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영국에서 활동하던 세션기타리스트 중에선 단연 뛰어났다고 한다. 이 시기에 빅 짐 설리반[4]과 지미 페이지 둘이서 런던의 각종 세션 녹음마다 가장 많이 불려다니는 양대 세션 기타리스트였다. 지미 페이지가 세션맨으로 한창 활동하던 시절에 하도 많이 연주했기 때문에 이 시기(1964~65)에 영국에서 녹음된 세션 기타 연주 중 무려 몇 십%를 지미 페이지가 기타 연주한 것이라는 풍문들도 있는데, 이는 물론 과장된 소문이고 정확한 근거가 있는 얘긴 아니다. 007 골드핑거의 주제곡인 "Gold Finger"의 녹음과 킹크스, 롤링 스톤스, 더 후의 녹음에도 기타 세션맨으로 참여한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녹음에도 기타 세션맨으로 참여하였던 적이 있다. 여담으로 지미 페이지는 악보를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5], 록 음악과는 달리 악보가 중요한 오케스트라 녹음을 할 때는 눈치보다가 치는 시늉(...)만 했다고 한다.
로큰롤 뿐 아니라 엘모어 제임스, B.B. 킹, 오티스 러쉬, 프레디 킹, 머디 워터스 등의 블루스 음악과 포크음악에도 심취하였다.[6] 그리고 제프 벡, 에릭 클랩튼 등의 뮤지션들과도 친분을 유지했다.
1966년에, 한국에선 소위 세계 3대 기타리스트[7]라고 알려진 인물들을 모두 배출하게 되는 역사적인 밴드인 야드버즈에 가입했다. 야드버즈의 1기 기타리스트였던 에릭 클랩튼이 밴드를 떠나고 지미 페이지가 후임 기타리스트로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제프 벡을 추천하여 제프 벡이 먼저 들어갔다. 이후 제프 벡의 요청으로 지미 페이지도 가입했고 리듬기타를 맡고 있던 크리스 드레자가 베이스에 익숙해질 때까지 처음엔 베이스를 연주하기도 했지만 이후 제프 벡의 바람대로 같이 트윈 기타를 연주하게 되었다.

4. 전성기: 레드 제플린 시절


이후 제프 벡, 키스 랠프, 크리스 드레자 등등 야드버즈의 멤버들이 전부 탈퇴하려 하여 밴드가 해체 위기에 놓이자, 밴드를 끝까지 지키고자 한 지미 페이지는 '밴드 오브 조이'의 보컬리스트이던 로버트 플랜트, 드러머 존 본햄을 영입하고 세션계에서 알아주던 베이시스트이자 키보디스트인 존 폴 존스를 영입해 "뉴 야드버즈(New Yardbirds)"를 결성했다. 하지만 제프 벡이 새 밴드에 야드버즈라는 이름을 쓰지 말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전해 와서 밴드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고심하던 차에, 더 후의 드러머 키스 문과 만나서 대화하던 중 새 밴드 이름 얘기가 나오자 키스 문의 아이디어로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이란 이름을 채택하여 활동하기에 이른다.
1969년 1월 첫 레드 제플린의 앨범이 녹음되었다. 이때 재밌는 일화 중 하나가 지미가 야드버즈 때의 동료였던 제프 벡의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건데, 제프 벡의 얘기로는 당시 제프 벡이 만들던 앨범에서 블루스 거장 윌리 딕슨의 곡 "You Shook me"를 넣으려고 연주하고 있었는데 지미 페이지가 방문해서 이걸 듣고는 자기도 레드 제플린의 앨범에서 이 곡을 넣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지미는 레드 제플린의 선장을 맡으며 레드 제플린을 세계 최고의 밴드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80년 9월 25일 지미 페이지의 집 '윈저'에서 종일 과음한 존 본햄이 자다가 구토를 해 구토물이 목을 막아버리는 바람에 질식사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자 레드 제플린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때의 충격으로 지미는 헤로인을 끊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엔 코카인에 중독되었다고(...) 어쨌든 이래저래 고생하다가 80년대 중반쯤에 모든 마약을 완전히 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술과 담배는 아직도 끊지 못했다고 한다.

5. 이후의 솔로 활동


밴드 해체 후 애증이 엇갈리는 친구 제프 벡과 제플린 때의 동료 로버트 플랜트, 나일 로저스와 같이 허니 드리퍼스란 밴드를 조직해 "Sea of Love"라는 노래를 히트시키기도 했다. 또한 프리와 배드 컴퍼니의 보컬리스트 폴 로저스, 플랫리스 베이스의 달인 토니 프랭클린, 맨프레드맨, 유라이어 힙을 거친 드러머 크리스 슬레이드와 더 펌이란 밴드로 활약하기도 한다. 또 데드 위시 등의 영화 음악도 맡고, 콜로세움의 보컬리스트 크리스 팔로우와 블루스 곡들을 협연하기도 하고, 딥 퍼플화이트 스네이크의 보컬리스트 데이빗 커버데일과 커버데일 페이지 를 결성, 딥 퍼플 + 레드 제플린으로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실제 앨범은 데이빗 커버데일의 보컬이 입혀진 매우 제플린스러운 음악이었다. 또 그리스에서 미국의 서던 락 밴드 블랙 크로우즈와 함께 제플린 시절의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지속적으로 로버트 플랜트와 같이 활약하기를 바랬지만 로버트 플랜트의 거절로 계속 어긋나다가 마침내 94년에 의견이 맞아 드러머 마이클 리, 베이시스트 찰리 존스와 함께 '페이지 앤드 플랜트'를 결성해 같이 활약하기 시작했으며 94년에는 MTV 언플러그드 라이브로 중동과 인도의 신비주의가 물씬 풍기는 포크 앨범인 "No Quarter: Jimmy Page & Robert Plant Unledded", 98년엔 이전의 레드 제플린적 취향이 잔뜩 반영된 사이키델릭 블루스 지향의 앨범 "Walking into Clarksdale"을 발표하였다. "Walking into Clarksdale" 때의 프로듀서NirvanaIn Utero 앨범을 프로듀싱한 인물로 유명한 스티브 알비니(Steve Albini)로 이 두 앨범의 스타일을 비교해보며 듣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이후 레드 제플린의 재결성에 관한 얘기가 많았지만 현재 들리는 얘기로 보면 쉽지 않은 모양이다.

6. 그의 기타 연주에 대한 견해와 평가


Les Paul, SG 더블넥 레드 칼라, Gibson 기타를 주로 쓰는 기타리스트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라이브에서도 레스폴 아니면 SG 더블넥[8]만 주야장천 썼다. 이러한 취향은 슬래시가 이어받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인생 최고의 명곡 Stairway to Heaven의 솔로잉은 Telecaster[9]로 녹음했다. 사실 세션 맨 시절과 야드버즈 시절에는 오히려 텔레캐스터를 더 많이 사용했으며, 레드 제플린의 데뷔 앨범도 텔레캐스터로 녹음되었다. 초기 라이브에서 텔레캐스터를 쓰는 영상이 있다. 라이브에서 솔로 연주를 몇 분이나 늘려서 10분 넘게 연주하는 스테어웨이 투 헤븐이나 약 30분 동안이나 연주하면서 바이올린 활대까지 사용하는 데이즈 앤 컨퓨즈 등을 감상해보면 거장의 품격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주로 쓰는 장비로 유명한 것은 로얄 앨버트 홀 라이브에서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Hiwatt 앰프, 70년대 지미 페이지 사운드를 상징하는 마샬 플렉시 슈퍼리드, 레코딩에서의 비장의 무기였다는 Supro사의 Thunderbolt 앰프 등이 있다. 이펙터는 초기 텔레캐스터와 함께 애용한 톤 벤더(Tone Bender), VOX사의 Wah 페달, 테이프 딜레이 이펙터인 에코플렉스(EchoPlex), 허공에 마술을 부리듯하는 퍼포먼스로 유명한 Theremin을 즐겨 사용했으며, 이 외에도 마에스트로 퍼즈, 에코렉, 후기 앨범의 MXR 페이져 등등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레코딩에 있어서 좋은 톤을 만들기 위해 워낙 많은 것들을 시도해본지라 본인도 다 기억을 못할 정도며, 반대로 어떤 장비를 사용해도 지미 페이지가 쓰면 지미 페이지의 톤이 나온다. 보통 지미 페이지 톤의 절정으로 보는 시절의 라이브는 마샬 플렉시에 깁슨 레스폴 만으로 거의 모든 톤을 내고 솔로 시에 Wah 페달을 밟아주는 정도.
기타 연주면에서도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 중 하나이지만, 라이브에서의 연주는 그리 완벽하지 않고 잔실수를 많이 범하며 기타 피크를 자주 떨어뜨리기도 한다고 한다. 라이브 영상 가끔 보면 마약에 취해서 혼자 노는 그의 모습도 볼 수 있다고(…). 특히 딥 퍼플을 좋아하는 팬들이, 라이브에서 연주의 완벽주의를 표방하는 리치 블랙모어와 비교하며 그를 깐다. [10]
하지만 그의 최고의 능력은 무엇보다도 음악을 프로듀싱하는 능력. 64년경에 녹음된 영국 음악 기타 연주의 몇십 %는 지미 페이지가 연주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수많은 곡들에서 기타 세션 연주를 해주었고 이런 풍부한 녹음 참여 경험이 그를 종합적인 음악적 통찰력을 지닌 아티스트로 끌어올렸다. 마이크는 어떻게 배치할 것이고 악기의 톤은 어떻게 잡아야 할 것이며 녹음 장비의 노이즈는 어떻게 줄이고 볼륨은 어떻게 조절해야 될 것인가 등 음악을 프로듀싱할 때 필요한 모든 전반적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달인급 음악인으로 성장한 것이다. 아무리 화려한 속주와 테크닉도 음악에 맞지 않으면 그저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장식일 뿐이다. 지미 페이지는 각 음악에 딱 들어맞는 기타 멜로디를 보여주었고 그것을 알맞게 배치하였다. 레드 제플린의 멤버 하나 하나가 각 분야에서 역사상 최고를 두고 자웅을 겨루는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아우르고 이끌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지미 페이지의 이러한 능력 때문이었다. 괜히 지미 페이지의 별명이 "위대한 레드 제플린의 위대한 선장"인 것이 아니다.
사실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는 레드 제플린의 프런트 맨임에도 라이브에서 제 정신으로 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 정도로 언제나 나사가 빠져 있는 상태다. 음반에 녹음한 가사와 라이브의 가사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 라이브도 있다. . 하지만 레드 제플린의 레전드 영상으로 꼽히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 얼스 코트 라이브 등을 찾아보면, 그가 왜 롤링 스톤이나 그 외 꽤나 공신력 있는 음악 매거진에서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 탑 10에 항상 이름을 올리는지 알 수 있다.
김태원이 록커로서의 자신을 지미 페이지를 카피해서 메이킹했다고 하는데, 여기까지 보면 너무 많이 카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7. 사생활


당시의 락스타들이 그러했듯 지미 페이지 역시 수많은 그루피들 및 미녀들과 어울리며 쾌락적인 삶을 살았다. 70년대는 록계에서 그루피 문화가 절정에 달한 때였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롤링스톤즈레드 제플린이 가장 많은 그루피 부대를 몰고 다녔던 밴드였다. 미녀 그루피 부대가 제플린 멤버들이 투숙한 호텔방은 말 할 것도 없고 그 중 일부는 레드 제플린이 다른 도시로 이동할 때 아예 공항까지 따라가서 레드 제플린의 전용비행기에까지 같이 타서 공중 이동 중에도 같이 질펀하게 놀고 즐기면서 이동하곤 했을 정도다. 한국 아이돌 스타의 사생팬들하곤 스케일과 헌신도부터가 차원이 다르다. 몸까지 100% 다 주니까...
전성기 시절 레드 제플린 시절에는 무려 '''14세의 그루피와 사귄 적도 있다.''' 그 그루피의 이름은 로리 매덕스로, 1970년대 로스앤젤레스그루피 중 한 명이었다. 그 밖에도 '그루피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파멜라 드 바레스, 베베 뷰엘[11]등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그루피들과의 관계를 가졌다. 이 정도면 말 다 한 셈(...)
1971년부터 83년까지 약 10년 동안 샬롯 마틴[12]이라는 프랑스 모델과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둘 사이에 낳은 딸 스칼렛 페이지(1971년생) 은 현재 락 전문 사진작가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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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시절의 샬롯 마틴.
하지만 정식으로 결혼한 건 1986년에 패트리샤 에커라는 모델과 결혼한 게 처음이다. 약 10년 동안 같이 산 후 이혼했고 둘 사이에 제임스라는 아들[13]을 뒀다. 그 뒤에 지메나 고메즈 파랏차라는 브라질 여인과 결혼하여 두 자식을 뒀는데 역시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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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세의 나이에 자기보다 46세나 어린 25세의 여자친구와 연애하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여자친구는 프랑스인과 이란인의 혼혈인 영화배우이자 시인인 스칼렛 사벳. 하필이면 2015년 새해에 터진 터라 영국의 각종 찌라시 신문을 연초부터 요란하게 장식했다. 공교롭게도 지미의 딸과 동명이인인 스칼렛 사벳은 무려 지미의 딸보다 19세 연하다. 이 정도면 거의 손녀뻘과 연애하는 셈.
웃긴 것은, 이 둘의 스캔들이 터진 이후 미국의 유명 연애매체인 TMZ에서 올린 동영상에서 하는 말이, "There's a girl, she is young. With a man, he is old. She's installing a chairlift to heaven"(...)
해석을 해보자면, "어린 여자가 있어요. 늙은 남자와 함께죠. 그녀는 천국으로 가는 휠체어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려고 해요."라는 말이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스칼렛이 지미의 돈을 보고 사귄다는 것을 Stairway to Heaven의 가사로 패러디 한 것.
그리고 여기에 스칼렛 사벳의 트위터가 있다.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시나 음악의 관한 트윗이 지속적으로 올라오기도 하고 본인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추정된다. 최소한 트위터만 보면 스칼렛이 골드 디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위에서 부가설명에 쓴 것처럼 정말 지미의 팬이거나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듯하다. 하지만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기 때문에 판단은 본인 몫.
워낙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다보니[14] 그의 성적 취향에 대한 많은 풍문 썰들이 있는데, 사실 그런 것들의 확실한 사실여부까지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많은 그루피들의 증언에 따르면 가방 한 쪽에 채찍 등을 항시 가지고 다니며 사디즘 등 각종 변태 성향이 있었다는 얘기부터, 의외로 침대에서는 신사적이었다는 얘기까지 서로 상반되는 썰들도 많다.
마약 역시 빠질 수 없는데, 60년대엔 대마초와 LSD를, 70년대에서 80년대 초까진 헤로인을 했었다. 특히 헤로인 중독은 70년대 후반에 지미 페이지의 건강을 위협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80년대 들어서 헤로인은 끊었으나 이번엔 코카인에 손대서 1982년과 84년에 코카인 소지로 체포되기도 했다. 이후론 완전히 끊었다고 알려져 있다.
흑마술, 신비주의, 인도 사상 등에 심취했었고 특히 오컬트와 흑마술에 대해선 열렬한 추종자였다. 그러나 흑마술과 오컬트에 대해선 존 본햄이 자기 집에서 급사했을 때 워낙 간절한 마음에 그를 되살리기 위한 흑마술 주문을 외우는 등 노력을 했는데도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한 뒤로는 관심을 점차 끊었다고 한다.
억만장자 스타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좀처럼 안 쓰는 짠돌이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런 인색함에 불만을 가진 스태프 등 주변 사람들이 뒤에서 지미의 뒷담화를 할 때 그의 구두쇠적인 면을 비꼬는 의미에서 '납 지갑'(le(a)d wallet)이란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심지어 레드 제플린의 매니저이자 지미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던 피터 그랜트마저도 "지미 페이지를 죽이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지미가 보는 앞에서) 달리는 런던 버스 앞에다 2펜스만 던져놓으면 된다."[15] 라는 조크로 지미의 돈 밝히는 성향을 풍자했을 정도다.
자신의 대중적 대외 이미지 관리에 철저했던 뮤지션이기도 하다. 팬들에게 언제나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에 평소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모습이나 흐트러진 모습은 절대 공개를 안했다. 레드 제플린 시절에 다른 멤버들은 무대 뒤, 대기실, 호텔, 이동 중의 비행기 등에서의 스스럼 없는 모습이 영상, 사진에 다 나와도 지미 페이지만은 안 나온다. 자신의 모습은 오직 전속 사진사에 의해 무대 위 공연 중에서나 프로모션용 촬영 등에서 간지나게 찍힌 사진들 중에서만 엄선해서 대중에게 공개했다.
이와 관련해서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영화감독 마이클 위너가 런던의 고급 주택가로 이사왔는데 마침 이웃집이 지미 페이지가 살고 있던 저택이었고 둘은 친분을 맺게 된다.[16] 그런데 위너 감독이 아침에 운동복 차림으로 조깅을 하고 있던 지미 페이지를 보게 됐는데, 지미는 "내가 조깅한다는 걸 남에게 절대 말하지 말아달라. 그런게 널리 알려지면 내가 쌓아온 록스타로서의 신비스런 이미지가 훼손될 것이다"라며 신신당부 부탁했다고 한다.[17] 지미 페이지가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에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는지를 잘 보여주는 재밌는 에피소드다.

8. 기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폐회식에 참가하여 2층 버스에서 리오나 루이스와 함께 "Whole Lotta Love"를 연주하는 퍼포먼스를 하였다.[18] 데이비드 베컴도 버스 위에서 공을 차는 퍼포먼스를 하였다.
2014년버클리 음악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
푸 파이터즈의 08년 웸블리 콘서트에서 존 폴 존스와 함께 레드 제플린 시절 히트곡인 "Rock n Roll"을 협연하는 장면. 3분대부터 나온다. 푸 파이터즈의 성향이 첨단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 순수 기본 장비+이펙터 위주다 보니 그런 음악적 성향이 마음에 든듯하다.
신해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올 것 같은 금발의 플랜트와, 동양적이고 신비로운 스타일과 외모(흑발, 용이 그려진 의상)의 페이지가 극명한 대조를 주면서 가뜩이나 하늘을 찌르던 레드 제플린의 인기가 대기권을 돌파하고 우주로 향한 요인이 되었다고 평했다.[19] [20] [21]
윗 문단에서 어느정도 서술된 것 처럼 나이가 들면서 동양인의 외모가 되어간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젊었을 때도 흔히 말하는 게르만 계열이나 라틴 계열처럼 전형적인 서양인의 외모는 아니였지만 그래도 서양인다운 모습이 보였는데, 백발이 된 이후의 모습을 보면 나이 지긋이 먹은 일본인이나 홍콩인 같은 이미지를 많이 풍긴다. 서구권의 댓글에서도 종종 'Jimmy Page. The only man to have changed ethnicity while living', 해석하자면 '지미 페이지, 살면서 민족을 바꾼 유일한 사람'같은 말을 자주 한다.
It Might Get Loud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서로 다른 세대의 기타리스트 후배인 U2의 기타리스트 디 에지와 싱어 송라이터인 잭 화이트와 같이 출연하면서 서로 무슨 장비를 사용하며 어떤 성향인지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22] 지금처럼 다양한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시절 때는 순수 테크닉이 전부였다고 토하기도 하였다. [23] 그 이외에 다양한 이펙터를 사용하는 디 에지와 기타에 내장형 확성기를 설치하는 잭 화이트의 장비들을 보면서 신기해하기도 했다.

[1] 자료 출처에 따라 58년이라는 설명도 있고 57년이라는 설명도 있다.[2] 정확히는 암 치료법을 연구하고 싶었다고 한다.[3] 지미 페이지가 이 사람의 세션 기타리스트 활동을 그만 두고 그 후임으로 들어간 사람이 바로 리치 블랙모어다. 원래 지미 페이지는 밴드를 그만 두면서 자신의 후임으로 친구인 제프 벡을 추천했지만, 닐 크리스챤이 제프 벡의 성격이 까탈스러워 같이 작업하기 힘들다고 제프 벡을 거부했고, 리치 블랙모어를 영입한 것이다. 여담이지만 리치 블랙모어와 지미 페이지는 10대 시절부터 서로 면식이 있었고, 이 때 부터 이미 서로를 라이벌이라 여기고 있었다 한다.[4] 리치 블랙모어가 이 사람한테 기타를 배웠다. 빅 짐(Big Jim)은 그의 별명으로 지미 페이지는 리틀 짐(Little Jim)으로 불렸다.[5] 지미 페이지 뿐 아니라 1960~70년대 대부분의 주요 록 뮤지션들이 악보 보는 법을 몰랐다. 애초에 당대의 록 음악인들은 작곡이든 연주든 악보를 이용해서 하는 방식이 아니었다.[6] 같은 시기 미국에서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때문에 흑인 음악을 크게 배척을 한 반면, 영국에선 보수적이긴 하지만 인종과 상관없이 이들의 음악을 크게 받아들였다. 그 덕분에 이들의 음악을 듣고자란 비틀즈, 롤링 스톤즈, 레드 제플린 같은 밴드들이 탄생햇고 브리티쉬 인베이젼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7] 참고로 이 "3대 기타리스트"라는 표현은 오직 한국에서만 유행했던 수식어이다.[8] 정확한 모델명은 Gibson Double Neck EDS-1275이다. 스튜디오 녹음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라이브 무대에서 12현 기타와 6현 기타를 동시에 써야 하는 경우에 사용하였다. 대표적으로 The song remains the same과 Stairway to Heaven.[9] 야드버즈 시절 제프 벡에게서 물려받은 기타로 지미 페이지가 직접 용을 그려넣었다. 친구란 인간이 선물이랍시고 그림을 다시 그려주다 이 전설의 명기를 박살냈다.[10] 리치 블랙모어는 본인도 절대로 마약을 하지 않았으며, 녹음이나 투어 중에 문제가 생길수도 있다는 이유로, 밴드 멤버들이 마약을 하는 것도 막았다. 참고로 레인보우의 키보디스트 였던 토니 캐리가 심각한 약쟁이였는데, 공연 도중에 리치 블랙모어가 기타 솔로를 연주하고 있는 와중에 혼자 마약에 취해 키보드에 낙서를 하는 이상 행동을 하다 공연이 끝난 직후 바로 리치 블랙모어에게 해고 되었었다. 해고를 통보 받은 직후, 리치에게 "날 해고했으니 넌 이제 불행해 질거야." 라는 식의 저주의 말을 했다가 바로 싸대기를 맞은 건 덤, 당시에는 토니 캐리가 스스로 탈퇴하였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실제 내막은 저랬던 것이다. 이 일화는 일본 번 매거진 2006년 3월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리치 블랙모어 본인이 직접 밝힌 것이다.[11] 플레이보이 모델 출신. 원래는 패션모델을 지망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진로를 변경한 경우. 배우 리브 타일러의 엄마[12] 살롯 마틴은 에릭 클랩튼과도 잠시 사귄 적이 있다.[13] 정확히는 제임스 패트릭 페이지 3세(....)다.[14] 물론 그조차도 롤링스톤즈의 믹 재거에 비할 순 없다.[15] 돈에 눈이 멀어 무작정 돈을 주으러 버스앞으로 뛰어들어서 교통사고를 당할 거라는 뜻.[16] 이 인연으로 마이클 위너가 감독하고 찰스 브론슨이 주연한 1982년작 영화 '데스 위시 2'의 삽입곡을 지미 페이지가 맡게 된다.[17] 이 에피소드는 이로부터 한참 후인 2008년에야 이 감독이 Uncut지와의 인터뷰에서 공개했다. 참고로 이 당시 80년대 초의 지미 페이지는 존 본햄의 사망과 레드 제플린 해체 후 한동안 칩거만 하고 있다가, 마약을 끊고 운동도 시작하며 건강을 다시 추스리고 있었던 때였다.[18] 리오나의 보컬은 라이브였지만 지미의 연주는 핸드싱크이다.[19] 서양인들도 원래 다 눈이 큰건 아니다. 이 당시 영국에서는 60~70년대까지만 해도 서양인인데 황인스럽게 생긴 사람들이나 희한하게 생긴 사람들이 꽤있었다.예로는 섹피의 폴 쿡,본 항목의 지미 페이지,젊은 시절의 더 클래시의 믹 존스, 애니멀스(The House of the Rising Sun으로 유명한 밴드)의 에릭 버든, 존 레논도 약간 해당됨(눈이 좀 찣어진 스타일이라거나 눈이 작다거나 속쌍꺼풀,아니면 가끔씩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 다만 존 레논은 심각한 근시로 비틀즈 후기부터는 도수가 엄청난 안경을 썼기에 그만큼 눈이 작아 보인 점을 감안해야 한다. 비틀즈 초기나 말년에 안경을 벗은 얼굴을 보면 생각보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큰 걸 알 수 있다. 사실 눈을 제외해도 큰 매부리코에 각진 턱 등 존 레논은 전형적인 서향인의 얼굴 골격을 갖추었다.) 특히 아일랜드 사람들이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는다.페이지의 눈을 잘보면 특유의 쌍꺼풀이 있는데,이는 술고래로 유명한 뮤지션인 셰인 맥고완의 것과 비슷하다.셰인 맥고완은 쌍꺼풀이 훨씬 짙은편,따지고 보면,아일랜드 사람 피가 섞이질 못할 이유도 없다.애초에 아일랜드-영국 혼혈이 많아서 페이지의 외모는 모계의 것이 강한듯하다.[20] 어머니가 아일랜드계 사람이고 할머니가 몽골인이라는 소문은 인터넷 루머에 불과하다.[21] 서양인 중엔 늙으면서 눈이 처지면서 황인처럼되는 사람도 있고,그냥 눈이 움푹파이거나 그래서 눈이 굉장히 쌍꺼풀지는 케이스가 많다.[22] 어쩌면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기타리스트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지미-60년대 후반-~70년대/디 에지-8~90년대/잭 화이트-2000년대)[23] 사실은 Stairway to heaven과 같은 track 녹음 시 6현 기타 뿐만 아니라 12현 기타도 사용하였는데, 라이브 공연에서는 기타를 교체하기가 여의치 않기 때문에 SG 더블넥(정확한 모델명은 Gibson Double Neck EDS-1275)을 사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