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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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병자호란 때 벌어진 전투이자, 근왕군이 격파되지 않은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전투에서 '''홍타이지의 매부인 '슈무루 양구리'[1] 가 전사'''했다. 양구리는 전투 경험이 많은 명장으로, 험천 전투에서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충청도 근왕병을 격파하기도 했다. 당연히 양구리의 전사는 청군에 큰 충격을 줬다.[2]
2. 전라도 근왕병과 양구리의 움직임
1636년 12월 20일(이하 음력),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라 감사 이시방과 전라 병사 김준룡은 급히 전라도 각 고을에서 병력 6,000명을 모았다. 이때 화엄사의 승려인 벽암(碧巖) 각성(覺性)이 이끌던 승병 2,000명도 합류하여 총 8,000명의 전라도 근왕병이 남한산성을 향하여 북진하기 시작했다.
1637년 1월 2일, 양지에 도착하자 이시방은 김준룡을 선봉장으로 삼아 병력 2,000명을 주고 먼저 남한산성에 진군하게 했다.
한편, 도도의 청군은 1월 2일 험천 전투에서 충청도 근왕병을 격파했다. 전투가 끝난 후 도도와 양구리는 김준룡의 2,000명의 선봉대의 소식을 들고 곧장 병력을 광교산 동쪽에 배치하여 남한산성과 김준룡 부대의 연락을 차단하고, 3천여 명을 인솔하여 광교산으로 향한다.
3. 전투 전개
1월 4일, 광교산에 도착한 김준룡은 병력을 배치하고 군수품을 진영 중앙에 비축하여 태세를 갖추며 남한산성과 연락을 시도한다.
1월 5~6일, 마침내 호쇼이 어르커 친왕 도도가 지휘하는 청군이 광교산 부근에 도착한다. 산 기슭에 주둔한 전방 부대를 발견한 청군은 수차례에 걸쳐서 공격을 시도하나, 조선군은 청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미리 진영 주변에 목책을 세우고 진형을 잘 정비해놨다. 청군이 공격해 들어오면 총포로 집중 사격하여 타격을 입히고, 청군이 퇴각하면 궁병과 등패수가 청군의 배후를 가격하여 타격을 입혔다. 수차례 청군의 공격을 막아낸 조선군은 총포를 쏘고 불을 지피는 등 자신들이 왔다는 걸 남한산성에 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며, 승전 소식을 전하여 패닉 상태의 조정을 안정케 했다.[4]
김준룡과 함께 근왕대를 이끌고 왔던 전라도 중영장 우상중(禹尙中)의 증언에 의하면 양 군은 동틀 때부터(平明) 밤9시~11시(二更)까지 싸웠다 하니 매우 치열한 접전이었을 것이다.
1월 7일, 이 날은 특히 눈이 많이내리고, 안개도 낀 날씨라 피차간 시야가 매우 좋지 않았다. 광교산 기슭에서의 전투는 결국 근왕군의 패색이 짙어져 조선 병사들이 흩어졌는데, 당시 도도는 안개로 시야가 흐린 탓에 청병을 풀어 이들을 추격하고 본영을 찾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산 정상에 위치한 김준룡의 본영을 탐지하자, 도도는 소라고동을 불어 흩어져 있는 청군을 집결시켰다. 산 기슭에 있던 양구리는 소라고동 소리를 듣고 산 정상으로 올라가나, 그 과정에서 석굴에 숨어 있던 조선 병사에게 저격당해 숨졌다.
밤이 늦도록 양구리의 행방이 묘연하자, 도도는 김준룡의 본영을 공격하지 않고 대치했으며 결국 산 기슭으로 철군했다. 김준룡은 이 틈을 타서 횃불을 켜두고 야영하는것처럼 속이고 천여 마리의 말을 매어둔 채 수원 방면으로 퇴각했으며, 1월 8일 날이 밝자, 도도는 조선군 본영을 총공격하나 허탕을 치고 양구리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날 양구리의 시신을 확인한 홍 타이지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통곡을 멈추지 않았으며 양구리에게 자신의 어복과 흑색 초피 갖옷 등을 내주어 염하고 초상을 치렀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앙엽기(盎葉記)〉에 따르면, 홍 타이지가 슬퍼하는 것을 정탐하다가 달아난 조선 졸병을 양구리를 해친 자라고 하여 어선(esen)으로 하여금 수급했다고 한다.[5] 한편 이시방은 김준룡이 수원을 향한 게 패퇴 했기 때문이라 판단하고 흩어진 병사들을 모은다며 공주로 도망가 금강의 다리를 끊고 머무른다. 이시방이 후퇴함으로써 본대와 연락이 끊긴 김준룡의 선봉대도 수원에 계속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청의 무응답 속에서 재차 사신을 청 군영에 보내고자 하던 인조에게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수성군의 사기를 올리고자 한 대사간 김반은 김준룡을 구원하지 않아 광교산에게 패배를 당하게 한 이시방을 처벌하여 군율을 세울 것을 청하지만, 인조는 이것을 당장 실행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며 윤허하지 않았다. # 1월 13일, 인조는 결국 홍서봉·최명길·윤휘 등을 보내 관온인성이라는 홍 타이지의 존호를 찬미하고 소방의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는 # 글을 받들고 청 군영에 가게 하였으며, 잉굴다이에게 즉시 회보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
4. 여담
이 전투에서 전사한 양구리는 청의 개국공신 중의 한명으로 14세부터 누르하치를 따라 종군하고 누르하치의 사위가 된 용맹한 돌격대장이었다. 당시 직위는 초품 일등공으로 다른 문무대신보다 훨씬 높은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청나라에 항복하여 왕으로 봉작된 한족 3왕(공유덕, 경중명, 상가희) 보다 훨씬 높은 직위였다. 전사한 양구리의 시신을 마주친 홍타이지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애통해했다고 청실록에서 전하고 있다.
양구리와 함께 이 전투에 참가했던 도도는 훗날 죄를 짓고[6] 이 일까지 재차 거론되어 친왕에서 버일러로 강등되었으며, 벌금 1만냥과 소유한 노비 3분의 1을 친형인 호쇼이 머르건 친왕 도르곤에게 바치라는 벌을 받았다 전한다. 그래도 홍타이지가 조선 침공 때 자신보다 앞서 압록강을 건너는 선봉부대를 맡겼을만큼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송산-금주 전투에서 홍승주를 생포한 공으로 군왕작을 회복했고, 입관 때는 이자성의 반란군을 북경에서 쫓아내는 공을 세워 친왕작을 회복했으며, 도르곤의 오른팔로서 남명 홍광제 정권 함락 및 양주대학살 등 많은 공을 세웠으나, 천연두로 요절했다. 사후에 다시 군왕으로 강등되었으나, 건륭 연간에 도르곤을 친왕으로 복권하며 도도 역시 친왕으로 복권되어 태묘에 배향되었다.
이 전투에서 수훈을 세운 김준룡은 한때 부족한 정보로 인해 "김준룡이 앞장서 퇴각했기 때문에 예하 군대가 흩어졌다"는 이유로 죄를 물어야 한다는 의견으로 유배되었지만 이후 이조판서 지천 최명길과 비변사가 올린 계(啓)로 자세한 정황이 알려지고, 전라도 근왕병이 광교산에 제 시간에 도착했음이 참작되어[7] 사면되었다. 이후 김준룡은 어영중군, 경상도병마사 등을 역임했고, 훗날 정조로부터 김준룡은 충양(忠襄)이란 시호를 받았다.
수원화성이 축조 될 때에서야 채제공[8] 에 의해 전승터인 광교산에 전승비가 새겨져 기려지게 되었다.[9]
[1] 음차해서 한자로 양고리(揚古利)가 되는데 대개 이 음차로 많이 알려져있다.[2] 명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이 정도 고위급 장수가 전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당시 청군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3] 지도의 오른쪽에 나와있는 정세규는 충청 감사로, 광교산 전투 3일 전에 벌어진 험천 전투를 뜻한다.[4] 전라 병사(全羅兵使) 김준룡(金俊龍)이, 광교산(光敎山)에 도착하여 여러 차례 접전을 벌여 승리하는 일이 꽤 있었고 바야흐로 기회를 보아 헌릉(獻陵)으로 전진할 계획이라는 일로 올린 장계가 들어왔다.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 1월 5일[5] 《청사고》 도도 열전에도 양구리 저격병을 사살했다고 하는데 이 일을 가르킨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6] 군사작전 중에 병영으로 창기를 불러들였다.[7] 강진 전라병영성에서 광교산까지는 통상 9일이 걸리는데, 김준룡의 전라도 근왕군은 교지를 받은지 13일되는 시점에서 이미 광교산에 도착해 진영을 꾸렸으니 기일이 늦지 않았다는 것.[8] 화성의 건축을 위해 석재를 구하던 인부들에 의해 전해들었다고 한다.[9]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