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읍
祿邑
1. 개념
신라 때 국가가 관료에게 직무의 대가로 지급한 논과 밭으로, 일종의 봉급 제도라 보면 된다.
관료, 귀족이 소유한 일정한 지역의 토지로 해당 지역으로부터 세금을 수취할 수 있는 '''수조권'''에다가 그 토지에 딸린 '''노동력'''과 '''공물'''을 모두 수취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는데 이게 여러모로 로마 귀족의 대토지소유 후 발생하는 문제점과 매우 흡사하다. 즉, 내 땅에선 내가 왕임을 자처할 수가 있다. 주로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를 녹읍으로 주는 경우가 많으며 이 때 포로도 같이 내주게된다. 대표적인 예가 진흥왕 시기, 대가야를 멸망시킨 화랑 사다함이라든가.
소성왕 원년(799)에는 지금의 거제도로 비정되는 청주[1] 거노현을 국학생의 녹읍을 삼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국학의 학생에게도 녹읍이 지급된 것을 알 수 있다.
2. 탄생
언제부터 마련되었는지는 기록에 없으나 적어도 통일 이전부터 계속 존재해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진흥왕 시기에도 존재했다.
사실 귀족에게 땅과 주민을 지급해버리면 귀족은 기왕이면 더 많은 소득을 얻기 위해 백성을 쥐어짤 것이 뻔할 뻔자고 이로 인해 민심이 바닥나는 상황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2] 나아가 그 귀족이 자기 소유의 땅에서 난 식량을 군량으로 만들고 주민들을 무장시켜 사병으로 만들면 반란도 충분히 가능해진다. 즉 사실상 귀족을 왕에게 맞먹게 만드는, 왕의 입장에서는 자폭이나 다름 없는 것이 녹읍인 것이다. 그럼에도 왕이 녹읍을 허락한 것은 우선 귀족들 월급을 중앙으로 모아서 나눠줄 여력이 안되므로 각자 알아서 취하게 하려 했던 것도 있고, 무엇보다 고대 국가들은 원래 여러 부족장들이 대표자인 왕을 내세우는 식으로 건국되었기 때문에 왕 입장에선 자신보다 더 오래전부터 그 땅을 소지하고 있던 부족장들의 땅을 빼앗을 명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왕 입장에서는 알고도 못막는 가불기였던 것. 그래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들의 특징 중 하나가 이 제도에 손을 대려 하는 것이며, 반대로 이 제도가 부활하면 그만큼 왕권이 약해졌음을 알 수 있는 좋은 지표가 된다(...).
3. 통일 이후
녹읍과 함께 한 술 더 떠 세습까지 가능한 '''식읍(食邑)'''도 있었다. 단 대대로 우려먹을 수 있는 식읍은 녹읍의 상위호환급으로, 너무나 큰 특권이라 김유신, 장보고, 경순왕[3] , 견훤[4] , 강감찬[5] 등 진짜 일부 사례에서만 지급했으므로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로 보고 녹읍에 비해 비중있게 가르치진 않는다.[6] 녹읍은 '''월급''', 식읍은 '''보너스'''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한국사 시험이나 수능 한국사 영역을 위해 설명하자면 녹읍은 단위가‘읍(마을) 단위이다. 그래서 녹읍 수여에는 특정 지명이 등장한다. 소성왕 대의 “국학 학생들을 위해 거로현(현재 진주시)을 녹읍으로 삼았다.”와 같은 방식이다. 식읍은 ‘호’로 센다. “장보고한테 식읍 2,000호를 수여했다.”와 같이 나온다. 2009년 수능 국사 영역에 이게 문제로 나와서 수험생 여럿 물먹인 적 있다. 그리고 2013년 한국사능력시험에서도 녹읍은 마을, 식읍은 호로 센다는 내용이 똑같이 등장하여 수많은 공무원 지망생들의 원성을 샀다.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녹읍을 폐지하기 위해 보유가 아니고 세금을 걷을 권리인 수조권만 인정되는 관료전이 687년(신문왕 7년)부터 지급되었고 녹읍과 식읍은 2년뒤에 혁파된다. 대신 귀족들은 녹봉을 받고 살게 된다. 물론 귀족들의 반발이 대단했겠지만 신문왕이 한 번 작정하면 정책을 화끈하게 밀어부치는 타입이라 가능했던 듯. 여하튼 녹읍제가 혁파됨에 따라 추가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공물 또한 받아냄으로써 국가 재정의 확충과 국방력이 강화되는 효과를 보았다. 더불어 진골귀족들의 세력을 억제시켜 신라 중대 왕권을 강화하게 되는 순기능이 발휘되었다. 이는 이후 혜공왕까지 이르는 약 100년간에 이르는 중대 신라의 최전성기를 마련한 기틀이 되기도 했다.
경덕왕 16년인 757년, 귀족들의 반발에 못 이겨 녹읍제도가 '''부활됐다'''. 귀족들의 힘이 왕의 힘을 능가했다는 방증이며 국가가 귀족들을 견제하는 것에 GG를 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흔히 알려져 있고 교과서 차원에서도 그 정도로 가르치지만 경덕왕이 녹읍을 부활시킬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녹읍 부활 후 한화정책을 별 탈없이 시행한 점을 고려해보면 경덕왕 시대에 단순히 왕권이 귀족에 압도당했다고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고, 그냥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정책이었다고 보면 된다. 오히려 이제는 녹읍을 부활시켜도 왕권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의 표현에 가까웠다. 자세한 건 경덕왕 항목 참고. 다만 경덕왕 본인이야 귀족이 좀 팔자가 펴도 감당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사후 어린 왕이 즉위하고 왕권이 급격히 약화되어 귀족들의 세력이 훨씬 강력해진 건 사실.
그리고 신라는 경덕왕 이후 100여 년간 차차 망조가 들기 시작한다. 김헌창의 난이 일어난 9세기 초반까진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에 의한 지배가 지켜진 것 같지만[7] 장보고 전쟁을 거쳐 9세기 중후반쯤 되면 호족들은 자기 영지 내에서 사실상 왕이었으며 단지 신라 조정에 세금을 바치고 복종하고 있을 뿐이었고 이들은 훗날 후삼국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8]
고려왕조도 초기에는 역분전(役分田) 제도와 함께 신라의 녹읍 제도도 이어받아 계속 시행했던 듯 하다. 고려사 태조세가와 흥달 열전에서 고려도 녹읍을 부여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다만 그 기간이 전시과 시행 이전까지로 잡아도 짧기 때문에 녹읍이라고 하면 보통 신라 때의 토지제도로 보는 편이다. 그러다 제5대 국왕 경종 때인 976년에 새로운 제도로 전시과를 시행하였다.
[1]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가 아니라 신라 9주 중 하나인 청주(菁州), 지금의 진주시이다.[2] 다만 그러한 서술은 조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물론 녹읍처럼 원칙적으로 당대에 국한된 영지의 경우 그런 부작용이 생기겠지만 그것이 사실상 세습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주 계급 입장에서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영지의 경제력을 키워야할 유인이 생기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시대의 길어봐야 3년짜리 임명직 지방관 입장에서는 그저 자기 임기 내에 최대한 많은 이득을 얻으려고 온갖 패악질을 저지를 유인이 다분하며 선정을 펼치는 여부는 전적으로 지방관의 양심에 달린 문제에 가깝다. 하지만 일본의 다이묘들처럼 세습이 보장된 경우에는 오히려 지역 경제를 최대한 키우기 위해 영지 경영에 힘쓰게 된다. 실제로 조선의 전직 관료로서 훗카이도에 표류했다가 마쓰마에 번에 닿아 다이묘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에도에서 막부 쇼군을 접견하고 수개월동안 일본 각지를 직접 보고 귀국한 이지항이 저술한 표해록에는 마쓰마에번(오늘날의 훗카이도 최남단 하코다테 일대)조차도 변방의 낙후된 고을임에도 조선의 평범한 고을들보다 열 배는 더 풍등하다고 하며 그 원인을 다이묘들이 영지를 세습하기 때문에서 찾고 있다. 애당초 국왕이 관료들보다 국가 경제와 민생에 더욱 관심이 많다. 전근대 사회에서 왕 입장에서는 나라 자체가 세습재산이기 때문에 왕권 강화가 대체로 진보이고 개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어리석은 군주가 말아먹는 사례야 흔하디 흔하지만 왕의 이해관계 자체는 그러하다.[3] 신라를 고려에 바친 대가로 왕건에 의해 경순왕에게 '''경주 전체를 식읍으로 지급'''.[4] 견신검의 쿠데타에 밀려서 실각하자, 견훤이 고려로 망명해 왕건한테 투항한다. 왕건은 견훤의 고려 망명을 최대의 업적으로 생각하면서 견훤을 상보로 삼고 '''양주 전체를 식읍'''으로 지급했다. 식읍 문서를 보면 견훤이 받은 양주 식읍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 수 있다. 더군다나 당시의 양주는 오늘날의 양주시 일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서울 강북지역을 포함한 굉장히 넓은 지역이었다. 게다가 견훤의 외손녀가 정종의 왕후가 되는 등 후백제왕이었다고 해서 고려에서 무작정 괄시받지 않았다. 지금은 실전되었으나 여러 사료에서 인용되어있는 '이제가기'라는 족보를 남긴 집안이기도 하였다.[5] 거란의 3차 침입을 막은 뒤, 현종에 의해 받는다. 그것도 300호, 500호, 1000호 순으로 계속 올려받는다.[6] 식읍도 원칙적으로 소유권은 나라에 있었고, 식읍보다 더 좋은 것으로 그 소유권까지 주는 '봉읍(封邑)'도 있지만, 이건 중국의 봉건제도 시절에나 있던 것이라 한국사에서는 해당하지 않는다. 사실 봉읍까지 나눠주면 그건 중국 춘추시대마냥 사실상 별개의 국가나 마찬가지다.[7] 김헌창이 웅주에서 도독으로 있을 때 난을 일으켰지만 그가 거기에 연고가 있다거나 한 건 아니었고, 이 동네 저 동네 임기 채우며 옮겨다니다가 웅주에 부임했을 때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8] 단 후삼국시대의 대부분의 호족이라면 모를까, 모든 호족이 이런 유형인 건 아니고 상인 출신, 군인 출신 등 다양했다. 호족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