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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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이집트 초기에 왕릉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 건축물. 무덤이란 것이 중론이지만 아래 단락에 나오듯 그냥 무덤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사후세계로 가기 전 영혼의 임시 거처라는 주장도 있고, 도굴당하지 않고 근현대까지 남은 피라미드는 하나도 없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가 없다.
2. 설명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전세계의 피라미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으로, 고대로부터 매우 유명해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기도 하는데 '''연대 자체는 이미 사라진 7대 불가사의의 6개 건축물보다 2천년 가량 더 오래됐다.''' 현대를 기준으로 대략 '''4000년에서 4700년 전의 유물'''이다. 현대인인 우리가 보기에 콜로세움이 2천 년 전의 고대유적이듯, 고대 로마인들이 보기에도 이집트 피라미드는 2천 년 전의 고대유적이었다. 쉽게 말해서 고대 로마 시대의 인물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7세 입장에서 피라미드를 짓던 시기보다 현재 지구상 가장 높은 건축물인 부르즈 칼리파를 건설한 시기가 더 가깝다.[4]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사후세계에서 되살아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은 파라오가 살 사후세계의 왕궁을 짓는다는 개념에서 만들었다. 즉, 기본적으로는 무덤으로 설계된 것이다.[5] 지금은 거의 피라미드만 남았지만 건설 당시에는 근처에 신전과 제사를 지내는 공간, 피라미드를 둘러싼 긴 벽 등 부대시설이 함께 있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엄청나게 크고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모습이며, 피라미드를 구성하는 사각돌의 크기부터가 장난 아닌 데다가 건축물의 수평 등이 매우 정밀해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 인상이 매우 압도적이라 동시대 이집트인은 물론이고, 주변 국가와 후대의 문명, 특히 유럽에 큰 영향을 남겼다. 특히 이집트 최대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는 '''2.5톤 무게 사각돌 300만 개'''를 사용했다고 한다.[6] 이 피라미드가 기원전 2560년에 146 m 높이를 달성한 이후로 인류는 무려 3871년 동안 이보다 높은 구조물을 짓지 못했다. 기원후 1311년에 이르러서야 높이 160 m인 영국 '링컨 대성당'의 첨탑을 지음으로써 이 수치를 넘어섰다.[7]
이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수천 년 동안 보존된 이유는 건축물에 치명적인 강수와 식물이 적은 환경 덕분이다. 그래서 미국 애리조나/네바다주의 후버 댐에 이어서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가장 오래 보존될 건축물로 손꼽힌다. 게다가 구조물 크기나 각 부재의 크기가 무식하게 커서 풍화를 상당히 오랫동안 견딜 수 있었다. 벽돌로 지은 초기 피라미드는 거대한 돌로 지어진 라미드보다 보존 상태가 안 좋다.[8]
사실 맨 처음 지어질 때에는 저렇게 우둘투둘하지 않았으며 매끈하게 다듬은 흰색 석회석을 외장으로 사용하여 번쩍였다는데, 세월이 지나며 약한 외장은 떨어져 나가고, 후대 사람들이 돌을 떼어내서 다른 곳에 쓰는 바람에 저렇게 거친 표면이 되었다.[9] 심지어 피라미드가 지어진 고왕국 당시에도 후대 왕들이 선대 왕들의 피라미드에서 석재를 '''약탈해''' 자신의 피라미드들 짓는 일이 있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옛 석조물에서 새 석조물의 자재를 마련하는 일이 빈번했다. 가령, 기념물을 많이 건설했기로 유명한 람세스 2세의 경우 명백히 피라미드에서 석회석을 채취해 사용했다. 심지어 신왕국 말기쯤 되면 민간인들조차도 (재력이 되면 석회석을, 그렇지 못한 이들은 벽돌을 가져가며) 피라미드를 채석장처럼 사용했다. 또한 카이로를 세우는 와중에도 바로 옆에 있는 기자 3대 피라미드에서 그때까지 남았던 외장재 대부분을 벗겨내어 카이로 공공건물의 자재로 전용하였다.
원래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를 '피라미드'가 아니라 '''메르(Mer)'''라고 불렀다. 하지만 기원전 그리스의 관광객들이 본국에 돌아가 피라미드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먹는 삼각형 모양의 과자 '''피라미스'''에 비교했기 때문에 '피라미드'란 명칭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현재 이집트에서 이집트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으므로 메르라는 용어도 잘 쓰이지 않는다. 현대 이집트 아랍어로 피라미드는 el-harram(الهرم)이라고 부른다. 어간 هرم은 '늙은'이란 뜻이므로 어간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래된 것' 정도 의미이다.
사실 피라미드의 위상에 가려서 그렇지 이집트의 석조 건축의 수준과 의의는 피라미드 외의 것들도 대단히 놀라운 수준이다. 신전 유적 등을 보면 이집트인이 석조 건축의 기본을 스스로 개발했음을 원래 피라미드 주위에는 장례나 제사를 위한 신전과 부대시설,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위한 긴 벽 등을 세웠다. 여기에서 발전하여 돌기둥을 벽에 연결시킨 원시적인 구조가 나오고 차근차근 더 발전해 벽에서 독립되어 세워진 돌기둥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을 구현하였다. 이집트 건축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크레타 섬의 문명이나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같은 것도, 이집트의 대담한 시도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3. 기원과 건축 양식의 발달
피라미드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개선되고 발전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원래 이집트에는 마스타바(mastaba)[10] 라는 벽돌식 단층 무덤을 지어 매장하는 관습이 있었다. 여기에는 완성된 양식의 피라미드에 사용한 거대한 돌과 달리 비교적 크기가 작은 벽돌을 사용했다.
조세르(Djoser)[11] 라는 파라오 시대에 이르러 그 유명한 이모텝은 조세르의 마스타바를 공사했는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당시 이집트에는 파라오가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그의 무덤을 공사해야 하는 법도가 있었는데, 마스타바가 완성되어도 조세르는 멀쩡했던 것. 그래서 이모텝은 공사를 확장시키기 위해 마스타바 위에 작은 마스타바를 올리는 계단식 마스타바를 구상하고 실행했다. 이로써 마스타바는 다층의 <계단식 피라미드>가 되었다. 심지어는 위로 층을 올렸는데도 여전히 왕이 죽지를 않으니 옆으로 확장한 흔적도 있다. 원래 지하에 석실이 있는 마스타바의 구조를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지하에 석실이 몰렸다.
조세르 피라미드 유적지에 프타호텝의 마스타바와 Ty의 마스타바가 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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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계단식(스탭) 피라미드. 참고로 이 피라미드는 1992년에 일어난 지진 때문에 붕괴 위기에 처하여 수리하는 중이다.
후대의 파라오인 스네프루(Sneferu, Snefru)[13] 는 매우 야심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계단식 피라미드에 만족하지 않고 영원히 기억되고자 새로운 형식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매끈한 삼각형 모양''' 사각뿔 피라미드 건축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내부에 좁고 높은 계단식 피라미드를 쌓고, 외부에 벽돌을 덧붙여 매끈하게 사각뿔로 마무리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횡력에 취약한 작은 벽돌을 사용한 탓에 피라미드는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전체가 무너지진 않았지만 공사 도중에 외벽이 붕괴한 것 같다. 이런 실패작이 스네프루를 만족시킬 리가 없었는지 결국 완성도 안 하고 그냥 버렸다. 당연히 이 피라미드에는 스네프루가 묻히지 않았다.[14] 이를 '메이둠 피라미드'라고 부른다.
스네프루의 건축가들은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여 벽돌보다 크고 단단한 돌을 사용해 건축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공사 도중에 하중 때문에 돌에 금이 가버렸다. 돌의 크기가 필요치보다 너무 작았고, 바닥 면적에 비해서 경사가 너무 급했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급하게 주변에 돌을 더 쌓아 바닥 면적을 늘리고, 피라미드 높이의 절반 정도에서 경사를 확 낮춰 쉽게 마무리해버렸다.
그 결과물이 유명한 굴절 피라미드. 물론 스네프루는 만족하지 않았다. 참고로 굴절 피라미드는 특이하게도 초창기 피라미드임에도 불구하고 매끈매끈한 외장 석회암이 상당히 많이 남았는데, 석회암 블럭과 내장 바위 블럭 사이에 상당히 큰 틈이 있어 열팽창으로 인한 구조약화를 잘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의 미숙함 때문에 더 오래 보존된 특이한 사례.
결국 지금의 완성된 피라미드 수준의 거대한 석재를 사용하고, 처음부터 안정된 각도를 추구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피라미드의 형태를 만들고야 말았다. 그리고 엄청난 하중을 견디기 위해 내부의 천장 역시 역 계단식으로 쌓아 가장 상부의 하중이 벽으로 분산되도록 하였다. 흡족한 스네프루는 아마도 이 안에 묻혔겠지만... 미라가 발견되지 않은 탓에 진실은 모른다.
대를 이은 쿠푸 왕은 아버지의 업적을 보고는 구조와 형태는 그대로 두고 더 크게 지었는데, 그것이 이집트 최대의 피라미드인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다. 하지만 너무 크기가 커서 내부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돌에 금이 가고야 말았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처음으로 화강석을 왕이 안치되는 석실 천장으로 사용했는데, 계속해서 금이 가는 것을 보고 5중겹까지 쌓아서 겨우 하중을 분산하였다. 어쨌든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가장 큰 이집트 피라미드이며, 7대 불가사의의 피라미드라면 이것을 말한다.
그래서 보통 최종적인 피라미드의 완성형은 카프레왕의 피라미드라고 말한다. 이는 쿠푸왕의 피라미드보다는 3 m 작지만, 내부가 안정되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에서 사용한 화강석 석실도 버렸다. 이렇게 해서 피라미드 건축술이 완성되었다. 특히 이 피라미드의 윗부분은 건축 초기의 매끈한 모습이 풍화나 석재 떼어가기를 견디고 비교적 많이 남았다. 직접 올라가본 관광객들의 말에 따르면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맨위쪽의 석재를 도둑질해갈 사람은 없으리라고 할 만큼 크다.
물론 이 외에도 멘카우라의 피라미드를 비롯한 많은 이집트 피라미드가 있으며, 사실 스네프루의 피라미드 이후에도 계단식 피라미드거나 마스타바를 만든 파라오들도 있다.
4. 몰락
이러한 피라미드는 한동안 무덤으로 쓰인 모양이지만, 훗날 고왕국이 쇠락하면서(제1 중간기) '귀족의 자식이 노예가 되고 노예의 자식이 귀족이 되는 세상'이라는 당대의 기록을 볼 때 엄청난 사회혼란이 있었던 듯하다. 당시 지난 5천 년 중 최악의 가뭄이 닥쳐 어른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아이들을 구워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역병과 정치적 혼란은 덤. 이집트는 근 2백 년간 혼란에 휩싸였다.[15]
이 떄문에 피라미드같이 복잡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축조할 수가 없었고 심지어 기존의 피라미드를 훼손하기까지 했다. 결국 중왕국시대에 이르면 단단한 석재 대신 진흙벽돌로 속을 채우고 겉을 포장용 석회암으로 바른 피라미드를 만들기도 했지만 그나마도 안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내부자재가 부실한 탓에 모두 침식되어버려 오늘날 남은 중왕국시대 피라미드들은 그냥 흙무더기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상태가 나쁘다. 그나마도 중왕국 후기에 이르면 힉소스인의 침입도 그렇고 피라미드 만들 재력이 안 되어서 그냥 바위산에 굴 파고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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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왕조시대 파라오 아마넴헤트 3세(Amenemhet III)의 벽돌 피라미드. 기자의 대 피라미드와 비교하면 이게 더 옛날 피라미드로 보일 만큼 상태가 나쁘다. 아마넴헤트 3세의 생존년도를 토대로 계산해보면 저 벽돌 피라미드는 기자의 대 피라미드들보다 적어도 '''800~900년 뒤에''' 건축된 구조물이다.
이집트가 다시 국력을 회복한 신왕국 시대에 와서는 지난 세월의 환란 속에 피라미드 건축법을 이미 잃어버린 데다가 정치적, 종교적 상황도 변화하였고, 수도를 고왕국 시대의 북부 이집트 멤피스에서 남부 이집트 룩소르로 옮기면서 최고신도 태양신 라에서 창조신 아문으로 바뀌게 되는 등, 피라미드를 건축할 이유도 사라졌기 때문에 왕의 시신은 주로 왕가의 계곡이라는 곳에 매장했다.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도 피라미드가 아닌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왕가의 계곡은 오랜 세월 비밀이다가 19세기에 들어서야 발견됐는데 대부분 도굴당한 상태였다고 한다. 해당 문서에 들어가보면 알 수 있겠지만, 예부터 쓰였던 무덤 마스타바와 피라미드는 눈에 띄어도 너무 띈다. 그래서 수백~수천 년간 도굴꾼에게 시달렸다.
그래서 아예 사막 속 암반 계곡에 굴을 파고 거기에 왕족의 미이라와 부장품들을 안장한 것. 왕족들 입장에서 잊힌 기술인 피라미드 건축법을 재건하기 위해 막대한 지출을 할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도굴로부터 그나마 더 안전한 사후세계가 보장된 새로운 장례지 선정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
5. 자매품: 누비아 피라미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지만, 이집트 남쪽의 수단에도 피라미드가 있다.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았던 누비아 문명의 쿠시 왕국에서는 기원전에 '누비아 피라미드'(Nubian pyramid) 란 것을 여럿 만들었다. 쿠시 왕국은 특이하게도 흑인 왕국이었다. 나일강 상류의 쿠시 왕국은 하류의 이집트를 침략하여 이집트 파라오가 된 적도(이집트 25왕조) 있었다. 지금도 유적지에서는 흑인을 나타내는 검은 석상들이 발굴된다.
누비아 피라미드들은 양식적으로 전성기의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유사하지만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다. 현재까지 발견된 피라미드 중 제일 높은 게 40 m이고 웬만한 것들은 20 m 미만으로 훨씬 작다. 경사 역시 훨씬 급하고 돌에 철분이 함유되어서 전체적으로 색상이 어두운 편이다. 이집트와는 달리 나일강의 동서쪽에 다 있다. #
누비아 피라미드는 전부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무덤 자체는 피라미드 속안이 아니라 피라미드의 밑에 (지하에) 있고, 피라미드 옆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대신 피라미드 앞에는 작은 사각형 석실이 있는데 아마도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인 듯하다. 즉 누비아 피라미드는 제사용 시설, 묘비의 성격이 강하다.
크기가 작아 모래바람에 묻혀버리기가 쉽고, 수단이 상대적으로 고고학계와 여행객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다 보니 아직도 느리게 발굴하는 중이다. 피라미드들이 모여있는 곳이 여태까지 4군데 발견되었고(Meroe, Jebel Barkal, Nuri, El-Kurru), 2018년에 수단 북부에서 다섯 번째로 피라미드가 모인 장소가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240~250개 정도가 남았다고 한다. 이는 숫자로는 이집트 피라미드들보다 많다.
위의 사진은 이들 중 제일 유명한 메로웨(Meroe)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피라미드의 윗부분이 파괴되었다. 수단도 강수량이 적은 사막지대이고 근처에 큰 도시가 있는것도 아니라서 2천 년 넘게 피라미드들이 세월을 잘 견뎌내었는데, 1830년대에 주세프 페를리니(Giuseppe Ferlini)라는 이탈리아인 도굴꾼이 보물을 찾으러 와서 다이너마이트로 많은 피라미드들을 날려버렸다. 결국 부장품을 조금 찾기는 했지만, 그 시대 유럽인들의 생각으로는 '미개한 사하라 남쪽 아프리카에서 몇천 년 전에 이렇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 고로 이것들은 가짜'였기 때문에 많이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현재 이 부장품들은 독일에 있는 박물관들에 전시 중이다.
현대에서는 파괴된 피라미드 근처에 널린 벽돌을 모아서 복원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동안 근처에 살던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 사용하느라 없어진 돌들도 많아서 어떤 것들은 복원했다는 티가 너무 나기도 하고, 어떤 것은 터만 남았을 뿐 영영 없어지기도 했다. 좌우간 아쉽게도 요즘시대에 메로웨의 파라미드를 상징하는 것은 윗부분이 날아가버린 피라미드뿐이다.
6. 노동력 확보
헤로도투스는 쿠푸 왕이 대피라미드를 지을 때 노예 20만 명을 동원해 지었다고 적었지만[16][17] 오늘날 학자들의 대체적 견해로는 노예가 아닌 농부들이 피라미드를 건설했으며 그 이유는 나일강이 범람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동안 대체 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었다.
이집트의 인구는 프톨레마이오스 생전에도 300만 명 정도[18] 였으므로 피라미드 건설 당시에는 인구가 더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몇몇 피라미드에 긁적여놓은 낙서에서 오늘은 돈을 얼마 받았고 생필품으로 뭐가 제공되었다고 적혀있다든지, 감독관과 싸워서 며칠 동안 안 나갔다가 마누라에게 바가지 긁혀서 결국 나갔다고 투덜거린다는 것처럼 별별 낙서가 발견되었고, 피라미드 근처에서 발견된 석판 중에는 노동자들의 출결 현황과 결근 사유가 적힌 문서에서 결근 사유로 과음으로 인한 숙취까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자유민이 다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도 당연히 세금으로 걷은 곡물을 비축했을 것이고, 나일강이 범람하여 농업을 할 수 없게 되면 농부들은 놀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엔 보관기술이 부족하다 보니 식량을 아껴뒀다 그냥 썩히느니 농부들에게 곡물을 나눠주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껏 거둔 세금을 공짜로 나눠주면 파라오 입장에서는 아깝지 않은가? 게다가 할 일이 없다고는 해도 놀면 뭐하나? 영화나 만화에서처럼 채찍질을 동반한 강제노동이었다기보다는[19] 이집트판 뉴딜 정책, 즉 구제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20]
당시 이집트의 종교는 파라오를 신으로 여기고 있었고, 피라미드는 바로 그 파라오의 무덤이었으므로 건설의 명분은 충분했다. 실제로 파라오에 대한 신앙심과 경외심이 약해진 후대의 왕조들에서는 피라미드같이 파라오 개인에게 헌사하는 건물이 더 이상 짓지 않고, 대신 파라오보다 격이 높은 신들을 모시는 신전을 건설하는 형태로 바뀌어갔다.
또한 하인리히 야콥의 명저 '빵의 역사'에 의하면 이들에게는 급료로 빵과 맥주가 지급되었는데, 감독관이 이를 지급하지 않았을 경우 노동자들은 파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기록상의 '세계 최초의 파업'은 이집트에서 일어났다. 피라미드 자체는 아니고 람세스 3세 시절 파라오의 신전을 만들던 노동자들이 급료를 받지 못하자 시원한 그늘에 누워서 급료를 받기 전까지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버틴 것. 결국 그들은 급료를 받았다고 한다.[21] 참고로 이런 파업의 전통은 동로마 제국의 시대에까지 계속되어서 지역 총독들이 이런 지역 특성 문제 때문에 고생했다고 한다.
또한 피라미드 주변을 보면 피라미드 건설에 자원했던 사람들의 무덤이 발굴되기도 하며, 관리자급이나 기술자들뿐만 아니라 단순 노동자들의 무덤 역시 발견되고 있다. 신으로까지 숭배받을 정도로 위대한 존재로 여겨졌던 파라오의 무덤 근처에 천한 노예나 강제 노역을 당하는 평민들의 무덤을 대놓고 짓는 것은 비상식적이라 볼 때, 피라미드는 강제동원된 노예가 짓지 않았다는 않았다는 쪽이 유력하다.
그리고 일반 노동자들의 유골 중 부러졌다가 나은 경우는 물론이고 심하게 다친 다리를 절단한 자국이 있는 유골까지 나타난 것으로 보아 당시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의료지원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감독관, 조리장, 보수 지급을 위한 회계사 등의 무덤도 발굴이 되었으며[22] , 이를 통해 노동조합이 있지 않았나 추측하기도 한다.피라미드 노동자들의 삶[23] 그리고 이들이 자유민이었다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로 '''외과 수술을 받은 흔적이 있는 유골'''과 '''임신한 여성의 유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노예라면 수술 같은 고급 의료따윈 기대하기 어려운데다 가족, 특히 노동력을 거의 기대하기 어려운 임신한 여성을 건설 현장 근처까지 데려와서 살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이 또한 노동자들이 자유민 신분이었다는 설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이 자유노동자들의 환경이 좋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출토된 유골을 단층촬영한 결과 노동은 매우 고되었으며 부상자들이 많았고 평균수명 또한 더욱 짧았다.
또 다른 근거로는, 노예 경제의 대표선수 격인 고대 로마마저도 대형 공공건축물을 짓는 데까지 노예 노동력에 의존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로마가 남긴 수많은 대형 건축물들은 대개 로마 군단병이나 임금 노동자들이 만들었고, 노예를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 노예들도 대부분 급료를 받는 노예로서 우리가 생각하는 채찍과 함께 움직이는 노예들은 아니었다. 고대 로마에는 신분만 노예로서 직업 선택의 자유나 신변의 자유만 없었을 뿐 제대로 임금을 받고 사는 전문기술직 노예들도 많았기 때문. 로마 사람들도 생산성이 극도로 낮고 전문적인 기술을 축적하기 어려운 하급노예들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분야에 동원하는 것은 위험할 뿐더러 능률까지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최고 수준의 육체노동을 하는 노예들에게 채찍질까지 해가며 일을 시켰다간 문자 그대로 노예들이 죽어나간다. 고대 시대에서 인간의 목숨은 무한히 존재하는 게 아니었고, 노예의 죽음은 주인의 입장에선 엄청난 재산적 타격이었다. 지금도 전문기술자들이 작정하고 일하는 와중에도 삐끗하면 온갖 사고가 터지기 십상이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되려 최소한의 대우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24][25]
흔히 바벨탑이라고 불리는 바빌로니아의 지구라트는 노예노동으로도 90 m가 넘는 높이로 만들어진 신전이었지만, 이 경우 건축물의 특성을 살펴봐야 하는데 좋은 석재가 없어서 진흙 벽돌을 쌓아 올린 지구라트는 단순 노동인 벽돌을 만드는 작업의 비중이 매우 컸고 반면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돌을 깎아서 만들기에 전문직인 석공의 작업이 중요했던 차이가 있다.
과거 한국의 언론인이자 학자인 리영희 교수가 이집트를 방문하여 피라미드를 구경한 뒤 피라미드가 노예들이 아닌 자유민에 의해서 건설되었다는 설을 지지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근거는 '자유의지에 기반한 창조성 없이 피라미드와 같이 웅대한 건축물을 건설할 수는 없다'는 것. 물론 그는 이집트사 학자가 아니므로 전문적 지식에 기반해 글을 쓴 것은 아니겠지만, 노예노동은 비효율적이라 몇십 년씩 걸리는 대역사를 유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기회만 나면 땡땡이치고 대충 일하는 게 당연한 노예의 손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높은 완성도를 보이기도 아주 어렵다는 것을 생각해보면[26] 역사학적 근거는 없어도 합리적인 추론이다. 대부분 고대 문화에서 저런 거대 건축물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나름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노예란 기본적으로 불경한 존재로 여겼다는 점을 고려하면 '''부정탄다'''는 의식적인 문제도 있고, 강제 노역자들은 조금만 감시가 소홀해지면 도망가거나 심지어 사보타주의 가능성까지 있으니 동시대 관점에서도 기념비적 거대 건축물들은 자발적인 자유노동자들을 쓸 만한 당위성이 있었다.
7. 건설기술
피라미드가 만들어진 장소는 거의 다 석회석이 많은 지역에서 만들어졌다. 피라미드의 구조 대부분은 석회석으로 이루어져 있는건 이런 이유. 지금이야 피라미드에 의한 관광산업 때문에 피라미드 주변까지 시가지가 확장되었지만, 당시(4000년 전!)엔 외따로 떨어진 석회석 산지를 골라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석회석의 경도는 2로 인간 손톱의 경도 2.5보다도 약하여 굉장히 가공하기 쉽다. 그래서 쐐기 등을 이용하여 쉽게 가공하였다. 그리고 내부의 석실은 화강암과 나무로 만들었는데, 화강암은 겉에 나타난 암석의 결에 따라 절개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피라미드에 쓰인 대형 화강암을 절개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1) 끌이나 정 등으로 암석에 일렬로 구멍을 낸다.
2) 구멍마다 나무 쐐기를 박는다.
3) 나무 쐐기에 물을 뿌리면 쐐기가 물을 빨아들여 팽창하면서 돌을 쪼갠다. 이 때 일렬로 박아둔 쐐기구멍이 마치 절취선처럼 일렬로 돌을 쪼개게 되는 것이다. (우표 가장자리 절취선이나 영화 티켓 생각하면 된다.) 이 방법은 고대 이집트뿐만 아니라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 조상들도 화강암 석재를 자를 때 썼던 방법이다.
채석장에서 피라미드 건설현장까지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고 중간에 나일 강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나일 강은 장애물은커녕 오히려 좋은 통로가 되었다. 나일 강이 범람하기 전, 절개한 석재를 끈으로 묶고 그것을 땟목 위에 연결시켜 놓았다. 그리고 나일강이 범람하면 그 땟목이 석재를 운반해 주면서 강을 탈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하루에 '''몇십만 개'''가 넘는 석재를 운반한 기록도 있다고 한다.
피라미드의 외벽을 구성하는 석회석 블럭 하나는 측정결과 보통 2톤 정도로 계산되며, 벽돌이나 흙을 이용하여 경사로를 만들고, 돌 밑에 둥근 나무를 깔고 끌어올리면 10명 내외로 끌어올릴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의 한 대학 건축학과에서 50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3주일 만에 돌 186개를 쌓아 8층짜리 피라미드를 만든 적이 있다. 또한 피라미드를 쌓기 위한 경사로를 피라미드 안쪽에 만들어서 서서히 외벽을 만들어 가면서 올라가는 구조로 만들면 훨씬 더 공기를 단축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국내의 한 건축학자 겸 고고학자는 자신의 서적에서 기중기 사용을 주장하였다. 기중기는 기존의 이론인 경사로에 비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술과 효율성인데 당시의 이집트인들이 이집트 특유의 단단한 나무를 이용하여 기중기를 제작하여 사용했을 거라는 이론. 기중기 이론에 의하면 3천 명이 기중기 60여 개로 7년 동안 작업하면 대피라미드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중기의 흔적은 나무가 재질인 만큼 사용이 끝나면 흔적이 남지 않고 이집트가 쇠퇴기에 접어들자 제작기술이 소실되었다는 이야기다. 사실 기중기를 사용했다는 주장 자체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기중기의 부품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돌이 피라미드 부근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Bearing Stones 항목 참조.
피라미드 주변의 무덤이나 각종 자료에 의하면 주민 1만 명 미만이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이에 따르면 돌 230만 여 개인 피라미드는 대충 7년 정도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피라미드의 건설이 농한기에만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피라미드를 파라오가 즉위하자마자 건설하기 시작해서, 죽기 전에만 완공되면 되니까 요절하지만 않는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래 산 왕의 경우에는 재위 기간동안 피라미드 여러 채를 짓기도 했다.
화강암으로 일단 계단식으로 쌓은 뒤 맨 꼭대기에는 캡 스톤(피라미디온)이라 하여 사각뿔의 돌을 하나 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도 석회석으로 반듯하게 만들어 전체적으로 사각뿔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쿠푸왕의 피라미드 등 대부분의 피라미드는 석회석이 일부 떨어져 나가 높이가 좀 줄었다.
8.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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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푸왕의 대피라미드의 구조인데, 사실 피라미드의 내부 구조는 거의 제각각이다. 모든 피라미드가 이런 구조로 지어지지는 않았다. 공통적인 것이라면 입구가 북극성을 향하도록 지었다는 정도.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위로 올라가면 왕의 묘실이 있고 왕의 묘실 바로 아래에 왕비의 묘실이 있다.[27] 하지만 왕의 묘실로 가려면 천장에 있는 통로를 통해서 가야 하며 이 통로를 마개로 막아 놓았다. 통로 방향으로 계속 내려가기만 하면 막다른 곳으로 빠지는데 그 아래에 함정이 있다.
피라미드 내부의 통로는 극히 좁다. 건물 자체의 하중이 무지막지할뿐더러, 하중을 효율적으로 분산시키기 위한 아치 등의 구조를 몰랐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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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푸 피라미드의 대회랑. 왕의 방/왕비의 방으로 향하는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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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구조도에서 '공기 구멍'으로 표시되는 부분. 구멍을 쳐다보는 사람은 전(前) 이집트 유물부 장관이자 현 이집트 문화재청장인 '자히 하와스' 박사. 이 사람은 1947년 생으로 언론에 나올 때는 늘 저렇게 중절모를 쓰고 다닌다. 고대 이집트 전문가이자 유물 수호자로도 불리며 이집트 고고학계 및 여론에서는 인기가 높다. 그럴 만한 게 2000년대에 와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으로부터 도난당한 파라오시대 고분벽화 5점을 돌려받았으며. 영국 런던 대학교가 보유하고 있던 석기시대 유물 등 2만 5천 점, 미국이 보유한 3000년 된 목관 등 유럽과 미국에게 3만 점이 넘는 이집트 고대 유물을 되찾아오는 데 큰 활약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유대주의자[28][29] 이며 언플도 자주하는 등 정치적인 행동으로 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래 봬도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한, 자타공인 최고의 고대 이집트 전문가 중의 한 사람이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만든, 그의 네페르티티의 미라를 찾는 연구 과정을 취재한 다큐멘터리에서 그가 네페르티티 본인이거나, 그 친족일 가능성이 유력한 미라를 찾는데 성공한 모습이 나왔는데, 이 와중에 그는 각 미라의 안치 방식과 관의 형태 등을 보고 네페르티티의 생존시기와 상관없는 미라들을 정확하게 판별해내는 위엄 넘치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하와스는 이집트 유물의 출입과 유적지 발굴을 허가하는 권한을 가져서 국내외 관계자들은 그를 두려워한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면 유물과 유적지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 작업하는 외국 고고학자는 발굴 결과를 공개하기 전에 위원회에 보고해야 한다. 이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추방당한다. 여하튼 문화재에 대한 애착은 엄청나서 2011년 이집트 시위 이후 몇몇 이집트 문화재가 도난당하자 그야말로 분노하여 비난 인터뷰를 하고 도난방지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초고대문명설을 아주 싫어해서 관련 연구자들한테는 연구 허가도 내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2005년부터 방사성 비파괴검사로 탐사해 온 결과 200석짜리 협동체 비행기가 들어갈 만한 공간도 있다고 나타났다. 다만 이것이 처음 세웠을 적에 의도하여 만든 공간인지 아니면 하중이 내려앉아 생긴 공간인지는 더 탐사해 봐야 알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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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쿠푸 왕의 것에 비해 구조가 한층 간결해진 것을 알 수 있다.
9. 오해
워낙 엄청나게 크고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고대 인류의 솜씨가 아닌 더 이전 시기의 알려지지 않은 고도의 문명이 피라미드를 제작했다는 초고대문명설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그 중 제대로 된 근거가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 독특한 건축 스타일과 정교한 기술로 인해서 과연 이집트인들이 세운 것이 맞냐는 의혹에서 초고대문명설의 떡밥이 시작된다. 이런 떡밥이 존재하는 또다른 이유 중 하나는 마야 등 곳곳에서 발견되는 피라미드의 보편성 때문이기도 하다. 서로 교류가 없는 문화권끼리 비슷한 건축물을 지었다는 것은 원형이 따로 있었지 않았겠냐는 것. 그러나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초창기 마스타바부터의 발전상이 뚜렷하게 남아있으며, 처음부터 사각뿔 형태로 지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기둥의 자립과 아치도 모르던 건축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는 피라미드와 같은 사각뿔 구조로 지음은 거대건축물을 지을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즉, 서로 비슷한 환경에서 형태가 우연히 비슷해진 것이지 어떠한 원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피라미드 구조 자체는 완벽한 건물 형태도 아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피라미드를 지을 당시 이집트의 건축 기술에는 아치라는 개념이 없었다. 아치 구조를 몰랐기 때문에 피라미드는 막대한 자체 하중을 효율적으로 분산시킬 수가 없었다. 웅장한 건물 규모에 비해 내부 구조가 지극히 협소한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초고대문명설이나 외계인설 등은 여기서 간단하게 반박된다.
정상적인 대다수 학자들은 이런 초고대문명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당시 이집트가 바로 그 초고대문명이라 불릴 수 있을 만큼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충분히 당대 이집트의 능력으로 피라미드의 건설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이집트는 사막으로 둘러싸인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은 사막밖에 없지만, 기원전 북아프리카는 수풀이 대부분을 덮은 사바나 지역이었다. 사바나에서는 인간이 자체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다.[30] 당시 그곳에서는 농업도 굉장히 발달했다.[31] 기후변화로 지금은 모두 사막으로 변했지만. 게다가 매년 일어나는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을 극복하기 위해 기하학, 천문학, 측량술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덕분에 당대 이집트는 그야말로 초월적인 기술력이 있는 나라였다.
나일강 범람이 왜 기하학과 측량술에 영향을 주었냐면, 나일 강이 한번 범람하면 새로운 흙으로 그 일대가 뒤덮이게 되는데 그러면 땅 소유주들은 땅의 어느 부분이 자기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이것을 측량해 주는 전문가가 나서서 각 땅 소유주의 명확한 영토 크기를 알려주게 되는데, 이런 짓을 수천 년간 반복하다 보니 측량 기술과 이에 필요한 기하학이 엄청나게 발달한 것이었다. 기하학(γεωμετρία, geometry)의 어원도 땅(γεω, geo)+측정(μετρία, metria)의 그리스어다. 지금은 "이집트인들이 그렇게 정확할 수가!" 하면서 놀라지만 땅 한 뼘만 손해 봐도 난리나는 땅 주인들을 상대로 정확히 그들의 땅의 크기와 경계를 측정해 온 이집트의 측량사들에겐 이런 방위계산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일강의 범람은 해마다 일정한 주기로 계속되었는데 이때에 맞춰 대피하다보니 1년과 하루의 길이를 계산하는 것이 엄청나게 정확해졌다. 일년은 공전주기이므로 일년을 계산하려면 천문학을 알아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천문학도 빠삭하게 되었다. 즉 이집트의 나일강의 범람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이집트 인들로 하여금 측량술, 기하학, 천문학의 전문가로 만든 것이었다.[32] 덤으로, 나일강이 범람할때마다 새로운 흙으로 뒤덮이는 바람에 토질이 좋아져서 농사까지 잘됐다. 나일강이 범람하고 난 다음에는 농사를 시작하는 것이 고대 이집트 번영의 이유로, 나일강의 범람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수위가 낮으면 재앙이 닥쳤다며 신관들이 나서서 기도하던 나라가 이집트였다. 수천 년이 지난 중세 유럽에서도 땅을 셋으로 나누어서 돌아가면서 1년에 하나씩 쉬게 하는 3포 농업을 실시했고, 그마저도 쟁기가 발달하기 이전엔 1년 농사짓고 1년 쉬는 2포 농법을 실시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으로 지력이 회복되어 매년 농사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피라미드로 대표되는 고대 이집트의 불가사의한 생산력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원동력이었다.
그 때문에 수천 년 동안 반복된 나일강의 범람은 이집트인들에게 시대를 초월한 천문학, 기하학적 지식과 풍부한 노동력을 제동해 주었고, 이들은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이런 능력을 십분 발휘하였다. 그러므로 '''고대 이집트인 따위가 저런 걸 지을 기술력이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은 굉장히 오만한 오류이다.
또한 초고대문명설의 주장처럼 피라미드가 누가 기술을 준 것처럼 갑자기 나타나지도 않았다. 피라미드의 원형인 마스타바와 그걸 쌓아올린 계단식 피라미드가 뚜렷이 남아 있다. 그 다음 지어진 굴절 피라미드는 원래 그냥 피라미드로 지으려다가 너무 가파르게 지어서 무너지려 하자 급히 각도를 낮춘 거다. 경험이 없어 나타난 시행착오의 명백한 흔적. 굴절 피라미드 바로 다음 지어진 제대로 된 피라미드를 보면 경사가 현격하게 낮다. 그 후 여러 차례 각도를 높혔다 낮췄다 하면서 여러 피라미드를 짓다가 최적의 각도가 정해졌고, 그 이후에야 대피라미드가 건설되었다.
게다가 현대에도 피라미드를 재현할 수 없다는 말도 어불성설이다. 위의 류경호텔 등의 예가 있지만, 이미 현대인은 피라미드보다 훨씬 큰 건물을 더 빠르고 정교하게 만들 기술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당장 라스 베가스 스트립에 있는, 피라미드 모양을 그대로 재현한 호텔 '룩소르 호텔 앤 카지노'만 봐도 실제 이집트인들이 쌓은 어지간한 피라미드보다 크고, 내부 구조도 더 복잡하다. 오히려 피라미드를 쌓는 작업은 현대 건축물들을 만드는 작업에 비해 훨씬 간단하다. 단지 굳이 피라미드 구조를 안 쓰더라도 하중을 견디면서 공간을 훨씬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피라미드형으로 건축자재를 쌓을 필요가 없을 뿐이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 인들의 계단식 피라미드나 쿠푸왕의 피라미드 등에서 보이는 많은 시행착오와 설계변경, 하중을 견디지 못한 실패의 흔적들을 보면 '완벽한 건물'이란 인식은 다소 과장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생각이 현대인만의 오만은 아니다. 고대 로마 시절 이집트로 단체 관광을 갔다와서 써놓은 수기를 읽어보면 관광지의 바가지, 추가 수수료를 요구하는 가이드에 대한 불평 다음으로 많이 보이는 것이 "고대인들이 어떻게 저런 것을 지었지?"라는 내용이다.[33] 로마 시대를 기준으로 해도 피라미드는 이미 수천 년이 넘은 고대 유적이었다. 쿠푸왕 피라미드를 세울 당시 시베리아에는 아직 매머드가 살아있었다. 이미 헤로도토스 시절부터 고대 유적 관광지로 인식되었다.
즉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 사람들에게도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고대문명의 놀라운 미스테리 역사유적이었다. 그도 그럴게 그리스로마 입장에서 현대와의 시간 차이보다 이집트 피라미드 시대가 더 시간차이가 크고 더 멀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이런 시간 간격이나 차이 감각의 왜곡을 '''시간의 착시'''라고 한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백악기 공룡으로 유명한 티라노사우루스 입장에서 보면 현대인과의 시간이 가깝고, 잘 알려진 쥐라기 공룡인 스테고사우루스가 훨씬 시간 차이가 멀다.
서기 120년 경 로마인 관광객 테렌티아가 죽은 동생 데키무스 겐티아누스를 애도하며 피라미드에 라틴어로 낙서를 해놓았던 것을 1335년 독일인 순례자 빌헬름 폰 볼덴젤이 발견하여 옮겨적은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
10. 미스테리
10.1. 개관
위에 상세하게 피라미드의 발전과정 및 쇠퇴에 대해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꾸준하게 미스터리라는 이름을 달고 온갖 괴이한 학설이 난무하고 있다. 여기서는 미스터리에 대해 언급하고 비판은 몰아서 하겠다.
- 에리히 폰 데니켄은 "신들의 전차"에서 피라미드는 이집트 사람들이 지은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데니켄은 당시 이집트의 기술력과 인원동원 능력으로는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 건축물을 짓기는 무리이며 결국 피라미드를 세운 고도의 건축술과 각종 과학, 수학적 사항들이 외계인들에게서 온 것이라 주장했다.
- 에리히 폰 데니켄처럼 외계인 개입설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 그레이엄 핸콕은 로버트 보발과 함께 한 연구에서 피라미드가 오리온자리의 소위 "오시리스 벨트"의 위치와 일치한다고 주장하였고, 정확하게 오리온 자리의 별의 위치와 피라미드의 위치가 들어맞는 시기를 추적해 피라미드가 2만여 년 전에 건축된 것이라 주장했다.
- 간혹 무덤으로 사용된건 맞으나, 원래 거기 있던거에 후대에 이집트 왕들이 발견해 자기들 무덤으로 개조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10.2. 반박
- 초고대문명설이나 외계문명기원설 혹은 외계인 개입설은 앞서 설명한 내용만 봐도 충분히 논파된다. 사실 상단의 신비주의적 해석과 초고대문명설은 과학적, 합리적 근거가 매우 부족할 뿐더러, 이러한 해석이 주로 근대 서구인들에 의해 제기되었다는 것은 결국 위에서 서술했듯이 '이집트인 따위가 저런 것을 지을 수 있을 리 없다.'는 제국주의적 오만함에 의거한 오리엔탈리즘과도 통한다. 이러니 위에서 나온 자히 하와스 이집트 문화재청장은 이따위 개소리로 이집트 모독하지말라며 극도로 이런 주장을 혐오하고 이런 연구한답시고 이집트 유적지 발굴하겠다는 이들은 절대로 발굴 및 연구허가를 안 내준다. 그뿐 아니라, 이집트 고고학계에서도 당연히 미친 자들이라며 혐오한다.
- 오리온자리와 유사하다고 이를 근거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은 사실 '비슷해 보인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중요한 점은, 오리온이 지평선 위로 막 올라왔을 때는 배치가 비슷해 보이지만 정작 피라미드 상공에 올라왔을 때 천구 밖에서 피라미드를 바라본다면 오리온 벨트와 피라미드 배치는 X자 모양으로 어긋난다. 그레이엄 핸콕은 이후에도 세계의 다른 고대 유적지를 별자리와 억지로 연관지어 보려고 하는데 모두 근거가 부족하고 무리한 해석이다.
- 마지막으로 비밀통로로 알려진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여러 번 언급했듯이 부실공사의 산물이다. 항상 이런 미스테리를 언급할 때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언급되는데, 부실공사의 산물이 건물 내부에 틈새가 많은 것은 당연하므로 미스터리의 소재가 되기 딱 좋다. 물론 단순히 오래되어서 갈라진 틈이라는 의견도 있다. 어찌되었든 당장 바로 옆에 있는 피라미드의 정점인 카프레왕의 피라미드는 미스터리의 소재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10.3. 고고학계의 의문점
위의 미스터리들은 그냥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라 솔직히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위의 반박에서 다 반박되고 있지만 이집트학 전공의 고고학자들이 의문스러워하는 부분이 있는데 전성기 피라미드들 특히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정말 왕의 무덤이 맞긴 하냐'''는 것이다. 제일 의문인 게 쿠푸왕이지만 쿠푸왕의 피라미드만 문제는 아니다. 전성기 피라미드들 중에서 매장의 흔적이 있는 건 위에서 말한 조세르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팔 하나가 전부다. 다만 다른 피라미드들은 멀쩡한 피라미드를 일부러 허물어 볼 수도 없고 해서 아직 조사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이후 조사가 더 진행되면 왕의 미이라가 발견될 가능성은 있다.
이런 의문이 나오는 이유는 피라미드 내에서 '이건 왕의 무덤이다'라고 납득할 만한 증거물이 석관을 제외하고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푸왕의 피라미드에는 왕의 방이니 왕비의 방이니 하는 것들이 있긴 하지만 사실상 이건 처음 들어가봤던 아랍인들이 자기들 보기에 이건 남자 방같이 생겼으니 왕의 자리 같고 이건 여자들 방 같이 생겼으니 왕비의 자리 같다면서 왕의 방, 왕비의 방이라는 식으로 대충 끼워맞춰 붙인 이름이다. 문제는 이런 방에 어떤 이름을 붙이건 어쨌건 분명히 현재까지 발견된 피라미드 내부의 매장 공간임이 확실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유해는커녕 그 흔해빠진 부장품 유물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설사 유해가 죄다 썩어 없어졌다고 해도 '여기에 유해가 있었다'는 흔적 정도는 당연히 남는데도 불구하고 아예 매장의 흔적이 없는 것이다.
도굴돼서 없는 거라는 말도 있는데, 역사 기록상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제일 먼저 파고 들어간 인물로,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였던 알 마문이 피라미드에 들어갔을 때도 완전히 텅 비어있었다고 한다. 도굴당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텅 비어있었다는 것이다. 알 마문 본인이 도굴해놓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본래부터 비어있었다는 드립을 쳤다는 말도 있지만 도굴당한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알 마문은 몰래 도굴하려 피라미드 내부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당시의 풍설에 있다고 전해지는 '고대의 보물과 기술'을 얻으려는 ''''공식적인 탐사''''였기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숨길지언정 무엇인가 나왔다면 숨길 이유가 없다. 이야기의 다른 버전에는 보물의 일부를 얻은 것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결코 많은 보물은 아니고 '탐사비용만큼의 재물'을 얻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알 마문 이래 아랍 지식인들이 피라미드에 관해 언급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것이 알 마문의 이야기이며 후대 이집트 민담에도 반드시 언급됨을 고려하면 알 마문은 피라미드에 들어간 것은 숨길 의도조차 없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칼리프 시대보다 고고학에 대한 기술이 월등히 발전된 지금은 도굴 당했다고 해도 도굴 당했다는 사실 정도는 당연히 알아차릴 수 있다. 도굴꾼은 당연히 돈 되는 물건만 훔쳐가기 마련이며 돈 안 되는 잡다한 쪼가리 유물들은 도굴되지 않은 무덤이 아닌 도굴된 무덤에서도 발견되는 게 고고학계의 상식이다. 설사 싹쓸이를 했다고 해도 도굴 과정에서 반드시 뭔가는 부서지기 마련이고, 그 흔적은 남게 되어 있다. 그리고 고고학자는 이런 흔적들을 찾아내는 것을 자신의 전문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한 예로 당신이 박물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박살난 도자기나 토기 파편 같은 유물은 도굴꾼들이 무덤에서 깽판친 흔적일 확률이 꽤나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푸왕의 피라미드에서는 그런 도굴의 흔적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다.
혹자는 훗날 계속되는 도굴에 견디지 못하고 왕가의 무덤에 묻혔던 미라들을 다 따로 모아두었듯이 쿠푸왕의 미라를 따로 모셔두고 피라미드를 싹 청소했다고도 하지만 그런 청소를 했으면 청소의 흔적이라도 발견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흔적 따위도 전혀 없다. 때문에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대세임에도 불구하고 무덤이면 당연히 있어야 할 유해가 없는 점은 여전히 이집트 고고학계의 크나큰 의문점이다.
실제로 쿠푸왕의 피라미드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정체불명의 공간만 세 군데고,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아직 발견되지 못한 (유적과 유물이 있는) 진정한 왕의 자리가 있다는 설 심지어 피라미드 자체가 왕의 무덤이 아닌 무언가 다른 목적으로 지은 거라는 설도 있지만 가설 단계일 뿐이다.
하지만, 무덤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것은 쿠푸왕의 피라미드의 시기에 만들어진 피라미드들에 국한된 얘기이다. 그 이후 왕조의 피라미드들의 경우 왕의 무덤이라는 증거물이 다양하게 발견되었다.# 따라서, 쿠푸왕의 피라미드도 무덤이라고 여김이 자연스러운 추론일 수밖에 없다.
10.4. 건축학적인 의문점
피라미드의 각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근세에 세워진 그리니치 천문대는 9분[34] 정도 기울어져 있는데 반해 피라미드의 남북 방위는 겨우 3분 오차가 있을 뿐이다. 나침반도 없던 4500년 전 고대에 방위를 어떻게 정밀측정했을지는 추측의 영역이다.
또한 실무적인 관점에서 본 피라미드 건설 과정의 의문점은 여전히 있다. 단순히 돌을 캐고 옮겨서 깎아 쌓아 올린다고 생각하면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려면 현재 발견된 채석장보다 규모가 3배는 커야 한다. 이는 피라미드 규모 = 채석장에서 캐간 돌의 양이라는 착각에서 일어난 일인데, 문제는 모양을 다듬는 과정에서 더 많은 돌이 필요하고 부산물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산에 따르면 피라미드의 2배 이상 크기의 버려진 돌무더기가 있어야 한다.
게다가 피라미드 건설방법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아직 없는 것도 미스터리이다. 수년간 가장 유력했던 이론은 피라미드 한쪽면을 따라 설치된 별도의 경사로로 돌이 운반되었다는 것이지만 현재는 주류 학계에서 부정되는 추세. 피라미드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경사는 급격해지고 경사로는 길어지게 된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돌을 운반할 만한 경사로의 길이는 2 km가 넘게 되는데 이는 피라미드보다 더 큰 구조물이 된다는 것이 문제. 나중에는 피라미드 외부면을 돌아가는 훨씬 작은 경사로가 나선형으로 설치되는 방식도 제시 되었지만 돌의 규모와 모퉁이의 존재까지 생각하면 경사로를 지탱하기도, 돌을 효율적으로 옮기기도 힘든 방법이다.
시간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피라미드 건설에 걸리는 시간은 약 20~30년인데 추정대로 석대가 250만 개 사용되었다면 25년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6분에 1개씩 쌓았다는 뜻이 된다. 처음에는 여러 군데에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지만, 몇 단만 올라가도 힘들게 된다. 건축학자 피터 제임스의 주장에 따르면 피라미드 내부의 돌들은 다듬은 석재가 아니라 잡석으로 채우고 외부면 몇 단만을 석재로 쌓았을 것이라는 기존의 의문점을 해소하는 이론을 제시 했지만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건설방식에 대한 증거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당시 이집트인 종교관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건설방식이기 때문이다.
11. 기타 사항
사실 쿠푸 왕의 아들이었던 제데프레의 피라미드가 몇 k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로마 시대에 석재를 약탈해 가서 아랫부분만 남아 있다. 스핑크스도 카프레 왕의 얼굴을 본뜬 것이 아니라 쿠푸 왕을 기리기 위해 쿠푸의 얼굴을 조각한 것이 진실. 카프레는 제데프레의 조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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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는 사막 한가운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단 가장 유명한 3대 피라미드부터가 기자 시의 외곽에 있고[35] ,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에서도 매우 가깝다.[36] 카이로 공항에서 자동차타고 가면 1시간 이내에 도착한다. 피라미드를 보려면 지하철 타고 기자역에 내려서 마을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시에 잔뜩 있는 왕릉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무엇보다도 이 피라미드는 수도고속도로 안에 있는데, 그 수도고속도로의 남측 구간은 사막 한가운데를 지난다.
구한말(1883년) 한국 역사상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보빙사 일행'''들도 방문했다고 한다. 동행한 서양인들은 당시 유행이었던 피라미드 등반과 탐사를 보빙사에게 권했으나, 전원이 거부했다고 한다. 서양인들은 보빙사 사람들이 대담하지 못하고 겁이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선비 된 입장에서 천민의 무덤이라도 함부로 못 하는데 하물며 남의 나라 '''왕릉'''을 밟고 올라가거나 들어가볼 수 있을 리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를 배경으로한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에서는 다양한 피라미드가 나오는데, 대부분 꼭대기가 뷰포인트라서 피라미드를 직접 타고 올라가야한다. 내려올때는 미끄럼틀 타듯이 벽면을 타고 내려오는데, 올라갈때 걸린 시간과 달리 엄청 빨리 내려와서 허무함이 들 정도(...) 여담이지만, 현재는 풍화되고 주변 건축자재로 떼어가며 사라진 피라미드의 매끈한 외관을 고증해냈다. 안에 들어가볼 수도 있다.영상
20세기 후반에는 어째서인지 피라미드의 형태 자체에 영험한 힘이 있다는 주장이 인기를 끌었다. '피라미드 파워'라는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뉴 에이지이즘(new ageism)'의 일종이었다. UFO, 크리스탈 힐링 등과 더불어 21세기에는 인기가 없어진 20세기의 유행.
스타게이트에선 우주선 착륙장으로 나온다. 어째서인지 우주선도 피라미드 모양.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에선 디셉티콘의 스타 하베스터를 카프레왕의 피라미드가 덮고있는것으로 나온다.
스타게이트의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의 영화 10000 B.C.에는 정체불명의 고대인들이 다른 부족들을 노예로 납치해와 매머드와 착취해서 이걸 기원전 10,000년에 건설하는 게 나온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에서는 이집트 문명의 불가사의로 등장. 2편에서는 에디터 전용 건물로 나온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쿠키 영상에선 아포칼립스(엑스맨 유니버스)가 염력으로 혼자 순식간에 짓는다. 이후 엑스맨: 아포칼립스에서 현대에 부활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염력으로 현대의 시가지를 밀어버리고 그 자재로 자신을 위한 피라미드를 새로 짓는다.
12. 형상
세계 곳곳에 유사한 건물이 있는 것도 간단히 그 대답을 낼 수 있다. 피라미드 형태는 무게 분산에 유리하고 매우 안정적인 구조이며, 그래서 고대의 미숙한 건축기술로 거대한 건물을 만들려 한다면 피라미드 형태로 만드는 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기 때문이다.[37]
쿠푸왕의 대피라미드의 진짜 입구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 있는 입구는 일꾼 탈출용 입구를 완력으로 찾아낸 것이며, 석실도 진짜 석실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다. 1990년에 독일 고고학 연구소 팀이 환기갱이라 알려진 곳에 로봇을 투입하여 탐사를 했는데 그 안에 문이 또 있었다. 이 문 너머에 대한 탐사는 이집트 당국이 허가를 내주지 않아 무산되었다.
이것은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정말로 비밀에 가득 찬 피라미드라는 설도 있으며, 혹은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설계 미스로 인해 석실을 끊임없이 증/개축 했다는 설로 나뉘어 있다. 하지만 2011년 현재는 쿠푸왕의 피라미드도 기술력 부족으로 석실이 끊임없이 파손되는 부실건축물이었다는 후자의 입장이 정설이 된 지 오래다.
당장 석실에 7중겹의 천장을 올리고도 그 천장이 다 균열이 가서 반쯤 박살난 상태라는 것과 석실의 구조도 천장이 어긋나고 기울어진 등 영 어설프고, 상기한 일꾼 탈출용 통로가 사실은 그냥 잘못 만들어진 틈이라는 주장 등으로 뒷받침된다. 즉 칼 같은 동서남북 방향과 별자리 등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와 설계 미스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4] 피라미드(기원전 2500년) - 카이사르 / 클레오파트라(기원전 50년) - 부르즈 칼리파(2010년)[5] 다만 무덤으로만 한정하기에는 여러 반론이 있다. 예를 들어 쿠푸왕의 아버지 스네프루왕은 재위 기간동안 피라미드를 5채나 지었다.[6] 이 건설에는 인원 10만 명 남짓을 동원했다고 추정했지만, 현대에 프랑스의 한 건축가가 내부 경사로를 이용해 지었으리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이 가설에 따르면 건설에 필요한 인원은 4000명 미만으로 대폭 줄어든다.[7] 하지만 이조차도 무너져 사라졌기 때문에 기록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의심 없이 확실하게 이 피라미드를 넘어섰고 아직까지 남은 최초의 구조물은 19세기에 완공된 쾰른 대성당이다.[8] 당시에는 벽돌을 만들 때 불에 구워서 만든 것이 아니라 진흙을 빚어내거나 틀에 넣어 모양을 만든 뒤, 햇빛에 '''말려서''' 만들었기 때문에 내구성이 매우 낮았다. 물론 당시엔 완성된 뒤 회반죽으로 코팅을 했기 때문에 방수 및 풍화에 어느 정도 보호가 되었지만 통짜 바위를 깎아내서 만든 피라미드와는 근본적인 내구성 차이가 있다.[9] 중국의 명나라, 청나라 때 재건 및 보수된 만리장성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훼손됐던 상황과 비슷하다.[10] 아랍어로 긴 의자(벤치)라는 의미.[11] 이집트 고왕국 제 3왕조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사족으로 이 피라미드에서 조세르 파라오로 추정되는 미라가 발견되었는데 팔 한 짝만 있었다.[12] 프타호텝은 이집트 고왕국 제 5왕조의 파라오 제드카레 이세시(Djedkare Isesi) 시대의 고관이다.[13] 이집트 고왕국 제 4왕조의 창시자이다. 대피라미드로 유명한 쿠푸 왕의 아버지이자 카프레 왕의 할아버지가 되겠다. 스네프루의 건축학적 업적이 후대 파라오들의 경쟁심을 자극한 덕에 이집트 석조기술은 놀랍게 발전하였다. 청동기 시대에 석재 수십만 톤을 다듬고 운반하고 쌓아올리는, 말 그대로 불가사의한 업적을 이룩한 것이다. 피라미드 건축 열기가 식은 이후에도 이때 발전한 건축기술만큼은 그대로 계승되어 룩소르 신전, 카르나크 신전 등과 같은 불후의 건축물들을 세웠다. 그리스-로마의 건축물들도 이 시기의 과감한 시도가 없었다면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14] 자기 무덤이 아니라 전 왕조에서 짓고 있던 피라미드라는 설이 있다. 이 설이 맞는다면, 조세르의 피라미드를 따라서 계단식 피라미드로 설계되었던 메이둠 피라미드를 무리해서 매끈한 피라미드로 설계 변경을 하다가 답이 없어 보이니 일부러 무너지게 놔두었단 뜻이다.[15] 현재의 사하라와 아라비아 사막이 생성된 때는 대략 5천년 전이다. 즉 고왕국 시대와 중왕국 시대만 하더라도 초원이 있었다. 더구나 1만 년 전 사하라는 지금의 브라질과 비슷하게 열대우림과 초원이 펼쳐진 지역이었다.[16] 이런 노예들이 흑인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스파이크 리 감독이 대표적. 1990년대 영화 말콤X를 감독하며 피라미드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 피로 지어진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17] 전쟁 노예가 광산에 동원되어 채석이나 운반 등의 프로젝트에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예를 들면 피라미드를 세 개나 지은 스네페루는 정복군주이기도 했는데, 그가 누비아나 리비아에서 데려온 전쟁노예 수천 명과 가축들이 시나이 반도의 광산에 투입되었다. 종합하자면 단순 노동에는 노예들을 사용했고 보다 정교한 작업이 필요한 곳에는 자유인을 썼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20만이라는 규모는 무리가 좀 있지만 헤로도토스가 없는 소리를 지어낸 것은 아닌 듯하다. 문제는 까내린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거지만...[18] 신왕조 시절에 이미 180만을 찍었지만, 이후 기원전 7세기부터 인구가 줄기 시작하여 8세기에는 120만이 되었다.[19] 채찍질도 애초에 사람을 때리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구령 넣을 때의 박자 맞추기용이었다는 설도 있다.[20]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건지 2002년에 개봉한 프랑스 영화인 아스테릭스 미션 클레오파트라에서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새 왕궁을 건설하는 노동자들이 자유민 출신의 피고용인들로 나온다. 심지어 급료 문제때문에 수시로 노사분규가 일어났다는 것까지 고증해서, 간신인 아몽보피스의 선동에 넘어간 노동자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고는, 공사에 도움을 주러 온 아스테릭스 일행에게 푸념을 늘어놓는 장면까지 등장했다(...).[21] 파라오 입장에서 이 정도면 좋게 끝난 거다. 더 심하면 파라오 사후 노동자들이 자기 손으로 지었던 피라미드를 도굴하는 사태도 있었다.[22] 고대 이집트의 무덤에는 보통 벽화나 비석 등의 형태를 통해 생전에 했던 일이나 행보 등 무덤의 주인에 대한 기록을 남겨둔다,[23] 여기에 오류가 있는데 이집트에도 노예 자체는 있었다. 보통 전쟁포로 등이 노예로 쓰였다. 다만 그 규모나 보편성에 대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피라미드를 짓는 데 투입된 노동력은 노예보다는 일반민이나 자유민, 기술자 등을 통해 충당된 것은 사실이다.[24] 추가로 로마의 노예들은 대부분 일정기간을 노예로 살면 자유민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을 일컬어 해방노예라고 한다. 또한, 그들의 자식들은 시민권까지도 얻을 수 있었다. 현대에서 생각하는 노예의 이미지와 당시의 노예는 많이 달랐다.[25] 다만 이는 경우에 따라 달랐다.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치거나 의술 종사자, 또는 이발사(이 둘은 겸직일 때도 있었다) 등 기술직 노예들은 정말 좋은 대우를 받으며 자유민이 될 가능성도 높았지만 일반적인 단순 노무를 담당한 육체 노동 노예들은 대체로 비참하게 살았다.[26]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아우슈비츠의 입구 표지판 같은 경우나 V2의 실패 사례 등이 예시가 된다.[27] 이 왕의 묘실도 피라미드의 불가사의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왕의 묘실에는 화강암으로 된 매끈한 관이 있는데 청동기 시대에 어떻게 이걸 정밀 가공할 수 있었을까? 청동기 시대에 세운 대피라미드의 수수께끼 석재에 관해서는 정말로 불가사의한 수준의 기술력을 가진 건 확실하다.[28] 유태인이 팔레스타인 지배를 받고 그걸 빌미로 학살벌이자면 세상에 그 정당성으로 무수한 나라가 과거 역사로 지배당해야 한다면서 그들의 역사는 더럽다고 혐오감을 보이기도 했지만 문화재를 훔치는 건 나치 같은 놈들이라고 욕한 인터뷰를 한 걸 보면 그도 나치는 혐오하는 듯하다.[29] 반유대주의가 옳은 것은 아니지만, 이집트는 지난 중동전쟁에서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과 수없이 전쟁을 치르며 많은 패배를 겪은 현대사로 인해 반유대주의가 마치 한국인이 일본인에 대한 본능적 경쟁심을 느끼듯 자연스러운 국민감정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봐야할 필요가 있다.[30] 북아프리카의 사막화는 수백 년간에 걸쳐 서서히 일어나 고왕국시대에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피라미드를 지은 걸 보면 그다지 큰 타격은 입지 않은 모양.[31] 심지어 이집트는 훨씬 뒤인 20세기 중반까지도 식량자급이 가능했던 국가였다. 물론 1970년대 중반 이후에 (인구급증으로) 상황이 역전되어서 식량을 수입하는 형편이지만.[32] 게다가 현재 쓰이는 달력인 그레고리력, 율리우스력의 원조가 이집트다.[33] 하지만 재밌게도 로마도 멸망 후에 그 놀라운 건축기술 덕에 비슷한 말을 들었다. 물론 수천 년의 간극이 있는 이 사람들을 고대인으로 뭉뚱그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인식일 뿐이다.[34] 1분은 1도의 1/60[35] 정확히 말하자면 피라미드 바로 앞에 시가지가 만들어진 셈이다. 피라미드는 이미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인 로마 제국 시절부터 관광명소라서 그 근처를 중심으로 상권이 발달했기 때문.[36] 많은 이집트인들은 아예 기자를 카이로의 위성도시쯤으로 취급할 정도로 가깝다. 카이로에서 기자까지는 약 6 km으로, 서울역에서 노량진역 사이의 거리와 비슷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즉 이집트 입장에서 기자는 수도권이다.[37] 간단한 실험으로, 모래사장에서 양동이를 쓰지 않고 모래를 최대한 높이 쌓아보자. 무슨 모양이 나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