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이란 관계
1. 개요
아르메니아는 기독교 국가이지만 이란의 주변국 중 가장 이란에 우호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는 과거사 및 영토 문제로 아제르바이잔, 터키와는 사실상 적국 수준으로 사이가 좋지 않고 이란 역시 주변국들과 사이가 원만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사실 이란에서도 터키 못지않게 아르메니아인들을 많이 학살한 적이 있으나 터키의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근현대에 일어난 일이며, 이란의 아르메니아인 납치와 학살은 근세에 일어난 일어라 체감 상의 차이가 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이란에서도 꽤나 많이 살고 있음에도 아르메니아와 이걸 이용하여 다른 외교적 루트를 만드는 일은 그동안 없었다. 다만 고립상태인 아르메니아가 이란에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살고 그들이 과거에 호메이니를 지지하여 공존을 인정받았기에 이들을 통한 외교관계 개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이란도 터키와 이스라엘 견제를 위하여 최근에는 좀 신경을 쓰는 분위기이다. 아르메니아 측에서도 사도 유다 타대오가 순교한 장소에 새워져 있다는 역사적 아르메니아령 바스부라간, 현대 이란의 서부 아제르바이잔 지방에 있는 성 타대오 수도원을 비롯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그나마 남아 있는 성소들 중 상당한 수가 이란 국경 내에 남아 있기 때문에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는 이란과 유별나게 각별한 편이다.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 문단에서 서술했듯이 양국의 적성국(이란은 이스라엘,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간의 군사 협력이 확대되면서 이에 대항하기 위한 양국의 협력도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2. 역사적 관계
2.1. 현대 이전
원래 아르메니아인과 이란인은 고대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믿으면서 문화적으로 분리되기 이전에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이란인 중 상당수는 아르메니아계 조상을 두고 있는데, 파르티아 및 사산 왕조 페르시아 시대에는 아르메니아 왕족들과 페르시아 황족들 사이에 인척 관계가 형성되었다.
물론 전쟁이나 갈등이야 있었지만 이웃나라끼리 흔하디 흔한 일이었고 되려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란 고대사부터 근현대사까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고대 말 사산 왕조의 아르메니아 출신 장군 슴바트 4세 바그라투니가 페르시아 동부 국경 지대를 침공하던 에프탈을 쳐부순 적도 있으며, 근세 사파비 제국의 샤인 아바스 1세(1571~1629)는 아르메니아인 30만여 명을 수도인 이스파한 근처로 이주시켰는데, 강제이주 과정에서 절반 가까이 사망했음에도 금새 터전을 닦고 몽골 제국의 침략 이후 무너졌던 이란의 상공업을 부흥시켰다. 아바스 1세는 이란으로 이주된 조지아인들은 무조건 시아파 이슬람으로 개종시켰던 것과 다르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허락했다. 순니파 이슬람 성원을 사도 교회로 만들게 해줘서 지금도 이스파한에 가면 거대한 이슬람형 돔 위에 십자가가 걸려있는 특이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반크 교회도 이때 내 준 것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은 특히 유럽인들과의 교역에서 유용했다. 특히 사파비 왕조 시절 왕조 설립의 주축인 튀르크계 시아파 전사 집단인 키질바시의 정치적 영향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이들을 영향력을 축소 시키고자 사파비 왕조의 샤들은 이웃 오스만 제국의 데브시르메 정책을 벤치마킹하여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체르케스의 카프카스 기독교인 출신 개종자들을 집중적으로 천거하는 정책을 폈고, 이 덕분에 페르시아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입지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아바스 1세는 시아파 골수 신도로서 순니파를 비롯한 다른 이슬람 종파나 천주교를 비롯한 기독교를 가혹하게 탄압했던 반면, 딱 하나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에게만은 상당히 관대하게 대해주었다. 종전 오스만 제국이나 다른 이슬람 나라들에서 자주 벌이던 기독교 및 비이슬람교 신도들에게 세금을 더 받던 것도 없애고 당당한 페르시아인으로 인정하며 세금도 더 받지 않았고 이들을 경제직이긴 해도 주요 무역 담당 같은 일을 맡기며 등용했다. 물론 아바스 1세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승인한 것은 실리적인 목적이 더 컸고, 아르메니아인들은 세금 수입을 증대시키고 무역 적자를 감소시키는 것은 물론 그의 생일에는 금을 가득 선물했던 적도 있다.
물론 그도 아르메니아인들의 상업성을 높이 사서 그들을 페르시아의 이득에 써먹으려 하고자 받아준 점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 덕에 아르메니아인들은 꽤 관대하게 살아갔으며 아예 수도인 이스파한에 떡하니 졸파라는 아르메니아인 특별 자치 거주지역까지 하사받아 여기서 모여 살아갔었고 지금도 아르메니아인 7~20만 이상이 여기서 살고 있다. 여담인데 크리스티아노포비아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이란이 성지 이스파한에 이렇게 아르메니아 기독교인 자치구역이나 성당을 인정하는 것도 엄청 관대한 거다. 다른 종파는 예외없이 박살내버렸다.
2.2. 현대
오늘날 아르메니아와 이란 모두 외교적으로 고립된 사이인 관계로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좋은 편이다. 카자르 왕조 말기부터 팔레비 왕조 초까지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란의 영화 배우, 영화 감독 등으로 활약하며 서구 문물 전파 및 문화 산업 성장에 이바지했다.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였다가 러시아에서 추방당하고 이란에서 시아파 이슬람으로 개종한 예프렘 칸의 경우 이란에서도 존경받는 사람이다.
이러다 보니 역사적으로 보면 당연히 나름 긍정적인 역사적 친밀감까지 있고 조지아보다 훨씬 경제적 규모도 더 크고 자원으로 도움이 되며(러시아도 막대한 자원이 있지만 여긴 애증의 관계이며 러시아가 아르메니아에게 하도 이래라 저래라 하기에 반발도 있다) 최근 현대사에서도 이란에 사는 아르메니아계들이 본국과 이란의 관계 우호에 기여하고자 사회 기부 및 이란 정계에 로비도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호메이니 시절에도 아르메니아인들이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았다. 당시 이란 곳곳에서 천주교나 여러 기독교 성직자들이 살해[1] 당하고 집단 폭행에 성당들이 불태워진 반면,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성당들에 대한 약탈이나 테러는 호메이니 정부가 강력하게 금지했는데 되려 팔라비 왕조 시절에는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상업적 견제[2][3] 가 워낙 심했기에 이들이 호메이니를 은근히 지지해 비밀리에 상당한 돈을 지원했던 점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란에 군비도 제공하면서 아르메니아계의 입지는 제법 크게 인정받게 된다. 그래서인지 반대로 아르메니아 내의 이란계 아르메니아인들 또한 토착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괜찮은 대접을 받고 있다.
그야말로 수백여 년 세월에 걸쳐 압바스 1세와 호메이니라는 골수 신앙인들이 지도자로서 자국에서 시아파만 고집했던 반면, 딱 하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관대했다는 공통점을 봐도 아르메니아에선 그나마 이웃나라에선 이란이 좋게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서로가 이득 때문에 그런 게 있었지만 그야말로 상부상조했다. 근현대 와서 아르메니아인들이 이란에서 꽤 우호적으로 대우받았고, 호메이니도 아르메니아인에게 종교를 인정하며 자치구역까지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이 주도하던 이란 경제봉쇄에 난감해했지만 러시아가 이란과 경제 교류를 유지한 덕분에 같이 이란과 마찬가지로 경제교류를 한다. 그러다가 오바마 정부에서 이란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를 해제했을 때는 아르메니아도 무척 기뻐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란과는 터키를 두고 사이가 안 좋은 점은 비슷해서 협력하는 게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매우 싫어하는데 터키가 그 이스라엘에 많은 도움을 주기에 당연히 터키도 매우 질색한다.게다가 터키와도 국경 분쟁 문제와 같이 과거부터 역사적으로 앙금이 컸기 때문에 이를 갈아왔다.[4] 그렇지만 최근 터키랑 이스라엘이랑 사이가 나빠지면서 이란과 터키의 관계개선도 이루어지고 있어 참 아이러니한 상황...
3. 관련 문서
- 아르메니아/외교
- 이란/외교
- 아르메니아/역사
- 이란/역사
- 아르메니아/경제
- 이란/경제
- 아르메니아인 / 이란인
- 아르메니아어 / 페르시아어
-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해관계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서아시아 국가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캅카스 국가
[1] 한국 선교사가 이란에 대하여 쓴 책을 보면 1979년 당시 이란에 거주하던 이란인 개신교 선교사가 갑자기 들이닥친 폭도들에게 죽고 그 폭도들이 신자들에게 개종하라는 협박을 했다고 한다.[2] 팔레비 왕조는 유대인들을 우대했다.[3] 당시 아르메니아 본토가 소련 영토였던 점도 있다.[4] 하지만 웃기게도 터키 맥주가 이란에 많이 수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