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대 국회의원 선거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

1963년 11월 26일
6대 총선

1967년 6월 8일
'''7대 총선'''

1971년 5월 25일
8대 총선
}}}
'''투표율'''
76.1%▲ 4.0%p
'''선거 결과'''
[image]

<color=#70000b> '''정당'''
<color=#70000b> '''지역구'''
<color=#70000b> {{{#!wiki style="margin: 0 -10px;"'''전국구'''
<color=#70000b> '''총합'''
<color=#70000b> '''비율'''
'''민주공화당''']]
'''102석'''
'''27석'''
'''129석'''
'''73.7%'''
'''신민당''']]
'''28석'''
'''17석'''
'''45석'''
'''25.7%'''
'''대중당''']]
1석
0석
1석
0.6%
1. 개요
2. 결과


1. 개요


1967년 6월 8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76.1%를 기록했다. 131석의 지역구'''(소선거구제)'''와 44석의 '''전국구'''를 선출했다. '''무소속 출마는 여전히 금지'''되었고, 선거법은 6대 총선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2. 결과


[image]
'''제7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제1당'''

'''129석'''
제2당

45석
제3당

1석
민주공화당이 약 50%의 득표율로 개헌선을 넘는 129석을 얻었고, 신민당은 당초 예상보다 저조한 약 33%의 득표율로 45석에 그쳤다. 그래도 대도시에선 승리를 챙겼고 민주공화당 득표율이 저번보다 많이 올라가 6대 총선과 달리 전국구 의석만큼은 그나마 공평하게 분배된게 신민당 입장에선 위안이라면 위안점. 사실 기타 정당들이 표를 갉아먹은 여파도 꽤 컸다.
해당 선거는 이후 전개로도 주목받았는데, 왜냐하면 '6.8 부정선거'라는 닉네임이 붙을만큼 선거가 끝난 뒤 부정선거 논란이 거세게 일었고 실제 시위와 당선 맥락의 변화도 일어났기 때문. 농촌 지역에서 속칭 "막걸리고무신" 선거라고 불리는 금품, 물품 살포행위 같은 선거법 위반 행위가 대형 스케일로 저질러져서 여당이 농촌 지역구를 싹쓸이했는데, 이에 신민당이 전면 무효를 외치며 재선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다만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을 뿐 신민당도 이러한 막걸리, 고무신 살포를 행하는 흑역사를 찍기도 했다고 한다.(...)
하여튼 정황증거가 너무 명확하다보니, 분노한 대학가에서 휴학 열풍까지 일 정도가 되자 정부측도 여론의 압력에 부딪혀 부랴부랴 1명의 당선자를 정정하고 공화당은 꼬리자르기식으로 일단 7명을 제명 조치했다. 이에 야당 낙선자들은 소송을 냈으나 재보선이 대대적으로 벌어져서 정부의 권위가 추락하고 공화당 의석이 개헌선 아래로 떨어지는 건 싫어했던[1] 당시 행정부가 사법부에 압력을 넣은 탓에 대부분 패소하고 만다.[2] 한편, 공화당 탈당자들 중 일부는 의원직도 내려놓은 후 정계 은퇴를 하기도 했지만[3] 나머지는 '10·5구락부(클럽)'이란 단체를 구성했다가, 3선 개헌 시즌에 은근슬쩍 친정인 민주공화당으로 복당한다.
경향신문6월 12일 기사에서 공화당이 압승하고 신민당이 참패한 것, 불과 얼마 전 대선에서 나타난 지역별 특정 정당 선호가 그대로 재연되는 대신 전국에서 공화당이 이긴 것, 지난 대선 당시 윤보선이 이긴 호남 지역에서 호남 푸대접론에도 불구하고 민주공화당이 이긴 것이나 반대로 박정희가 이겼던 부산에서 신민당이 압승한 것 등은 완전히 일반의 예상을 뒤엎은 것이며, 이승만 정권 시절의 여촌야도 현상이 재현된 것, 군소 정당들은 한국독립당 전진한 후보나 자유당 장택상 후보 등 원로급 정치인들마저 낙선하는 등 전혀 힘을 쓰지 못한 것, 공개 투표, 대리 투표, 매표, 투표장 폭력 사건, 개표 조작 등으로 수많은 부정 선거 논란이 일어난 것 등이 흥미로운(?) 점이라고 평했다.[4]
사족으로 이때 경상남도는 신민당이 1석만 차지했는데, 그곳이 어딘가 하면 바로 성낙현이 당선 된 창녕군이었다. 오늘날 창녕이 합천군, 산청군 등과 같이 보수정당의 텃밭 지역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꽤나 격세지감인데, 아니나 다를까, 성낙현은 3선 개헌을 앞두고 개헌에 찬동하는 변절을 해버린다.(...) 실제 성낙현은 신민당의 셀프 해산으로 의원직을 잃은 후 민주공화당에 입당했으며, 창녕군도 이후 보수 텃밭으로 오늘에 이르게 된다.

[1] 실제 해당 국회 시기 3선 개헌안이 통과된다. 어찌보면 헌정 역사에 분기점이 된 선거였던 것.[2] 예외적으로 김옥선만은 승소하여 늦깎이 등원을 하였다. 이후 이중재는 재보궐선거로 당선되었다.[3] 이중엔 김종필도 있었는데, 여긴 선거 때문에 직후 탈당한건 아니고, 박정희의 2인자 견제가 원체 심해지자 6.8 부정선거의 책임을 진다는 명목하에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1968년 6월 2일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탈당한다.[4] 해당 기사에선 당시 공화당 내 차기 대권 경쟁도 잠깐 다루고 있는데, 알다시피 당시 그런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들은 얼마 안 가 눈물을 머금고 꿈을 접어야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