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잇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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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사상가이며, 일본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든 파천황적 사고를 지닌 인물이었다.'''마왕(魔王)'''[1]
과거 기타 잇키에 대해 연구했던 사학자 마츠모토 겐이치는 그를 '''혁명적 낭만주의자'''로 평가하기도 했는데, 반대로 자기애가 강한 유아론자 정도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사상이 워낙 복잡했던 만큼 평가도 사람에 따라서 갈린다고 봐야 한다.
2. 생애
본명은 기타 데루지로[2] (北 輝次郎), 메이지 16년(1883년) 4월 3일 니가타현 사도군[3] 료츠 미나토(현재는 사도시 료츠 미나토이다.)의 양조업자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보다시피 그는 가업도 있을 뿐더러 부친이 정장까지 지낸 지역 유지였는데 이러한 배경 때문인지 주변 지역의 호족 출신들이 상당수 참여한 자유민권운동에 기타의 부친과 숙부 역시 소속되어 어린 기타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1897년이 되자 데루지로는 중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월반하여 3학년이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눈병에 걸려서 입원을 했고 이후 학업이 부진하여 낙제한 뒤 설상가상으로 가업까지 기울어 결국 퇴학을 당하게 된다. 참고로 이때 얻은 눈병으로 기타 잇키는 오른쪽 눈을 적출했고, 평생 의안을 사용해야만 했다.
1901년에는 눈을 치료하기 위해 상경하게 됐는데, 이 때 고토쿠 슈스이 와 사카이 토시히코의 평민사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며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라는 존재를 부정했던 아나키즘적 사회주의자 코토쿠와는 다르게 기타 잇키는 국가와 국민을 전제로 하는 사회주의를 구상하게 된다. 이후 그는 신문에 러일전쟁 찬성론과 국체론 비판처럼 여러 논문을 발표했고, "국민 대 천황의 역사적 관찰"이라는 논문에서 그만 "천황은 국민의 가까운 가족 같은 존재다"라는 내용을 서술하는 바람에 불경죄로 연재를 중단당하고 만다.
이후 남동생이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자 같은 대학 정치 경제 학부에 입학하여 독학으로 사회 과학 연구를 진행했고, 1906년에는 첫 단행본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를 간행하게 된다. 참고로이 책은 발간한 지 5일이 되던 날 금서로 지정되었고 이에 기타는 요시찰인으로 낙인이 찍혀서 일본 경찰로부터 감시를 받기 시작한다. 그렇게 책이 금서로 지정되자, 기타는 이런 방식으로는 일본 개혁을 이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국제 개혁을 통한 국내 개혁을 주장했던 미야자키 토텐과 같은 대륙낭인들과 합류하여 중국 동맹회에 입당하고 곧바로 신해혁명에 투신한다. 이때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쑹자오런 등과 교류하며 흑룡회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특파원 신분으로 흑룡회의 지원을 받았다.
1913년이 되자 친구였던 쑹자오런이 상해 철도 역에서 암살된다. 정황을 놓고 보면 위안스카이가 범인이 확실했지만 기타는 쑨원이 범인인 편이 여러모로 좋다고 생각하여 여론을 그에 맞춰 선동하기 위해 신문에 쑨원을 암살 사주범으로 지목하는 기사를 썼다. 그러나 당시 대륙낭인들 중 쑹자오런 지지자는 기타 데루지로 혼자 뿐이었고, 미야자키와 우치다를 비롯한 주류파는 쑨원 지지자였기 때문에 기타는 그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결국 상해 총영사에게 귀국 명령을 받고 귀국하게 된 기타 데루지로는 『지나혁명외사』를 저술하여 신해혁명의 좌절을 기록했는데, 여기서 일본이 21개조 요구를 한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신해혁명의 성공과 쇠락이 모두 위안스카이의 관군 동참 여부에 달렸음을 확인하고, 혁명 성공을 위해 "혁명에 동조하는 관군"의 존재가 필수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1916년 다시 중국에 건너가 이 때부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름인 "기타 잇키"를 자칭하기 시작했다. 이후 상해 북쪽의 일본인 병원에 취직해 그 곳에서 지내다가 1920년이 되자 상해를 방문한 오카와 슈메이 등에게 귀국을 권유받아 같은 해 12월 31일에 일본으로 귀국했다.
귀국한 기타 잇키는 1921년 오카와 슈메이가 세운 유존사에 합류하여 국가 개조 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유존사는 정확히 2년 뒤인 1923년에 해산을 당하고 기타 잇키와 오카와 슈메이는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져 원수 지간까지 되어 버린다.[4] 기타는 『일본개조법안대강』을 발간, 의회를 통한 변혁에 한계가 뚜렷하니 군사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당연히 금서 처분을 당했지만 쇼와 유신을 추종하던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 이러한 기타 잇키의 주장은 큰 반향을 일으킨다.
1920년 이후부터 기타는 우익 청년 장교들이나 우익 폭력배들에게 간접적이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21년에 일어난 아사히 헤이고의 야스다 재벌 총수 야스다 젠지로 암살사건이다.[5] 아사히는 기타와 일면식도 없었지만 기타 앞으로 보내는 유언장을 썼다. 그러자 기타는 이런 유형의 테러를 당하고 싶지 않으면 정보료 명목으로 돈을 내놓을 것을 재벌들에게 요구했고, 이 공갈행위로 기타는 커다란 저택에 살면서 처와 자식 3명과 하녀 3명, 운전수 1명을 모두 먹여살릴 수 있는 여력을 갖추게 된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고 조선인 학살이 벌어지자 박열이 기타를 찾아 와 의탁을 청했다. 하지만 상술한 것과 같이 일본 경찰의 사찰을 받고 있던 기타로서는 박열을 돌보아 줄 상황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기타는 박열에게 노잣돈을 주어주고 그를 돌려보냈다. 그렇게 박열은 기타의 집을 나와 불령사 본부로 돌아가는 길에 그만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그 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히로히토 황태자를 암살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기소되는 이른바 박열 대역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예심판사 다테마스 가이세이는 박열을 회유하기 위해 여러가지 무리한 박열의 요구들을 들어 주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고향의 모친에게 보여드리기 위한 웨딩 사진 촬영이었다. 기타는 이 사진을 어떻게 입수했는지는 몰라도 이것을 여러 신문사들에 뿌리고 다녔다. 박열과 후미코의 사진은 묘한 포즈[6] 때문에 소위 "괴 사진"이라고 불렸다. 어떻게 죄인에게 이런 특혜를 줄 수 있냐고 여론이 폭발하여 결국 다테마스 예심판사는 해임되고 제1차 와카츠키 내각은 사퇴했다.
1926년에는 제자이자 하수인이었던 니시다 미츠기[7] 가 찌라시를 살포해 궁내성 괴문서 사건을 일으켰고, 기타는 그와 함께 체포 당해 1년 동안 수감된다. 사실 기타는 예전부터 여러 차례 막후에서 찌라시를 살포하여 정국을 흔들었다. 예컨대 1918년에는 외가가 사쓰마 번 출신인 구니노미야 나가코가 히로히토 황태자의 비로 내정되었을 때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조슈 번이 반대하고 나섰는데, 기타는 나가코를 지지하는 찌라시를 살포해서 야마가타의 정치 생명을 골로 보내 버렸다. 이런 짓을 막후에서 오랫동안 해오다가 박열 사건으로 기타의 이름이 양지에 드러나게 되었다.[8]
1930년 이후부터 일본이 국가 총 동원 체제로 전환 되자 기타는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일련종)에 침잠한다. 자기 이름과 얼굴이 드러난 상황에서 찌라시 살포 같은 모험을 하기에는 시국이 너무 엄혹했다. 그렇게 기타는 자택에서 법화경 낭송으로 세월을 보낸다. 1936년이 되자, 기타 잇키의 영향을 받은 또는 받았다고 착각한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것이 2.26 사건이다. 당시 기타는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사상의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당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타 잇키는 쿠데타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군에게 책임이 돌아갈 것을 우려한 군부가 "군 외부의 불순분자" 기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여담이지만 기타는 당시 중일전쟁을 막아보겠다고 중국으로 건너갈 준비에 한참이었고, 쿠데타 당일에야 거사를 전달 받았기 때문에 쿠데타 계획과 실행에 연관이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었다.
재판관은 기타가 무죄이며 죄가 있다고 해도 방조죄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군부의 압력을 받은 다른 판사들이 기타를 반란 수괴라고 몰아가 끝내 그것을 관철시켰다. 군 상층부에서는 기타와 니시다에게 모든 죄를 씌우고 처형한다는 방침이 확고했다. 따라서 군부가 무엇을 덮기 위해 이런 무리수를 두었는지, 또 2.26 사건이 정말 청년 장교들의 혈기만으로 일어난 사건인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9] 그래서 기타는 법정 투쟁을 벌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었지만, 청년 장교들이 먼저 총살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법정 투쟁을 포기하고 사형 구형을 자처한다.[10] 결국 1937년 8월 14일 니시다와 함께 총살형이 선고되었고 5일 후인 8월 19일 형이 집행되었다.
함께 총살된 니시다가 "천황 폐하 만세 삼창을 부를까요?"라고 묻자 기타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세구를 남겼다.
이라며 히로히토 천황을 도련님이라고 냉소하며 죽어갔다. 향년 54세였다.若殿に兜取られて負け戦
3. 사상과 이념
나는 명백하게 주장한다. 나는 사회주의를 주장한다. 나에게 사회주의는 모든 것이다. 거의 종교이다. (중략) 하지만 동시에 나는 명백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사회주의를 주장하기 때문에 제국주의를 버릴 수가 없다. 아니, 나는 사회주의를 위해 단연코 제국주의를 주장한다.
우선 기타 잇키는 분명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로 표상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기타는 오히려 플라톤의 사회 조직론이 더 우수하다고 생각했고, 맹자를 동방의 플라톤으로 지칭했다. 이러한 것을 보면 기타 잇키의 사상은 전반적으로 독일 보수 혁명론자들이 주장한 사회주의와 유사하다. 또한 그는 사회진화론자였는데, 주체는 "소아"(개인)에서 "대아"(국민)로, 그리고 대아를 넘어 "무아"(국제)로 나아간다고 했다. 그래서 그를 "제국주의적 사회주의자"라고도 한다.사회주의 세상에는 사형에 의한 도태가 없고, 완력에 의한 도태, 경제상의 경쟁에 의한 도태가 없고, 국가간, 인종간의 전쟁에 의한 도태가 없다.
社会主義の世においては死刑による淘汰なく、腕力による淘汰、経済上の競争による淘汰なく、国家間、人種間の戦争による淘汰なし。
-- 기타 잇키,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
그의 일본 정치에 관한 구상은 1923년 발간한 『일본개조법안대강』에서 완성된다. 기타는 "단일한 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사회주의의 이상이 강제되는 전체주의를 도입하고자 했다. 메이지 유신 이래로 일본 곳곳에 포진한 재벌과 제국주의로 표변한 입헌정치인, 그리고 화족으로 대표되는 수구 보수 세력을 일거에 뿌리 뽑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타 자신이 그런 "강력한 지도자"가 되려고 한 것은 아니다. 기타는 천황이 일본 사회에서 누리는 특수한 지위, 그러니까 신적인 존재로서 무한한 권위는 가지고 있으나 실권은 그렇지 않은 존재라는 점에 착안해 천황을 바로 그 역할을 맡을 존재로 낙점했다.
쉽게 풀이하면 일단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천황을 확보하고, 천황의 권위를 이용해 메이지 헌법을 중지시킨다. 그런 다음 유산 보수 정당들을 쓸어버리고 민중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할 정당들로 의회를 조직한다. 그렇게 조직된 의회는 전략 산업을 국유화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천황과 국민 사이를 막고 있는 화족과 궁내성 귀족원 같은 장애물은 모두 뽑아 버리고, 고문원으로 그 자리를 대신한다. 고문원의 고문은 천황을 알현할 수 있는 존재이며 명망이 있는 지도자들로 선출한다.[11] 보통선거권을 실시하고 귀족원을 폐지해 심의원으로 대체하며 사유제한을 제한하고 8시간 노동제와 남녀동일노동 동일임금같은 사회주의적 정책을 실시한다. 그리고 이런 내부 개혁으로 강력해진 일본이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 아시아를 해방시킨다.
는 것이 기타 잇키가 그린 그림이었고 이것을 "국가 개조론"이라고 한다. 이 계획은 언뜻 보기에는 천황에게 초월적인 권력을 부여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 보면 그렇지도 않다. 의회와 고문원을 통해 민중의 의사를 크게 키우고, 천황은 그 민의를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천황이라는 그릇의 권위를 이용해 민중의 뜻을 아래로 하달하며 강제한다.[12]
'''즉 기타 잇키에게 천황이란 자신의 혁명을 위한 도구, 그릇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던 것이다. 천황이 현인신이라는 사고에 의해 국체가 존립되던 전쟁 전 일본에서 말이다.'''
한편 조선에 대한 의견도 밝힌 바 있는데, 그는 조선을 독립시켜 야 한다는 의지는 없었다. 다만 조선인에게도 일본인과 평등한 참정권을 주어 동등한 국민으로 대우하여 흡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3] 사회 진화론자였던 기타 입장에서 조선의 멸망은 조선 지배 계층의 무능으로 인한 것이라 동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민족 차별을 계속한다면 서세동점에 맞서 동양을 해방시켜야 하는 일본의 당위성을 해치게 된다. 그러니 조선인을 핍박해서는 안 되고 "일본인"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해줘야 한다는 것이다.[14] 이미 독립한 후대의 한국인이 볼 때는 기타 잇키의 생각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전후에도 식민지 시절과 다를 것 없는 차별을 받으며 살았던 재일 조선인 사이에서는 "그 양반이 일본 정권을 잡았더라면..." 식으로 기타를 평가해 주는 의견이 없지 않아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기타는 일본어를 폐지하고 에스페란토를 일본 제국의 공용어로 할 것을 제안하였다.[15] 그는 에스페란토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바라봤으며, 미래에는 세계 공용어가 될 에스페란토를 일본도 하루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100년 후[16] 일본 제국과 그 부속 식민지들의 언어는 에스페란토가 될 것이었다.
4. 평가
사회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심지어 일련종의 종교적 색채까지 섞인 기타 잇키의 사상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의 영향을 받아 궐기를 통해 국가 개조를 강행하고자 했던 2.26 사건의 청년 장교들도, 제자이자 하수인이었던 니시다 미츠기도 실상을 보면 알겠지만 기타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천황에 대한 관점이 대표적인 예로, 기타에게 천황은 도구에 불과했지만 청년 장교들에게 천황의 존재는 국가 기관이나 도구가 아닌 선한 신이었고, 궐기 이후에도 순진하게 천황의 대어심을 기다리며 충성을 바쳤다. 어찌 보면 그래서 그들의 혁명은 실패했다.[17]벗이여, 혁명의 이름에 전율하는가?
그것은 계집애나 할 짓이라네
양심은 어떠한 상전과도 더불어 살 수 없으니
자본가도
지주도
차르도
카이저도
그리고 '''・・・・''' (말할 필요도 없다 言ふぺからず)
영하일섬, 가슴에서 가슴에
죄악의 세상을 뒤집는
지진과 같이
대장부 이렇게 이 세상에 살리라
-- 기타 잇키, 「혁명의 노래(革命の歌)」
이렇듯 자신의 추종자들과 달리 기타는 천황을 몹시 증오했다. 국회의원 친구가 관직에 출사할 것을 권하자 "'''천황 따위 시끄러운 놈'''이 있는 세상에서는 벼슬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할 정도였다. 그의 천황에 대한 증오는 다른 사회주의자들이나 후세 다쓰지 같은 민권주의자의 천황제 반대와는 사뭇 다른 감정적인 무언가였다. 민중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거짓된 국체 위에 아무런 비전도 없이 군림하고 있는 천황에 대한 질투가 개입되어 있었다. 어쩌면 천황이 가지고 있는 그 위치에 정말로 어울리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18] 최후까지 그는 천황을 도련님이라고 냉소하며 죽었다.
기타는 천황제와 메이지 헌법, 그리고 천황 주권론에 대한 혹독한 비판자였다. 메이지 유신으로 성립된 근대 일본은 "천황의 일본"이었고, 일본 국민들도 "천황의 국민"이 되어 있었다. 기타가 보기에 이것은 제대로 된 근대화는 커녕 "토인 부락"에 지나지 않는 미개한 것이었다.] 그래서 기타는 "천황의 일본", "천황의 국민"을 뒤집어 "일본의 천황", "국민의 천황"으로 만들려 했다. 즉, 천황을 국민을 위한 도구로 만들겠다는 소리였는데 제국 시절 일본인이 천황에 대해 이런 생각을 품는다는 것은 파격 그 이상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일본 국민"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사상과 시대가 서세동점의 제국주의 침탈에 맞서기 위한 대응책이었기 때문에 기인하는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서양을 닮고자 했던 입헌 리버럴[19] 은 서양이 그랬듯 제국주의 국가로 일본을 몰고 갔다. 기타는 아시아주의의 이상을 믿었고 그의 정견의 최종 숙원은 내실을 다진 일본이 아시아를 서양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타는 "국제적 프롤레타리아"인 일본이 "국제적 자본가" 영국에게서 호주를, "국제적 지주" 러시아에게서 시베리아를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을 가졌던 것 같다. 쑹자오런을 죽인 것이 위안스카이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쑨원을 배후로 지목했고, 가네코 후미코가 죽자 관장사까지 했다. 박열과의 관계나,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동등한 공민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보면 자기 가치관에서는 민족 차별에 반대한 것 같지만, 1926년 괴문서 사건에서 니시다가 관동 대학살을 조선인 폭동에 대한 정당한 행위라고 찌라시에 쓴 것을 교정하지 않았다. 니시다의 가치관이 어떠하건 간에 니시다를 통해 정국을 흔들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기타의 이런 면모를 마츠모토 켄이치는 "될 대로 되어라 주의"라고 했다.
이런 소소한 일화들이 아니더라도, 애초에 그의 정견과 구상부터가 천황 숭배를 미개의 습속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국민에게 사회주의적 이상을 강제하기 위해 천황 숭배를 이용한다는 마키아벨리즘의 극치였다. 여러모로 도덕 "따위" 초월해버린 것 같은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당대에 마왕이라고 불렸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 군국주의 정권에게도, 전후 보수 리버럴 정권에게도 터부시되었다. 이 불온한 혁명성 때문인지 전후 우익 뿐 아니라 신좌파 학생운동가들이 기타 잇키를 읽곤 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그는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상술한 2.26 사건의 경우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해당 사건을 우국 군인들의 결단으로 평가하며 우리도 궐기하여 나라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을 한 적이 있으며, 군관 학교 시절에는 황도파로서 2.26 사건에 가담했었던 간노 히로시 소령과 만난 적도 있었다. 또한 친분이 있다고 알려진 기시 노부스케는 기타 잇키의 사상에 매료된 사람이었고 기타 잇키는 국가 개조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인간 개조를 언급했던 것을 보면 매우 묘한 느낌이 든다.
만약 2.26 사건이 성공했더라면 그가 마왕에 비견되는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훗날의 도조 히데키를 대신해서 아돌프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와 함께 추축국의 지도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있기는 하다. 반대로 기타 잇기가 흑막 노릇을 좋아했던 걸 고려해 지도자보단 2인자로써 행동했을 거란 의견도 있다. 이는 황도파였던 야스히토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인데 사실 2.26 사건은 실패로 돌아갔으니 모두가 상상의 영역이다. [20]
5. 매체에서
일본 뉴 웨이브 영화의 주역이었던 요시다 요시시게의 계엄령에서 2.26 사건과 함께 중요하게 다뤄진다.
테즈카 오사무도 기타 잇키를 다룬 「잇키 만다라」라는 만화를 그렸다.
사학자 마츠모토 켄이치는 30년 동안 기타 잇키를 연구해서 1000 쪽 분량의 평전을 썼다. 읽다 보면 마츠모토 본인이 기타의 불온한 카리스마에 매료당해 버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준익의 영화 박열 후반부에 등장한다. 배우는 서동기이다. 아사히 신문사에 찾아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괴사진을 뿌린다. 기타라고 언급되지는 않고, 스탭 롤에 이름도 "누군가"라고만 되어 있다.[21] 대중에게는 맥락없이 파시스트라고만 알려진 인물이 주인공의 조력자였음을 설명하려면 여백이 부족해서 그냥 이렇게 적당히 때워버린 것 같다. 사실 기타와 박열의 유대 관계와 그 배경을 관객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면 키타가 단순한 파시스트가 아니었음을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데, 그러면 스포트 라이트가 박열이 아닌 기타에게 가는 꼴이 될 수 있으니 "박열 부부"의 전기 영화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들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 관동대지진 때 학살 당한 오스기 사카에는 오스기가 일본어로 번역한 크로포트킨 책의 역자 이름으로 스쳐 지나간다.
[1] 오카와 슈메이의 평가다.[2] 후술하겠지만, 사실 본명보다 더 유명한 기타 잇키라는 이름은 어디까지나 그가 중국으로 건너간 이후 자칭하게 된 이름에 불과하다.[3] 고대로부터 유배지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일본의 부속도서 중에선 가장 큰 축에 속한다. 한국의 제주도와 비슷한 입지와 역사적 배경이 있다.[4] 다만 훗날 기타 잇키가 처형 당하는 입장이 되자 오카와 슈메이는 이를 매우 슬퍼했고, 추억 보정인지는 몰라도 기타 잇키 사후에는 자신과의 불화가 자신의 철없음에서 기인하였다고 회고하며 기타 잇키를 높이 평가했다.[5] 도쿄대 야스다 강당이 바로 이 사람이 기부한 돈으로 세워진 것으로, 훗날 전공투가 점거했던 곳과 동일하다.[6] 후미코와 박열이 몸을 겹치고 앉아 있는데, 박열의 왼손이 후미코의 가슴 섶에 쑥 들어가 있다.[7]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의 육사 동기로 군인 출신이다. 늑막염으로 예편한 뒤 기타와 오카와 등의 영향을 받아 우익 운동가가 되었다. 군인 출신으로 육군 내 황도파 청년 장교와 재야 우익을 연결하는 "혁명 브로커" 역할을 했다. 흔히 2.26 청년 장교들이 기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오히려 니시다였다.[8] 이렇게 전면이 아닌 막후에서 배후 노릇을 하는 것이 그의 특기였기 때문에, 훗날 2.26 사건을 일으킨 청년 장교들도 5.15 사건으로 니시다가 총격당했을 때 니시다의 병상에서야 기타를 처음 만났다.[9] 적어도 황도파 고위 장령 중 누군가가 직접적인 지시 또는 간접적인 신호를 주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히로히토가 분노하여 본인이 친정하겠다는 의사를 표출하기 전까지 장령들은 반란군에게 동정적이었고, 애매하게 동참 의사를 표시한 자들도 많았다. 이 의견에 따르면 진짜 수괴는 기타 잇키가 아니라 황도파의 2인자 마사키 진자부로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니시다의 육사 동기이자 사실상 황도파 일원이었던 히로히토의 동생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의 이름이 이후 수사나 재판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은 점도 수상하다.[10] 청년 장교들에게 책임감을 느껴서 그랬다는 설도 있고, 목숨을 구걸하면 자신의 사상적 완결성이 무너지기 때문에 그랬다는 설도 있다.[11] 아시오 광독 사건의 다나카 쇼조를 떠오르게 하는 대목인데, 실제로 기타는 다나카를 꽤 존경했다고 한다.[12] 이는 천황을 상징으로만 남기고 우회해 의회민주주의를 정착시킨 현대 일본국 헌법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천황을 '이용'해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는 전체주의적 대목은 현대 일본국 헌법에도 없다.[13] 일본은 조선을 합병하고 패망할 때까지 "민도" 부족을 핑계로 조선에서 헌법을 실시하지 않았다. 조선 총독은 내각이 아니라 천황 직속이었기에 내각과 헌법으로부터 독립적이었다. 그래서 식민지 조선의 정치가 총독 마음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멀리 보면 이런 식으로 일본 '내지인'들은 식민지에서 실제로 자국 군대나 상관 같은 제국주의 첨병들이 무슨 만행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알지 못했고, 이런 무지가 현대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선 수용할 수 없는 식민지 근대화론 같은 이상한 소리들이 판치고 있는 것이다.[14] 비슷한 사상을 가진 이시와라 간지도 유사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시와라는 아예 조선을 독립시키자고 했던 점이 차이다.[15] 그와 사상적 교류를 하던 중국 대륙의 아나키스트들도 비슷한 제안을 한 적이 있다.[16] 즉 2030년 즈음이 된다.[17] 그래서 기타는 처형당한 청년 장교들을 동정하면서도 자신이었다면 황거를 습격해 천황의 신병부터 확보했을 것이라며 그들을 혹평했다.[18] 마츠모토 켄이치는 전전 일본에서 천황이 가지고 있던 위치를 "카리스마"였다고 규정했다. 막스 베버의 정의에 따르면 카리스마는 근대 사회에서 비논리적으로 공동체를 휘어잡는 존재, 즉 사이비종교의 교주 같은 무엇이다. 그래서 마츠모토의 기타 평전 부제가 "천황과 대결한 카리스마"인데, 기타가 "카리스마" 천황을 증오하고 자신이 카리스마가 되고자 했음을 의미한다.[19] 후쿠자와 유키치, 이토 히로부미, 무츠 무네미츠 등 번벌 정권과 이타가키 다이스케로 대표되는 자유 민권 운동 우파 세력이 융합하여 형성된 일본 제국 및 전후 일본의 지배 세력을 말한다.[20] 참고 삼아 언급해 보자면 기타는 본명인 데루지로를 놔두고 잇키라고 자칭할 만큼 중국의 영향을 받은 친중파였기에 웬만하면 중일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철저한 반영파이자 반러파였는데 엉뚱하게도 지미파면서 지불파였다.[21] 이름이 익명 처리된 것을 생각해 보면 기타가 아니라 기타의 하수인 노릇을 한 니시다일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