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미스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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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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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모습. 위 복원 상상도 사진과 비교해보면 기둥 한 개와 신전의 벽으로 보이는 벽돌 외에는 잡초만 무성한 채로 방치되어 있다.
'''명칭'''
그리스어
Ἀρτεμίσιον
터키어
Artemis Tapınağı
영어
Temple of Artemis
'''국가·위치'''
터키 공화국 이즈미르 주 셀주크 시 에페소 구

건축년도
불명
파괴
서기 268년
1. 소개
2. 역사
3. 유물들
4. 현대의 모습
5. 기타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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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대 에페소스[1]에 있었던 아르테미스 신을 모시던 거대한 신전.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으나 268년 로마 제국을 침공한 고트족에 의해 파괴되어 사라졌다.
고대 7대 불가사의를 처음으로 언급한 안티파트로스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자신이 본 건축물 중 최고로 쳤다.

I have gazed on the walls of impregnable Babylon along which chariots may race, and on the Zeus by the banks of the Alpheus, I have seen the hanging gardens, and the Colossus of the Helios, the great man-made mountains of the lofty pyramids, and the gigantic tomb of Mausolus; but when I saw the sacred house of Artemis that towers to the clouds, the others were placed in the shade, for the sun himself has never looked upon its equal outside Olympus.

나는 전차들이 그 옆을 따라 경주를 할 법한 난공불락의 바빌론 성벽과, 알페우스 강변의 제우스를 목도하였다. 공중정원과, 태양의 거상과, 장대한 인공산이라 할 만한 높다란 피라미드와, 거대한 마우솔로스의 묘를 보았다. '''그러나 내가 구름에 닿을 만큼 우뚝 서있는 아르테미스의 신성한 전당을 보았을 때, 이 모두가 그 그늘에 가려졌으니, 태양마저 올림푸스 밖에서 그와 견줄만한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

그리스 사화집(Greek Anthology) IX.58[2]


2. 역사


첫 번째 신전은 청동기 시절부터 존재한 건축물로, 고대 그리스 인들은 이 신전을 아마존이 건설한 것으로 추측했다.
기원전 7세기에 홍수로 인해 폐허가 된 이후, 기원전 550년에 리디아의 마지막 왕 크로이소스가 크레타 출신의 건축가인 케르시프론과 그의 아들 메타게네스에게 의뢰하여 건설되었다. 이 시기 건설된 신전은 매우 화려했다고 하며, 높이 30m에 너비도 대략 50m×110m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축구장과 비슷한 규모였다. 건물 자체도 클뿐더러 기반도 상당히 높은 곳에 건설되어서 에게 해 10km 밖에서도 보일 정도였다니 그 위엄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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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으로 복원한 축소 모형. 첫 번째 신전을 모델로 한 것.
그러나 기원전 356년 헤로스트라투스가 "나쁜 짓을 저질러서 내 이름을 역사에 영원히 남기겠다"라는 말과 함께 불을 지르면서 2번째로 파괴되었다. 에페소스에서는 그를 처형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까지 금지하려 했지만, 결국 헤로스트라투스라는 이름은 그가 바라던 대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재건을 지시하였고, 대왕 사후인 기원전 323년에 세 번째 건설이 시작되어, 로마 제국의 전성기가 끝날 때까지 굳건히 서 있었다. 안티파트로스가 자신이 본 7가지 놀라운 건축물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라고 평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아르테미스 신전이다. 마지막 건설 당시의 모습의 평면은 64.3m × 119.17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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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로마의 힘이 예전같지 않게 된 서기 268년, 고트족의 약탈로 파괴되었다. 신전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후 기독교가 득세할 때 이 신전에서 예배를 드린 기록 등이 있는 것을 보면 수리나 재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독교 공인 이후 타 종교 신전의 파괴와 폐쇄가 벌어지는 동안 아르테미스 신전도 폐쇄되어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5세기 초까지는 신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대 유적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신전의 일부 자재는 다른 건축물의 자재로 전용되기도 했는데, 하기아 소피아를 지탱하는 주 기둥의 출처가 바로 이곳이다.

3. 유물들


현재의 위치는 대영박물관의 후원을 받은 영국의 발굴단이 확인했으며 이때 수많은 유물들을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가 전시했다. 이 때문에 터키에서는 지금도 영국을 향해 반환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발굴 책임자였던 존 터틀 우드의 기록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이 유물들은 흔히 생각하듯 무작정 훔쳐온 약탈품이 아니라, 당시 오스만 정부와의 교섭(발굴된 유물을 몇 대 몇으로 나눌 것인지 등)을 통해서 술탄의 발굴 허가증을 받아 발굴한 것이라(Wood, 1877), 터키 측에서 무작정 '우리 거니까 내놔라' 하기에는 법적으로 문제가 간단치가 않다. 당시 오스만 정부를 통해 구입한 파르테논 조각 유적과 비슷한 경우다.

4. 현대의 모습


사도 요한의 무덤이 있는 기념 성당에서 내려다보면 바로 보이는 위치이다. 과거에는 바다였지만 강물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어 지금은 늪지대가 된 광활한 지역과 마주하고 있으며, 현재의 셀축 외곽에 위치하고 있다. 사도 요한의 기념 성당 밑에는 이사베이 모스크가 있는데, 이 모스크 바로 밑에 위치해있다. 가봤자 별거 없고(...) 입장료조차도 받지 않는다. 사도 바오로가 봉변을 당할 뻔한 에페소스 극장은 지금도 유적으로 남아있고, 아르테미스 신전 만큼이나 고대 헬레니즘 세계에서 수준급으로 큰 극장이었는데 마찬가지인 아르테미스 신전과 비교해보면 뭔가 묘한 기분이 들것이다.

5. 기타 이야깃거리


당시 이 신전의 위명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성경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사도 바울로가 에페소스에서 팔리던 은으로 만든 아르테미스 신전 모형[3]을 두고 '''"사람이 만든 건데 왜 신이라고 함?"''' 이라고 비판한 일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이 근방에서 장사를 하던 은세공자들의 수익에 큰 타격을 입게 되자 이들이 죄다 모여서 데모를 하는데 당시 이 집회의 주동자였던 데메트리우스의 발언은 이러했다.

사도행전 19장 25-27절(공동번역 성서)

"여러분,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이 사업으로 잘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로라는 자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 에페소에서뿐만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마음을 돌려놓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의 사업이 타격을 입게 될 뿐만 아니라 위대한 여신 아르데미스 신당이 괄시를 받게 되고 마침내는 온 아시아와 온 세계가 숭상하는 이 여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말 터이니 참으로 위험합니다."

이 말을 듣고 은세공자들은 물론 에페소스 주민들까지 전부 빡돌아서 '에페소의 여신 아르테미스 만세'를 외치고 다녔고, 사도 바울로의 동행이었던 마케도니아 사람 둘을 붙잡아 극장으로 끌고 갔다. 이들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도시 전체가 소란해졌고, 사도 바울로가 저들을 말리고자 극장으로 뛰어들려 하자 사도 바울로를 따르던 신도들뿐만 아니라 그와 친분이 있던 아시아의 지방 장관들까지 뜯어말려야 했으며, 바울로를 훼방놓으러 왔던 유대인들조차 성난 주민들의 기세에 눌려 조용히 해달란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4]
소동은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이어졌고, 결국 에페소스 시장[5]이 직접 나서서 '에페소스 시민 여러분, 여기가 아르테미스 여신님 모시는 동네라는 거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고 이 사람들이 아르테미스 여신님을 직접 깐 것도 아닌데 이렇게 난리피울 거 없잖아요. 만약 문제가 있으면 당사자들끼리 법대로 합시다. '''안 그러면 로마에서 소요죄로''' 뭐라고 할지도 몰라요.'라고 말한 끝에 간신히 해산시켰다고 한다.
다른 고대 종교들이 그렇듯 그리스 종교도 신과 인간의 관계가 기브 앤 테이크식이었다. 인간은 신의 이름을 드높이고 신은 인간의 이익을 도모해주는 일종의 기복신앙이었다. 그래서 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과 자기가 부를 얻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이 구분되지 않았고, 그래서 인간의 것과 신의 것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기복신앙을 배척하는 기독교 교리가 전통적 기복신앙과 충돌한 사건이다.

[1] 현재 터키 셀추크 부근[2] 보면 알겠지만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없는데 이유는 안티파트로스가 그 등대를 매일 봤던 알렉산드리아 사람이었기 때문(...).[3] 개역한글판에서는 은감실, 공동번역에선 은으로 된 신당 모형이라고 나와 있다. 오늘날 주요 랜드마크에 가면 기념품으로 파는 그 랜드마크의 모형을 생각하면 된다.[4] 사도행전에 기록된 유대인들의 행보를 요약하자면, 사도 바울로가 가는 곳마다 소문을 따라 쫓아가서 방해 공작 및 선동을 일삼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살벌한 인간들이었다. 물론 유대인들 전부 다 그랬다는 건 아니지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로를 엿먹이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던 극성종자들이었는데 이런 사람들조차 찍 소리도 못했다고 나온 건 이 대목이 유일하다.[5] 개역한글판에는 서기장으로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