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읍
食邑
1. 개요
과거 중국, 한국, 베트남 등에서 공이 많은 신하에게 내리는 토지와 백성들. 식읍을 받은 신하는 본래 국가가 식읍에서 거둬야 하는 조세를 백성들로부터 대리하여 수취할 수 있고, 백성들의 노동력을 마음대로 징발할 수 있다.
식읍은 백성들의 가호 단위로 센다. 예를 들자면 식읍 50호.
한국사에서는 신라, 고려의 여러 공신 및 조선 초기까지 개국공신 위주로 식읍이 배분됐으나 세종 18년 때 완전히 철폐된다.
2. 녹읍과의 차이
녹읍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일종의 보너스 개념이다. 식읍과 녹읍의 차이는 녹읍은 직역(벼슬)의 대가(소위 나라의 녹을 받는다)로 받는 것이고 식읍은 벼슬을 하지 않아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세습이 인정되지 않는 녹읍(祿邑)과는 달리 자산으로 여겨져서 세습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김인문은 삼국통일전쟁 당시 식읍을 받았는데,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를 보면 무려 200여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김인문의 후손인 김흔(金昕)이 보령시에 대대로 물려받은 식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
온전히 그 소유권까지 주는 봉읍(封邑)[1] 과는 달리 식읍의 소유권은 원칙적으로 나라에게 속한다.
3. 특권
그 수가 많든 적든, 식읍을 받는 것은 대단한 영예이다. 단 100호의 식읍만 받아도, 100가구부터 세금을 받는 셈이니 물질적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었다. 게다가 화폐가 잘 발달하지 않거나 돈이 없는 가호에서는 노동력이나 군역으로 대신 부과할 수도 있으니 말 그대로 작은 마을의 왕이 되는 셈.
식읍이 대단한 건 옛날에는 인구가 현대처럼 특정 지역에 몰려사는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식읍 규모가 크면 거의 마을이나 심지어 도시 '''몇 개'''를 받았다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무왕이 장보고한테 식읍 2,000호를 내려줬다고 하는데, 한국으로 치면 거의 중견 도시 몇 개를 보너스로 받았다는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경순왕은 신라를 고려에 바친 대가로 태조에게 경주 전체를 식읍으로 받았다. 즉 신라의 소유권만 가져가고 자치권은 계속 보장한 것이다.
4. 유명 케이스
너무나 큰 특권이기에 삼국통일전쟁 때는 공을 세운 김유신, 박유(朴紐), 김인문 등 몇몇 인물에 각각 300~500호 정도를 내려줬다가 통일신라부터는 사실상 거의 폐지되었는데, 이후 몇백 년만에 장보고가 식읍 2천 호를 받았다. 그리고 견훤이 왕건한테 투항할 때 왕건이 양주를 견훤한테 식읍으로 지급했다. 경주를 식읍으로 받았던 경순왕의 예와 함께 이처럼 '''특정 지역 전체'''를 식읍으로 받는 케이스도 있다.
견훤이 받은 양주 식읍은 2019년 기준 양주시 + 의정부시 + 동두천시 + 구리시 + 남양주시 + 중랑구 + 노원구 + 강북구 + 도봉구 + 성동구 + 광진구 일대이다. 견훤이 받은 양주 식읍에 2019년 살고 있는 인구는 무려 400만 명.(...) 물론 나말여초에 한강 유역은 지금과 달리 행정구역 배분만 봐도 그리 인구가 많은 지역은 아니었다. 다만, 왕건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신라 경순왕과 달리 오랫동안 적대를 해왔던 견훤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견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견훤의 근거지인 후백제 부근이나 견훤의 고향 상주시가 아닌 고려의 수도 개성특별시 근처의 양주를 식읍으로 준 것이다.[2]
후기의 견훤도 후백제 왕을 자칭하기 전에 신라의 식읍 2천 호를 자칭했는데, 이건 신라 조정에서 인정한 건 아니고 그냥 자칭이다.
[1] 중국 고대 봉건제 시절에나 있던 것으로, 한국사에서는 실제로 시행된 적은 없다.[2] 양주는 지금의 경기도 일대이기 때문에 한성백제와 연관성이 있기에 그가 가진 백제의 정통성으로 인정해서 후백제를 동요시키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