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왕

 


'''시호'''
<white,#191919> '''신무대왕(神武大王)'''
'''관등'''
<white,#191919> 아찬(阿飡)
'''성씨'''
<white,#191919> 김(金)
''''''
<white,#191919> 우징(祐徵)
'''왕후'''
<white,#191919> 정계부인(貞繼夫人)[1]
'''왕태자'''
<white,#191919> 김경응(金慶膺)(839 ~ 즉위)
'''부왕'''
<white,#191919> 성덕대왕(成德大王) 김균정(金均貞)
'''모후'''
<white,#191919> 정교부인
'''묘지'''
<white,#191919> 제형산 서북쪽(弟兄山 西北)
'''생몰년도'''
<white,#191919> 음력
<white,#191919>?[2] ~ 839년 7월 23일
'''재위기간'''
<white,#191919> 음력
<white,#191919>839년 1월 24일 ~ 839년 7월 23일 (181일)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최후에 관한 이설
5. 기타
6. 미디어
7. 삼국사기 기록


1. 개요


신라의 제45대 국왕. 할아버지는 원성왕의 차남 김예영(金禮英), 아버지는 상대등을 지낸 김균정이다. 희강왕이나 민애왕처럼 원성왕의 증손자로 태종 무열왕 이래 나타난 신라 왕실복수귀.[3]
삼국유사 원문에서는 '신호왕(神虎王)'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삼국유사가 고려 시대에 작성됐으므로 고려 제2대 혜종의 휘인 무(武)를 피휘했기 때문이다. 문무왕을 '문호왕'으로 적은 것과 같은 케이스다. 즉 고려 시대가 아닌 원래 신라 때는 신무왕이 맞다.

2. 생애


헌덕왕 때 아버지 김균정시중에 임명되고 후삼국시대 이전 최대 규모의 반란이었던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자 아버지 김균정, 잡찬 김웅원과 함께 삼군을 이끌고 출진해 진압했다. 이러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828년 시중에 임명되었다. 흥덕왕 때인 834년 아버지 김균정이 상대등에 임명되자 부자가 동시에 재상이 될 수는 없다 하여 물러났고[4] 시중 자리는 김명(훗날 민애왕)이 이어받게 되었다.
김예영계의 자손이었던 그가 김인겸왕실에서 중용받았던 이유는 당시 김인겸계의 막장 왕위 계승에 어느 정도 원인이 있었다. 즉 김인겸계의 헌안왕의 왕위 계승은 비정상적이었고 그로 인해 위에서 언급된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원성왕계의 또 다른 축인 예영계가 인겸계에 반발을 하게 된다면 이는 김헌창의 난보다 더 크게 작용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김예영의 장남인 김헌정, 차남인 김균정 모두 시중에 오르고 병부를 책임질 정도로 막중한 직책에 오르게 되었다. 김균정의 아들이었던 그 역시 828년에 시중에 올랐으니 말 다 한 상황이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김헌정의 아들인 김제륭이 김인겸계와의 결탁을 통해 김인겸계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면서 균형이 깨지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흥덕왕은 김제륭과 김균정의 다툼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아우였던 김충공의 후임으로 김균정에게 상대등 지위를 내려주게 되는데 이는 오히려 더 파국을 부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으로 하여금 아버지 김균정의 왕위 계승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다.
결국 흥덕왕이 왕후 장화부인에 대한 일편단심으로 자식이 없이 죽자 사촌이자 당시 사실상 왕위 계승권자로 있었던 것이 유력한 김제륭(훗날 희강왕)과 김제륭을 지지하는 김명[5] 등이 아버지 김균정과 왕위 다툼을 하게 되었다. 사실 이는 왕위 계승권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김우징이 일으킨 것으로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겠다. 김균정은 먼저 적판궁(積板宮)에 들어갔으나 김제륭 세력의 궁중 기습을 받아 김균정은 살해당하고 자신과 김주원계의 김양은 겨우 도망쳐 청해진장보고에 의탁하였는데 김명 등에 복수하기 위해 장보고에게 군대를 빌리려 했고 그 와중에 사돈 약속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우징이 장보고에게 의탁하기 이전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던 828년 당시의 시중이 김우징이었는데 시중은 신라 정계의 실세였던만큼 김우징의 입김이나 영향력이 없이는 청해진 설치 같은 큰 정책이 결정되기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되어서 이 무렵에 이미 어느 정도 친분을 쌓았을 가능성은 있다.[6]
이후 희강왕이 일단 왕위에 올랐다가 김명이 또다시 희강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니 민애왕이다. 김우징은 청해진 소속 군대와 김주원 계인 김양의 도움을 받아 청해진(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수도 서라벌로 진격해 달벌대전 등 전투에서 정부군을 격파하고 결국 839년 1월 23일[7]에 수도 경주에 입성해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되어 종기로 승하하는 비운을 맞았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무왕이 복수한 시중 이홍(利弘)의 귀신이 신무왕을 에서 로 쏘아 을 맞추었는데 잠에서 깨어보니 등에 종기가 나있었고 결국 종기가 난 달 23일이 되어 승하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복수[8]도 이루었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지만 복수귀스런 인생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에 비해 왕답게 살아보지도 못한 채 허망하게 간 인물. 그리고 김우징은 사돈 약속을 지키려 했을지 아닐지 너무 빨리 죽어 알 수 없게 됐지만 뒤를 이은 문성왕이 장보고와의 사돈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장보고의 수명도 단축시킨 셈이 되었다.

3. 평가


복수귀이자 권력욕에 불타 올랐으나, 당시 정계의 혼탁한 상황을 일단 정리해서 통일신라의 수명을 50년은 늘린 임금이기도 하다.[9]
《삼국사기》의 경우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으나 장보고 열전의 사론 등에서 장보고에 대한 높은 평가[10]를 보면 사관들도 1년만에 죽었으나 꽤 긍정적으로 보았을 수는 있다.
반면 조선 왕조에서는 직접적으로 좋은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신무(神武)는 능히 적(賊)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의리를 알아서, 의리의 깃발을 한번 휘둘러 원악(元惡)의 목을 치고 혼란을 평정하여 정의를 다시 세우니, 인심이 통쾌하게 여겨서 신라의 나라 형세가 거의 위태로웠다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다만 동국통감의 평가는 위에서 소개했듯이 "악인을 물리치고 정의를 세워 후대에 좋은 왕들이 나올수 있도록 했다." 정도다. 거기다 동국통감의 사론의 평대로라면 예를 들어 신문왕은 나라를 겨우겨우 유지한 왕[원문]에 불과한데 나무위키를 비롯해 현대에는 많은 개혁을 시도, 시행한 철혈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반대로 문성왕은 동국통감의 평가에서 신무왕이 정의를 세운 나라를 잘 이끌었다고 평가했는데 나무위키를 비롯해 현대에는 중대 왕들에 비해 꽤 박한 평가를 받고 있다.[11]
이렇게 조선 사관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이유는 첫째, 동국통감의 사관은 미천한 출신인 장보고와 사돈 약속을 맺어 족내혼을 타파하려 했기 때문에 유교사회화가 정착된 조선시대의 기준에 맞다는 점과, 민애왕과 그를 돕던 난신적자들을 소탕하여 신라의 어지러운 상황을 단박에 제압해 이후 신라 하대기 나름의 치세를 연명한 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대비되는 민애왕의 경우는 아예 왕명을 삭탈해버리고 김명이라고 기록했다는 점에서 동국통감의 의도를 파악할수 있다.

"마침내 김명(金明)에게 해를 당하게 되었으니, 대개 신문왕(神文王) 이후로는 순박함이 없어지고 난적(亂賊)이 뒤를 이어 그 화가 만연(蔓延)됨이 이에 이르러 심화되었습니다."

민애왕이 자기 아버지를 죽이면서 왕위에 올랐고 신하들을 겁박했고, 이를 통해 백성들의 지지를 못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신라정통론'''을 밀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동국통감훈구파가 쓴 동국통감이 아니라 사림파가 개보수한 신찬동국통감으로 권근이 쓴 동국사략처럼 기자조선 / 마한 / 신라를 한국사의 흐름 중심에 있는 정통왕조로 편성했다. 이런 신라적통론은 조선 건국 초기, 조선이 무너트린 고려 왕조 위주의 고려정통론을 부정하기 위함이었으며 동국사략,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등 조선 초에 편찬된 역사서에 적극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것과 신무왕이랑 무슨 상관이냐!라고 할 수 있는데, 요약하면 고려왕조의 성립 배경이자 전왕조 신라 몰락의 배경으로 부정적 인식이 있던 800년대를 뒤엎자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800년대 신라를 보면 상황이 영 좋지 않았지만, 동국통감에서는 신무왕이 역적을 몰아내고 800년대의 신라가 재부흥했다고 재평가하며, 결국 진성여왕을 이후로 신라가 몰락했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12]
하지만 애초에 동국통감도 조선왕조실록 그대로 서거정이 관여했고, 훈구파와 사림파 모두가 참여했었고, 무엇보다 사림파를 떠나서 '''삼국유사의 경우도 신무왕을 신무대왕이라고 격상시켰다.''' 이미 조선 이전부터 고려 왕조에서 신무왕에 대한 재평가는 이루어진 셈이다. 실질적으로 복권에 성공한 것은 조선왕조다.
신무왕의 가장 큰 문제는 900년간 이어진 왕족들의 기득권을 깨기 위해서 장보고와 정략혼을 약속했다는 것인데, 장보고의 경우는 집안이 미천해 당시 기준에서 고대부터 전례가 없는 일이라 여론이 좋지 않았다는 문제가 컸다. 이는 당장에 신라의 왕족이었던 궁예의 어머니도 집안 문제로 왕족들 손에 죽을 뻔 하다가 한쪽 눈만 잃고 겨우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보면 신라 자체에서는 이러한 정략혼 자체가 무리가 뒤따랐다. 이전에 신라가 족내혼을 타파했던 사례를 살펴보면 나라의 기틀이 잡힌 중고기쯤부턴 전부 다른 나라의 왕가와의 결혼이었다. 백제대가야와의 국혼이나, 무열왕이나 문무왕은 가야계 출신인 김해 김씨와 손을 잡았는데 이들도 전 왕족으로서 진골을 인정받은 케이스. 아예 거리가 먼 발해나 일본 말고는 마땅히 국혼할 주변국도 없어진 통일신라에게는 적용하기 힘든 전례다. 하다못해 경주 최씨경주 설씨를 비롯한 6두품 귀족급 신분들과 결혼해 손을 잡지도 못한 것이 컸다.
그리고 중부지방을 비롯해 패서의 호족들과 손을 잡고 혈구진을 키웠어야 하는데, 서남지역 일대 호족들과 손을 잡은 것은 신라를 서남지역에서만 세력을 확장, 공고히 했지 중북부지방과 패서의 호족들을 외면한 감이 없지 않다. 정작 김헌창의 난 때까지는 신라 북부는 반란에 참여하지 않고 신라 조정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는데 이 기조를 그대로 이어가지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훗날 궁예가 이 틈을 노려 중북부지방을 대부분을 장악하게 된 원인을 제공했다. 삼국유사나 조선 왕조 입장에서는 신분을 뛰어넘는 정략혼과 부모를 죽이고 왕에 오른 왕들을 갈아치웠다는 점에서 신 세력으로 분류가 되었으나 결국 신무왕은 고려 왕조 입장에서는 삼국유사에서 재평가가 되어도 구 세력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었고 재위기간이 단축되는 빌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신무왕의 이상주의적 면모는 이후 궁예가 실현했고, 신무왕의 현실주의적 면모는 왕건이 실행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후삼국시대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후일 고려 희종과 조선의 인종과 비슷한 편이다.
편찬자의 의도에 따라, 혹은 편찬자들이 중요시하는 것에 따라 평가는 엇갈릴 수밖에 없기에 함부로 왕에 대해 재단하는 것은 몹시 위험한 것이다.

4. 최후에 관한 이설


신무왕의 갑작스런 죽음에는 많은 설이 있다. 일단 사서에는 종기로 인한 사망으로 적혀 있지만, 굳이 "꿈이 김리홍(金利弘)이 나타나 신무왕의 등에 화살을 쐈다"라는 서술이 있다는 점과, 장보고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건으로 인해 기존 세력 사이에서 반발이 일어나고 신무왕이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는 점, 그리고 '''정실부인인 김정종(정종태후)이 왕후로 추봉된 기록이 없다는 점''' 때문에 재위 초반에 장보고와 급격하게 밀착된 모습을 보였고 이에 김정종 등 문성왕의 모계 세력과 김리홍 등 옛 희강왕-민애왕파가 신무왕을 몰아내고 상대적으로 좌지우지하기 쉬운 문성왕을 재위에 올렸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그가 왕에 오르자마자 죽어 갑자기 죽었다고 보이기 쉽지만, 따지고보면 왕족으로 호의호식하던 그는 김균정 사망 시점부터 목숨을 건 탈출극을 찍고 경주에서 청해진이 있는 완도군까지 국토대장정을 했고, 그 뒤에도 전장과 같은 환경에서 구르며 살았다. 몸이 축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일각에서는 근친혼의 누적에 따른 유전병 탓에 사망했다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근친혼을 통한 질병은 보통 30세를 넘기는 경우가 드물고, 정말로 근친혼으로 인한 병치레를 하는 사람이었다면 왕에 오르기도 전에 반란통에 그 병으로 인해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죽었거나 장보고에게 가기 전 산 넘고 물 건너던 고생부터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는 장보고가 신무왕을 암살했다고 하는데 별다른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장보고가 굳이 청해진 본진으로 돌아가 문성왕을 즉위시킬 이유가 없다.
셋째는 염장과 김양의 결탁으로 신무왕이 시해되었고, 이로 인해 장보고도 암살당했다는 설이 있다. 대체로 염장과 김양의 경우는 구 세력으로 신무왕과 장보고는 신 세력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장보고의 난은 신라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사건이었으며 난이 진압된 이후 신라는 안정을 찾는다.
정작 훗날의 개경 호족들이 성장한 것에 기여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김양이 밀어붙인 혈구진이었다.[13] 실제로 청해진의 경우는 무진주(광주)를 수도로 하려했다는 설이 있는데, 옛 백제 지방에 대호족 세력이 생기는 셈이다. 장보고의 딸과 태자를 결혼시킨다는 족외혼도 장점만 있는게 아니라서 척신을 키우고 권력 다툼이 커질 우려가 있었다. 비교대상으로 고려는 초기 태조가 잦은 족외혼을 통해 이후 외척가문별로 피터지는 싸움이 벌어져 왕들의 재위가 2년에서 4년 밖에 안되었다.
즉 기록대로 종기가 승하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 다른 시나리오들도 가정일 뿐이고, 말년에 죽을 고생을 한 그가 승리하자마자 중병을 앓는다는 게 그리 석연찮은 상황도 아니었다. 더구나 바로 앞의 왕이 둘이나 연속으로 살해당한 판국이라 승자인 자신조차 쿠데타로 즉위해서 정통성 부재의 상황에 처했기에 언제 또 형세가 뒤집힐지 몰라 불안감에 사로잡혀야 했고 신무왕이 악몽에 시달린것도 이를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신무왕 사망 이후 문성왕 치세까지 이어져 문성왕은 숱한 역모사건[14]과 숙청을 반복해야 했고 이와중에 결국 장보고 암살과 김양의 조기 은퇴 같은 일련의 일들도 발생하게 된다.

5. 기타


현대에 신무왕릉으로 비정되는 고분이 경주시 동방동에 있지만, 몇몇 학자들은 이 무덤이 신무왕의 왕릉이 아니라 진덕여왕릉으로 알려진 무덤이 실제 신무왕의 왕릉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이 불과 6개월이었다. 참고로 신라 역사상 가장 재위 기간이 짧은 왕이며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서도 사반왕, 고려 순종에 이어 세 번째로 재위 기간이 짧은 왕이다. 흔히 7개월간 재위했다고 알고 있는데, 순수 날짜로 따지면 6개월... 그 다음이 조선 인종의 9개월.

6. 미디어


KBS드라마 <해신>에서는 길용우[15]가 열연했다. 민애왕 김명과 왕위 다툼을 벌인 행적만 있을 뿐 역사상으로 누가 나은지는 알 수 없지만 김우징이 주인공인 장보고와 가까운 관계로 막장으로 나오는 김명과 대조되게 주인공 버프에 편승해 선량한 인물로 묘사된다. 작중에서는 이사도의 난 진압 때 산적들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린 정화를 산 후 정화의 후견인이 됐으며, 그 인연으로 장보고와도 알게 된 것으로 묘사된다. 그 외는 실제 역사와 같다. 여기서는 김양과 염장이 몰래 시해한 것으로 나오며, 이로 인해 신무왕을 지지하던 청해진과의 마찰이 생기고 이에 김양은 장보고를 반역자로 규정해 예전에 부하로 포섭했던 염장을 이용해 장보고를 암살한 다음[16][17] 청해진을 완전히 쓸어버리며 끝이 난다.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한국인 장보고 편에서 등장한다. 성우는 허예은.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할 무렵부터 아버지와 함께 지원자 역할로 등장하며 친분을 가지게 된 것으로 묘사된다. 흥덕왕 사후 왕위계승분쟁이 격화되자 재빨리 김균정을 옹립했지만, 김명에게 역습당해 아버지는 피살당하고 본인은 탈출하는 것으로 복수심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후 참모격인 김양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만들어주겠다고 꼬셔 군사력을 얻자고 조언했고, 장보고와 거래를 해 달벌대전 승리 후 왕위를 차지한다. 왕이 된 후 장보고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지만, 장보고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했으니까 즉위 후 얼마되지 않아 급사해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스토리 상의 신무왕의 죽음은 장보고 암살의 단초가 된다.

7.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신무왕 본기'''
一年春閏一月 신무왕이 즉위하다
一年春閏一月 조부와 아버지를 추존하고, 어머니를 태후로 삼았으며, 아들 경응을 태자로 세우다
一年春閏一月 궁복을 감의군사로 삼다
一年春閏一月 이홍이 달아났으나 잡혀 죽다
一年秋七月 치청절도사에게 노비를 주자, 황제가 불쌍히 여겨 돌려보내다
一年秋七月 왕이 이홍의 저주로 병에 걸리다
一年秋七月二十三日 왕이 붕어하다
삼국사기 10권은 원성왕부터 시작하여 신무왕에서 끝난다.
[1] 정계(貞繼), 진종(真從), 정종(定宗) 중 하나라고 하는데, 繼의 이체자가 継이고 從의 이체자가 従이라서 한 쪽이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표기로 定宗이 쓰이는 점을 볼 때 '''정종(貞從)'''이 맞는 듯 하다.[2] 자신의 오촌 당숙이 되는 흥덕왕이 777년생인 것을 감안할때 800년대 전후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822년에 김헌창의 난을 토벌 한 기록으로 보아 790년대 생으로까지도 볼 수 있다. 즉 죽을 당시 나이는 40대 전후로 추측이 가능하다. 아버지 김균정이 흥덕왕과는 4촌이 된다. 소성왕, 헌덕왕, 흥덕왕, 김충공 형제와 김균정은 할아버지(원성왕)가 같은 4촌지간이다.[3] 동국통감에서는 신무왕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를 두고 명군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이 동국통감의 평가는 "정의를 바로 세웠다" 정도의 이야기이고 정치 등 국왕으로서의 일을 잘했다는 말은 아니다. 원문 보기. 당장 동국통감에 나온 평은 신문왕, 효소왕, 성덕왕은 겨우 나라를 지킬 뿐이었고 효성왕불교에 빠졌으며 경덕왕신하들의 충정어린 간언을 받기는 했으니 효성왕보다는 낫고 혜공왕은 여색에 빠졌고 등 "신문왕(神文王) 이후로는 순박함이 없어지고 난적(亂賊)이 뒤를 이어 그 화가 만연(蔓延)됨이 이에 이르러 심화되었습니다."라며 현대의 일반적인 평가와 달리 문무왕 이후 왕들은 모조리 폄하하고 있다. 다만 흥덕왕은 나쁜 길로 안 빠져들고 재해도 잘 극복했다며 칭찬했다. 그러다가 "신무왕이 민애왕을 죽여서 그동안 망해가던 나라를 뒷 사람들에게 잘 전달해주었다."라며 신무왕 이후 왕들인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을 언급하며 "이들이 다스릴 때는 중외(中外)가 편안하고 백성이 잘 살게 되었으니, (후략)"이라며 신라 하대 초기 왕들을 좀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니까 동국통감 사관의 평은 '신무왕이 한 일은 앞서 나쁜 기운을 잘라내고 좋은 기운을 물려줬다는 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혹자는 왕족으로 있을 때의 활약을 높게 쳤다고 하는데 명군에서 군은 왕족이 아니라 군왕을 말한다. 광해군세자 시절만 놓고 보면 명군 소리를 들을 수 있으나 국왕일 때는 정작 명군 소리를 못 듣는 것도 바로 그 때문.[4] 거꾸로 말하면 이 때 권력이 얼마나 왕족 일가에게 집중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일화기도 하다.[5] 김인겸계의 유일한 적손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당연히 김제륭을 지지하며 후위를 도모했을 가능성이 높다.[6] 보통 장보고를 다룬 작품들에서는 이 해석을 수용해서 김우징이 당나라에서 신라에 막 돌아온 장보고의 조력자 역할로 많이 묘사된다.[7]삼국사기》에는 1월 19일, 『민애왕석탑사리함기』에서는 1월 23일에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다.[8] 사실 신무왕의 원수는 희강왕이기는 하지만 희강왕을 죽게 하고 왕위에 오른 민애왕도 처음에는 희강왕을 지지하여 김균정과 대립했었다. 사실상 민애왕도 신무왕의 원수.[9] 혜공왕 시기에는 그나마 혜공왕이라는 지도자를 대표한 중앙정부가 지방을 어느정도 통제라도 할 수 있었지 흥덕왕 사후 신무왕 즉위까지는 신무왕이 청해진으로 도망갔는데도 아무 조치도 못 취하는 등 혼란이 심했다. 그러나 신무왕은 민애왕을 축출하고 즉위함으로서 일단 이 혼란은 종식시켰다.[10] 과거 본 문서에는 "삼국사기에는 장보고가 반역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정작 신무왕을 도운 김양, 장보고가 반역 열전이 아닌 충신 열전에 올라 의문을 준다."고 되어 있었는데 사실과 다르다. 삼국사기 장보고 열전을 보면 "나라가 어지러우니 정연을 보내 왕을 시해한 자를 죽여 왕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열전 사론을 보면 "장보고는 자신의 안위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반역자들을 모아놓은 열전 9권을 반역 열전으로 부를 수는 있어도 열전 4권이 충신 열전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충신 열전이라는게 있다면 딱 어울릴만한 인물들인 동천왕을 살린 밀우와 유우는 열전 5에 있다.[원문] 신문(神文)·효소(孝昭)·성덕(聖德)은 간신히 수성(守成)할 수 있었고(후략)[11] 이는 장보고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영향이 크다.[12] 권근이 동국사략과 동국통감 등은 모두 신라가 900년대에 비로소 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3] 혈구진이 설치된 강화도의 경우는 본시 고려나 조선에서 주요 요충지였다.[14] 진짜 역모인지 문성왕이 귀족들을 숙청하기 위해 벌인 일인지는 불분명하다.[15] 태조 왕건에서는 복지겸, 삼국기에서 의자왕, 대조영에서 보장왕, 공화국 시리즈에서 김영삼 등으로 출연한 배우이다.[16] 김양은 염장에게 청해진과 조정의 싸움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장보고를 죽여야 한다고 부추겼고, 과거에 장보고와 원한이 있던 염장은 김양의 지시에 따라 장보고를 죽이지만 김양은 염장마저 잔인하게 죽여버린다.[17] 사실 장보고 암살 이후 김양이 곧 시중직에서 해임당했기에 청해진 해체 작업과 김양은 별 관련이 없다. 오히려 김양 자신도 문성왕 재위중에 있던 숱한 숙청의 바람의 피해자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