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령 전투

 

'''쌍령 전투'''
雙嶺 戰鬪

[image]
'''명칭'''
한국어 : 쌍령 전투(雙嶺 戰鬪)
'''날짜'''
1637년 1월 28일 (인조 15년 정축년 1월 3일)
'''장소'''
경기도 광주부 쌍령(현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
'''결과'''
경상도 근왕병의 전의 상실 및 남한산성의 구원 실패
'''교전국'''
[image] 조선
[image] 청나라
'''지휘관'''
[image] 민영 ''''''
[image] 허완 ''''''
[image] 선세강 '''''' [1]
[image] 윤여임 ''''''
[image] 손종로 ''''''
[image] 백선남 ''''''
[image] 김충선[2]
[image] 아이신기오로 요토
[image] 실투 '''''' [3]
[image] 악다귀[4]
'''병력'''
8,000명[5]
3,000명 ~ 6, 000명
'''피해 규모'''
지휘부 괴멸
전사자 2,600여 명
최고 지휘관 전사[6]
피해 규모 불명
1. 개요
2. 쌍령 전투의 전개
2.1. 조선측의 기록
2.2. 청측의 기록
3. 쌍령 전투에 대한 평가
3.1. 4만 병력 패퇴설
3.2. 지휘관 무능설
3.3. 여타 패인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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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병자호란 때 있었던 전투. 흔히 조선군이 대패한 전투로 잘 알려져있고 실제로도 대패한 전투이지만 청측에서는 전투를 지휘하던 최고 지휘관이 전사하고 또 그 지휘관의 시신도 버리고 팔기군들이 무질서하게 퇴각할 만큼 은근히 격전이었던 전투이다.

2. 쌍령 전투의 전개



2.1. 조선측의 기록


1637년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북상한 경상도 속오군 4만명[7]은 1월 3일 아침 경기도 광주 쌍령에서 기병 위주의 청군과 마주치게 된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은 경상 우병사 민영과 경상 좌병사 허완이었으며 4만 군사의 대부분이 조총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만 이 중에 실제 투입된 병력은 8천으로 이들이 허완, 민영의 지휘하에 전투에 참여했는데, 한번에 4만 명을 다 동원할 수 없어서 먼저 집결한 병력으로 추정된다.
청나라군의 선봉 33명이 나무 방패를 들고 돌격해왔는데, '''지휘권도 없는''' 경상감사 심연의 종사관 도경유[8]가 '''제멋대로''' 비장[9] 박충겸을 '''참수'''하고 총포 사격을 명한다. 대개 전투를 회피하던 장수들(그 회피가 타당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에게 윗선에서 얼른 싸우라는 압박이 가해지는 경우는 흔했고, 윗선의 무리한 명령을 따르다가 부대가 전멸하는 경우도 흔했다.[10] 반대로 윗선의 명령을 어기고 버티다가 지휘관 자리를 박탈당하거나 반역을 의심받는 경우 역시도 흔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수장의 지휘권을 박탈하는 것도 아니고 일개 비장을 처형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은 세계사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총포 사격으로 청군은 100보 떨어진 지점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포수들이 공명심에 연달아 함부로 쏘아대는 바람에 화약이 떨어지고 만다. 그 덕분에 화약을 더 달라고 소리치고 경포수를 더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청군이 낌새를 알아채고 다시 돌격하여 목책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안동의 영장 선세강이 직접 지휘하여 화살 30여 발을 쏘았지만 나무 방패에 맞고 나중에는 화살이 다 떨어지자 결국 적의 칼에 사망하고 만다.
청군이 목책 안으로 들어오자 조선군은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저절로 무너져 달아나고 허완은 겁을 집어먹고 3번이나 말에서 떨어진 끝에 도망치던 아군에게 밟혀 죽었다. 일설에선 허완이 말에서 3번 떨어지고 분전하다가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는 말도 있고 다른 설에선 청군의 칼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좌군은 완전히 무너지기에 이른다. 그나마 평지였기 때문인지 다수가 도망치는 데 성공하기는 했으나 지휘부가 전멸하여 부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참고로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허완은 나이가 많고 겁에 질려 출병을 할때 눈물을 흘렸고, 그 주변 사람들은 나라가 망했다며 통곡을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오른쪽의 민영이 지휘하는 군은 그나마 허완 부대에 비해 군기가 잡혀 있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지급된 10발의 탄약을 모두 소모[11]한 탓에 다시 탄약을 나누어 주고 있는데 종사관 도경유에게 처형당한 '''비장 박충겸의 아들이 원한을 품고''' 폭발 사고를 일으켰다. 결국 탄약을 보급하던 수령 2명과 군사 수십이 폭사하고 조선군은 동요하게 된다. 이 때 팔기군 300기가 공격을 감행하자 전의를 상실한 조선군은 그대로 붕괴됐고, 진을 친 곳도 후퇴에 불리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 부대는 확실하게 전멸을 당했다.[12] 한편 경기도 여주 부근에 주둔하던 경상감사 심연은 쌍령에서의 패전 소식을 듣자 전의를 잃고 조령으로 후퇴한다.
청군이 소수의 병력으로 조선군의 전열을 붕괴시키고 나머지 병력으로 전과확대전을 벌였기에 조선군 지휘부는 완전히 소멸했다. 용인 전투 때와 달리 적어도 2,600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7만의 병력 중 1천이 전사한 용인 전투 때보다 훨씬 큰 피해이다. 나머지는 생환했으나 용인 전투 때와 달리 지휘부가 전멸한 상황이라 수습되지 못하고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경상도 근왕군은 건재했으나 이 패배를 접하고 사기가 꺾여 반격을 하지 못하고 조령에서 대기해야 했다. 그리고 그 직후 인조가 항복하게 된다.

2.2. 청측의 기록


'''그런데''' 청 태종 문황제실록에 따르면 '''조선측의 기록과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들'''이 나온다.
기록을 요약하면 요토는 실투와 악다귀에게 병력을 주어 조선군과 치열하게 싸우게 했지만 조선측의 기록과 달리 이 악다귀가 이끌었던 1차 돌격이 청군의 패배로 돌아갔고 1차 돌격에 실패한 악다귀는 결국 부상을 입고 먼저 돌아왔으며, 요토의 회군령에 병력을 퇴각시키던 실투 또한 상처를 입고 말에서 떨어져 그대로 전사해버리자 이후 급히 퇴각하던 팔기군을 고마이가 저지시키고 "장수(실투)의 시신을 버리고 갈 수 없다" 말했고 이에 호군교(바야라 주완 이 다) 부당커러가 도주하던 팔기 병사 3명을 베어버리고 병졸들에게 실투의 시체를 찾아오라 명했음에도 조선군의 반격이 만만치 않자 부당커러도 지휘관 실투의 시신 수습을 포기하고 본영으로 그대로 퇴각해버렸고 이후 청군 병사들이 전진하여 적병을 공격할 때 부당커러 또한 전진하지 않았고 석교하를 건너서 곧바로 본영으로 향하여 가버렸기 때문에 많은 청군 장수들과 팔기군 병사들이 해당 전투에서의 추태를 이유로 사형과 기타 여러가지 형벌들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들을 참조.
토탈워 마이너 갤러리-쌍령전투의 기묘함
역사 카페 부흥-병자호란 청실록 47부

3. 쌍령 전투에 대한 평가



3.1. 4만 병력 패퇴설


이 전투가 유명해진 이유는 4만에 달하는 조선군이 고작 300기의 청나라 기병에게 패퇴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인데, 이 청나라 기병 300명이 당시 전투에 참여한 모든 청군의 숫자라고 단정할 근거는 희박하다. 물론 전체 청나라 병력 수는 300명이 아닌 6,000여명 정도로 추정이 되지만, 민영이 이끄는 조선군 부대와 교전한 청나라 팔기군의 숫자는 300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인조 34권, 15년(1637년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2월 26일(병신) 2번째 기사).
우선 쌍령 전투 당시 청군을 지휘했던 장수는 『청사고』와 『청태종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아이신기오로 요토'로 추정되는데,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성해응도 그의 문집인 『풍천록』에서, 쌍령 전투 당시를 '至如同時雙嶺之戰 虜帥岳託乃以三十三人'라 서술하여 적의 사령관을 요토와 33인의 장수로 책정한 바가 있다. 요토는 거의 바닥에 가까운 우리 나라에서의 인지도와는 달리 '''누르하치의 사실상 장남[13]인 '다이산'의 장남, 즉 누르하치의 손자로 청 태종 홍타이지를 황제로 옹립시켜준 실력자이며, 당시 팔기군 중 한 부대인 양홍기의 대장'''이기까지 했다. 당시 팔기의 기군 하나 당 책정된 병사가 만주 팔기의 경우 7500명이 상한이라는 점, 『황조문헌통고』에 '(청 태종이) 숭덕 원년(1636년) 12월에 요토 등으로 하여금 3000명의 군대를 이끌게 했다'는 기록과 이후 병력 증원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 점을 고려해보면 쌍령 전투 당시 요토가 이끈 병력은 3000명은 넘겨도 최대치인 7500명에는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요토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철군할 때 후방 부대를 통솔하는 임무를 맡게된다.
또한, 지휘관이 요토 말고 1명 더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화 전투에서 지휘를 했던 유림이 훗날 병자호란이 끝나고 쌍령 전투에 참전한 군관에게 '''그놈들 지휘관이 누구길래 우리 조선군은 그렇게 엿 먹은거임?'''라고 물어보았는데, 그 군관은 "오곽사라는 자와 황족인 아이신기오로 요토입니다."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그래서 요토 말고 오곽사라는 장수도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14]
실제로 승정원 일기에는 허완의 아들 허장이 자신의 아버지가 도망쳤다는 사실에 대해 당시의 전투 상황을 술회하며 올린 상소가 기재되어 있는데, ''''날이 밝자 적기 수백이 진 앞까지 쳐올라왔는데, 이어 수천의 적기가 산성으로부터 엄습해오니, 바야흐로 산위에서 총탄과 화살이 서로 오고갔습니다.' '''라며 쌍령 전투 당시 청군이 수천 명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신재호(필명) 씨 또한 이러한 논지의 주장을 펼친 바 있으며, 우리나라의 국방 전사 편찬 위원회에서 나온 『병자호란사』도 비록 근거가 되는 사료는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쌍령 전투에 6000명의 청군이 참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완의 반대편 진영에 주둔했던 민영을 사령관으로 하는 조선 병사들은 불과 팔기군 300명의 돌격에 허무하게 전열이 무너져내린 것은 사실이다. 애초 허완과 민영은 각각 집결한 조선군 병력을 두 부대로 나누어 쌍령 고개 양쪽에 진을 쳤는데, 그 중 민영이 이끌고 있던 수천 병졸들이 팔기군 300명의 돌격에 전투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허무하게 와해 및 전멸한 것인데, 사실 이것도 민영군 진영에서 화약을 보충하려던중 쌓아놓은 화약이 폭발하여,(박충겸의 아들이 보복성으로 불을 질렀다 한다.) 군관 두명과 백여명이 폭사한 영향이 더 클것이다.

3.2. 지휘관 무능설


정신적으로 잘 훈련되지 않고 머릿수만 불린 병사, 급히 출진하느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물자, 무능한 장교들의 형편없는 지휘와 갑작스레 이루어진 지휘관의 처형이 낳은 총체적 비극이란 인식이 있으나, 지휘관이었던 허완은 '''사람 보는 눈이 매우 깐깐한 이순신 장군'''에게 능력을 인정받고[15] 유성룡에게도 천거받아 여진족을 상대로 승전 경험도 있던 장수였다.
위의 글에서도 적혀있듯이 허완이 3번 낙마했단 사실 자체가 전열이 붕괴되는 상황에도 지휘권을 유지하기 위해 낙마를 했음에도 말에 세번씩이나 다시 탔단 이야기며 조총수들은 탄약과 화약을 부족하게 보급받은 것도 아니었다.
속오군의 훈련도를 가지고 뭐라 그러는데 훈련도가 개판이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걸 조선군 지휘관들이 몰랐던 것도 아니고 훈련도를 감안하지 않은 작전을 세웠다가 무너진 것도 아니다.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인 승전이었던 광교산 전투김화 전투도 속오군이 주축이 되어 이긴 전투였고, 훈련 수준이 낮지만 그래도 전의가 남아 있는 속오군을 어떻게든 추스려 그나마 사상자가 최소화되고 방어가 용이한 전장에 배치하고 지휘관이 적극적으로 지휘를 하니 비록 전투 직후 탄약이고 뭐고 다 떨어져 퇴각해야 하긴 했지만 우세한 청군을 적어도 한 번 막아낼 수는 있었다.
따라서 '''쌍령 전투의 가장 큰 패인은 군무에 무지한 문신이 제멋대로 지휘에 개입하면서 총 지휘관이 제대로 부대를 통제할 수 없어진 것에 있다.'''[16] 승전이었던 광교산 전투와 김화 전투는 모두 지휘관이 무신이었고 지휘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만 봐도 큰 차이가 있었다.
실제로 쌍령 전투를 고증해본 결과 패장인 허완의 지휘는 군사의 배치부터 지휘 요소에선 부족함이 없었다. 단지 최전선을 맡은 하급 지휘관이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군에게 목이 잘려 부대의 통제가 힘들어진 상황을 감안하지 못한것이 결정적인 원인인데 이 경우가 워낙 상식을 벗어난 일인지라 허완의 책임 요소는 없다고 봐야 한다. 부대 통제를 위해 만든 장교단이 아군에게 박살나는데 뭘 어쩌란 말인가? 즉 '''군사에 무지한 문관이 정신나간 훈수질로 역사에 남을 패전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봐야 한다.''' 역으로 승리하거나 패했어도 상식적으로 패할 만해서 패한 전투[17]는 다 지휘관이 제몫을 한 전투였다.
허완의 부대가 후퇴했더라도 다른 부대가 남아있었기에 방어는 가능했을 수도 있으나 민영 역시 문관인데다 적도 아닌 멍청한 문관에게 참수당해 죽은 박충겸의 아들이 탄약고를 날려버려 방어에 실패하고 남은 부대도 후퇴했다.

3.3. 여타 패인


참고로 근대 영국군은 다른 나라에 비해 속사를 추구하면서도 전투 경험 많은 부사관에 따른 사격 통제를 극도로 중시하였는데, 바로 위에서 좌군이 무너지던 것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적군이 다가오면 사람은 공포심이 일어나 자기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겨버리게 되고, 일단 옆에서 누군가 쏘기 시작하면 그 분위기가 퍼지는 것도 순식간이다. 경험을 통해 이를 알고 있었던 영국군은 '''적군의 눈에서 흰자가 보이게 될 때'''까지 이를 악물고 사격을 참도록 훈련시켰으며, 부사관의 지시보다 앞서 방아쇠를 당긴 병사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응징이 가해졌다.
사실 전열 보병 전술이 극대화되려면 가혹한 군기와 통제가 필수이다. 영국군의 전열보병 레드 코트가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두 가지 요인은 실탄 사격 훈련과 엄정한 군기였다. [18]
중앙군 최정예인 훈련도감이나 어영청 병력은 지휘관이 추태를 보여도 스스로 메우며 싸울 자질이 있었지만 속오군 포수들은 숙련도와 군기를 담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군기를 잡고, 사격을 통제할 하급 군관과 장교[19]들의 책임이 막중했는데, 임진왜란 때부터 병자호란 때까지 조선 중기 전쟁하는 내내 숫자가 부족해 고생했던 계급이다. [20] 수가 적은 만큼 숙련된 하급 지휘관 한 명 한 명이 중요했는데 전투 직전 아군 손에 목이 잘려나가고 교체되면 군기고 뭐고 없게 된다. 참고로 레드 코트들의 엄격한 군기는 엄중한 형벌에 기반했는데, 그 정도가 '확실하게 맞아 죽는 후퇴를 하느니 확률적으로 살 가능성이 있는 전열을 지킨다'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철저히 규정에 따른 것으로서 똥군기나 가혹 행위로 보아서는 안 된다. 어떠한 행위에는 태형 몇 대라는 식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21] 이순신 장군 또한 해전에서 멋대로 포격을 감행한 장수들에 대해서는 최소 참수형을 시행하였다. 군대에 있어서 통제가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보인다.

4. 기타


도경유는 패전의 책임으로 귀양을 가게 되나 얼마 안돼서 암살을 당한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이는 박충겸의 두 아들의 소행으로 그들은 체포되었으나 2년 후 의옥[22]으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대구 병암서원에서 도경유와 그의 형 도응유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23]
병자호란 부분은 대략 어떤 전투들이(승전, 패전을 가리지 않고) 벌어졌는지 지도로 표기가 안되어 있기에 교과서에는 대개 실려있지 않다. 심지어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승리한 승전인 광교산 전투[24]김화 전투도 실려있지 않다.

[1] 연려실기술에서는 허완의 부장이 안동영장 선약해였다고 나와있지만, 순조 실록 32권(순조 31년 9월 1일 경술 1번째 기사)에 따르면 허완의 부장으로 참전해서 전사한 안동영장은 선세강이다. 선약해는 선세강의 11촌 조카로,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진도 군수 선의문의 아들이며 심양일기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분은 경상 수군 절도사로 재직 중 병사했다.[2] 임진왜란 당시 투항한 사야가,즉 그 김충선이 맞다. 참고로 김충선은 이 전투에서 무려''' 500기를 사살한다!'''[3] 조선군을 향해 2차 돌격을 감행하다 입은 부상으로 본진으로 겨우 돌아온 뒤 결국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낙마하여 전사하였다.[4] 1차 돌격 당시 조선군과의 전투도중 부상을 입고 본진으로 패퇴하였다.[5] 조선의 행정력이 우수한 편이었지만 임란 당시 20일에 걸쳐 동원한 4만의 병력을 고작 5일 만에 동원하기는 힘들다. 물론 여기저기서 집결한 근왕군이 도합 4만이라면 맞는 말이기는 한데, 그들 대부분은 말 그대로 집결 중이었고, 쌍령에서의 패전 소식을 접한 뒤 조령으로 후퇴했다.[6] 석이도(실투)[7] 다만 경상도 속오군만이 참가한 것은 아니고, 전투가 벌어지기 전 구원을 위해 북상했다가 험천 전투에서 패배하고 물러난 충청도 속오군이 합류해 싸웠다. 공식 편제대로라면 경상도 속오군은 총 2만 2448명, 1628년에 경상감사가 인조에게 보고한 병력은 2만 4천 명이다.[8] 민영과 허완보다 계급이 위인 심연이 싸움을 독촉하라고 도경유를 보낸 거였기 때문에 이걸 월권 행위로 보기는 애매하다. 하지만 전투엔 문외한인 주제에 현장 지휘관을 무시하고 장교를 처형한 건 빼도 박도 못할 잘못이 맞다.[9] 조선 시대 감사나 절도사가 데리고 다니던 관료. 비서 업무나 민정 시찰, 감찰 업무 등을 수행했다. 배비장전의 배 비장이 이 비장이다.[10] 윗선의 무리한 명령을 내리는건 딱히 조선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군대와 관료가 분리된 현대사회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다. 대표적으로 히틀러와 스탈린이 무리한 명령을 내리다가 전쟁을 말아먹거나 말아먹을뻔 했다.[11] 정확히는 탄약 2냥이었다고 한다(남급본 병자일기 + 병자록의 기록). 현재 자동 소총으로 10발이면 연사 시 1초, 2초요 단발 조준 사격으로도 몇분 안되어 다 쓰기에 적은 양으로 느껴지지만 전근대 총으로는 제일 빠른게 20초에 한발이었고 적이 다가오기를 충분히 기다려서 쏘면 이후 또 쏠 기회가 많지 않기에 10발도 적은 수라 할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 서양도 12사도(총기)라고 부르는 12발의 장전통을 가지고 다녔는데 한 전투에서 12발을 다 사용할 경우 매우 격렬한 전투를 했다고 평가하였으니 전장식 소총에서 10발은 그다지 적은 보급이 아니다. 이는 최전선 지휘관의 팀킬로 인한 사격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적을 사살하지도 못한 채 낭비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는 비슷한 시기의 승전인 김화 전투에서 유림이 철저한 사격통제로 청군이 10보 앞까지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과 크게 대비된다.[12] 연려실기술을 보면 허완의 부대가 입은 피해는 별다른 언급이 없으나 민영의 부대는 확실하게 전멸했다는 기술이 있다.[13] 다이산은 둘째고 첫째는 추옝이었는데 추옝은 누르하치와 사이가 나빠져서 숙청당했다.[14] 이 오곽사는 유림이 김화 전투에서 전사시킨 장수다. [15] 난중일기에 보면, 이순신 장군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장수는 '''손에 꼽는다'''.[16] 멋대로 아군 비장 박충겸의 목을 날려버리면서 부대의 통솔이 불가능해졌고 처벌도 하지 않은 것은 심각한 문제점이다.[17] 김화 전투 당시 유림과 함께 지휘를 맡은 조선군 지휘관은 평야에 진을 쳤다가 청군의 강습을 받았는데, 비록 패하기는 했으나 쌍령 전투와 달리 청군이 병력이고 장비고 뭐고 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아니 애초에 수백명의 기병에게 강습을 받고 수천명이 무너진 전투 자체가 아무리 속오군 중심이라지만 쌍령 전투 말고는 없다. 청군도 그걸 알고 있어서 항복만 받고 인조를 너무 심하게 자극하지 않은 것이다. 인조를 심하게 자극했다가는 경우에 따라 장기전의 명분을 제공하여 상황이 청군에 불리하게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18] 당시 영국군에서 명령을 어긴 병사에게 내려진 형벌은 채찍형이 보통이었는데 문제는 이 당시 채찍은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한가닥의 끈 따위가 아닌 여러 가닥이 있고 철조각들이 붙어있어 엄청난 고통을 주는 정말 악랄한 체벌도구였다. 특히 몇 대만 맞아도 살이 갈려 나가는 터라 50대 이상의 태형을 받으면 사실상 처형이었다.[19] 조선시대에 지금의 장교에 해당하는 계급은 군관이라고 불렀고 부사관에 해당하는 하급 지휘관을 장교라 칭했다.[20] 이는 조선 초기 부사관 역할을 해야 하는 갑사들을 한 부대에 몰아넣고 일종의 정예부대로 만들면서 생긴 현상이다. 전투능력이 뛰어난 갑사를 하나의 부대로 만들어서 일종의 정예부대로 굴릴 생각이었지만 부사관이 사라지면서 군대의 질이 떨어지고 갑사들도 군정이 문란해지면서 전투력이 떨어졌다.[21] 물론 프랑스 근위대처럼 자발적인 군기를 갖추는 전열 보병들도 없지는 않았으나 당대 전열 보병들에게는 체벌을 통한 통제가 보다 일반적이었다.[22] 유죄인지 무죄인지 뚜렷하지 않은 사건[23] 참고로 도경유의 형인 도응유는 이괄의 난 때에 의병을 일으켜 지휘했으며 정묘호란 때도 후금군에 맞서 의병과 관군을 이끌고 항전하는 등, 군 경험이 풍부한 장군인데 동생인 도경유는 형과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무능하며 역사에 다시 없을 정신나간 짓을 저지른 멍청이였다.[24] 청태종의 매부인 '수무루 양구리'가 전사 할 정도의 대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