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균(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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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전 독립유공자, 정치인.
1918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1923년에 어머니와 함께 상하이로 아버지 신익희를 찾아가 공부를 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중국에서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하였고 중국 중앙은행의 과원조장, 신탁국조장을 지내기도 했다.
8.15 광복 후 아버지 신익희를 따라 귀국하여 아버지의 정치 활동을 보좌하였다. 이후 민주국민당에 입당하여 민주국민당과 민주당, 신민당, 민정당, 민중당, 신민당에서 정치 활동을 하였다.
1956년 8월 23일, 아버지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경기도 광주군 제3대 국회의원 선거의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당의 최인규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당 구파 출신들과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경기도 광주군-이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최하영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65년 통합야당 민중당 정치훈련원장에 임명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차지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9년 신민당 서울 성동구 병 지구당위원장에 지원하기도 했다.[3] 그러나 정운갑에 밀렸고, 그 이후로는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63년 서울 대확장으로 인해 '''본인 지역구의 절반이 날아가고''', 남은 절반이 이천군과 붙으면서 군사정부 실세였던 차지철에게 지역구를 빼앗긴, 어찌보면 1963년 서울 대확장의 최대 피해자이다.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1] 배우 신하균과는 '''본관, 한자, 항렬까지 똑같은 동명이인'''이다.[2] 그의 본관 평산 신씨에서 따온 것으로 독립이 불확실하다고 내다본 부친 신익희가 나중에 죽더라도 본관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지었다.[3] 성동구 병 지역의 80% 이상은 1963년 서울 대확장 이전 아버지와 자신의 지역구였던 경기도 광주군 지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