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지철

 


'''제3대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
車智澈 | Cha Ji-Chul
'''
<colbgcolor=#002267><colcolor=#fff> '''출생'''
1934년 11월 6일
경기도 이천군
'''사망'''
1979년 10월 26일 (44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안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97)
'''본관'''
연안 차씨
'''호'''
용천(龍川)
'''재임기간'''
제3대 대통령경호실장
1974년 8월 22일 ~ 1979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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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267><colcolor=#fff> '''학력'''
국민대학교 (정치외교학 / 학사)
한양대학교 (정치학 / 석, 박사)
레인저 스쿨
'''종교'''
개신교(장로회)
'''군사 경력'''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54년 7월 20일 ~ 1962년 8월 21일
'''최종 계급'''
중령

1. 개요
2. 일대기
3. 가족
3.1. 부인
3.2. 모친
4. 김재규와의 악연
5. 전두환과의 관계
6. 사진
7. 창작물
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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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군인, 정치가. 1974년~1979년 박정희 정권에서 대통령경호실장을 역임하였다.

2. 일대기



2.1. 군인


어머니가 소실이어서 서자로 태어났다. 이로 인해 '''정실 소생인 형제들에게 설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용산고등학교[1] 졸업육군사관학교 제12기로 들어가려고 시험을 쳤으나 낙방했다.[2]
비록 육사 입학은 실패했지만, 동창들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 널리 알려진 무식한 이미지와 달리 출신 때문에 독기를 품었는지 공부를 꽤 잘 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무술실력도 상당하여 태권도 합기도 각각 5단, 검도 3단의 실력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우락부락한 대통령경호실장 시절과는 달리 학창 시절에는 의외로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후 대한민국 육군 포병 간부시험을 보아 합격하여 포병간부후보생 출신으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육사 출신에 대한 컴플렉스'''[3]가 상당했고 경호실장 시절 육사 출신 현역 중장 또는 소장을 경호실 차장으로 임명하는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항상 경호실 훈련 때 마치 총사령관인양 군복을 입고 아예 수경사령관 등의 장군들을 지휘하기도 했다. 1959년 공수특전단에 배치받았고, 이듬해인 1960년에 선진국의 특수훈련과 리더쉽을 배우기 위해 미국에 유학 가서 미합중국 육군 기지인 조지아 주포트 베닝레인저 스쿨에 입교했다.
이 레인저 스쿨 코스에서 '''같은 팀 소속 미 육군 교육생이 인종차별을 하자 말 그대로 반죽음까지 두들겨 팼는데'''[4], 이때 맨손으로 본인보다 덩치가 훨씬 컸던 상대 교육생을 떡실신시킨 무술실력을 높이 산 미 육군 측에서 교육생들한테 태권도를 시연해보이는 것으로 무마시켜줬다고 한다. 어차피 동맹국 육군 장교를 인종차별로 시비걸어 폭행을 가했던, 가해자 잘못이 크기에 미 육군도 뭐라고 할 입장이 아니었다.
외모가 주는 거칠고 우락부락한 느낌과는 달리 아주 깔끔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장교로 복무할때 항상 반질반질 광이 나는 전투화를 신고 다녔으며 입고 다니던 전투복이 주름지지 않도록 항상 신경쓰고 다녔다고. 방바닥에 먼지 하나 안 떨어지게 청소를 하는 깔끔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전역 이후에도 이 성격은 변하지 않아서 입고 다니는 양복이나 신고 다니는 구두, 깔끔한 머리모양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왼쪽부터 박정희 소장, 박종규 소령, 이낙선 소령, '''차지철''' 대위.[5] 박정희 소장 기준으로, 왼쪽에 차지철, 오른쪽에 박종규가 서 있었기 때문에, '''좌지철, 우종규'''라는 말도 있다.
5.16 군사정변 때는 대위 계급으로 공수특전단에 근무[6]하고 있었으며, 쿠데타에 적극 참여했다.

2.2. 국회의원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육군 소장 박정희가 의장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차장이 되었고, 박정희가 집권하자 1962년 3월 20일에 소령으로 진급하고, '''2달 뒤인 5월 31일에 중령으로 특진'''하게 되고, 3달 뒤인 8월 21일에 예편하였다.[7]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30살의 나이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1964년에는 국민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고, 이후 한양대에서 2년 만에 정치학 석사, 박사 학위도 땄는데 이건 당시 엉망이었던 대학원 과정 + 정계인사에 학위를 남발하는 학계관행 덕이었다. 이후에는 국회 외무위원장, 내무위원장까지 맡으며 승승장구한다. 여담으로 외무위원장 맡을 때의 나이가 36세. 이것은 박정희의 빽이란 말도 있다.
이만섭KBS 1TV 인물현대사 차지철 편에서 권오석 등과 현역 정치인들을 폭행하는 등, 주먹으로 정치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차지철도 못 건드린 인물이 있었는데 그 인물은 바로, 조선의 알 카포네이자 주먹 하나로 조선을 평정했던 주먹황제 오야붕 김두한이었다. 막말로, 차지철이 김두한과 진짜로 붙었다면 개패듯이 처참하게 맞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4.19 혁명 학생운동에 참여했으며 6대 국회에서 김두한의 비서로 지냈던 서용화는 국회 본회의장 안에서 갑자기 '''"당신 힘이 장사라며? 나하고 한번 붙어볼까?”'''라며 웃통을 벗어던지는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김두한은 40대 후반, 차지철은 30대 초반이었다. 게다가 김용채에게 손찌검을 당하기도 하였다.
베트남 전쟁 파병 때 여당 내에서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던 인물 중의 한 명이다. 그런데 그 이유는 미국이 참전의 대가로 들어주기로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여당 내에서 파병을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이른바 쇼를 위해 박정희가 지시한 것이다. 쇼로 시작했으나 자기 역할에 몰입한 나머지 진짜로 반대론자가 되었다고 한다.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는 박정희의 지시로 월남파병을 반대하기 위해 월남 전쟁을 연구하다가 심취해 필요 이상의 반대를 하다 박정희에게 찍힌다. 사실 참전의 정당성 문제를 떠나서 남베트남의 상황이 상당히 막장이기는 했다. 최소한 대한민국 국민이란 자각이 있던 우리나라완 달리 월남 국민이란 공통 정체성도 없는 판이었다. 다만 한국전쟁에 구원을 한 미국이 직접 주도적으로 한 전쟁인만큼 한국으로선 필요하였다고 할 수 있다.
[image]
이후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기도 광주군-이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신민당 신하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유기준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기도 광주군-이천군-여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오세응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2.3. 대통령경호실장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29주년 기념식 날, 1년 1주일 전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에 격분하여 박정희를 겨냥한 재일교포 문세광의 저격으로 영부인 육영수가 사망하자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피스톨 박''' 박종규 대신 경호실장이 되었다. 그리고 경호실장 임명에 따라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자 지역구는 정동성이 물려받았다,
사실 박종규나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은 전 국세청장 오정근을 경호실장으로 추천하였지만, 박정희의 의지로 결국 마흔살의 차지철이 내정되었다. 당시 신문기사는 차지철을 박정희의 친위 중의 친위라고 소개하고 있다.
'''차지철을 강력하게 추천한 것은 다름 아닌 육영수였다고 한다. 여자 관계가 깨끗한 데다 술담배도 하지 않으며, 기독교 신앙심이 깊은데다, 우직하게 박정희한테만 충성'''하니까 경호실장으로 걸맞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물론, 육영수가 말한 부분은 모두 사실이다. 그러나 차지철은 '''다른 의미로 절대 등용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2.4. 월권


대통령경호실장 재직 당시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육군 준장 전두환, 행정차장보 육군 준장 노태우와 함께.[8]
경호실장이 된 뒤 박정희는 차지철의 위상을 높인다고 '''경호실장을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했다. 심지어 현역 중장을 경호차장으로 두었으며 현역 육군 준장을 차장보에 임명하였다. 비상시에는 수도경비사령부도 지휘할 수 있게 법까지 개정하였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11·12대, 13대 대통령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 둘 다 대통령경호실 차장보 출신이다. 한 마디로 차지철보다 기수와 나이도 위인 데다[9] 한국전 참전 용사인 '''2성 장군'''인 육군 선배 장교들이 일개 '''예비역 포병 중령인 민간인 차지철'''에게 매일 군인 상관 대하듯이 거수경례를 해야 했다.
여담으로 이때 대통령비서실장과 동일한 장관급으로 격상된 경호실은 수십 년이 지난 2008년, 이명박 정부에서 비서실에 흡수되어 대통령실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차관급으로 격하되었다가, 박근혜 정부에서 경호실을 독립시키면서 다시 장관급으로 격상되었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경호실이 국정농단에 가담하는 모습을 보이자 문재인 정부가 다시 차관급으로 돌려놓았다.
1974년 취임한 그는 1978년 이후 점점 더 엉뚱한 짓을 자주 벌였다.
경호실장 전용식당을 마련한 것이 첫째였다. 자신의 위세 과시를 위한 것이다. 음식은 특급호텔의 요리사가 출장 서비스를 하는 방식인데 처음에 대통령을 모신 데 이어 여야 유력 정치인, 언론인 등을 차례로 불러들였다. 군대 내 위화감을 부르기 딱 좋은 일인데, 그는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는 '경호원가'를 만들어 임무교대 때 부르도록 했다.

"이 나라 이 겨레 구원자 되신 /님의 뜻 받들고자 여기 모였네......."

차지철의 진면목은 그 다음에 더 잘 드러난다. 1975년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박근혜는 비서관을 통해 "아버님께서 가사가 거북하니 부르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차지철은 그 다음 날 득달같이 달려와 대통령의 재고를 요청했다. 묻지마 충성의 뚝심에 밀린 박정희도 "꼭 부르겠다면 향토예비군의 노래와 섞어 불러라"라며 타협안을 제시해야 했다.
1978년부터 시작된 경호실과 수경사의 합동국기하강식은 기행의 정점이었다. 차지철은 매주 월요일 아침 경복궁 연병장에서 국기하강식과 함께 분열식을 진행했다. 당시 로열박스에 앉은 차지철 주위로는 민주공화당 중진과 장관들 같은 거물들이 함께한 진풍경이었다.
비서실장이 김계원으로 교체된 1979년부터는 '''경호실에서 비서실 업무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때 김계원은 육군 대장 출신으로 중앙정보부장직에서 해임되고 주 대만 대사를 거쳐 비서실장에 임명됐는데, 이것은 김계원이 부총리급인 중앙정보부장에서 장관급인 비서실장으로 좌천되어서 차지철이 김계원을 물로 보고 얕봤다는 말이 있다.[10]
월권의 정점은 중앙정보부와의 갈등으로, 차지철은 '''경호실의 공금으로 대규모의 사설 정보팀을 운영'''했다. 중앙정보부장박정희에게 보고할 때도, '''경호실장이 동석해야 한다'''라고 억지를 부렸다고 한다.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는 이런 월권 행위를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했고, "내가 중장 출신인데 어찌 저런 예비역 중령이랑 옥신각신하겠나"라며 분을 삭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차지철은 김재규박정희에게 '''무언가 말을 하면 중간에 잘라먹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들을 지껄이는 통에''' 김재규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나게 만들었다.
또한 박정희를 지키겠다며 상식 밖의 일들을 벌여댔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한밤 중의 전차 시위였다. 경복궁에 주둔하던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전차 1개 중대를 갖다 놓고, 밤마다 출동시킨 것이다. 서울 시민들이 자고 있을 시간인 새벽 1시부터 3시까지 전차 여러 대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청와대 부근을 빙빙 돌았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동네에 난리가 났다. 인근 주민들이 처음엔 전쟁이 난 줄로 알고 불안해했을 정도였다.
이런 일을 한 이유가 궁금했던 기자가 차지철에게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누군가 묻자 차지철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누구든지 대통령을 방해하는 자는 걸리면 큰일이 난다는 것을 공공연히 알리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위압감을 심어줘 박정희는 불가침의 성역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시위였다는 이야기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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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경호실 산하 부대들을 창설한 뒤 특제 제복을 입혀 완벽하게 박정희의 친위대로 만들려고도 하였다.'''[12] 이들 경찰·군부대들의 101, 22, 33, 55, 88 등 같은 숫자가 '''두 번''' 쓰인 독특한 이름들을 지은 것도 차지철이다.
참고로 민주화 이후에도 이들 부대는 여전히 있다. 대통령경호처/지원부대 문서 참고. 특유의 화려한 복장 또한 다소 변화하긴 했지만 여전하다. 다만 현재는 복장이 보안사항이라 공식적인 루트로는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없다.[13] 운이 좋다면 경호실 인근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박정희국군의 날 사열식을 본따 '국기 하강식'이라고 해서, ·차관 등을 초청해 대규모의 행사를 치루게 했다. 이 행사가 매우 유명해져, 장관이든 대장이든 초청을 받고 오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일화가 있다. '''각하의 친위 중의 친위가 초청한다는데, 가지 않을 배짱이 있나?''' 유일하게 초청을 받고도 가지 않은 것으로 밝혀진 사람은 김정렴 비서실장이었다.[14] 자신이라도 줏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당시 육사 출신이 장성으로 진급하면 작전차장보 전두환에게 인사를 왔는데, 전두환은 꼭 이들을 차지철에게 데려가 인사를 시켰다.[15] 차지철은 이를 매번 흡족하게 여기며, 아예 자기 이름이 새겨진 지휘봉을 하사했다. 이건 일개 경호실장이 할 짓들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당시 차지철을 두고 '''소통령(小統領)''' 또는 '''부통령 or 부각하''' 이라고 비꼬는 말도 나왔다.

2.5. 정치 개입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 등에 개입하였다. 그리하여 이철승의 온건 노선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이철승 체제의 유지를 목적으로 신도환에게 접근하였다. 또한 이택돈 등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밀월관계를 유지하였다.
민주공화당 내에서는 박찬종 등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16]
같은 해 3월, 제10대 국회가 개원하였을 때 민주공화당 이만섭 의원이 여당,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자 이를 자신의 계열인 민주공화당 모 의원으로부터 보고받고는 박정희에게 과장 보고하여 박정희가 이만섭을 제명하려고 하였다. 다만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17], 류혁인 정무수석비서관의 만류로 없던 일이 되었다.

2.6. 최태민 옹호


박정희는 당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하던 박근혜최태민과 유착하여 잡음을 일으키자, 민정수석실에 조사를 의뢰했고, 이어 김재규가 수장이던 중앙정보부에도 조사를 시켰다. 김재규는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최태민의 비리를 담은 보고서를 박정희에게 올렸다. 박정희는 이런 보고서를 보고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자신의 집무실로 김재규최태민을 불러 친국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결과적으로 최태민박근혜로부터 떼어놓지 못했고[18], 김재규는 10.26 이후 항소이유서에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기재해놓았다#. 10.26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계원은 김재규로 부터 차지철이 최태민을 옹호했다고 들었다고 한다.#
이 모든건 재판중이었던 김재규의 증언이다.

2.7. 최후


이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4.19 혁명곽영주를 거론하며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라며 사태가 심각해지면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했고, 차지철은 여기에 덧붙여 캄보디아[19]를 언급하며 "부산·마산 시민 100만~200만 명쯤 희생시켜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말로 동조하였고 이러다 큰일나겠다 하며 자신이 거사를 거행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항소이유 보충서 당시에 밝혔다. 그러나 이 말을 한 김재규는 정작 어느 장소에서 언제 들었는지 추가 증언을 하지 않았다. 그자리에 있었던 김계원,심수봉,신재순은 아무도 그런내용을 증언한게 없고 오직 김재규뿐이다.

대통령: 오늘 가보니 삽교천 공기는 좋고 공해도 없는데 신민당은 왜 그 모양이요. 오늘 삽교천 준공식 광경을 왜 KBS TV에 보도하지 않지? 정보부장, 신민당 상황은 어떻소?

김재규: 공화당 발표 때문에 다 틀렸습니다. 사표 내겠다고 한 친구들이 다 강경으로 돌아섰습니다. 아무래도 당분간 정 대행체제의 출범은 어렵겠습니다. 그리고 주류가 강해져서 다소 시끄럽겠습니다.

여기에서 정 대행체제라는 것은 9월 7일, 서울민사지방법원이,‘김영삼이 불법으로 총재가 되었다’며 신민당 조일환 등 3명의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들이 낸 “총재단집무집행정지가처분신청”을 정당한 사유로 받아들인 결과 김영삼의 총재직을 박탈하고 정운갑을 총재로 하는 대행체제를 출범시키라고 법원이 판결한 것을 의미했다.

차지철: '''그까짓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전차로 싹 깔아뭉개 버리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일단 차지철이 막나가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박정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윗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비단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뿐만 아니라, 비서실장이나 국무총리조차 자기 아랫사람인양 마구 대했다. 특히나 김재규는 박정희의 육사 동기임을 감안할 때, 기수를 매우 중요히 여기는 군부 출신으로서 이를 고깝게 여기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 고름은 1979년 10월 26일 결국 차지철을 쏘고 박정희를 쏘는 10.26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터진다.
이때 김재규 외에도 정-관-군 전반에서 차지철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심했는지, 사건 직후 박정희의 죽음이 알려졌을 때 처음엔 '차지철이 박정희를 살해했다'고 여긴 인사들이 많았다. 정승화 총장은 차지철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고 오판해서 수경사 병력을 동원해서 청와대를 원거리에서 포위하게 했고, 육군본부에서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했을 당시 김치열 법무부 장관은 '''"그 놈의 새끼가 기고만장하며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구나!"'''라며 분통을 터뜨렸는데 여기서 ''''그놈의 새끼'는 당연히 차지철을 지칭했다.''' 훗날 반란을 저지르는 전두환도 10.26 사건 직후 친구인 노태우에게 사적으로 암살을 알려주면서 차지철이 범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정도로 차지철의 전횡은 심각했다.
전직 중앙정보부장이자 미국으로 망명해서 박정희를 디스하던 김형욱의 납치 살해에도 차지철이 관여했다는 설도 있고, 다른 설에는 차지철이 아니라 김재규가 관여했다고 한다. 어쨌든 둘 중 한 명이 연루된 것은 확실하며, 10.26 직전인 그해 10월 8일 파리에서 행방불명된 김형욱은 살해되었고, 이것을 본 김재규가 자신도 권력을 잃은 후 이렇게 될 것을 우려하여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설도 있다.
어찌됐든 10월 26일 차지철은 박정희를 따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그날 저녁 안전가옥에서 만찬이 시작되었고, 궁정동에서 차지철은 김재규의 손에 최후를 맞는다. 좀 더 자세한 사건내용은 10.26 사건 항목 참조.
암살 직전 김재규는 '''"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20]라는 말을 던지고는 품속에 숨겨둔 PPK로 차지철의 팔을 쏘았다.
당시 차지철은 박정희의 경호실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차고 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박정희는 술자리에 총이 보이는 것을 매우 싫어해서 일부러 차지철에게 총을 차고 오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21] 그리고 이것이 차지철과 박정희의 운명을 결정해 버렸다.
경호실장이라는 작자가 총기를 지참하지 않은 게 어이없긴 해도, 그나마 이건 박정희의 지시 때문이라고 이해해줄 여지가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경호실장이라는 인간이 '''총격이 시작되자 대통령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이다. 차지철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오른쪽 팔에 총을 맞았는데, '''총 맞은 직후 바로 화장실로 도주해버렸다.''' 경호실장이 자기 목숨 위험하다고 최우선 경호대상인 대통령 앞에서 총 뽑는 자를 내버려두고 도망쳐버린 것이다. 물론 차지철은 전문 경호원도 아니었고 김재규가 그런 짓을 할 것인지는 상상조차도 못 했기에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도망간 것이겠지만, 경호라는 임무를 맡은 직책을 부여받았으면 자신이 보호를 해야할 대상에 병기를 뽑아드는 대상에는 맨몸으로라도 제압하거나 저지해야 한다는 건 상식인데, 그것도 무려 '''청와대 경호실장이 이런 짓을 한 것이다.''' 게다가 총을 쏜 직후 김재규의 총이 격발불량을 일으켰고, 현장에는 경호원들이 있었던 만큼, 또 차지철은 위에서도 나오듯이 무술 유단자로 힘이 장사라 작정하고 덤비면 아무리 총을 들었다한들 그당시에 건강이 상당히 안 좋았던 김재규가 버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22]
한편 차지철이 화장실로 도망간 사이 김재규는 박정희도 총으로 쏘았고, 그 직후 안전가옥 전체의 불이 꺼졌고,[23] 김재규도 PPK가 송탄불량이 나는 바람에 다른 총을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차지철은 그제서야 총에 맞은 팔을 움켜쥐며 (이미 김재규의 부하들이 다 죽이거나 무력화시킨) 경호원들을 찾는 추태를 보이다가, '''김재규가 다른 총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그러자 차지철은 화장실에서 빠져나와 "경호원, 경호원"하면서 문쪽으로 달려나갔다. 차지철이 흘리는 피가 오른쪽 벽 아래를 따라서 선을 그렸다고 한다. 차지철이 문으로 뛰어나가려는 찰나에 권총을 들고 들어오는 김재규와 마주쳤다. 김재규가 박선호로부터 받아든 38구경 리볼버 5연발 권총에는 세 발이 장전되어 있었다. 원래 다섯 발이 장전되어 있었는데 박선호가 두 발을 쏘았던 것이다.[24]
차지철은 안쪽 병풍 옆에 있던 장식용 문갑을 방패처럼 치켜들고, "김 부장, 김 부장." 하며 애원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문갑을 앞세우고 달려들었고, 김재규는 이에 가슴을 향해서 한 발을 발사했다고 한다.[25]
오른쪽 가슴 상부에서 들어간 총탄은 허파 부위를 지나 왼쪽 등 아래로 진행하다가 몸속에 멈추었다. 차 실장은 잡고 있던 문갑과 함께 뒤로 넘어졌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문갑 속에 있던 물건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그때 숨이 끊어지진 않았고 상황이 끝난 후에 중앙정보부 경비원이었던 김태원이 M16 소총으로 사망자들을 하나씩 확인사살할 때까지 살아있었다고도 한다.[26] 어쨌건 그렇게 차지철은 궁정동에서 총상으로 사망한다. 45세 생일이 불과 열흘 앞이었다.
차지철이 죽고난 뒤 체포된 김재규의 재판과정에서 생전에 대통령 경호를 들먹이며 설쳐대어 주변의 원성을 듣던 주제에 정작 대통령을 경호할 생각은커녕 화장실로 도주한 것과 이유야 어찌됐든 총을 차고 있지 않은 것 때문에 차지철은 엄청나게 비판을 받는다. 이것 때문에 정부는 원래 차지철의 시신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려 했으나 취소하고, 결국 차지철 시신은 그의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한편 신재순은 1979.11.18. 육군본부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대통령의 머리에 총을 갖다대었을 때는 다음에는 나를 쏘겠구나 생각하고 후다닥 일어나 실내 화장실로 뛰었습니다. 저의 등 뒤로 총성이 들렸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도 문 손잡이를 꼭 쥐고 있었습니다.' 바깥이 좀 조용해지자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는데 하늘을 보고 쓰러져 신음하고 있어서 일으키려고 손을 당기며 몇번 힘을 써보다가 포기하는 눈빛을 하면서. "난 못 일어날 것 같애'. 그러고는 다시 쓰러져 신음하는데 그 눈빛도 잊을 수가 없어요. 차실장이 고마운 것은, 그날 제가 대기실에서 면접을 볼 때 술을 못마신다고 했더니 그 분은 '옆에 깡통을 갖다놓을 터이니 거기에 부어버려라'고 말하더군요.'


3. 가족



3.1. 부인


초선의원 시절 결혼한 첫 번째 결혼은 얼마 되지 않아 이혼으로 끝났다. 차지철이나 그 측근들은 이 이혼이 여자의 복잡한 남성문제 및 시어머니 부양 거부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신빙성이 부족하다. 1990년대 유신특집을 기획하며 차지철 측근들을 인용해 기사를 낸 중앙일보는 이 여성의 고소에 걸려서 거액을 배상한 바 있다. 즉 법원이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누가 차지철의 부인과 감히 바람을 피울까?[27]
두 번째 부인은 피아노 연주자라고 알려져 있으며, 둘째 부인 사이에서 차지철은 딸 세 명을 두었다. 이들은 차지철이 사망한 후 전두환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이민가서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미국에서 호화생활을 즐겼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그 돈은 차지철이 빼돌린 재산일 가능성이 많다. 그것도 모자라 국가유공자 가족 신청을 했으나 미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패소 판결을 받았다.

3.2. 모친


1990년, 서울신문사 여성월간지 <QUEEN>에서 차지철의 어머니인 김대안(1898.12.06~1998.12.23) 씨가 살아있다고 하여 보도한 바 있다.링크 당시 아흔 둘이던 어머니는 홀로 가난 속에 병마로 시달리고 있었는데 차지철이 어릴 적부터 가던 교회 목사가 그나마 경제적 도움을 줘가면서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차지철은 어머니에게만은 엄청난 효자였는데, 어린 시절이 불우했기에 믿을 사람이라곤 어머니뿐이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땐 배다른 형제들에게 무시당하고 맞고 살았는데, 그가 출세하자 이 형제들이 꼬리흔들며 찾아왔지만 차지철은 "'''형제? 나에겐 어머님밖에 피붙이가 없는데 뭔 개소리냐? 다시 찾아오면 그땐 제대로 살아남기 어려울 테니 얼씬도 하지마라.'''"라는 차가운 목소리로 문 앞에서 내쫓았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효자였는지는 노태우 회고록에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어느날 박정희의 여름 휴가에 차지철과 함께 대동한 노태우는 박정희 가족들과 함께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박정희가 차지철 보고 물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자 '''차지철은 즉각 거부했다.''' 박정희가 다시 강권하자 차지철은 마지못해 바닷물에 종아리를 담궜으나 파도가 얕게 치자 즉시 질겁하며 달려나갔다. 거의 공수병 환자 같은 모습에 의아해진 박정희가 이유를 묻자 차지철이 '''"어머니가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다."'''라고 대답했고, 그 뒤로 박정희는 차지철에게 수영을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차지철이 거의 신처럼 떠받들던 박정희도 어머니보다는 후순위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골프장 오픈 기념 행사로 초청이 되어 이동하던 중에, 우연히 일을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목격하고는 그대로 차를 돌려 돌아간 일도 있었다. 어머니가 땡볕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데 자기가 놀러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28] 실제로 차지철은 죽을 때까지 골프를 치지 않았다.
그외에도 전 중앙정보부장이자 나중에 비서실장을 지내는 김계원의 모친이 편찮아서 안절부절 못할 때, 박정희에게 대신 보고하고 헬리콥터까지 빌려주는 등 "어머니"가 관련된 문제에는 평소와 다르게 매우 친절하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차지철이 살아있을 시절에는 어머니도 호강을 누렸다. 불편한 어머니를 위해서 집에 에스컬레이터를 달아줬을 정도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다 보니 김대안 할머니는 당시 이 월간지 인터뷰에서도 "내 아들이 남에게 죽일 놈 욕을 먹는 거 알지. 하지만 나에겐 하나뿐인 아들이었어. 그리고 이 에미에겐 지극정성하던 효자였고."이라며 아들을 그리워했었다. 그러나 차지철이 어머니를 위하여 마련한 큼직한 집이나 차와 돈은 어머니가 생전에 죄다 사기당하여 모조리 잃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어머니의 지인들은 차지철이 믿던 그 목사야말로 사기꾼이라며 비난했다. '''차지철이 그나마 어머니를 위하여 준비한 재산을 야금야금 다 먹었다'''고 비난했는데 당시 이 월간지에서 인터뷰하려고 하자 피했을 정도다.
참고로 당시 이 월간지에 나온 어머니는 달동네에서 볼 법한 허름한 집에서 텔레비전도 없이 이불자리와 정말 간단한 주방살림과 전자제품이라곤 커피 포트 하나 뿐인 극빈층 신세였다. 치아 상태도 말이 아니라 도 못먹고 커피 포트로 쑨 만 겨우 먹을 수 있던 비참한 신세였다. 지인들은 '''이런 할머니에게 그 목사가 경제적 도움이라고 주는 돈이 겨우 하찮은 용돈이나 던져주는 수준'''이라고 비난했다. 차지철 본인이 생전에 박정희의 채홍사 명령도 거절할 정도의 독실한 개신교인이었음을 생각하면 한편으로 씁쓸해지기도 하는 대목이다. 결국 김대안 할머니는 1998년 12월 23일 경기도 하남시 영락노인복지센터 양로원에서 만 100세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29]
사망 당시의 기사를 보면, 81년 즈음에 차지철의 아내, 즉 며느리가 3명의 딸과 함께 모두 미국으로 건너가버렸고, 차지철 외에 3명의 딸들도 일찍 사망하거나 혹은 미국으로 가버린 바람에 오랫동안 홀로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링크 이후로 차지철의 친구들과 그 옛 부하들로부터 생활비와 병원비를 지원받았던 흔적이 포착된다. 98년 사망 당시에는 미국으로 건너간 며느리는 이미 2년 전에 죽은 상태였고, 손녀들은 끝내 빈소를 찾지 않은 듯. 미국으로 건너간 셋째 딸도 건강문제로 빈소를 찾지 않았다. 자식들 중에 빈소를 찾은 사람은 둘째 딸 뿐이었다.

4. '''김재규'''와의 악연


차지철은 박정희 시대 말기에, 박정희 다음으로 가장 큰 권력을 차지해 횡포를 부리다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연회장에서 김재규에게 총살당했다.
김재규 본인은 자신은 처음부터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부정적이었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 10.26을 저질렀다고 법정에서 진술했지만, 실제로는 차지철한테 빡친 김재규가 우발적으로 총을 갈긴 다음에 이왕 이렇게 된거 하면서 박정희도 쏘았다는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주장은 주로 김재규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로 아래에 서술되는 차지철과 김재규의 개인적인 원한관계에 주목한다.
하지만 김재규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측에서도 차지철의 횡포가 김재규의 결심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이쪽에서는 차지철의 횡포를 그대로 묵인하는 박정희한테 실망한 김재규가 거사를 단행했다는 주장을 많이 한다. 실제 김재규는 박정희가 정권 말기에 총기를 잃었다는 증언을 했다.
현대사 연구자들이나 언론인들 중에도 핵심측근들간의 충성경쟁(소위 2인자박치기)을 유도해서 자신의 권력기반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던 박정희가 유신정권 말기에 가면 차지철만 편애할 정도로 합리적인 사고력을 상실했다는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30]
차지철, 김재규는 각각 유신정권 말기를 지탱하던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우두머리였고, 둘 다 엄청난 권력자였지만 사이는 견원지간이었다. 결국 차지철에게 밀려난 김재규가, 10월 26일에 일을 저지른 셈이다.
둘이 이리도 사이가 나빠진 원인은 바로 개인적인 관계 때문이다. 먼저 차지철은 김재규보다 8살이 어리다. 또한 김재규는 일제강점기일 때 대학교까지 마치고, 광복 뒤에 박정희와 본인의 고향인 구미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육군사관학교 2기(박정희와 동기)로 들어갔다. 반면 차지철은 서자였고, 공부는 곧잘 했지만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지 못해서, 태권도를 비롯한 무술 실력 덕분에 포병 간부시험에 합격했다. 알다시피 정식 장교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서, 차지철은 육사에게 엄청 열등감을 품었다. 그러다가 박정희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얻으면서 자기와 동급이거나[31] 더 높은 위치[32], 심지어 군에 더 오래 머문 사람들[33]을 하대했다. 김재규를 매우 싫어한 까닭은 또 있다. 차지철은 박정희 옆에서 5.16을 주도했고, 정권 극초창기부터 박정희의 수족처럼 일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군인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내비치다가, 혁명 반대론자로 몰려서 감옥에 갇혔다가, 박정희가 직권을 쓴 덕분에 겨우 풀려났다. 이후 6관구 사령관 (현 수도군단), 방첩부대장 (보안사령관), 3군단장을 지내다 중장으로 군 생활을 마친후 바로 유신정우회 1기 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을 거쳐 중앙정보부장까지 올라간 남자가 김재규다. 혁명을 반대한 사람이, '''박정희와 동기에 고향후배라는 이유로''' 개처럼 일한 자신하고 직급이 같은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 자체가 차지철을 무척 자극했다.
김재규에게도 차지철은 고까운 놈이었다. 일단 정통파 장교인 육사 출신도 아니고, 중장까지 올라간 본인과는 다르게 영관급인 중령에서 군생활을 마치고, 일찌감치 정치에 뛰어든 주제에, 다른 군 장성 출신을 무시하고, 과격한 행실이나 일삼았기 때문이다. 차지철은 육영수가 총에 맞아 숨진 뒤부터, 자신이 소속된 경호실을 강화하여, 또 다른 군벌집단처럼 만들었다. 게다가 정보 수집과 공작 활동은 중앙정보부 관할이지만, 차지철은 국가 예산을 동원해 경호실 산하에 또 다른 정보기구를 만들어서 정보를 수집했다. 박정희는 말년에 차지철을 중정보다 많이 믿었다. 평소부터 주먹질을 일삼던 차지철이 워낙에 쓴소리를 들었지만, 경호실장을 맡은 뒤부터 박정희에게 아부하면서, 자기 권력까지 키워 전횡을 휘둘렀다. 남들을 얕잡는 짓거리 때문에 차지철은 더욱 인망을 잃었다.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는 차지철보다 나이도 많고, 군 계급도 높지만, 차지철은 김재규를 그냥 '''김 부장!'''으로 불렀다. 지금으로 치면 국정원장이 청와대 경호실장에게 밀린 꼴이다. 물론 이 당시 경호실장도 장관급이긴 했지만 정보부장은 부총리급이었다. 업무분야가 다른 만큼 상호존대가 원칙인 기본을 지키지 않았던 셈이다.
1979년 10월 26일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차지철로부터 전화를 받은 김재규는 “바로 오늘”이라는 생각에 즉시 평소에 공을 들여온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후 4시 15분이었다.

정 총장, 오늘 저녁 좀 만났으면 하오. 궁정동 안가 알지요. 18시 30분까지 궁정동 본관으로 좀 와 주시오.

오후 4시 30분, 김재규는 곧바로 궁정동 안가, 별채 연회장에 가서 김계원 비서실장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김계원은 오후 5시 40분경에야 나타났다. 두 사람은 안가 정원에 쪼그려 앉았다. 김계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만 듣고 각하에게 보고하여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야.

기다렸다는 듯이 김재규가 내심을 털어놓았다.

형님, 오늘 저녁 이놈을 해치우겠습니다. 뒷일은 형님이 책임져 주시오.

김계원이 고개를 끄덕여 이에 동의를 표시했다.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늘 인격이하의 대우를 받아왔으며 대통령이 있는 앞에서 면박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차지철에 대한 분노는 뼈에 사무쳐 있었다.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던진 이 말은, 김재규의 가슴속에 불타고 있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에 불을 질렀을지 모른다. “오늘 해치우겠습니다. 뒷일을 책임져 주시오.” 이 엄청난 말에 김계원이 선뜻 동의한 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차지철만이 아니라 박 대통령까지도 해치우겠다는 의도에 동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재규가 언젠가는 그런 일을 벌일 것이라는 데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게 무슨 소리요?” 하고 놀라는 동시에 “차지철만 죽이고 각하를 살려두면 당신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요?” “뒷일을 생각해 보았던 거요?” 이렇게 연속해서 물었을 것이다.

5. 전두환과의 관계


전두환은 차지철보다 3살이 많았다. 차지철은 정규 육사 출신을 질투하고 있었고, 분명히 전두환에게 콤플렉스를 느꼈을 것이며, 전두환도 4년제 정규 육사 1기라는 자부심 때문에 포병 간부라는 뒷문으로 장교가 된 차지철에게 고까움을 느낄 법 했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겉으로는 좋았다고 한다.
차지철은 중령으로 예편해 장성에 대한 열등감이 컸다. 육사 12기 시험에서 떨어졌던 사실도 쉬쉬했고 육사 출신을 싫어했다. 그런 차지철의 밑에서 전두환은 경호실 차장을 맡았다.
전두환이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관 김성익에게 했던 공식 구술에 따르면 박정희는 1년에 두 번 전두환을 청와대에 초청하고 장성 진급때는 승용차를 하사하는 등 가까이 대했다. 이 때문에 청와대 돌아가는 내막을 잘 아는 전두환은 차지철과의 관계에 있어 능수능란하게 처신했다. 차지철이 국회 내무위원장으로 있을 때 업무 차 찾아갈 때마다 "충성! 중령 전두환 내무위원장님께 용무 있어 왔습니다!" 하는 신고를 하여 흡족하게 했다. 육사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를 잘 아니 고개를 숙인 것일 것이다. 특히 차지철이 자신의 위세를 보이기 위해 매주 실시한 국기하강식에서, 준장 계급장을 단 전두환이 제병지휘관이 돼 ‘경호실장을 향하여 받들어 총!’ 구령을 하며 차지철 앞에서 열병식을 지휘하곤 했다. 여기에 전두환은 하나회 회장 자격으로 장성으로 진급한 하나회 후배들을 차지철에게 소개시켰고, 차지철은 이들에게 지휘봉과 금일봉을 수여하였다.
하지만 10.26사건 이후 차지철에 대한 여론이 나쁘자 전두환은 차지철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매장하는 것을 취소하였고, 차지철 유해는 국립묘지에 가지 못하고 차지철의 어머니가 다니던 영락교회 묘지에 묻히게 된다.
전두환이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는1979년 보안사령관에 임명된 뒤 중앙정보부와 경호실 간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파악해 이것을 보고하려 10월 29일 박대통령과의 일정을 잡았다고 되어있다.

6.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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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와 차지철. 뒤에 박종규이낙선도 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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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 23일 군부대에 격려금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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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국회의원 선거 포스터. [35]

7.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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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원[36]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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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근이 열연하였다. 이때의 연기가 워낙 강렬해서 이후 박정희 시대를 다룬 드라마에서 차지철의 모습은 어느 정도 정형화된 감이 있다. 5.16 군사정변 당시 갖고있는 소총의 개머리로 헌병의 얼굴을 가격했다. 국회에선 외무위원장이라고 깝치자 이에 반발한 야당 국회의원과 청문회장에서 대판 싸우기도 했다. 경호실장이 된 뒤에는 교회에 가서 십자가에 무릎꿇고 "주여! 청와대 안에서는 각하가 저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명대사까지 하기도 했다. 그 후 말년에 김재규(박근형)에게 "김부장" 이라며 김재규의 부아를 아주 제대로 돋구게 하였고 결국 10.26 때 "이 새끼 너 건방져!"라는 말을 듣고 저격당했다. 이때 옥에티가 있는데, 카메라 앵글을 제때 조절 못해서 그런지 김재규가 총을 쏘기도 전에 차지철의 손목에 피가 보인다. 현대사 정통 정치 드라마의 딱딱한 특성상 분위기를 전환할 만한 개그 캐릭터로서의 활약 역시 두드러졌다.
  • 다큐멘터리 극장(KB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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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방영된 다큐멘터리 극장에서의 차지철은 2인 1역이었다. 23화 부마항쟁 편은 김희라가, 28화 영욕의 청와대 편은 안광진이 차지철 역할로 출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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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헌이 차지철을 연기하였다. 다만 현대극에서는 친근하면서도 능글맞은 아저씨를 주로 연기하는 정한헌이 차지철을 연기하기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는 평이 있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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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임꺽정에서 임꺽정 역으로 연기한 정흥채 씨가 연기하였고 박정희 사진 앞에 무릎을 꿇으며 그를 찬양하는 대사는 백미다. 극중 무식한 행동대장 기믹이어서(실제도 그랬지만) 알게 모르게 개그 캐릭터화. 드라마가 조기종영하는 바람에 죽는 장면은 안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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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하, 맞습니다. 캄보디아에서도 3백만 명을 죽였다는데 우리가 백만이나 2백만 정도 희생시키는 거야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보릿고개를 넘은 지가 얼마나 됐습니까? 이제서야 겨우 먹고 살 만해지니까 정신 못 차리고 데모나 하는 자식들. 초장부터 세게 밟아버려야 합니다.
정호근이 연기했으며 저격당하기 전 "이 따위 버러지 같은 놈!"이라는 말을 들었다. 제4공화국에서 나온 말은 당시 김재규가 차지철을 쏠 때 한 말로 소수설이고, 제5공화국에선 공식 수사기록인 다수설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다. 공식 수사 기록과, 사건의 목격자인 심수봉 씨나 김계원 씨의 증언 중 서로 다른 내용이 조금 존재한다. 참고로 공식 수사기록은 최근에 당시 수사기관의 강압적인 압력에 의해 나온 거짓진술임이 드러나면서 심수봉의 말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신재순과 중앙일보의 인터뷰
배우 김동현이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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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선 다른 작품들에서 개그 캐릭터를 자주 맡은 정원중이 치졸하고 유치한 모습을 연기했다. 상의는 화려한 제복을 입었는데 정작 바지는 입지 않은 채 '각하'에게 전화를 받는 모습이나[38], 명색이 경호실장이라면서 혼자 살아보려고 추태를 보이는 모습이 포인트. --덤으로 쪼인트를 굉장히 현란하고 맛깔나게 깐다. 그리고 부총리에게 "그 돼지같은경호실장은 뭐 했대요?" 라는 사후디스를 먹고 언급이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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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조연 손병호가 연기했는데, 작중에는 '장혁수(장 실장)'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작중 김재규보다 더 비중있게 나오며, 주인공 아들과 박지만이 싸웠을 때 화가 치밀어 주인공 머리에 총을 겨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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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저 새끼 군법재판 넘겨! 경호실장한테 총을 들이대고 말이야! 총살감이야 저거! 이거 쿠데타야 쿠데타!! 선배가 되가지고 말이야! 야 우리도 남산 한번 쳐들어가자! 돈까스 맛 좀 한번 보자!! 하하하"
>"저기 어디야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도 희생시켰다는데 우리가 뭐 100만 200만 땡크로 밀어버린다고 뭐 큰일이라도 나겠어요?"[39]
곽상천이란 이름으로 나오며, 이희준이 연기했다. 당초 이희준이 캐스팅되었을 때 외모가 닮지 않아 미스캐스팅이란 지적이 있었으나, 배우가 무려 25kg이나 증량을 하고, 어마어마한 연기력을 선보이면서 그런 주장을 쑥 들어가게 만들었다. 특히 김재규[40] 역을 맡은 이병헌과의 다툼을 그린 장면이나 부마사태 강경진압을 주장하는 장면은 아주 백미. 외모상으로는 싱크로율이 떨어질지 몰라도 배우의 연기력으로 실존 인물의 모습을 상당히 입체적으로 잘 고증해내었다.

8. 여담


  • 교보생명(당시 명칭은 대한교육보험)이 광화문 사옥을 건설하려 할 때 층수를 낮추라고 압박을 주었다. 그러자 오히려 대산 신용호 창업주가 그럴 바에 할복자살하겠다고 하여 역관광당하였다.#
  • 개신교 신자로서 여성 관계에 있어서는 대단히 깨끗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 당시 정치인들은 외도가 일반적이었고 정부를 두는 경우도 있었지만 차지철은 아내만 바라볼 뿐 다른 여성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만 모종의 이유로 6개월 만에 이혼했던 전처가 있기는 했다. 차지철 측의 주장으로는 시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했다거나 혹은 사생활 문제가 있었다고 하나 이혼의 진짜 사유는 당사자들만 알고 있을 것이다.
  • 차지철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차지철이 청탁을 들은 척 안 했다며 차지철의 지인에 대한 청탁이 들어오자 기도만 해주고 그냥 보냈다고 하나 차지철의 금전 문제가 깨끗했다는 측근들의 주장은 상당히 가려들어야 한다. 이렇게 차지철이 청렴했다는 주장은 경호실에서 차지철을 보좌했던 부하들이나 측근들이 소스인데 신빙성이 매우 의심스럽다. 차지철이 죽은 뒤 미국으로 이민간 후처는 거기서 2천만 달러짜리 저택을 소유하였으며 아내뿐만 아니라 처남도 비슷하였다. 심지어 차지철 사망 직후에 차지철의 아내가 사기를 당했는데 액수가 14억원이었다.[41] 피아노 연주자였던 차지철의 후처가 이유없이 이를 소유했다면 출처는 차지철밖에 생각할 수 없으니 청렴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거기다가 그렇게 사기당하고 경황없는 와중에 재산도 다 챙기지 못했을 텐데도 미국에 2천만 달러짜리 저택을 구입한 것을 보면 더 많은 자금을 보유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위의 청탁에 관련된 일화도 차지철이 그 선배와 그다지 친하지 않았거나 혹은 자기에게 떨어질 떡고물이 그리 크지 않아서 들어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 옆에 있는 사람의 손목을 잡고 "주여"하면서 기도를 하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심지어 국민의 95% 이상이 불교 신도인 태국을 방문했을 때 불상을 보고 우상숭배 운운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건 한 나라의 주요 인사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대단히 무례한 결례이며 태국에서 불교는 국교나 다름없다. 또한 한국에서도 불상은 매우 흔하게 볼 수 있었고 박정희 집권 기간에 부처님오신날공휴일로 지정된 점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무개념한 발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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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사가로 활동한 경력도 있다. 위 사진EP 음반에 담긴 '조국의 찬가'와 '민족의 노래'가 차지철 작사로 표기되어 있다. 물론 대학 학력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누군가가 작사를 대신 해주고 차지철은 이름만 올렸을 수도 있다. 둘 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건전가요 수준의 노래들이지만 박정희와 차지철 사후 이 노래들을 누가 불렀다는 기록이 전혀 없으며 작곡가 김희조에게도 마찬가지로 불명예스러운 기록이 되었다. 두 곡 중에서 '조국의 찬가'는 이곳에서, '민족의 노래'는 여기서 들어볼 수 있다. 두 영상 자료는 1970년대 초반쯤에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영상물인데 조국의 찬가는 영상 맨 앞, 민족의 찬가는 영상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들어볼 수 있다.
  • 차지철에 대한 평가는 좌우 막론하고 매우 나쁘다.[42] 박정희 정권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박정희에게 아부하면서 전횡을 일삼은 사람이 좋게 보일리 없으며 박정희 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는 악영향을 준 간신 취급을 한다. 차이점이라면 이런 사람을 매우 총애하며 감싸던 사람도 부정적으로 보는지 아니면 윗선을 현혹시켜 권력에 빌붙은 간신이라고 보는지 정도. 해당 정권에 부정적인 쪽에서는 당연히 끼리끼리 같은 놈들이라고 욕하고 해당 정권과 지도자에 긍정적인 쪽에서는 '주군을 망친 간신'으로 엇갈리는 견해는 마오쩌둥4인방, 제1공화국 시절 이승만이기붕 또는 곽영주의 평가를 두고도 유사하다. 권력 구도의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 품성 문제를 넘어 차지철의 득세 자체가 박정희 정권의 말기적 징후 중 하나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박정희의 이른바 '2인자 박치기'는 정권 내에서 박정희를 독단으로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을 가진 실세 2인자의 출현을 막는 기능을 하는 동시에 정권의 핵심 인물들간에 균형을 유지해주는 절묘한 순기능도 하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차지철이 사실상 2인자로 대두하면서 이런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으며 이는 당시 박정희가 여전히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정국에 대한 통제력과 통찰력을 상실했음[43]을 보여주는 근거로 여길 만하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는 이승만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승만도 이러한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했지만 80대에 접어들어 평소 자주 접견하는 주변의 고위 인사들을 무조건 신임하게 되었고 자유당 고위 인사들,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장(대통령경호처장)은 "부부통령"이라는 별명이 붙여질 정도로 대통령의 총애를 마패로 삼아 각종 물의를 일으켜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차지철의 경우 정권 내에서 자신의 능력과 업적 등을 크게 인정받아서 독자적인 자기 영역을 구축한 인물이 아니라 철저히 박정희에게 아부를 떨어 생긴 친위 세력이었고 세대 측면에서 봐도 박정희에 비하면 한 세대(거의 20년), 김재규김종필 등에 비해도 반 세대(10년) 가까이 젊은 인물이었음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 초중기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실세 1920년대생(50대) 세대를 거르고 1930년대생(40대) 세대인 차지철이 2인자로 부각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당성과 전문성을 가진 정부 조직 대신 개인적인 지인만을 신뢰하여 부당한 정치 개입을 허용하였다가 국익에 해를 끼친 사례는 가까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할 경우 정말 운좋게 그 심복이 재능과 인격을 겸비한 인물이 아니라면 당연히 국가에 심각한 피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 애초에 훌륭한 재능과 인격을 겸비할 정도의 인물이면 어느 개인에게 아부하기보다는 당당하게 자신의 능력을 통해 뜻을 펼치려고 할 것이다. 하다못해 정치적인 면을 배제하고 업무 능력 면으로 봐도 칭찬할 거리가 없다. 박정희의 마음에나 들었을 뿐 업적을 남긴 바도 없고 최후에도 대통령을 지키는 대통령경호실장이라는 자가 호위 대상이 위기에 쳐했는데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느 면으로 봐도 좋은 평가가 드문 것.
  • 1975년에 진도군수가 청와대에 진돗개를 선물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진도’라 부르며 정성 들여 키웠다. 진도는 대통령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공격적이었다. 1978년 어느 날 본관 2층으로 올라가던 차지철 경호실장은 달려든 진도에게 엉덩이를 물려 박정희의 신당동 사저로 ‘격리 조치’되었다. 진도가 차지철을 물어뜯을 때 주위에서 이를 발견해, 재빨리 떼어놓지 않았다면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성깔대로 엉덩이가 어떻게 되었을 것인지는 아주 선명하다. 차지철은 병상에 쉬게하고 다른 경호실장을 임명했다면 현대사는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 차지철의 딸이 국가유공자 등록 소송을 했다.기사 1심에서 법원은 차지철의 딸이 국적을 포기했으므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으나 항소를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국적과 별개로 간신배가 국가유공자가 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드라마 빛과 그림자의 등장인물인 장철환은 차지철을 모티브로 만든 가상 인물이다. 전광렬이 연기하였는데 권력에 집착하는 다혈질적인 인물상은 차지철과 매우 흡사하다.
  • 김진태의 만화 시민 쾌걸에는 동명의 정보요원이 나오지만 이름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캐릭터이다.
  • 이순재와 동갑이며 같은 한날에 출생했다.
  • 고인드립으로 총을 맞고 죽었다는 것과 맞물려 김재규의 말을 "너 GunBang져!"라고 하는 드립이 있다.

[1] 평준화 이전 서울에서 커트라인으로 5위 안에 들던 고교였다. 경기고, 경복고, 서울고 바로 다음이었다. 현재로 비유하자면 상위권 외고 정도이다.[2]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을 비롯한 하나회 창설 멤버들이 제11기, 박희도, 박준병, 박세직, 장기오가 제12기이다.[3] 뒤에 나올 김재규와의 악연은 이 컴플렉스에서 비롯되었을 거라는 추측이 많다. 김재규는 육사 출신 중장으로 전역한 군인 출신이었고 그래서인지 차지철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또 경호실과 중앙정보부라는 육영수 사후 유신정권의 가장 큰 무력집단의 수장들이었으니 더욱 그랬던 것도 있고.[4] 둔기를 쓴 거 아닌지 의심을 받을 정도로 엄청나게 패놨다고 한다.[5] 흔히 박통에 관련된 유머가 없는 이유로, 박통 옆에 수류탄을 찬 차지철이 무서워 엄두도 안 나서라는 웃픈 유머가 있다.[6] 오늘날과 달리, 1980년대까지 육군 특전사에는 보병 병과 외 포병이나 기갑 등 다른 전투병과 장교도 특전교육을 받고 특전사 전투원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진급점수 확보 기회 등의 일환이었으나, 비보병 장교들은 병과 특성상 효율이 떨어져 현재는 지원 자체가 안 된다. 전투병과 중 특전사 전투원이 되려면 보병 외엔 정보병 병과나 일부 극소수 공병(시설단), 통신 등 만 가능하고, 포병이나 기갑같은 병과는 불가능하다.[7] 경호대장은 피스톨 박 박종규였다. 훗날 이 둘이 대통령 경호실장 전후임자 관계라는 것을 생각하면 예고편인 셈.[8] 뒷줄 우측에 차규헌도 있다.[9] 전두환은 1931년생, 노태우는 1932년생이며, 둘은 육사 11기이다.[10] 오히려 전임 비서실장인 김정렴에게는 깍듯이 대했다고 한다. 김정렴박정희가 총애하던 관료인 데다가 성격이 강직하여 경호실 국기 하기식에도 불참하는 등 차지철에게 꼿꼿한 자세로 일관했는 고로 차지철이 부담스러워 했던 반면, 김계원중앙정보부장 시절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인 신민당에 대한 공작 부실로 박정희의 눈 밖에 나면서 한동안 주 대만 대사로 나가 있었던 점 등으로 인해 얕보았던 듯.[11] 출처:중앙일보 2015. 08.12자 기사 김종필의 '소이부답'.[12] 이 특제 제복이라는 것도 어이가 없는 것이, 바로 나치 독일정치깡패단 SA의 제복 디자인을 일부 차용한 것이다.[13] 참고로 사진 주소를 보면 알겠지만 해당 사진이 올라온 곳은 유용원의 군사세계다.[14]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실 차지철이 박정희 이외에 감히 개기지 못한 인물 중 한 명이 김정렴이기도 했다.[15] 물론 전두환도 겉으로는 이렇게 차지철에게 숙였지만, 속으로는 '나야말로 각하(박정희)의 친위 중의 친위인데 차지철 따위를 통해서 각하와 이어져야 하나'라며 그를 싫어했고 불만이 많았다.[16] 박찬종이 90년대 한때 "무균질 정치인"이라는 닉네임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기도 했지만, 결국 당내 (여당 야당 모두) 에서 안착하지 못했던 건 바로 70년대의 이런 행보를 대부분의 중진 정치인들이 기억했기 때문이었다.[17] 이만섭이 5년제 대륜중학교 학생일 때 체육교사였다.[18] 최태민은 박정희의 명령으로 청와대 출입이 금지 되었으나 박근혜가 제 발로 외부로 나가서 최태민을 만나는걸 경호실이든 어디든 막을수가 없었다.[19]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대학살극 킬링필드를 언급한 것은 1976년 킬링필드가 시작된 지 불과 3년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20] 본래 이 발언은 소수설이고 목격자 신재순의 증언에 따른 "각하, 차지철 저 버러지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라는 발언이 다수설이었지만, 2011년 신재순 씨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버러지 발언이 합동수사본부의 강압에 의하여 진술하였다고 털어놓았다.[21] 아마도 부인이 총격에 암살된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추정된다.[22] 하다못해 피스톨 박이라 불리던 전임 경호실장 박종규는 문세광 저격 사건 때 권총을 뽑아들고 박정희 옆을 지키며 대적자세를 취하기라도 했다. 물론 평소에 수틀리면 권총뽑아 겨누던 그답지않게 총을 떨구고 공황에 빠졌지만.[23] 이는 당시 직원이 총소리를 듣고는 전류가 터진 것으로 착각하고는 임시조치로 전원을 내려버렸기 때문이다.[24] 친우인 경호처장 정인형과 후배 경호부처장 안재송을 쏘면서 두 발을 사용했다.[25] 검사 결과에 따르면 피격 당시 차지철은 문갑을 들고 자세를 낮추고 있었음이 밝혀졌다고 한다.[26] 육군과학수사연구소 법의과장 정상우 소령의 사체검안서에 따르면 앞서 김재규가 문갑을 든 그에게 쏜 제2탄이 치명상으로서, 혈흉에 의한 호흡부전과 심장부전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한 20여 분 뒤에 일어난 김태원의 사격은 이미 죽은 사람에게 쏜 확인사살이 된다.[27] 차지철도 여자문제는 깨끗했다고 하니 진실은 그들만이 안다.[28] 어머니를 마주친 게 가능했던 이유는 해당 골프장이 이천에 있던 골프장이었기 때문이다.[29] 여담으로 1997년 9월에 김영삼 대통령 부부추석을 맞아 영락노인복지센터를 방문했다가 김대안 할머니를 만났다고 한다.[30] 박정희는 5.16 직후부터 1970년대 초반 유신 초기 까지는 2인자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절묘한 용인술을 보여주었다. 분야를 나줘서 여러 측근들에게 골고루 힘을 실어주면서 누구 한명이 튀어 나온다 싶으면 바로 반대쪽에 힘을 실어주면서 제거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충성경쟁을 유도했다. 공화당 4인방(김성곤-백남억-길재호-김진만)을 키워서 김종필계를 압박해서 3선개헌을 성사시키고, 그 뒤엔 다시 김종필계를 키워서 4인방을 정계에서 축출한게 대표적이다. 이런 방식으로 김종필, 김재춘, 박종규, 이후락, 김형욱, 윤필용, 김재규, 김성곤, 신직수, 김계원 등 수많은 인사들이 서로 견제하면서 몇년간 권세를 누리다가 다시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이런 충성경쟁에서 제대로 살아남은건 굽히는 처신을 하던 김종필뿐이다.[31] 이때 경호실장은 장관급이었다.[32] 이때 김재규를 엄청 갈궜다. 중앙정보부장은 '''장관''' 급으로, 경호실장보다도 직급이 높았고, 직급은 장관급이지만, 실제 대우는 부총리급이었다.[33] 차지철은 예비역 포병 중령 출신이지만, 박정희 때는 군부정권이었기 때문에 정부요직에 장성 출신이 수두룩하였다. 김재규는 6관구 사령관, 보안사령관, 3군단장을 지낸 예비역 중장 출신이고, 10.26 때 동석했던 김계원도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예비역 대장이다, 군 출신들은 특유의 계급문화가 있기 때문에, 현재의 직급이 같다고 할지라도, 군시절의 기수나 계급이 자신보다 높을 경우엔 선배 대우를 해주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다, 현재도 이럴진데 하물며 군이 가장 힘있는 집단이었던 70년대야 말할 필요도 없을것이다, 이는 명백한 차지철의 잘못이다.[34] 역대 대통령 중, 관련 유머가 거의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 바로 박정희와 김대중이다. 그 이유로 첫째, 두 사람 다 유머소재로 쓰기에는 별로 재미없게 보였을 것이고, 둘째, 주요 유머생산계층이 당시 관련 지지자들이며(특히 김대중), 셋째, '''수류탄을 찬 차지철 사진을 보고 유머 만들 생각이 저 멀리 달아났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35] 제7대 국회의원 선거(1967년) 당시. 둘이 직접 맞붙은 것은 아니었다(김두한은 수원, 차지철은 광주·이천). 참고로 이 선거에서 김두한은 낙선(그래도 45% 득표), 차지철은 당선됐다.[36] 1953~2011. 대표작은 용의 눈물조영규, 무인시대의 장순석 등이며 말년에는 가수로도 활동했다. 2011년 1월 6일 별세.[37]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권정달 역을 맡았는데 오히려 권정달 역할이 잘 어울린다는 평.[38] 이건 김계원을 그만큼 개무시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39] 이 대사 자체는 상술한 정호근의 대사를 벤치마킹했을 가능성이 있다.[40] 영화에서는 김규평이라는 이름으로 등장[41] 당시 막 분양된 40여 평형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약 3천만원이었다. 14억원이면 지금도 거금이지만 그 때는 감히 상상도 못했을 금액이다. 2017년 시점으로 환산하면 수백억 대다.[42] 당대에도 평가가 좋지는 않았는데 오죽하면 박정희의 암살 소식이 전해졌을 때 정부 인사들이 가장 먼저 의심한게 차지철이었다.[43] 이 시기에 박정희는 권력 구도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정권 내부에서의 정치적 감각을 상실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