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밍 소드
'''Arming S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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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용 검, 무장용 검이라는 뜻이다. 중세 시대 11세기경부터 14세기 사이에 기사와 군인 계급이 사용하던, 십자가형의 크로스 가드를 지닌 양날 한손 장검이다. 기사 계급이 대표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knightly(또는 knight's) sword', '기사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도 아밍 소드로 검색하면 나이틀리 소드로 리다이렉트 해준다. '중세 서양의 검' 하면 떠올리는 일반적인 검이 바로 이것이다.
2. 잘못 알려진 사실
일반적으로 한국에는 아밍 소드를 롱소드와 동일시하지만, '''롱소드는 양손검이다.''' 롱소드가 한손검이라는 것은 D&D에서 잘못 퍼트린 편견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아밍 소드를 브로드 소드로 착각하거나 그렇게 부르는 편견이 퍼져 있다. 브로드 소드는 군에서 계속 사용하던 일반적인 굵기의 검이 17세기 이후 민간에서 주류가 된 가늘고 찌르기 위주의 '''레이피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날이 넓다고 그렇게 불리운 것으로, 역사적으로 17세기 이후의 검을 부를 때 쓰인 것이다.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판타지 소설과 게임으로 인해 발생한 무지. 사실 이들 '판타지 용어'는 영어 단어를 번역해 들여올 때 파이어 볼이나 라이트닝 볼트와 마찬가지로 그냥 음역해서 들여오는 과정에서 생긴 인식에 불과하다.
3. 한손검의 계보
이런 한손 장검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로마 시대의 스파타가 나오는데, 스파타는 대이주 시기를 통해 게르마닉 철기 시대의 도검에 영향을 미치고[1] , 대이주 시대 검은 바이킹 시대의 바이킹 소드에 영향을 미친다. 바이킹 소드는 유럽에서 노르만, 앵글로 색슨 등에서도 두루 비슷한 형태로 사용되다가 점차 폼멜이 둥그렇게 변하고 크로스 가드가 길어지면서 11세기 정도에 우리가 생각하는 중세 검, 아밍 소드로 변화한다.
아밍 소드도 형태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검신의 폭이 넓고 풀러가 길던 초기형에서, 점차 테이퍼가 심해지고 풀러가 짧아지다가 결국에는 풀러 없이 다이아몬드형 단면의 검신을 지닌 칼끝이 매우 뾰족한 형태로 변해간다. 가드와 폼멜 그립 등 각종 구성요소도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유행과 변화를 거쳐서 변화해나간다. 중세의 도검도 시대적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진화했다는 증거.
검신의 양날이 거의 수평에 가깝던 바이킹 소드에 비해 아밍 소드는 칼끝으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테이퍼형 검신을 지니고 있다. 크로스 가드가 길기 때문에 손을 잘 보호해주며, 폼멜이 둥글고 무게추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무게와 길이에 비해 매우 쉽게 다룰 수 있는 검이다. 이런 형태상의 특징은 평범하게 생각하면 아무 의미 없게 들리지만, 검술과 도검 전문가에게는 큰 의미가 있다. 칼 끝으로 갈수록 뾰죽해지는 테이퍼형 검신은 찌르기에 유용하다는 뜻인데, 비슷한 크기와 무게의 선조격 도검인 바이킹 소드는 검신의 양날이 거의 수평에 가깝게 유지되기 때문에 찌르기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으며 베기로 많이 썼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중세 후기 나이틀리 소드의 테이퍼형 검신은 찌르고 베기 모두에 능하다는 뜻이고, 본래 찌르기에만 특화되어 있던 군단병 시절의 스파타에서 각개전투에 유리한 베기로도 검의 사용법이 다양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로스 가드가 길다는 것은 크로스 가드가 단순히 손의 보호만 하는 것이 아니라 크로스 가드를 적극 이용해야 하도록 검술의 변화가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기사라면 검과 방패만 들고 싸우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만 들고 싸우지는 않는다. 봉토를 가지지 않고 실전을 자주 치뤘던 노르만 기사의 당시 기록과 재현도만 보더라도 칼과 방패뿐만이 아니라 도끼와 창도 썼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기사의 가장 위력적인 공격인 첫 돌격은 창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으며, 보통 이 첫 돌격으로 창은 부러지거나 (금속제의 경우) 구부러진다. 물론 카우치드 랜스가 보급된 건 중세 전성기의 이야기이고, 이 카우치드 랜스 기술은 '''5m나 되는 기마용 랜스'''를 다루기 위한 것이었다. 이전 시대의 기사들은 2~3m짜리 창을 썼으며, 반드시 카우치드 랜스만으로 돌격이 이뤄진 건 아니고 두손으로 창을 다루거나 투척하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창을 소모했을 경우 한손 무기를 그냥 말 타고 지나가다가 후려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위력을 발휘했다. 리차드 1세처럼 마상의 운동 에너지를 활용한 공격은 십자군 전쟁 시기의 이슬람 세력에게 굉장한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 외에 기사가 기병 검술을 사용한 사례가 있다. 백년전쟁 시기에 영국 하마 기사들의 전투력에 강한 감명을 받은 프랑스 기사들도 수하들에게 하마 전투를 명령하기도 했다. 또한 육중한 직검의 충격력이나 찌르기 공격은 중세 이후로도 오랜 기간 중기병의 주 전법으로 사용되어 왔다. 윙드 후사르의 경우 육중한 직검과 경쾌한 곡도를 모두 안장에 매달고 다니다가 상황에 따라서 선택하여 사용했고, 18~19세기 유럽의 세이버도 후사르 등의 경기병은 휨각이 큰 것을, 퀴레시어 등의 중기병은 직선형 도검이나 휨각이 적은 묵직하고 긴 쪽을 선호했다. 오히려 나폴레옹 전쟁 내내 휨각이 큰 세이버를 휘두르던 영국 기병은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 흉갑기병과 창기병에게 털린 뒤에 직선형 도검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덤으로 그 전까지는 등한시했던 창기병도 창설한다. 애초에 곡도를 휘둘렀다고 흔히 생각하는 이슬람권 기병조차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직선형 도검이 주류였다.
한손검은 칼집에 넣어 허리에 차고 있으면 항시 휴대가 가능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라도 최소한의 무장으로 갖출 수 있다. 검술을 수련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검술을 수련한 경우 맨몸의 상대라면 매우 우수한 살상력을 발휘할 수 있고, 갑옷을 입은 상대에 대해서도 창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다. 상대가 장병기를 들고 있으면 왼손에 방패를 들어 매우 우수한 방어력으로 맞설 수 있고, 검술을 수련하면 매우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다. 자신이 폴액스나 할버드, 창, 그레이트소드, 클레이모어와 같은 장병기를 들었을 때는 칼집에 넣어두면 주무기를 잃었을 때를 대비한 든든한 예비 무기가 된다. 창이나 할버드의 경우 평상시에 들고 다니기엔 너무 귀찮고 쓸 때에도 제한 사항이 붙지만, 한손검은 가볍고 걸리적거리지 않으면서도 든든하다. 물론 검술을 수련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지만 거의 전 영역에 충분히 대응 가능한, 다른 무기 못지않은 무서운 무기가 된다.
더불어 사회가 안정되면서 거치적거리는 창과 당시 인식으로는 '야만인의 무기'로 인식되던 도끼[2] 는 배제되기 시작했다. 도끼의 배제는 '야만인의 무기' 라는 좋지 못한 인식에 기인한 바도 있지만, 도끼라는 무기 자체가 가지는 특성과 문제점에 기인한 바도 있다. 철퇴류와 마찬가지로 무게중심이 머리 쪽에 치우친 도끼는 원심력을 이용해 휘두르면 엄청난 속도와 파괴력을 내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 특성 때문에 사용 시 동작이 커지는 것이 단점이다. 즉 일격이 명중하면 도검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하지만 그 일격이 빗나가면 반격당하기 쉬운 빈틈 역시 크게 나타나는 것. 또한 밀집 대형이나 좁은 공간, 장애물이 있는 상황 등에서는 사용에 큰 동작이 필요한 도끼나 철퇴류의 무기는 그만큼 사용하기 불편하다. 이에 비해 도검류는 한 방의 위력은 제한적일지언정 다양한 상황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나고, 민첩한 동작을 통해 다양한 기술을 활용하기 유리하여 공방을 주고받는 전투가 장기화될 때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전문 전사로 훈련받는 귀족(기사)의 입장에서는 도끼보다 검이 더 '범용적으로 사용하기 쉬운' 무기로 사랑받을 만했던 것. 그리고, 어차피 중세 기사쯤 되면 무기로 검과 창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도끼나 철퇴 등 다양한 무기를 갖추고 그 사용법을 모두 연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말타고 달릴 때는 창으로 찌르고 말이 쓰러지거나 창이 부러지면 단병기를 휘두르며 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 따라서 상대가 갑옷과 투구 등을 잘 갖춰 입었을 때를 대비하여 전쟁에 나갈 때는 당연히 도끼나 철퇴들도 갖추고 나갔다. 하지만 전장이 아닌 일반적인 상황에서 그런 무기들을 모두 주렁주렁 매달고 다닐 수는 없으니 자연스럽게 평시의 무장으로는 범용성이 높은 도검류를 선호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근세 무렵까지도 특히 허리에 차고 다닐 수 있는 검은 귀족 정장의 필수적인 구성요소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자연히 귀족들 사이에서는 가톨릭의 상징이던 십자가와도 닮아 '고상한 무기'인 검의 지위도 올라 상류층에서부터 검술을 단련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더불어 검은 서유럽 문화권에서는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기사 서임에 쓰이는 도구가 칼이다. 사회 안정화가 이룩되었다고는 하지만 툭하면 결투를 해대던 당시 시대상을 보면 칼을 소지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다면 필사적으로 익히는 게 당연한 무기이기도 했다.
아밍 소드와 버클러를 사용하는 소드 앤 버클러 검술서 I.33 검술서는 학자에 따라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중반 사이에 쓰인 것으로 보는데, 어쨌든 유물이 현존하는 중세 서양의 검술서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I.33 검술서는 갑옷을 입었을 때가 아니라 평상복 차림으로 사용하는 검술이기 때문에, 기사의 훈련용으로 수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평민의 호신 검술, 중장병에 비해 가벼운 무장을 하는 궁병 등의 군인 계급의 검술로도 사용되었을 듯하다. 실제로 중세 시대에 아밍 소드와 버클러는 평민도 애용한 호신 무장이었으며, 르네상스 시대까지도 소드 앤 버클러 스타일은 꾸준히 사용되었다.
한편, 일부러 검지손가락을 칼날에 걸쳐 잡는 그립이 유행했다. 칼날 중에서도 손잡이에 가까운 부분은 대개 날을 세우지 않았다는 점을 이용한 것으로, 이로써 더 정교한 조작과 찌르기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맞춰서 아밍 소드에 손가락 보호대가 달리기 시작했다. 이 보호대는 갈수록 복잡하고 화려해졌으며, 여기에 맞춰서 날을 가늘게 만들기 시작했고, 이렇게 아밍 소드는 사이드 소드, 궁극적으로 레이피어로 발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