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보노 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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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인물. 사진의 아래에 있는 남자는 무토 케이지의 기믹인 그레이트 무타다.--
'''이름'''
아케보노 타로(曙 太郎)
'''국적'''
일본
'''생년월일'''
1969년 5월 8일
'''신장 / 체중'''
204cm / 220kg[1]
'''링네임'''
"아케보노"
'''종합격투기 전적'''
4전 4패
'''승'''
없음
'''패'''
3서브미션, 1판정
'''킥복싱 전적'''
10전 1승 9패
'''승'''
1승 1판정
'''패'''
5KO 4판정
1. 개요
2. 스모
6. 투병 생활
7. 기타


1. 개요


Akebono Taro(曙 太郎).
일본의 전직 스모 선수, 킥복서, 격투기 선수이자 현직 프로레슬러.
하와이 출신으로, 1996년경 일본으로 귀화했다. 귀화 전 이름은 채드 조지 하헤오 로언(Chad George Haaheo Rowan). 귀화 후 풀 네임은 아케보노 타로(曙 太郎).

2. 스모


1993년 3월 스모의 프로 리그인 오즈모에서 제 64대 요코즈나에 등극한 위대한 스모 선수였다. 스모에서는 거의 최종보스 기믹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하와이 출신인 고니시키의 단순한 스모보다는 츳빠리를 이용한 박진감 넘치는 손기술, 거체를 이용한 요리키리 스타일 등 피지컬과 기술 모두 접목한 스모선수였다. 같은 하와이 출신 선배 스모 선수 고니시키가 온갖 견제 끝에 끝내 요코즈나에 오르지 못하고 선수생활 내내 요코즈나 바로 아랫등급인 오제키에 머문 것과 달리[2] 요코즈나로 승격됐다. 아케보노가 요코즈나에 오르던 시절엔 4명이나 되던 요코즈나들이 줄을 이어 은퇴해 요코즈나 계급이 공석이었고[3] 스모계의 정점에서 온갖 주목을 받게 될 단 한명의 요코즈나가 유색인종 외국인임을 바라지 않던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던 스모 업계의 수 많은 견제 속에서 조건으로 내세운 2연속 우승을 달성하고 끝끝내 요코즈나에 오르게 된다.
이후 일본 스모계의 아이돌이자 살아있는 전설의 요코즈나인 와카다카 형제로 알려진 와카노하나-다카노하나 형제[4] 와의 일진일퇴의 명승부를 펼쳤으나 당연히 악역기믹 이었으며 후배세대인 무사시마루의 등장 이전까지 하와이계 스모선수의 절대지존자리를 유지하였다.
당시 90년대 스모계는 이 사상 최연소 외국인 요코즈나와 와카다카 형제의 등장에 힘입어 기존의 시청률에서 40%나 올라갔을 정도로 스모 선수로서의 아케보노의 위엄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이후 거체에서 나오는 고질적인 부상과 노쇠로 인해 스모계를 은퇴하였고, 감독이 되어 후배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3. 킥복싱


그런데 갑자기 2003년 11월 5일, 일본 스모 협회에 퇴직서를 제출하더니, 11월 6일에는 기자회견을 열고 뜬금없이 K-1에 참전한다고 발표하였다(...). 98년 결혼 당시 요코즈나가 외국 여성과 결혼한다는 이유로 후원회가 해산되었고, 은퇴 이후 스모 협회가 제공하는 배당금 만으로 생활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어쨌든 스모 요코즈나 출신이 격투기에 참전한건 아케보노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많은 화제를 낳았지만 아케보노의 격투기 진출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전적을 보면 알겠지만 승리와는 거의 인연이 없었다. K-1에서 유일하게 거둔 1승마저도 상대가 격투가로써의 전성기를 한참 넘긴 심판 카쿠다 노부아키였다는 걸 감안한다면 사실상 무승. 심지어 이 승리조차도 카쿠다가 흥행을 위해 져줬다는 루머가 있다. 말이 루머지 사실상 워크다(...).
이 시합이 결정되었을 당시 카쿠다는 나이 43세(...)로, 체중은 100kg 근처에 키도 170cm 정도로 이미 체급부터가 엄청나게 차이가 났다. 그러나 이슈를 만들기는 충분했는데, 카쿠다 자신은 젊었을때 부터 가라데 파이터로서 경력을 쌓았고(극진공수도의 전일본 대회 순위권자) 앤디 훅 등과도 싸운 경력이 있다. 게다가 초창기 K-1에선 종종 자신이 직접 현역선수로 출전하기도 하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게다가 그 나이때에도 가라데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고 하며, 실제로도 시합당시 도복을 벗자 나타난 나이를 초월한 우람한 근육에 관객들의 감탄사가 대단했다... 즉, 훌륭한 자버(...) 였던것. 그러나 어처구니 없게도 아케보노는 카쿠다의 '''그냥 킥에 맞고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떡밥 매치도 간신히 집어 먹은것.
사실 이 시합도 굉장히 말이 많았던게 아케보노는 거듭되는 연패로 스트레스성 탈모까지 생길정도로 심한 부담감을 가진 상태였고, 다음 시합에서도 패배한다면 격투기에서 은퇴한다는 폭탄선언을 던져 k-1사무국이 뒤집혀 버린 상황이었다. 아케보노의 기량이 워낙 기대이하라 떡밥상대조차 찾기 쉽지 않았고, 결국 은퇴후 k-1에서 일하던 카쿠다가 은퇴를 번복하고 링에 올라 아케보노를 상대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세간에선 아케보노의 은퇴를 막기위해 k-1관계자로 일하던 카쿠다를 제물로 삼아 일부러 져주게 하여 아케보노의 위신을 세워주고 은퇴를 막은거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이 시합의 영상을 보면 카쿠다는 평소와는 달리 전혀 공격적이지 않고 아케보노의 공격을 일부러 받아주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참고로 카쿠다는 이 경기 이후 붙은 독일의 마브릭 하비를 1라운드에 KO시킨다.
하지만 이벤트 파이터로서의 스타성을 가지고 있어서 밥 샙과의 경기는 42.5%라는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최홍만과는 총 3차례나 싸웠으며, 당연하지만 전패했다. 이 둘의 대결은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고, 천하장사가 요코즈나를 이겼다는 카타르시스를 국내 격투기팬들에게 안겨줬다.
최홍만과의 3차전 이후 K-1 입식 무대에서 퇴출당했다. FEG 대표 다니가와 사다하루가 K-1 출전은 없을 것이라고 직접 못박았다.
2015년 연말에 격투기 이벤트 RIZIN에서 12년만에 밥 샙과 재대결하게 되었다. 다만, 밥샙도 12년 전과 달리 종합격투기와 킥복싱 대회에서 연전 연패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심지어 2년 넘게 격투기 대회에 출전하지 않아서 경기 감각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막상막하(안좋은 의미로)의 결투를 벌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리고 역시나 밥 샙에게 판정패(...)[5]

4. 종합격투기


  • 주요 승: 없음(...)
종합격투기에는 2004년에 데뷔했다. 데뷔전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무려 UFC의 레전드 호이스 그레이시였는데 아마 엄청난 체급차로 꽤 비등한 경기가 될 거라 생각한 모양(...). 초반 거체를 이용해 그레이시를 테이크다운 시켰지만 하프 가드 상태에서 파운딩도 제대로 못 넣다가 리스트 락에 걸려 초살당했다. 이 경기는 '셔독 선정 괴상한 경기 베스트 10'에서 10위로 랭크되었다.
이후 2005년 다이너마이트에서, 우리에겐 최홍만의 MMA 데뷔전 상대로 유명한, 개그맨 출신 바비 올로건과 대결했는데 여기서도 졌다(...). 역시 초반에 올로건을 눕히고 암 트라이앵글을 걸어보았으나 결국 올로건은 탈출에 성공했고 이후 체력이 다 빠져버려 이리저리 도망가는 올로건을 제대로 잡지도 못 하고 짤짤이에 고전하다 판정패를 당했다. 올로건이 아케보노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노골적으로 등을 보이며 달아나는 둥 눈 뜨고 보기 힘든 수준의 시합이었다.[6]
2006년 히어로즈에서 돈 프라이의 복귀전 상대로 낙점되었다. 최홍만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자신에게 인파이팅을 시도하는 프라이를 상대로 클린치 상황에서 의외로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2라운드 막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프라이가 바로 길로틴 초크을 걸어 패배를 당했다.
K-1에서는 연패의 사슬을 끊을 제물로 브라질의 약체 거인 자이언트 실바를 불러들여 싸우게 했지만 스탠딩 기무라에 잡혀 초살당하면서 오히려 자이언트 실바의 연패를 끊었다(...). 이 패배를 통해 그 한계가 확실히 드러났다. 실바가 아케보노에게 대놓고 기무라를 잡았는데 풀어낼 생각조차 하지 않은 걸 보면...
자이언트 실바에게 패한 후 다니가와 프로듀서는 K-1 무대에 다시 서고 싶으면 곰과 싸워서 이기고 와라는 발언을 했다. 사실상의 퇴출 선언이나 다름 없는 내용.
2007년 다이너마이트 USA에 출전 예정이었으나 전적이 너무 안좋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2007년을 마지막으로 따로 은퇴 선언은 하지 않았으나 모든 격투기 관련 활동을 중단한 상태이다.

5. 프로레슬링


격투기에서는 처참한 모습을 보여줬던 아케보노이지만, 프로레슬러로 전업하고 나서는 오히려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무토 케이지에게 교육을 받은 뒤 2005년에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데뷔하였다. 데뷔전에서는 그레이트 무타에게 독무를 맞으며 처참한 패배를 당했지만, 이후로 전일본 쪽에는 꾸준히 참가한다. 2006년에 있었던 WWE 레슬매니아 21에서 빅 쇼와 스모매치를 벌여 승리하기도 했다. 2007년부터는 HUSTLE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그레이트 무타의 '''아들'''[7]이란 기믹으로 나타났다. 이때의 명의는 '''보노쨩'''. 캐릭터가 탄생하게 된 경위가 상당히 충격적인데, 무타가 인링사마[8]의 사타구니[9]에 독안개를 뿜었고 그대로 인링사마는 실신. 그 때문에 '''임신했다'''는 설정이 붙더니 얼마 뒤 태어난게 '''보노짱'''이다(.....).[10] 뭐 이딴 설정이 다 있나 싶지만 원래 HUSTLE이 이렇게 4차원 콘셉트의 프로레슬링 단체이다(..). 이후 무타, 인링과 함께 훈훈한 가족 태그팀으로 나오기도 했다(..). 본 항목의 메인 사진도 그레이트 무타와 동일한 컨샙의 '''그레이트 보노'''라는 캐릭터로 등장했을 시의 모습.
2008년부터는 역시 스모 선수 출신으로 데뷔한 신인 프로레슬러인 하마 료타와 SMOP[11]이란 태그팀을 결성해 2013년까지 같이 활동했는데, 이 둘의 태그는 2009년 도쿄 스포츠가 주최하는 프로레슬링 대상에서 최우수 태그 상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태그팀 타이틀, 드래곤 게이트에서 3인 태그팀 타이틀을 획득했다. 하시모토 신야가 세웠던 ZERO1에도 꾸준히 모습을 드러냈고 2012년에는 ZERO1의 세계 헤비급 챔피언을 획득한다.
데뷔한 후 약 8년 동안 프리랜서 신분으로 여러 단체에서 활동해왔다. 그러나 전일본 대량이탈 사건으로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선수가 많이 줄어들자, 2013년 9월에는 전일본에 정식 입단했다. 입단하자마자 왕도 토너먼트에서 우승했고, 우승자 자격으로 스와마에게 도전해 10월 27일에 삼관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했다.
2015년 들어서 전일본 사장 아키야마 준과의 삼관 해비급 타이틀전에서 패배한 이후, 프리 선언과 격투기 참전을 선언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전일본의 바바 모토코의 지원을 받은 새로운 레슬링 단체인 '왕도' 설립을 발표한다.

6. 투병 생활


안타깝게도 2018년 12월 기준, 투병중이다. 다름이 아니라 당뇨로 인한 합병증과 신부전을 갖고 있던 아케보노는 2017년 4월 11일, 평소와 같이 거친 프로레슬링 경기를 마치고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느닷없이 가슴에 심한 통증이 찾아와 그 다음날 겨우겨우 근처 병원으로 갔는데, 거기서 심장이 37분이나 멈추는 바람에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들다가 겨우 소생할수 있었다.
2017년 4월에 쓰러지고, 일본 언론에 대서특필후 소식이 잠시 끊겼다가 2018년 9월, 1년 5개월여 만에 TV에 출연했다. 210킬로에 달했던 몸무게는 투병으로 인해 140kg까지 감소했고 현재 주위의 도움이 없으면 신체를 움직이는 것 조차 힘들며, 당연히 외출도 무리다. 게다가 심장마비로 뇌까지 데미지를 입어서 기억장애로 인해 자신의 자식도 알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그나마 위 방송에서는 옛 스모 라이벌이자 방송인으로 활동 중인 하나다 마사루가 문병을 오자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주는 등 완전히 기억을 잃은 것은 아니다.
종합격투기에서 시련을 겪었지만 그래도 스모계에서 올타임 레전드 중 한명으로 스모역사에 한획을 그었고, 일본 프로레슬링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아케보노의 이런 무력한 모습에 지인들과 팬들도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7. 기타


  • 아케보노의 격투 활동은 여러모로 실패한 사례로 꼽힌다. 화젯거리가 되는 데는 성공했지만 기량도 최악이었거니와 발전을 위해 노력 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안티만 늘었다.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2ch에서도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일본 국내에서도 지는 게 당연한 선수라는 야유를 담아서 마케보노(負け/마케:패배)라는 별명으로 불렸었다. 한국에서의 별명은 약해보노(...).
  • 2009년에 K-1에서 그의 고향 하와이에서 열리는 대회의 프로모터를 그에게 맡긴 적이 있는데, 대진표가 나온 순간부터 까였다(...). 미국 GP 수준을 뭐 이따위로 만들어놨냐는 비난이 대부분이었다. 흥행 실적도 시원치 않았기에 그 후로 프로모터 자격으로는 부르지 않고 있다.
  • 이건 좀 안타까운 이야기인데, 2006년 경 그의 어머니가 암으로 시한부였을 때, 아케보노는 그의 어머니에게 "돌아가시기 전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아케보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 브록 레스너가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활동할 때 유일하게 친하게 지냈던 선수라고 한다. 브록이 자서전에서 회고하기를 팬들에게 좋은 공연으로 보답하기를 바라는 훌륭한 선수인데다가 성격도 좋았다고. 실제로도 서로 프로레슬링으로 붙은 경험이 있다.
  • 한국인 파이터 김재훈이 연전연패를 하자, 아케보노가 떠오른다는 소리가 많다(...).
[1] 현역시절, 현재는 건강악화로 140kg까지 급감했다.[2] 표면적인 이유는 우승없이 요코즈나로 승격되었다가 사고치고 은퇴한 후타하구로 때문에 요코즈나 승격 허들을 2연속 우승으로 높인 것이였지만, 누가 봐도 유색인종 외국인이었던 고니시키를 견제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 후타하구로는 자객 역할을 맡아 고의적으로 고니시키의 무릎에 부상을 입혔다는 의혹도 있다.[3] 아케보노와 동시대에 유력한 라이벌 요코즈나였던 다카노하나가 사상 최연소 오제키로 등극한 이래 저 2연속 우승에 발목잡혀 요코즈나에 오르는데 무려 2년 가까이 걸렸기 때문.[4] 특히 다카노하나는 요코즈나 시절 그야말로 일본 스모계의 자존심이었고, 형인 와카노하나도 동생의 후광에 다소 가려진 선수였지만 동생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최후의 일본인 요코즈나로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던 레전드였다. 와카노하나가 요코즈나로 입신한 후, 19년 동안이나 일본인 요코즈나가 없었던 걸 보면 이들의 업적과 실력이 어떠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19년 만에 일본인 요코즈나가 된 기세노사토는 기준에도 다소 미달하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협회의 전폭적인 지지로 요코즈나가 될 수 있었지만, 와카다카 형제는 몇 번이고 요코즈나의 문턱에서 아케보노에게 막혀 우승을 놓쳤으나, 기어코 쟁취한 선수들이었다.[5] 상대가 아케보노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밥 샙은 평소와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공격을 했다(...) 그러나 기량이 떨어진지 한참 된 밥샙이어서 그런지 ko당하진 않았다.[6] 사실, 바비 올로건은 개그맨 출신이긴 해도 데뷔전에서 입식 선수이긴 하지만 시릴 아비디를 꺾는 이변을 만들어내기도 했던 만큼 아케보노 입장에선 만만한(...) 선수는 아니었다.[7] 실제로는 7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8] 대만 출신 그라비아 아이돌 인링 오브 죠이토이가 여왕님 컨샙의 기믹으로 활동하던 캐릭터.[9] 인링은 대전 상대 위에 올라타고 M자 개각을 하는것이 피니쉬 홀드였다.[10] 한마디로 인링이 낳은 '''아기'''. 보노짱은 첫등장 시에 '''공갈젖꼭지'''까지 물고 나왔다. [11] SMAP스모를 결합한 말장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