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성실의 원칙
信義誠實의 原則 / Bona fides
1. 개요
'''신의성실의 원칙''', 약칭으로 '''신의칙'''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공동 생활의 일원으로서 상대방의 신뢰를 헛되이 하지 않도록 성의 있게 행동하여야 한다는 원칙[1] 이다.
이는 기원전 449년 완성된 고대 로마의 십이표법에서부터 프랑스 나폴레옹 법전에 이르기까지 유럽사를 관통하는 시민의 의무로 규정되었으며, 특히 19세기 이래 제정된 민법들은 이 조항을 명문화하여 법률적 관계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대원칙으로 두었다. 이후 유럽의 근대법 체계가 세계 각국에 보급되면서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계약법뿐 아니라 모든 법률관계를 규제, 지배하는 법의 일반원칙이다.[2] 즉, 신의성실의 원칙은 민법(계약법) 뿐만 아니라 모든 사법에 적용된다는 의미이다. 심지어 일부 공법 분야에도 적용된다.
쉽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과 법률관계를 맺을 때 비겁하게 굴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임하라는 원칙이다. 사회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수많은 행위들 중에는 겉보기엔 합법적으로 보이나 알고 보면 타인에게 지나친 피해를 주는 부당한 것들이 있다. 회사에서 해고된 사람이 아무 이의 없이 순순히 퇴사해놓고 몇 년 뒤 갑작스럽게 회사를 상대로 해고무효확인소송을 제기한다든가, 집 주인이 이웃집의 일조권을 침해할 목적으로 자기 집 굴뚝을 높게 쌓는 행위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법전 어디에도 위와 같은 행위를 정확히 언급하는 조문은 없고, 또한 이런 수많은 개별적 사례들을 일일이 법전에 명시하여 방지한다는 발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런 '비겁한 짓'들을 금지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신의성실의 원칙이다. 이러한 신의성실의 기준을 심사하고 개별 사례에 적용하는 것이 유권해석기관인 사법부, 즉 법원이며, 앞서 언급한 두 사례는 법원에서 사회통념상 '비겁한 짓'으로 해석된다고 판결을 내렸으므로, 이런 행위들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비추어 허용될 수 없다.
상호간의 합리적인 계약을 통해 사회적 질서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사회계약론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다만, 사회계약론과는 달리 신의칙의 적용은 법적 계약(법률관계)에 한정된다.
2. 민법상의 신의성실의 원칙
민사법의 대원칙으로, 민법 제2조에 규정되어 있다.'''민법 제2조(신의성실)'''
①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
②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
신의칙은 사인 간의 법률행위 등에 있어서 당사자가 가지는 권리의 사회성과 공공성을 가진다는 원칙하에 근거를 가진다. 민법 제2조는 권리자의 권리행사의 한계를 설정하는 조문으로, 일반조항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본디 권리의 행사는 친권 같은 타인을 위한 권리(민법 제913조 같은)를 제외하고는 자유롭게 행사가 가능하다. 그러나, 헌법 제23조 제2항에 따라, 권리의 행사가 타인 및 사회에 이롭게 해야한다는 전제조건이 따라붙는다. 이에, 민법 제2조를 두어 권리행사에 대한 제약을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상술하였듯이 해당 조문은 일반조항으로 모든 사안을 포옹할 수 있으나, 반대로 '''법관의 자의적 해석이 개입하여 법적 안정성을 해칠 수 있음으로 그 적용에 주의가 필요하다.''' 신의칙은 권리와 의무의 내용이 법률이나 계약으로 분명하게 정할 수 없는 경우에 보충적으로 동원되며, 이러한 경우에 신의칙을 통하여 구체적 타당성의 실현을 도모하며, 만일 법률의 흠결이 있을 시에도 보충적으로 유추해석이 가능하게 해준다. 즉 '''신의칙을 적용할 시에 개별적 규정을 우선 적용한 뒤에 최후의 수단으로 적용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칙은 원칙이라기 보다는 '''원칙을 그대로 적용할 때 보다 "더 권리의 사회성과 공공성을 보장하는 예외"들을 모아논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의칙을 적용하기 위하여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한데, 신의칙이 적용되거나 개입할 여지가 있으려면 당사자 사이에 법적인 특별한 결합관계가 존재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한 사람이 짝꿍에게 지우개를 빌려달라는 청약을 했고, 짝꿍이 그 청약을 수락하였다면 짝꿍은 청약자가 지우개를 문제없이 잘 쓸 수 있게 해줄 의무를 부담하며, 청약자는 그 지우개를 빌려달라고 할 권리가 생기며 사용 후에 반환할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과 같은 법률적 관계가 성립되어 있어야 한다. 당사자 간의 이러한 결합관계가 없을 경우 민법 제750조의 불법행위가 판단의 근거가 될 뿐 신의칙이 개입하지는 못한다.
2.1. 신의칙 파생 원칙
신의칙에서 파생된 다른 원칙들은 아래와 같다. 단, 이들 원칙들은 강학상(학문상) 편의를 위해 이름을 붙이고 나눠 놓은 것이지, 그 자체가 법조문에 규정되어 있는 원칙은 아니다. 따라서 학자에 따라 같은 판례를 두고 금반언의 원칙 위배라고 보기도 하고 권리남용금지의 원칙 위배라고 보기도 하는 등, 약간씩은 그 분류에 있어 차이가 있다. 신의칙 위반이라는 점에 큰 이견이 없다면 굳이 구분할 실익도 없을 것이다. 판례 역시 원칙의 이름을 콕 찝어 언급하기도 하지만, 퉁쳐서 '''신의칙 위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2.1.1. 모순행위금지(금반언)의 원칙
반언(反言), 즉 한번 했던 말에 모순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금지(禁)하는 원칙이다. 쉽게 말하면 '했던말 무르기 없기'. 민법 제452조 제1항에서 '양도통지와 금반언'[3] 이라는 제목으로도 다시 강조되는 원칙으로 권리행사 이전에 한 어떠한 행동이 권리행사가 앞에 한 행동의 태도와 맞지 않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으로 양자 간에 생긴 믿음을 배신하는 사태를 막기위해 존재한다. 이 원칙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크게 3가지 요건이 필요한데
- 객관적으로 이전의 행동과 권리의 행사가 모순되며, 귀책이 존재할 것.
- 상대방의 신뢰의 존재가 모순행위와 서로 관련을 가지고 있을 것.
- 이전 행동이 강행법규 위반 등으로 무효로 처리되지 않을 것.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원칙상 이위키는 경매대금에 대해 자신의 임차보증금에 관해 배당을 받을 수 있지만 '''임대차 사실에 대해 번복하고 말을 뒤집었기 때문에''' 배당을 받을 수 없다.(대판 1997.6.27 97다12211)
단 선행행위가 강행법규 위반이어서 무효일 때는 이 원칙을 배제하는데 예시는 다음과 같다.
나무증권은 투자수익보장약정을 제의하였고 그 뒤에 말을 바꾸어 약정이 무효라고 주장하였는데 신의칙상 이 둘이 모순이기 때문에 "무효라는 주장"이 무효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무증권의 무효주장을 신의칙에 입각해 부정해버리면 강행법규인 투자수익보장약정 금지를 몰각시키기 때문에 "신의칙상 '투자수익보장약정이 무효라는 주장'은 무효다"라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만 이것은 해당 주장이 무효가 아니다, 라는 뜻일 뿐이지 '''나무증권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이 경우에 이위키는 나무증권에게 신의성실의 원칙 대신에 민법 제750조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2.1.2. 실효의 원칙
오랫동안 행사하지 않은 권리는 그 효력(效)을 잃는다(失)는 뜻이다. 권리자가 자신의 권리를 장기간 행사하지 않았고, 이에 상대방이 이제는 그 권리의 주장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믿는 데 충분한 신뢰가 있는 상황에서, 그 권리를 다시 행사하는 것은 권리남용으로 허용되지 않고 상대방은 권리자의 권리행사에 대해 실효의 항변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쟁점은 "충분한 신뢰"에 대해서 판례는 "행사의 기대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기간이 경과하도록 권리를 행사하지 아니하여 의무자인 상대방으로서도 이제는 권리자가 권리를 행사하지 아니할 것으로 신뢰할 만한 정당한 기대를 가지게 된 다음에 새삼스럽게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법 질서 전체를 지배하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반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결과가 될 때에는, 이른바 실효의 원칙에 따라 그 권리의 행사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라고 명시하고 있다.
'''실효의 원칙은 소멸시효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 즉, 소멸시효에 걸리는 권리에 대해서도 시효기간에 관계없이 적용 될 수 있고, 소멸시효에 걸리지 않는 권리에 대해서도 장기간 권리행사를 하지 않을 후 새롭게 행사 할 때 저지 될 수 있다. 또한 실효의 원칙이라는 것이 '''권리행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지 권리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다.'''
공법관계에서도 실효의 원칙은 적용이 된다. 다만 인지청구권과 같이 일신전속적 신분관계상 권리는 실효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6]
2.1.3. 사정변경의 원칙
이때 사정은 '일의 형편이나 까닭'을 말하는 事情이다. 법률행위에 있어서 그 기초가 된 사정이 당사자가 예견하지 못한 또는 예견할 수 없었던 이유로 말미암아 현저한 변경이 발생되어, 당초에 정하여진 효과를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 한쪽에게 과도하게 부당한 결과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 당사자는 그러한 행위의 결과를 적당히 변경할 것을 상대방에게 청구하거나,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여기서 사정은 객관적인 사정을 의미할 뿐 주관적인 사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법은 직접적으로 사정변경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으나 사정변경의 원칙에 기반한 조항을 두어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민법 제286조(지료증감청구권)이나 민법 제312조의2(전세금 증감청구권) 등이 이러한 원칙에 기반을 둔 조항이며, 계약목적의 달성불능의 경우에도 이 원칙이 적용 될 여지가 있다.
판례는 엄격한 요건 하에 사정변경을 허용하고 있다.
2.1.4. 권리남용금지의 원칙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은 권리의 행사가 겉으로 보기에는 권리자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권리 행사로 인해 현저한 이익의 불균형이 발생하는 행위인 경우 이를 금지하기 위한 원칙이다.
주관적 목적으로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고 타인에게 손해만 끼치기 위한 행위는 통설에서는 권리남용으로 인정하지 않으나 판례상으로는 인정하고 있다. 헌법에서는 권리의 행사는 공공 복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으며, 이 원칙을 지키지 않을 시, 경우에 따라서는 권리 행사 자체를 불법행위로 보고 상대방에게 민법 제750조에 의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3. 민사소송법상의 신의성실의 원칙
민사소송에서의 신의칙에 어긋나는 행위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거론된다.
- 소송상태의 부당형성
- 소권 등의 실효 : 예컨대, 통상항고는 즉시항고와 달리 항고기간이 없지만 항고권이 실효될 수는 있다.
- 소권의 남용
- 진실의무 위반 내지 증명방해 : 진실일 수도 있는 사실은 이를 주장할 수 있고 거짓일 수도 있는 사실은 이를 다툴 수 있지만, 진실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주장하거나 진실인 것으로 알고 있는 상대방의 주장을 다투지는 말아야 한다. 또한, 상대방의 증명(입증)에 협력할 의무는 없지만, 상대방의 증명(입증)활동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4. 행정법상의 신의성실의 원칙
4.1. 행정절차
행정절차법 상의 신의성실 원칙은 조금 특이하다. 다른 법은 양 당사자 모두에게 신의성실칙을 요구하고 있는데 반해, 행정절차법의 조문은 행정청에게만 신의성실을 요구하고, 당사자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4.1.1. 세법
위 민법의 신의칙 개념을 세법에서 차용한 조항이다. 국세부가의 기본 원칙 중 하나로, 국세기본법에 실려있는 조항이다.
국세기본법의 신의칙은 납세자뿐만 아니라 과세관청 쌍방에 모두 적용되는 조항이다. 그러나 국기법의 신의칙은 과세관청에게 더 엄격하게 적용된다.
이는 납세자가 과세관청의 신뢰를 배반할 경우 과세관청은 가산세와 형사처벌의 제재를 가할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 납세자가 과세관청을 제재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4.2. 준사법절차
5. 국제법상의 신의성실의 원칙
국제법상 신의 성실의 원칙은 국제법의 상당히 오래된 원칙의 하나로서 '국제법과 외교의 황금률'이라고 표현하는 학자들도 있다.'''비엔나 협약 제26조 (pacta sunt servanda)'''
'''유효한 모든 조약은 그 당사국을 구속하며 또한 당사국에 의하여 성실하게 이행되어야 한다.'''
ICJ는 갑치코보-나기마로스 사건 에서 신의 성실의 의무는 조약 당사자들에게 조약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조약의 목적이 실현될 수 있는 방식으로 적용할 의무를 지우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는 신의성실의 원칙이 단지 의무를 이행하는 방법을 제시할 뿐 구체적인 의무의 연원은 아님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성실의 원칙이 국제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국제사회에 국가에게 법 집행을 강제할 수 있는 권위체가 부재한다는 점이 크다.
또한 조약뿐만 아니라 국제관습법,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가 행한 일방적 선언(unilateral declaration) 역시 법적 구속력을 창설하려는 의도가 드러나는 경우 신의성실 원칙의 구속을 받는다. 즉 ICJ도 언급한 것처럼 의무의 형식적 연원과 관계 없이 법적 의무의 창설과 이행에 적용되는 기본 원칙의 하나다.
6. 기타 (성실교섭의무)
단체협약과 관련하여, 노동조합과 사용자 또는 사용자단체는 신의에 따라 성실히 교섭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하여야 하며 그 권한을 남용하여서는 아니된다(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30조 제1항).
해당 조항을 신의칙과 권리남용의 법리로 해석하는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나, 노조법은 이를 성실교섭의무라는 별도의 의무로 노사 양측에 부과하고 있다. 뜬금없이 새벽에 찾아와 교섭을 요구하거나, 업무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핑계를 대며 교섭을 미루거나, 실질적 교섭 권한이 없는 교섭 담당자를 내세우는 등[7] 의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측이 성실교섭의무를 위반할 경우 단체교섭 거부, 해태의 부당노동행위(노조법 제81조)를 구성하며 이는 벌칙이 있는 형법상 범죄이다. 노측이 위반할 경우 별개의 처벌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이유로 한 사용자측 교섭 거부의 정당성이 인정되며, 교섭 거부가 정당한 이상, 이를 사유로 한 쟁의행위(파업 등)은 정당성을 상실한다.
[1] 헌재 2015. 7. 30. 2013헌바120 결정[2] 대법원 1993. 5. 14. 선고 92다21760 판결[3] 이는 채권양도와 연관이 있다.[4]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거절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상태.[5] 구체적으로 임대차에서 대항력을 갖고 있는 임차인은 제3자에 대해서도 동일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임대인이 제3자에게 집을 팔고 떠나면 원칙적으로 임차인은 보증금을 떠난 임대인에게 받아야 하지만 임차인이 대항력을 갖추고 있다면 보증금을 새로운 집주인에게 달라고 할 수 있다.[6] 가족법상 권리에 실효의 원칙을 적용시킨다면, 60년 이상 떨어져 있었던 이산가족이 우연히 만났을 때 이들의 가족관계가 모두 실효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7] 악질들은 갓 노무사 시험에 합격한 수습 노무사를 단체교섭 담당자로 보내기도 한다. 당연히 상대방에 대한 모욕이 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