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게노부 후사코
重信房子(しげのぶ ふさこ)
(1945년 9월 28일 ~ )
적군파의 여제.
적군파의 한 분파인 일본적군(JRA)의 수장이었다.
도쿄 세타가야구에서 태어났다. 여상을 졸업하고 공장에서 1년 근무하다가 1965년 메이지대학 야간부에 입학했다. 합격통보를 받고 등록금을 내러 가다가 등록금 시위를 하던 학생들을 만났고, 한 시위대원이 함께 앉아 항의하지 않겠냐고 권유했고 이에 후사코는 '''자연스럽게''' 이 시위대에 합류했다.[1] 그러다가 운동권에 합류를 하게 되었다.
경찰의 추적과 감시, 조직원들의 체포로 일본 내에서 적군파의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조직이 와해된 상황에서 시게노부 후사코를 비롯한 일부 간부들이 국제혁명근거지론(소위 P전략)에 따라 레바논을 통해 중동에 잠입하여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PFLP)와 연계, 일본 적군을 결성했고, 아사마 산장 사건을 일으킨 것은 모리 츠네오를 중심으로 하여 아직 체포되지 않았던 일본 내 잔류 세력이었다[2] . 즉, 아사마 산장 사건이 일어날 당시 시게노부 후사코는 이미 팔레스타인에 잠입하여 PFLP와 합류한 상태였다. 시게노부 후사코 본인은 아사마 산장 사건의 발생을 언론과 소식통을 통해 알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일본 내 잔류세력이 정부를 상대로 무장항쟁을 시작한 것으로 생각하고 크게 기뻐하였으나, 경찰의 추격으로 궁지에 몰린 적군파가 잔혹한 내부 숙청을 거쳐 자포자기 상태에서 농성을 벌였다는 실상을 알게 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자서전에 기록한 바 있다. 특히, 아사마 산장에서 농성하기 직전 린치 살해된 십여명의 동료들 중에 일본에 있던 당시부터 친하게 지냈던 사람도 포함되어 있어서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과 연대해 벤 구리온 국제공항을 습격하고 기타 여러 테러 활동을 벌인다. 1975년 국제테러리스트로 수배가 되었을 정도.
일본을 드나들다가 2000년 말에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되었고 감옥에 들어가면서 일본적군의 해산을 선언했다. 테러 혐의로 징역 20년 선고를 받았고 복역중이다[3] . 지금은 출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image]
참고로 딸이 하나 있는데,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딸이 굉장히 서구적인 이목구비의 혼혈이기에 아버지가 일본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름은 시게노부 메이. 레바논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따고 현재 일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중동 관련 보도를 주로 다루고 있다고 한다.
한 국내 언론사에서 복역중인 시게노부 후사코의 인터뷰를 따낸 적이 있다. 링크
해당 인터뷰나 자서전격인 저서 '사과나무 밑에서 너를 낳으려 했다'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대체로 옳은 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고, 상당히 반성적인 인물로 보이는 면모도 있으나... 사실 그냥 사회운동가도 아니고, 국제수배된 테러리스트라는 걸 생각하고 읽으면 어조가 너무 담담하다. 뭐 어쨌건 그래도 일본 적군파 간부 출신으로써는 개중 가장 반성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일본 적군파에 또라이가 좀 많은게 아니라...)
저서로는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가 있다. 이 저서에서도 위의 서술과 비슷한 특징이 드러나는데, 기본적으로 억지스러운 자기옹호나 미화, 정당화 및 합리화를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대해 반성하는 것도 아니다. 내용 구성이 딱 '남편 없이 혼자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동시에 자신의 분야에서도 성공한 여성 사업가나 전문직 종사자가 유일한 가족인 딸, 또는 딸 또래의 젊은 세대에게 자신의 인생과 자신이 해왔던 일을 회상하여 담담한 어조로 들려주는' 식이다. 문제는 그 전문 분야가 '''테러''' 라는 남다른 영역이라는 거지만(...) 예를 들어, 과거 자신이 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자주 거론하는(그리고 실제로도 시게노부 후사코의 행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벤구리온 작전' 같은 경우, 특별히 정당성을 주장하며 옹호하고 변명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잘못한 일이라고 반성도 하지 않고 그저 '내가 젊었던 때 했던 사업이나 프로젝트 중에서 제일 크고 중요한 일' 정도로 담담하게 서술하는데... 위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이건 정확히 말하면 '벤구리온 공항 습격사건', 또는 '벤구리온 공항 총기난사 사건' 이다. 사상자가 무려 세자릿수로 나왔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젊은 시절의 시게노부 후사코의 외모를 묘사할 때 꼭 들어가는 서술이 '긴 머리에 미인형'이다.[4]
또 덤으로, 시게노부 후사코의 아버지는 극좌가 된 딸과는 정 반대로 극우였다고 한다. 시골에서 작은 서당을 운영할 때 가르쳤던 제자 중에서 2.26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된 인물이 있어서 제자의 유고를 읽으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인 적도 있다고 할 정도. 다만, 나름 지조와 사상이 있는 신념형 극우였는지, 전후 혼란기에 먹고 살기 위해 식료품점(구멍가게)를 열었을 때 주변에 사는 재일 한국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공정하게 대했고, 이 덕분에 가게에 야쿠자가 쳐들어와서 돈을 뜯어내려고 행패를 부릴 때 주변에 살던 재일 조선인들이 도와주러 몰려와서 야쿠자를 쫒아내주었다고 한다.[5] 뿐만 아니라 자식들이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재일 한국인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절대로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는 일화도 있고, 시게노부 후사코 역시 자신의 책에서 이런 아버지가 몹시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했다. [6]
또 이외에도, 정치활동(과격파 학생운동)에 투신한 딸을 무척 깊게 이해해주는 편이어서 지나친 과격노선으로 치닫는 적군파의 활동 내용을 보고 '혁명이란 일살다생(一煞多生: 한 사람을 죽여 많은 사람을 살린다)이어야 하는데, 그런 과격노선으로는 일살일생(一煞一生: 한 사람을 죽여 한 사람을 살린다) 밖에 할 수 없다'고 타일렀다거나, 중동으로 출국하려는 딸이 무엇을 할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할 거라면 어중간하게 하지 말고 끝까지 하라'고 격려했다거나, 딸이 출국한 이후 인편을 통해 '대의란 불효와 같아서 육친을 죽인다'는 시를 전해주게 했다고 한다. 분명히 딸을 잘 이해해주는 좋은 아버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건 좀 말리는 게 낫지 않으냐 싶기도 하고, 아주 나빠서 상종 못 할 인간으로는 안 보이지만 그렇다고 긍정하기는 도저히 힘든 다소 미묘한 인물이었던 듯.
다른 여담으로, 시게노부 후사코의 아버지는 작은 서당까지 운영한 지식인으로써 그 지역 사회에서는 (가난하기는 했어도) 상당한 유지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영향으로 학생운동에 투신하기 전 시절부터 지역 출신 국회의원의 아들[7] 과 약혼 이야기가 오고 갈 정도였다고 한다. 상대측 역시 시게노부 후사코의 성격이 정치인의 부인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상당히 호의적인 반응이었다고.[8] 하지만 시게노부 후사코 본인은 자신이 학생운동에 투신한 뒤 '어차피 일본에 혁명이 일어날 리는 없고, 너는 결국 운동을 포기하고 내 품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상대 남자의 태도가 대단히 재수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9] 이후, 운동권 동료들과 함께 식사하고 차까지 마신 뒤 주머니를 털어보자 돈이 모자라서(...) 모두들 지인들에게 돈 좀 빌려달라고 전화를 하는 와중에 국회의원 아들이니 돈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전화를 걸었고, 마음에 둔 여자가 밥값 좀 내 달라고 하자 얼른 달려온 남자는 운동권 학생들이 모여 있는 모습에 빡쳐서 '이 돈은 너희 같은 좌익들에게 기부하기는 아까운 돈이다. 시게노부씨가 책임지고 갚아주었으면 좋겠다' 라고 나름 뼈있는 한마디를 남기고 음식값을 대신 내 주었다고 한다[10] . 물론 .시게노부 후사코는 이 돈을 갚지 않았고(...) 관계는 이후 끊어졌다고.
(1945년 9월 28일 ~ )
1. 개요
적군파의 여제.
적군파의 한 분파인 일본적군(JRA)의 수장이었다.
2. 생애
도쿄 세타가야구에서 태어났다. 여상을 졸업하고 공장에서 1년 근무하다가 1965년 메이지대학 야간부에 입학했다. 합격통보를 받고 등록금을 내러 가다가 등록금 시위를 하던 학생들을 만났고, 한 시위대원이 함께 앉아 항의하지 않겠냐고 권유했고 이에 후사코는 '''자연스럽게''' 이 시위대에 합류했다.[1] 그러다가 운동권에 합류를 하게 되었다.
경찰의 추적과 감시, 조직원들의 체포로 일본 내에서 적군파의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조직이 와해된 상황에서 시게노부 후사코를 비롯한 일부 간부들이 국제혁명근거지론(소위 P전략)에 따라 레바논을 통해 중동에 잠입하여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PFLP)와 연계, 일본 적군을 결성했고, 아사마 산장 사건을 일으킨 것은 모리 츠네오를 중심으로 하여 아직 체포되지 않았던 일본 내 잔류 세력이었다[2] . 즉, 아사마 산장 사건이 일어날 당시 시게노부 후사코는 이미 팔레스타인에 잠입하여 PFLP와 합류한 상태였다. 시게노부 후사코 본인은 아사마 산장 사건의 발생을 언론과 소식통을 통해 알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일본 내 잔류세력이 정부를 상대로 무장항쟁을 시작한 것으로 생각하고 크게 기뻐하였으나, 경찰의 추격으로 궁지에 몰린 적군파가 잔혹한 내부 숙청을 거쳐 자포자기 상태에서 농성을 벌였다는 실상을 알게 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자서전에 기록한 바 있다. 특히, 아사마 산장에서 농성하기 직전 린치 살해된 십여명의 동료들 중에 일본에 있던 당시부터 친하게 지냈던 사람도 포함되어 있어서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과 연대해 벤 구리온 국제공항을 습격하고 기타 여러 테러 활동을 벌인다. 1975년 국제테러리스트로 수배가 되었을 정도.
일본을 드나들다가 2000년 말에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되었고 감옥에 들어가면서 일본적군의 해산을 선언했다. 테러 혐의로 징역 20년 선고를 받았고 복역중이다[3] . 지금은 출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image]
참고로 딸이 하나 있는데,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딸이 굉장히 서구적인 이목구비의 혼혈이기에 아버지가 일본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름은 시게노부 메이. 레바논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따고 현재 일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중동 관련 보도를 주로 다루고 있다고 한다.
한 국내 언론사에서 복역중인 시게노부 후사코의 인터뷰를 따낸 적이 있다. 링크
해당 인터뷰나 자서전격인 저서 '사과나무 밑에서 너를 낳으려 했다'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대체로 옳은 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고, 상당히 반성적인 인물로 보이는 면모도 있으나... 사실 그냥 사회운동가도 아니고, 국제수배된 테러리스트라는 걸 생각하고 읽으면 어조가 너무 담담하다. 뭐 어쨌건 그래도 일본 적군파 간부 출신으로써는 개중 가장 반성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일본 적군파에 또라이가 좀 많은게 아니라...)
3. 저서
저서로는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가 있다. 이 저서에서도 위의 서술과 비슷한 특징이 드러나는데, 기본적으로 억지스러운 자기옹호나 미화, 정당화 및 합리화를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대해 반성하는 것도 아니다. 내용 구성이 딱 '남편 없이 혼자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동시에 자신의 분야에서도 성공한 여성 사업가나 전문직 종사자가 유일한 가족인 딸, 또는 딸 또래의 젊은 세대에게 자신의 인생과 자신이 해왔던 일을 회상하여 담담한 어조로 들려주는' 식이다. 문제는 그 전문 분야가 '''테러''' 라는 남다른 영역이라는 거지만(...) 예를 들어, 과거 자신이 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자주 거론하는(그리고 실제로도 시게노부 후사코의 행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벤구리온 작전' 같은 경우, 특별히 정당성을 주장하며 옹호하고 변명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잘못한 일이라고 반성도 하지 않고 그저 '내가 젊었던 때 했던 사업이나 프로젝트 중에서 제일 크고 중요한 일' 정도로 담담하게 서술하는데... 위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이건 정확히 말하면 '벤구리온 공항 습격사건', 또는 '벤구리온 공항 총기난사 사건' 이다. 사상자가 무려 세자릿수로 나왔다.(...)
4. 여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젊은 시절의 시게노부 후사코의 외모를 묘사할 때 꼭 들어가는 서술이 '긴 머리에 미인형'이다.[4]
또 덤으로, 시게노부 후사코의 아버지는 극좌가 된 딸과는 정 반대로 극우였다고 한다. 시골에서 작은 서당을 운영할 때 가르쳤던 제자 중에서 2.26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된 인물이 있어서 제자의 유고를 읽으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인 적도 있다고 할 정도. 다만, 나름 지조와 사상이 있는 신념형 극우였는지, 전후 혼란기에 먹고 살기 위해 식료품점(구멍가게)를 열었을 때 주변에 사는 재일 한국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공정하게 대했고, 이 덕분에 가게에 야쿠자가 쳐들어와서 돈을 뜯어내려고 행패를 부릴 때 주변에 살던 재일 조선인들이 도와주러 몰려와서 야쿠자를 쫒아내주었다고 한다.[5] 뿐만 아니라 자식들이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재일 한국인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절대로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는 일화도 있고, 시게노부 후사코 역시 자신의 책에서 이런 아버지가 몹시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했다. [6]
또 이외에도, 정치활동(과격파 학생운동)에 투신한 딸을 무척 깊게 이해해주는 편이어서 지나친 과격노선으로 치닫는 적군파의 활동 내용을 보고 '혁명이란 일살다생(一煞多生: 한 사람을 죽여 많은 사람을 살린다)이어야 하는데, 그런 과격노선으로는 일살일생(一煞一生: 한 사람을 죽여 한 사람을 살린다) 밖에 할 수 없다'고 타일렀다거나, 중동으로 출국하려는 딸이 무엇을 할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할 거라면 어중간하게 하지 말고 끝까지 하라'고 격려했다거나, 딸이 출국한 이후 인편을 통해 '대의란 불효와 같아서 육친을 죽인다'는 시를 전해주게 했다고 한다. 분명히 딸을 잘 이해해주는 좋은 아버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건 좀 말리는 게 낫지 않으냐 싶기도 하고, 아주 나빠서 상종 못 할 인간으로는 안 보이지만 그렇다고 긍정하기는 도저히 힘든 다소 미묘한 인물이었던 듯.
다른 여담으로, 시게노부 후사코의 아버지는 작은 서당까지 운영한 지식인으로써 그 지역 사회에서는 (가난하기는 했어도) 상당한 유지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영향으로 학생운동에 투신하기 전 시절부터 지역 출신 국회의원의 아들[7] 과 약혼 이야기가 오고 갈 정도였다고 한다. 상대측 역시 시게노부 후사코의 성격이 정치인의 부인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상당히 호의적인 반응이었다고.[8] 하지만 시게노부 후사코 본인은 자신이 학생운동에 투신한 뒤 '어차피 일본에 혁명이 일어날 리는 없고, 너는 결국 운동을 포기하고 내 품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상대 남자의 태도가 대단히 재수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9] 이후, 운동권 동료들과 함께 식사하고 차까지 마신 뒤 주머니를 털어보자 돈이 모자라서(...) 모두들 지인들에게 돈 좀 빌려달라고 전화를 하는 와중에 국회의원 아들이니 돈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전화를 걸었고, 마음에 둔 여자가 밥값 좀 내 달라고 하자 얼른 달려온 남자는 운동권 학생들이 모여 있는 모습에 빡쳐서 '이 돈은 너희 같은 좌익들에게 기부하기는 아까운 돈이다. 시게노부씨가 책임지고 갚아주었으면 좋겠다' 라고 나름 뼈있는 한마디를 남기고 음식값을 대신 내 주었다고 한다[10] . 물론 .시게노부 후사코는 이 돈을 갚지 않았고(...) 관계는 이후 끊어졌다고.
[1] 당시 일본은 학생운동이 강성한 시기였고, 한국의 80~90년대처럼 일반 학생이 운동권에 합류하기 쉬운 시기였다.[2] 여담이지만, 일본 국내에 잔류했던 적군파 세력은 아사마 산장 세력으로 완전히 붕괴되었고, 요도호 사건으로 북한(...)으로 향한 인물들 역시 처참한 결말을 맞았다. 이 점에서 보면 일본 적군 중에서 그나마 덜 바보같은 길을 선택한 것이 팔레스타인으로 향한 시게노부 후사코 일파였던 것.(최소한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에는 명분이 있고, 북한으로 간 적군파 간부들이 북한 정권에 의해 철저히 감시당하면서 이용당한 것에 비하면 팔레스타인에서는 동지로써 존중받으면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3] 단, 본인이 자서전에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체포 당시 사실상 자수하기 위해 일본에 입국하였으며, 중동 정세(더 나아가 세계 정세)의 변화로 의지할 수 있는 세력이 거의 없어진 상황에서 무국적 상태였던 딸에게 안정적인 신분(일본 국적)을 보장해주려는 것이 자수의 이유였다고 한다.[4] 젊은시절 사진을 보면 상당히 수수하고 소박하게 생겼다. 링크 쇼와 시대의 느낌이 나는 미인인 듯하다. 사실 '긴 머리에 미인형' 이라는 수식어는 70년대 일본에서 시게노부 후사코가 남긴 일종의 비쥬얼적 충격을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호의적으로 보면 나름 예쁘장하다고 할 만한, 수수하고 소박한 젊은 아가씨의 외모와 극좌 테러리스트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행적 사이에서 나타나는 강렬한 괴리감이 사람들에게 큰 문화적 충격을 안겨준 것. 말하자면 <참하고 얌전한 옆집 아가씨가 알고보니 극좌 과격파 조직의 최고 간부 중 하나로 해외에서 테러활동을 주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듯한 충격과 괴리감을 안겨준 것. 차라리 강인하고 거칠어보이는 인상이었다거나, 미인이라도 좀 더 반항적이거나 기가 세 보이는, 하다못해 화려한 느낌이기라도 했다면 외모로 인한 충격은 덜했을 것이다. 굳이 긴 머리가 자주 거론되는 것 역시, 별다른 장식이나 모양을 내지 않고 그저 단정하게 빗어내린 긴 머리가 얌전한 여성성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져 더욱 생경하게 여겨진 것. 사실 외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시게노부 후사코의 인생사 자체가 조금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정에서 여러 형제자매중 하나로 태어나 성실하게 공부와 집안일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회사에 취업하여 집안을 도우면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야간대학에도 진학하는 등 얌전하고 성실한 젊은이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역시 일본 학생운동의 전성기와 그 뒤를 이어 찾아온 불량문화의 전성기에 흔히 받아들여졌던 '시끄럽고 위험한 젊은이의 전형'과는 전혀 달랐던 것.[5] 당시 일본 극우는 사상적으로 좀 복잡한 경우가 많아서, 내선일체나 아시아주의를 진짜로 믿고 실현하고자 하는 부류도 많았고, '''"정말로 조선과 일본이 하나가 되려면 차별해서는 안된다"'''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다수였다. 아시아주의 항목 참조. 심지어 기타 잇키같은 경우는 조선을 완전히 일본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 "반도에서 도군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6] 사실 자세히 따지고 보면 일본의 극좌파나, 극우파나 기원은 미완의 혁명으로서 메이지 유신이 본질적인 불평등, 농촌 공동체 해체 같은 현실적인 사회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다는 점에 절망하며 1890-20년대 각종 서구발 근대 사상을 흡수해가며 과격화된 일종의 '운동가 전통'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보면 놀라운점은 아니다. 이 전 세대인 전쟁전 쇼와, 다이쇼시대만 하더라도 상술된 기타 잇키 처럼 본인은 극우파이지만 같은 운동가 문화를 공유하다보니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지인, 친구들도 있던 경우도 흔했다.[7] 2세 의원 전통이 강한 일본에서 당연히 그 지역구를 물려받을 후계자로 여겨졌다.[8] 적군파의 주요 간부 중 하나가 된 것을 보더라도, 상당히 리더십과 과단성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9] 한편, 시게노부 후사코의 아버지 역시 이 혼담을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상대 남자를 상당히 탐탁치않게 여겼다고 한다.(일단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도 상당한 집안과의 혼담, 즉 흔히 말하는 좋은 혼담인데다 상대편 집안이 훨씬 가세가 좋은데도 호의적으로 나오니 혼담 자체는 잘 되면 그대로 진행되어도 좋다고 보고 반대하지 않았지만, 사윗감 자체는 썩 탐탁치 않게 여기는 정도의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젊은 사람답지 않게 너무 건방지고 오만해서. 예를 들어 젊은이가 연하장을 보내면서 직접 손으로 써서 보내지 않고 인쇄된 연하장에 이름정도만 써서 보내는 모습등이 나이에 비해 오만해 보였다고 한다. 시게노부 후사코 본인과 아버지의 평가가 일치한 점으로 볼 때, 성격적으로는 확실히 좀 오만한 면이 있었던 인물로 추정된다.[10] 아마도 시게노부 후사코가 자기 밥값을 내 달라고 한 것이었으면 그냥 자기가 냈다고 생각하지, 갚으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