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역사

 


멕시코역사를 다루는 항목.

1. 고대사
2. 중세사
3. 근세사
4. 근대사
5. 현대사


1. 고대사


기원전 2만년 경에 베링해협으로부터 건너온 주민들이 멕시코 지역에 정착했으며 일부부족은 더욱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조상이 되었다. 어쨌든 멕시코 지역에 정착한 주민들은 기원전 8000년부터 농경을 시작하였으며 기원전 2300년 경의 토기가 발견되기도 하면서 이 시기부터 문명의 기원이 형성된걸로 보인다. 이후 기원전 14(혹은 12)세기부터 멕시코 동남부 지역에서 올메카 문명이 최초로 등장하였고, 이후 멕시코 본토에서는 사포테카, 미스테카, 테오티우아칸, 톨테카 등의 문명이 형성되고 사라지면서 수많은 국가들이 흥망을 거듭하였으며, 멕시코 남부 및 유카탄 반도과테말라 일대에서 마야문명이 번창하기도 했다. 이들은 매우 정확한 태양력과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로 대표되는 건축술, 인신 공양의 제례 방식 등을 공유하였고, 문자도 가지고 있었다. 현재는 이 문자들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사용된다해도 장식용으로 쓰는 게 대부분으로, 룬 문자오검 문자와 비슷한 상황이다.

2. 중세사


그러다가 14세기 경부터 모습을 드러낸 아즈텍이 멕시코 고원의 주도권을 잡고, 북부지방의 톨텍 제국에게서 제국의 타이틀을 빼앗아 왔다. 아즈텍은 이전부터 계속되던 인신 공양의 제례를 대대적으로 확대하는 한편, 텍스코코 호수 중간의 수중 도시인 테노치티틀란에서 '치남파스'라고 불리는 수경 재배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당시 테노치티틀란은 인구가 15 ~ 30만 명까지 추산되는 세계에서 손꼽을 만한 대도시였다.
하지만 쿠바에서 스페인콩키스타도르 에르난 코르테스의 병력 200여 명을 자신들 신화 속의 신 케찰코아틀로 여겼던 황제 몬테수마 2세는 이들을 환대하였다.[1] 1519년 코르테스는 이후 황제를 기습해 포로로 잡고 아즈텍을 유린했으나, 뒤늦게나마 반격을 가한 아즈텍에 의해 코르테스는 쫓겨나게 된다. 이후 코르테스본국의 지시 없이 단독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추궁하기 위해 자신을 뒤쫓은 1000여 명을 부대로 편입하고 아즈텍의 과도한 공물 요구와 인신 공양 제례에 지쳐 있던 다른 원주민들 10여 만 명의 협조를 받아 1521년 마침내 아즈텍을 멸망시켰고, 아즈텍을 정복한 스페인은 3년 후에는 멕시코 중부 지역에 위치해 있던 다른 원주민 국가인 푸레페차(타라스칸)를 정복하고, 뒤이어 마야 문명이 지배하고 있던 남부 지역과 북부 지역의 여러 군소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상대로 정복전쟁을 벌여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 들면서 멕시코 전역을 식민지화하기에 이르렀다.

3. 근세사


이후 이곳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어, '누에바에스파냐'라는 이름으로 스페인의 부왕(副王)이 지배하게 된다. 이 지역에서 유럽인들과의 접촉 이후 아즈텍 또한 천연두로 인해 대대적으로 인구가 몰살당했고,[2] 대항해시대 당시 건너온 유럽 백인들은 앵글로아메리카 쪽의 일부 종교적 소수자 외에는 남자가 대다수이고 여자는 부족하여 현지 원주민 여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하프인 메스티소들이 엄청나게 양산된 것. 물론 강간 등의 성범죄뿐만 아니라 결혼이나 사실혼으로 태어난 메스티소들도 많다. 그 때부터 시작된 메스티소 혈통은 멕시코 인구의 주류를 차지한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유럽발 전염병으로 때죽음을 당한 사실이 잘 알려져있지만, 아메리카에 정착한 스페인인들 역시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적지 않은 수준이었다. 스페인에서는 노다지 식민지에 파견할 유능한 관료들이 식민지 발령을 거부하거나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이들에게 반도인 즉 페닌술라르라는 감투를 씌워준 이후 식민지 내에서 왕 못지않은 절대권력을 누리도록 허락하면서, 누에바에스파냐 식민지에는 라 카스타 라고 부르는 일종의 카스트 제도가 형성되었다. 카스트 제도의 최상층에는 페닌술라르, 그 다음에는 식민지 현지에서 태어난 백인인 크리오요가 있었고, 원주민 및 흑인 노예들은 사회 하층 계급으로 차별받았다.
1546년 멕시코 사카테카스, 볼리비아의 포토시에서 은광에 발견된 이후 스페인은 막대한 은을 캐내고 대농장을 건설했지만, 정작 본국에서는 타국의 모직물 등에 사치하는 바람에 멕시코 은은 유럽 각국으로, 그리고 멕시코 서부의 아카풀코 항을 통해 필리핀을 거쳐 멀리 중국으로까지 흘러들어가게 된다. 멕시코 은은 16세기 가격 혁명의 주요한 원인이 되고 일본 은과 함께 세계 경제의 양대 축으로 자리 잡지만, 정작 스페인에서는 바람직한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멕시코 은이 물가 앙등의 원인이 되었다.

4. 근대사


17세기 이래 쇠퇴 일로를 걷던 스페인이 19세기 초반 나폴레옹 전쟁의 와중에 본토가 유린당하며 해외 식민지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미겔 이달고(Miguel Hidalgo y Costilla,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 신부가 돌로레스라는 마을에 위치한 그의 교회에서 사람들을 부른 뒤 스페인에 대항하여 군대를 일으킬 것을 부르짖었고(돌로레스의 부르짖음;Grito de Dolores), 이후 그를 중심으로 1810년대 독립 운동이 진행된다. 하지만 이달고 신부는 1811년 스페인 군대와 크리오요들에게 패배했고, 그의 사망 이후 그의 독립 운동은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José María Morelos)가 이어받아 4년간 항쟁을 계속하나, 그 역시 1815년 스페인군 소속 식민지군 사령관인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ín de Iturbide)[3]에게 패배당하고 만다. 독립운동의 실패 이후 스페인 본토의 정권을 좌파가 장악하게 되자 크리오요들이 멕시코 식민지에서의 권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1821년에 독립한다. 그 독립을 선언한 사람은 다름아닌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였고, 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모방해 스스로 황제 아구스틴 1세가 되어 멕시코 제국을 수립했다. 1823년에는 중앙아메리카 지역이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을 구성하며 떨어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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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년의 멕시코 제국의 영토.
이때 '''멕시코는 현재 미국 서남부 지역인 텍사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일대를 차지하고, 파나마 지협 이북의 중앙아메리카까지 모두 지배'''하고 있는 아구스틴 1세의 제국이었다. 그러나 1824년 산타 안나(Antonio de Padua María Severino López de Santa Anna) 장군의 쿠데타로 붕괴하여 공화정이 성립되었고, 부정부패와 독재를 일삼던 아구스틴 1세는 당시 토스카나 대공국의 일부였던 이탈리아의 리보르노로 추방당한다. 그리고 아구스틴 1세는 이후 다시 돌아왔다가 사망.
멕시코 제1연방공화국의 헌법은 미국 헌법을 모델삼아 쓰여진 것이고, 공화국의 형태 또한 합중국이었다. 여러모로 미국에게 영감을 많이 받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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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의 멕시코 영토.
이후 산타 안나 등에 의해 강력한 중앙정부를 형성하고자 하는 노력을 시도하여 멕시코 중앙집권공화국이 수립되고, 멕시코를 다시 식민지로 삼으려는 스페인의 재침공도 막아내고 잘 나가나 싶었더만, 미국인들이 서부개척 한답시고 슬금슬금 기어들어오더니, 결국 1846년에 미국이 전쟁을 일으켜 멕시코 거의 절반 가까운 땅을 왕창 빼앗아 간다.[4] 빼앗긴 텍사스에서는 석유가, 캘리포니아에서는 이 왕창 왕창 쏟아지고 미국은 강성대국을 넘어서 초강대국이 되었고 멕시코는 크게 몰락하였다. 멕시코로서는 이가 갈릴 일인데, 아직도 멕시코는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같은 곳이 원래 자기들 땅인데 미국이 억지로 빼앗아갔다고 여긴다. 그래서 멕시코 불법이민자들은 텍사스나 캘리포니아가 자국 땅이라면서 '이게 어디가 불법이냐?'라며 궁시렁댈 때도 있다. 물론 미국 경찰에겐 통하지 않지만.
이후 다시 정국은 자유주의적 연방파가 주도하여 멕시코 제2연방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자유주의적 개혁을 이루게 되지만 보수파의 반발은 거셌고 내내 쿠데타의 위협에 시달렸다. 1860년대에는 전후 멕시코의 혼란상을 틈타 프랑스 제2제국나폴레옹 3세가 자신의 조카였던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대공을 괴뢰 황제 막시밀리아노(Maximiliano) 1세로 세워 멕시코 제2제국을 선포했으나, 프로이센의 성장으로 인해 본국의 힘을 쌓아야 했던 프랑스가 힘을 빼면서 멕시코 제2제국은 붕괴하고 막시밀리아노 1세는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Juárez)의 혁명군에 의해 총살을 당하고 만다.

5. 현대사


1870년대부터 멕시코는 포르피리오 디아스(José de la Cruz Porfirio Díaz Mori, 호세 데 라 크루스 포르피리오 디아스 모리)라는 전형적인 개발 독재형 대통령이 정권을 잡아 억압 속의 안정을 이루게 되고, 나름대로 공업화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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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특권층에 집중된 경제 정책에 반대하여 1910년대부터는 멕시코 혁명의 물결이 멕시코를 뒤덮고, 이미 노년이었던 디아스가 별 힘 없이 물러난 상황에서 판초 비야(Pancho Villa),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 등의 혁명 군사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를 멕시코 혁명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시대를 상징하는 곡이 바퀴벌레라는 의미가 이후에 알려져서 화제가 되었던 곡 '라 쿠카라차'이다.
그러나 판초 비야는 미국 국경을 넘어 약탈을 벌였다. 약탈이라고 해서 미국 내에서는 도둑떼 취급을 받았지만, 판초 비야 입장에서 보면 상황이 좀 다르다. 당시 판초 비야와 사파타를 포함한 세력이 멕시코를 장악하였는데, 그들 중 하나인 베누스티아노 카란사가 정국의 주도권을 쥐었다. 그런데 카란사는 혁명의 종료를 선언하였고, 미국이 이걸 지원하고 나섰다. 이 때 카란사와 비야의 대표적인 전투가 셀라야 전투인데, 이 때 판초 비야 쪽의 미국산 무기가 문제를 일으키면서 판초 비야가 패하게 된다. 이후 판초 비야는 무기상과 카란사를 지원하는 미국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미국 도시 컬럼비아를 공격한 것이다. 이 '약탈'을 벌였다가 판초 비야는 존 퍼싱 장군의 미군에게 대패하여 군대를 잃었고 추적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판초 비야는 산맥에 숨어살았고 퍼싱은 지형상 추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미국의 1차 대전 참전으로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후 판초 비야는 미국을 공격하는것은 단념하고 다시 군대를 양성해 멕시코 정부를 대상으로 투쟁했으나, 카란사 정권이 무너진 다음에 은퇴해서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간 이후에 암살당한다. 이에 대해서는 판초 비야가 정치계로 나와서 경쟁자가 될 것을 우려한 카예스 당시 멕시코 대통령이 암살한 것이란 이야기가 돌았다.
사파타는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본인도 암살당하여 급진 좌파 세력은 기가 꺾였다. 그렇게 멕시코는 1920년대부터 다시 어떻게든 혼란을 수습해 나가려 하였다. 그런데 판초 비야를 몰아내고 사파타를 암살한 카란사 역시 오브레곤의 반란으로 쫓겨나서 암살당했다. 오브레곤 시대에도 조금은 안정되었다지만 역시 군사 쿠데타가 이어졌다. 오브레곤의 2차례 재임기간 도중에 집권한 플루타르코 카예스 시대에는 크리스테로 봉기라고 불리는,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톨릭 교도들과의 사실상의 반란~전쟁상태가 벌어졌다. 과격한 무신론자였던 카예스 대통령과 그의 신정부는 가톨릭 교회를 탄압하고,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하고 교회 교육을 강제로 없애는 등 과격한 반가톨릭, 세속주의 강요정책을 시행했고(이를 비공식적으로 카예스법(Calles Law)이라고 부른다), 이에 교황 비오 11세의 허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항의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합법적 청원도 일체 거부하고 신부들을 죽이는 등의 폭압적 정책을 시행했다. 카예스 대통령은 가톨릭 신자들은 멕시코 정부가 아닌 교황청에 충성하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는 편협한 주장을 고수했고, 멕시코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교회의 권력과 재산을 몰수하려고 시도했다. 가톨릭 신부들에 대한 핍박과 순교가 이어지고, 결국 가톨릭 농민 신자들과 사제들이 게릴라전을 위시한 광범위한 민중봉기운동을 펼쳤다. 가톨릭 신앙에 대한 종교의 자유는 1929년 에밀리오 힐 대통령 시대에 들어서야 개선되고, 가톨릭 신자들과 정부의 화해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카예스 대통령 이후 재집권한 오브레곤도 암살. 포레스트 힐 시기에도 이어진 폭동과 파스쿠알 루비오는 암살시도 등 전반적으로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플루타르코 카예스 대통령 이후 30년대 중후반 라사로 카르데나스 집권기 즈음 되어야 멕시코 혁명의 잔불도 진압 되고, 경제도 성장하여 어느 정도 안정이 이루어진다.
개혁주의자 라사로 카르데나스(Lázaro Cárdenas del Río) 대통령에 의해 보수파의 거점이었던 교회에 대한 압력, 토지 개혁, 보통 교육의 확대, 석유의 국유화 등이 진행되면서 멕시코 사회는 변모해 나갔으나, 단선제이면서도 여당인 제도혁명당에 의해 지속적으로 장악되어 '6년마다 죽는 신'이라고 불렸던 대통령주의와 정권의 보수화가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결국 틀라텔롤코 광장 학살 사건 등의 인권 탄압으로 인해 제도 혁명당은 194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 계속된 진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때 경제적으로 중공업과 소비재를 중심으로 한 경제발전이 급속하게 이루어지면서 연 평균 4%대의 고도경제성장을 누렸으며 이러한 경제적인 성과를 바탕으로 비록 유혈사태로 얼룩졌지만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1970 멕시코 월드컵이 개최할수있었고, 상당한 중산층이 형성될 수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 빈부격차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부정부패는 상당했지만 그랬다 해도 멕시코 경제사적으로 이 때 만큼 건실하게 성장했던 적이 없기는 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부터 수입대체산업은 점차 한계점을 보였으며 1976년 금융위기로 종말을 맞았다.
그래도 경제성장률은 그럭저럭 유지했으며 포르티요 대통령 시기 들면서 석유화학산업으로 눈을 돌리고 석유에 대한 투자를 급속히 늘렸다. 그 결과로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멕시코의 경제는 다시 고성장을 기록하였고 희망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라서 이에 따라 대규모 인프라 사업이 대대적으로 펼쳐졌으며 이에 따라 공공지출도 대폭 늘어났다.[5]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계속되는 유가 하락과 미국의 금리인상으로 인해 빚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는데 미국의 금리인상으로 인해 이자율이 크게 올랐을 때에는 석유가격이 상승세라 큰 문제는 되지 않았지만[6], 정작 1982년부터 유가가 점차 하락세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갚아야 할 빚이 늘어났고[7], 특히 1985년에 일어난 멕시코 시티 지진과 사우디와 영국, 미국의 석유가격 전쟁은 안 그래도 늘어나는 외채로 신음하는 멕시코 경제를 더욱 더 황폐화했다.
이후에 여러차례 채무가 조정되기는 했지만 이미 멕시코의 부채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게 되었다. 당시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군사정부 하에서 경제성장을 위해 무리하게 돈을 꾸거나 해외투자를 유치했는데 하필 석유파동 때라 수출이 잘 안되었던데에다가 이자율이 급속히 올라가면서 재정 적자가 급증하였고 그 결과가 경제파탄이었다. 그리고 브라질은 그 후유증이 2000년대까지 갔다.
이 부채 때문에 포르티요 이후의 대통령들은 심각한 재정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후 집권한 대통령들은 재정 위기의 개선과 광범위한 경제부양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1980~90년대에 걸쳐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포함한 시장 자유화 조치도 그 일환으로 행해졌고 구조조정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물론 이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크게 벌어진데다가 구조조정이 적극적으로 행해지면서 비정규직의 비율이 높아지고 임금도 크게 까이는 건 물론 복지지출도 크게 축소되면서 멕시코인들의 삶이 악화되었다. 멕시코의 복지지출이 OECD에 가입한 나라 답지않게 적고 노동시간도 역시 최장수준인 것도 이 시대의 유산이며[8] 1982년 금융위기를 겪지 않았으면 미국이 멕시코를 절대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올 지경이었다.[9]
또한 1983년과 1987년 사이에 멕시코 주가가 경제상황과 관련없이 크게 오르기도 했지만 1985년 멕시코시티 대지진1986년 멕시코 월드컵으로 인해 재정을 추가로 지출해야하는 요인이 생겨버린데다가 설상가상으로 1987년에 블랙먼데이로 인해 멕시코 증권시장의 거품이 붕괴되면서 경제난은 크게 가중되었다. 제도혁명당에 대한 지지율이 크게 떨어져서 1988년 대선에서 민족민주전선으로 정권이 교체될 듯 했지만 선거개표 도중에 정전을 시키고 투표함을 바꿔치기하는 방식의 부정선거로 정권을 연장시켰다.
부정선거[10]로 당선된 카를로스 살리나스(1988∼1994) 대통령은 취약한 정통성과 구조조정에 따른 엄청난 반발에도 시장개방정책을 추진하고 국영기업을 민영화시켰으며 석유노조를 약화시키고, 1994년에는 NAFTA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그의 재임 후반기는 위기의 연속으로 1994년 3월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되던 집권 제도혁명당(PRI)의 여당 후보인 콜로시오가 유세 도중 저격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 1994년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Chiapas)주에서 사파티스타 원주민 농민들의 무장투쟁이 발생하면서 정치적 혼란 시기에 접어들었으며, 12월에는 외환위기까지 맞이하게 되었다. 미국과 IMF 등 국제금융기구의 개입으로 일단 경제 위기는 극복되었지만 이후에도 사회 양극화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으며 부정부패도 여전히 심각했다. 그 결과 우파에선 국민행동당, 좌파에선 민주행동당이 크게 세를 넗혔으며 1997년 중간선거에서 제도혁명당은 과반에 밑도는 의석을 얻어서 일당제에서 3당제로 전환되었다.
2000년 7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계 야당인 국민행동당(PAN)의 비센테 폭스(Vicente Fox)가 당선되어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71년 만에 역사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빈센테 폭스 정권하에서도 빈부격차와 소득분배, 마약 카르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부유층들과 대기업들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뒀지만 대다수의 멕시코 국민들은 지속되는 저임금과 임금정체로 어려움을 겪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라크 전에도 참전하면서 지지율이 크게 낮아졌다. 이로 인해 2006년에 민주혁명당으로 정권이 교체될 듯 했지만 선거 막판에 판세가 뒤집혀져서 국민행동당 펠리페 칼데론이 0.6% 안팎의 근소한 표차이로 당선되어 겨우 정권을 연장하였다. 하지만 국민행동당 정부가 낮은 지지율로 재선된것을 만회하려고 마약전쟁을 벌이다가 마약과의 전쟁이 별 성과를 보이지 않자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고 말았고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경제도 어려워지면서, 2012년에 제도혁명당의 엔리케 페냐 니에토가 당선되면서 정권이 교체되었다. 하지만 엔리케 페냐 니에토도 집권 중반기부터는 부패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고 미국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다가[11] 빈부격차와 카르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경제성장도 침체되었다. 결국 2018년 대선에서 좌파 정당 국가재건운동(Movimiento Regeneración Nacional)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가 당선되어 12월 1일 취임과 동시에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1] 그러나 몬테수마 2세코르테스 일행을 정말 케찰코아틀로 여기고 환대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 이유는 아즈텍 측의 기록에는 코르테스 일행을 '''갑자기 와서 신인 것 마냥 행동하는 것들''' 이라고 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2] 이 때의 인구감소가 회복되어 만회하게 된건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였다.[3] 식민지주둔군 사령관 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조지 워싱턴과도 비슷한면이있다.[4] 미국 내부에선 바하 캘리포니아(캘리포니아 반도)와 멕시코 북부 주까지 요구하자는 목소리가 컸고, 아예 이왕 수도까지 점령한 김에 멕시코 전체를 합병하자는 소리마저 나왔지만, 텍사스와 켈리포니아만 해도 광대하다보니 굳이 이 지역들까지 점령할 필요가 없어 포기했다.[5] 1980년대 동구권 국가들이 체제전환이 이루어지게 된 게 1960년대에 성장률 침체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중공업에 투자를 했다가(루마니아와 폴란드가 그 예) 석유 파동으로 한 차례 타격을 받고 1980년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갚아야 할 빚이 크게 증가하자 빚을 갚기 위해 1980년대에 대대적인 긴축 정책을 펼침에 따라 복지 정책을 축소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많다. 당연히 인민들이 크게 반발하였고 거기에 소련이 유가 하락과 아프간전-체르노빌 사건 3콤보로 약해지자 공산당의 입지가 크게 약해졌고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것. 물론 체제전환 이후에도 이런 조치는 한동안 이어졌다.[6] 1981년에 석유가격이 고점을 찍었다.[7] 더군다나 그 기간동안 지하철 공사도 벌이고 송유관 건설사업 등 대규모 공공사업이 진행 중이라 경상수지 적자도 심각했다.[8] 1980년대 초반 대비로 친다면 실질 최저임금이 20%대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1인당 GDP는 1980년대 초의 3배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빈부격차가 넘사벽급으로 벌어진데다가 비정규직도 대규모로 양성되었기에 실질적으로 하위층의 삶은 80년대에도 못미치는 수준이다.[9] 1981년 당시 한국의 1인당 GDP는 멕시코의 60%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2010년대에 미국의 절반 수준으로까지 올라갔다. 만약에 멕시코가 1982년 금융위기를 겪지 않고 이전의 성장세를 미약하게나마 지속적으로 이어나갔다면 미국이 멕시코를 좀처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데에는 이견이 없다. 현재의 미국인들이 캐나다를 마냥 무시하지 않은 것도 캐나다가 인구수는 적지만 복지 혜택은 미국보다 더 좋고 결코 못 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더욱.[10] 선거결과 조작에도 득표율이 50.7%로 사상최저 기록[11] 물론 멕시코의 국력을 감안하면 어쩔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