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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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8대 내무부 장관
최인규
崔仁圭 | Choi In-kyu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1919년 3월 9일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미사리
(現 경기도 하남시)
'''사망'''
1961년 12월 21일 (42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울형무소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본관'''
경주 최씨
'''재임기간'''
제7대 교통부 장관
1958년 9월 9일 ~ 1959년 3월 20일
제18대 내무부 장관
1959년 3월 20일 ~ 1960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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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형제자매'''
남동생 최형규
'''학력'''
상일공립보통학교 (졸업)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고등상업학교 (졸업)
뉴욕 대학교 (상학과 / 학사)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3기)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4'''
'''경력'''
대한교역공사 업무부장
한국무역진흥주식회사 상무이사
유엔한국부흥위원회 뉴욕주재 한국대표
제2대 외자청장
제4대 국회의원 (경기도 광주/자유당)
제7대 교통부장관
제18대 내무부장관

1. 개요
2. 생애
3. 미디어에서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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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공무원.
할 줄 아는 것이 이승만에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라고 아첨을 하는 것밖에 없어 세간에서는 지당장관(至當長官)이라 불렀다.

2. 생애


1919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광주군 구천면(현 서울특별시 강동구) 상일공립보통학교(上一公立普通學校)에 입학, 4학년 때인 1932년 서울중앙기독교청년회 속성과에서 1년을 공부한 실력으로 1933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보결시험에 합격하였다.
1941년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에 입사하여 광복 때까지 근무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거쳐 1947년 뉴욕대학교 상과대학에 편입학하고, 1949년 졸업하여 귀국하였다. 1949년 대한교역공사(大韓交易公社)업무부장으로 들어가 1950년 동남아시아 무역사절단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이사장까지 승진하였다. 그러나 이 공사의 해산으로 1951년 발족한 한국무역진흥주식회사로 옮겨 상무이사로 재직했다. 1955년 이기붕의 알선으로 국제연합 한국부흥위원회(UNKRA) 뉴욕주재 한국대표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제네바 회담에서 한국업저버로 참석하였으며, 1956년 외자청장(外資廳長)이 되었다.
보다시피 전형적인 무역쪽 인물.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익희와 선거에서 대결했다가 낙선하고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익희의 아들 신하균을 물리치고 당선된 바 있다.
1959년 3월에는 이기붕의 추천으로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최인규는 나태하게 지령을 수행하다 실수로 이기붕이 당선을 위해 부정투표한다는 지령을 언론과 신문에 폭로되었다. 임화수의 지나친 권력욕심으로 부정투표가 실행되었고 부정선거로 이기붕이 당선되었고 그 일로 인해 전국적으로 유혈충돌이 벌여졌다.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총지휘하여 유혈사태가 벌어졌고 시위대와 학생들을 발포 명령내리며 진압을 하고 체포한 시위대와 학생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고문을 했고 그 과정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4·19 혁명의 한 원인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3.15 선거 직후 자유당측에서 수습한다며 내무장관직을 사퇴한다. 후임으로 들어온게 홍진기 장관이다. 홍진기[1]도 혁명재판에서 유혈진압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다른 사람 모두 사형되는 와중에 소리소문없이 사면돼서 출소했다.
장관 사임 후 아내가 해외피신을 권유하자 평생 처음 빰을 때렸다고 한다. 4.19혁명 당시 아내와 여동생의 권유로 마지 못해 피해있었다. 5월 초에 법의 판결을 받겠다며 서둘러 자진출두하였다.(미망인 강인화 여사 인터뷰)
결국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으로 1961년 12월 21일 곽영주이정재, 임화수와 같이 교수형당한다.
재판에선 자신의 죄를 인정했으며 다른 이들과 달리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처형 뒤 기자들이 최인규의 집에 찾아가 그의 아버지에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임금께 충성하다가 역적들에게 목숨을 잃었으니 내 아들은 충신이다."''' 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관련 기사

3. 미디어에서


조긍하 감독이 1968년에 만든 영화 <잘 돼 갑니다>에선 허장강이 맡았으며, MBC 공화국 시리즈(제1공화국, 제2공화국)에서는 남성훈이 연기하였다. 제1공화국에선 이기붕 부부에게 접근하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하며, 사격명령을 내리면서 다 죽여버리라고 아주 악랄하게 나오지만,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자 모든 걸 포기한 듯이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있다가 해외 도주를 권유하는 아내 따귀를 때리면서 "사내가 일을 저질렀으면 모든 책임을 져야지, 그렇게 더럽게 살 순 없다."고 일갈한다. 그리고 재판에서 발포명령을 인정하고 교수형당한다. 제2공화국에서는 늙은 이승만과 병약한 이기붕을 전면에 내세우고 실권을 행사하려는 야심가로 등장하며 그때문에 이기붕이 민주당 구파와 막후협상을 벌이는 것을 기자들에게 은근슬쩍 흘려서 막후협상을 결렬시키고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올리기 위해 부정선거를 획책한다. 결국 부정선거에 항의한 3.15 의거가 터지자 스스로 내무장관직에서 물러나고 조용히 때를 기다리지만 결국 4.19 혁명이 터지고 허정 과도정부에서 체포령을 내리자 외국으로 도피하라는 아내의 권유를 뿌리치고 체포당한다.
이환경 작가의 드라마 무풍지대야인시대에서는 각각 민욱임선택이 연기하였는데, 위의 공화국 시리즈에서 해당 인물을 상당히 치밀하고 강단있게 그리는 것과 상반되게 어쩐지 찌질이에 가까운 캐릭터로 나온다. 사형당하기 직전에도 곽영주에게 설마 정치범인 자신들을 죽이겠냐느니, 몇년 살다가 감형되어 나올것이라느니, 그깟 부정선거한게 뭐 어떠냐느니, 군사정권놈들도 그 자리에 앉으면 자기들처럼 똑같이 할게 뻔하다는 식의 개념없는 발언을 한다. 그러나 역사대로 처형당한다.
그런데 비중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곽영주는 123화에서 이름이 나오거나 처형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최인규와 돼지는 이름도 안 나오고 처형당하는 장면이 아예 생략되었다.[2]

4. 여담


  • 동생 최형규는 1964년 박정희 정부에서 문교부 차관을 잠시 지내기도 했다. 최형규는 흥남비료공장 직공, 연탄 장사, 쌀 장사 등을 하며 재산을 모았고 택시회사, 화물운수사업을 하는 기업인으로 살았다고 전한다. 그런데 그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찾아가 비밀리에 장학금을 전달하고 1993년 사재 153억 원을 기부하여 자신과 부인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딴 ‘형애장학재단’을 설립하였고, 2004년에는 오랫동안 살아온 집을 팔아 70억원을 종로구에 기부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극구 꺼렸고, 형애장학재단 관계자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까지 6000여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지만, 장학금을 받은 학생 대부분이 최 이사장의 이름조차 모르며 그 흔한 장학금 전달식 사진 한번 찍은 적이 없다"고 증언하였다. 관련 기사
  • 일각에서는 이승만 정부 때 일본화된 불교를 청산[3]하기 위해 시행된 불교정화운동(비구 VS 대처승)을 최인규가 주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해방 직후만 해도 민중들이 대부분 불교를 따르면서 주요 기부금(시주)이 사찰에 집중되어 있던 터라[4], 불교계에서 보유한 자금, 토지 등은 정치자금 난에 시달리는 자유당이 노리기 딱 좋았다는 요지.[5][6]


[1] 삼성가 이건희 회장의 장인이다. 이후 중앙일보동양방송의 초대 사장을 역임하였다. [2] 실제에선 돼지는 처형당하는 장면이 안나오는게 맞다. 사실 이정재랑 같은날에 집행되었기 때문이다.[3] 조선총독부에서 결혼을 한 승려들만 사찰의 주지가 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하여 해방 직후 전국의 주요 사찰에 모두 가정을 꾸린 대처승이 들어간 상태였다.[4] 해방 후 정부에서 토지소유 현황을 파악해보니 전국 6대 지주와 사찰(절)들이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국민 대부분은 소작농이더란 결과가 나왔다고[5] 이승만 본인은 효봉처럼 수행 경지가 깊은 고승들에게 존경의 뜻을 비추며,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돕고자 했다고 한다. 그리고 8.15 광복 전후하여 가정을 꾸리지 않은 비구승들과 대처승들 간에 송광사, 해인사 등 주요 사찰은 당장 돌려받되, 나머지는 차후 시간을 두고 조계종에 돌려주는 타협안이 만들어진 상황이었다고. 대표적인 사례가 2003년도에 입적한 서옹 선사로, 불교 정화운동이 벌어지기 전만 해도, 이제 갓 출가한 17살의 사미승인 자신을 정식 출가한 수행자라 하여 상석(上席)인 맨 앞자리에 세우고, 나이든 대처승들은 뒤에서 예불을 드리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다만, 일부 혈기 왕성한 젊은 승려들이 이 조치에 큰 불만을 품은 분위기를 눈치챈 정부 인사들이 최인규 내무부 장관을 주축으로, 이들 젊은 스님들을 부추기는 한편, 언론, 일부 주먹들을 머리를 깎아 스님으로 위장시켜 동원해 비구승들을 지원해, 결국 사단이 난 것이 해방 후 일어난 불교정화 운동의 또다른 일면이라는 "주장".[6] 독실한 크리스천인 이승만 박사의 호감을 얻을 겸, 정치자금을 확보할 겸 겸사겸사 일을 벌였다는 시각이기도 하다. 실제로 광주 보이스카웃 건물 등 대도시 시내권의 오래된 주요 건물 중에는 본래 사찰 소유의 토지였다가 이 정화운동 후 유야무야 개신교 계열 단체에 넘어간 사실이 있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