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계 멕시코인
1. 개요
오늘날 멕시코 인구의 약 80~90%가 스페인계 혈통을 가지고 있다.[1] 스페인계 멕시코인은 주로 멕시코에 정착한 페닌술라르 혹은 근현대에 스페인에서 멕시코로 이민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스페인인들의 멕시코 이민은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 1521년 스페인이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이후 이른바 누에바에스파냐 식민지 시대
-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유럽에서 신대륙 이민 붐이 일던 시절
- 20세기 중반 스페인 내전 시기
-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인해 스페인 내 청년 실업률이 40%대를 찍은 이후
2. 이민사
[image]
오늘날에 멕시코에 해당하는 지역들은 16세기 스페인에 의해 정복된 이후 스페인 출신 군인과 선원들이 대거 정착하게 된다. 초창기 스페인인들이 데려온 돼지 등이 옮겨온 질병으로 인해서 많은 아즈텍, 마야 원주민들이 사망하고 스페인 군인들이 원주민 여성들을 현지처로 삼으면서 오늘날 멕시코 인구의 절대다수를 구성하는 메스티소들이 생겨났다.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유럽발 전염병으로 때죽음을 당한 사실이 잘 알려져있지만, 아메리카에 정착한 스페인인들 역시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적지 않은 수준이었다. 스페인에서는 노다지 식민지에 파견할 유능한 관료들이 식민지 발령을 거부하거나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이들에게 반도인 즉 페닌술라르라는 감투를 씌워준 이후 식민지 내에서 왕 못지않은 절대권력을 누리도록 허락하면서, 누에바에스파냐 식민지에는 라 카스타 라고 부르는 일종의 카스트 제도가 형성되었다. 카스트 제도의 최상층에는 페닌술라르, 그 다음에는 식민지 현지에서 태어난 백인인 크리오요가 있었고, 원주민 및 흑인 노예들은 사회 하층 계급으로 차별받았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 초창기에 누에바에스파냐로 이주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남성이었고, 이 때문에 오늘날 멕시코인 상당수는 혼혈인 메스티소이다. 여성 이민자들은 주로 유대계로 스페인 내에서 종교재판으로 탄압받던 세파르드 유대인들이 살인적인 박해를 피해 가족 전체를 데리고 이주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2] 신대륙에는 백인 인구가 특히 여성 인구가 부족했기 때문에 굳이 여기서도 몰래 유대교를 믿는다고 심하게 박해하는 경우는 드물었다만, 엄연한 차별은 존재했다고 했다. 식민지 시대 초기 누에바에스파냐의 백인 여성들은 상당수가 이런 유대계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들 대다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몰래 믿던 유대교 전통을 잊어버리고 멕시코의 가톨릭 인구와 동화되었다.[3]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이런 순혈주의가 만연했던 이유나 유대인들이 대거 이주했던 이유는 근세 스페인의 상황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레콩키스타가 완료된 1492년은 크리스토퍼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해이기도 했다. 스페인은 레콩키스타를 거치며 강성 가톨릭 국가가 되었고, 그 결과 유럽 스페인 본토의 세파르딤들과 무데하르 상당수가 가톨릭으로 개종당하거나 추방당했으며, 스페인 내에서는 조상 대대로 가톨릭 신도였는지를 중시 여기는 순혈주의 풍조가 생겨났다. 스페인은 누에바에스파냐 식민지에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멕시코 원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데 적극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대 포르투갈과는 다르게 순혈주의를 강조하여 유럽 스페인에서 온 이민 1세대 페닌술라르와 이민 2세대, 3세대 이하 크리오요 및 메스티소와의 차등관계를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같은 시대 포르투갈에서는 스페인과 다르게 인구가 크게 부족했기 때문에 종교만 같은 가톨릭이면 공평하게 징집(...)해서 굴리고,[4] 흑인 해방 노예와 백인 여성과의 결혼도 드물지 않았다면 누에바에스파냐 식민지의 상황은 인종/출신별 계급 관계가 극명하게 달라졌다. 즉 스페인계 멕시코인들은 적어도 18세기까지는 누에바에스파냐 사회의 특권층을 차지했다.
식민지의 카스트 제도에 원주민들이나 흑인들이 순순히 복종만 한 것은 아니었고, 멕시코 제1연방공화국 시기에 해당하는 1827년부터 법령에 의해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에서 추방되거나 살해되기도 했다. 멕시코에서 스페인인 이민자들에 대한 거부감이 증가하는 것과는 별개로 19세기 이후로 황열병 약이 개발되면서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오는 이민자들의 사망률이 대폭 감소하자, 산업혁명 시대 당시 저임금 중노동으로 고통받던 유럽의 빈민 상당수가 미국과 아르헨티나, 브라질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쿠바나 멕시코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1850년부터 1950년 사이에 스페인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인구는 350만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의 이민 목적지 중 하나가 멕시코였다. 더 이상 스페인 태생 이민자들을 우대할 만한 이유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관습적으로 스페인 출신 백인 이민자들이 우대를 받는 상황이 일어나자, 독립국이 된 멕시코는 스페인계 이민자들에 대한 빗장을 걸어잠그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메스티소이자 아즈텍 제국의 후예에서 찾기 시작했다.
스페인 내전 당시 상당수의 스페인 공화파 출신 인물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을 멕시코로 피난보냈는데, 결국 스페인 내전이 프랑코 정권의 승리로 끝나자 공화파 난민 상당수가 멕시코로 영구 이주하게 되었다. 스페인 내전 시기 발생한 난민 18,000여 명 중 25%는 고등교육을 이수한 인텔리 계층으로 멕시코 내 여러가지 갈등에도 불구하고 무난하게 정착하는데 성공했다. 내전 당시 탈출한 지식인들은 반파시스트 성향의 좌파 예술가들이 많았고, 이는 현대 멕시코 문화의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 등이 대표적이다.
스페인 내전 당시 멕시코로 이민한 사람들 중 카탈루냐, 바스크[5] 출신이 많았다면 2008년 스페인 경제 위기로 스페인의 청년 실업률이 치솟자 마드리드 출신 카스티야인들을 중심으로 멕시코 이민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3. 바케로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과 안달루시아 내륙 지역은 농업이 불리한 건조지역이었고, 농업보다는 목축업이 발달한 지역이기도 했다. 카스티야와 안달루시아 출신 스페인인 상당수는 오늘날 선벨트와 멕시코 북부의 건조지대에서도 스페인 내륙에서 하던데로 말을 타고 다니며 소와 양을 쳤는데, 이들은 스페인어로 바케로(Vaquero)라고 불렸으며, 오늘날 멕시코 중부의 메스티소/인디오 목동 차로(Charro)와 '''미국의 카우보이의 직계 기원'''이 되었다.[6] 캘리포니아와 그레이트베이슨 지역에서 카우보이를 지칭하는 이명 중 하나인 버커루(buckaroo)의 어원은 바케로를 영어식으로 잘못 읽은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미국과 멕시코의 승마술은 아랍계 승마술과도 의외로 많이 겹친다고도 한다. 바케로의 마술과 승마용 장비는 히네테(Jinete)라고 불리던 중세 이베리아의 경기병들에게서 유래된 것으로, 이는 레콩키스타 시대에 이베리아 반도에 거주하던 무슬림들의 승마술 및 말 관리법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4. 멕시코의 혐스페인인 감정
[image]
오늘날 멕시코는 스페인에서 독립하면서 건국된 나라이고, 따라서 스페인 교과서에서도 멕시코인들의 정체성을 아즈텍 제국의 후예이자 메스티소로 규정하고 가르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페인 출신 이민자들에 대한 멕시코인들의 반감도 불거질 수 밖에 없었다. 상술한 것처럼 19세기 중반에는 스페인계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집단 학살이 일어났으며 스페인 내전 당시 새로 유입된 스페인계 멕시코인들은 여타 멕시코인들 사이에서 주로 베레모를 쓰고(바스크 출신 이민자들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 아무데서나 쿠바산 시가를 가지고 길빵을 하고, 멕시코인들이 주로 마시는 맥주나 데킬라 대신 일부러 와인을 마시며 사치를 부리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흥미로운 점은 근대 이전 멕시코에 집중적으로 이민을 와서 현지 유럽계, 메스티소 엘리트를 형성한 이베리아인들은 거의 대부분 안달루시아, 카스티야, 에스트레마두라에서 온 남부 이베리아인들이었던 반면, 20세기 정치적 스페인 난민들은 상당수가 바스크, 카탈루냐 사람들이라 토착 멕시코 메스티소들이 근대에 이민온 스페인계 이민자들에 대한 베레모쓰고 시가피는 깍쟁이니 하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상당수는 이베리아 반토 본토에서의 남북부 지역간 담론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항목들이다.
물론 스페인인들과 멕시코인들 모두 스페인어를 구사하고 멕시코 문화의 상당부분이 스페인에서 비롯된 것이니만큼 서로간의 차별이나 반목이 심한 것은 아니라고도 하지만, 이는 주로 전근대부터 있었던 백인 침략자와 원주민의 갈등 및 페닌술라르와 크리오요의 갈등 그리고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멕시코 사회 내 백인과 메스티소 간의 갈등의 연장선상이라고 봐야 하겠다.
5. 유명 인물
- 에르난 코르테스
- 기예르모 델 토로
- 루이스 부뉴엘
- 알레한드라 길만트
- 산티아고 페레스 그로바스 - 인스타그램 등지에서 매우 유명해진 사진사. 원래 금수저 집안 출신으로 샌프란시스코와 바르셀로나에서 공부하고 건축을 전공하던 사람이었으나, 커머셜 모델 포트폴리오 사진 촬영을 공짜로 해준 것을 계기로 유명한 사진사가 되었다. 여담으로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당시 멕시코가 한국 덕에 16강에 올라가자 인스타 스토리에 한국에 대한 감사 인사를 넣기도 했다.
6. 같이 보기
[1] 자세한 내용은 멕시코/역사 문서 참조[2] 이러한 경향은 멕시코보다는 포르투갈의 브라질 식민지에서 훨씬 더 두드러졌다.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의 경우 인구가 100만여 명에 이주민도 적었기 때문에, 식민지 경영 인력이 부족한 편이었고 이 때문에 자국의 해외 식민지로 이주하는 유대인들에게 좀 더 관대한 편이었다.[3] 오늘날 멕시코의 유대인 인구는 주로 20세기 초반 유럽/중동 등지에서 반유대주의를 피해 이민한 유대인들의 후손으로, 상술한 대항해시대 이민정착한 유대인들과 직접적인 상관은 없다.[4] 대항해시대 포르투갈 왕국은 유럽에서 징집한 병사와 선원들을 노예나 다름없이 말 그대로 공평하게 군량이나 담요 같은 기초적인 보급품도 제대로 안 주고 혹사시켰다. 식민지 약탈과 무역으로 얻은 돈은 왕실과 귀족들이 독점하는 상태에서, 식민지로 파병된 신병들은 현지 가톨릭 신도들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는 경우마저 왕왕 발생했다.[5] 그래서 현대 멕시코에는 가르시아(Garcia), 소레기에타(Zorreguieta) 등의 바스크계 성씨가 존재한다.[6] 멕시코가 스페인에서 독립한 지 얼마 안 돼서 1846년 미국은 멕시코에게 전쟁을 걸어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텍사스 등등을 포함하는 광활한 선벨트 일대를 점령했는데, 이 과정에서 해당 지역에 살던 멕시코인 목동들은 미국 국민으로 편입되었다. 1860년대 남북전쟁이 끝나고 남군 출신 실업자들이 그동안 히스패닉들이 주로 종사하던 목동 일에 뛰어들면서 서부 영화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카우보이 문화가 정립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