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그드인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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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드인(Sogd人, 속특 粟特)은 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에 사는 이란계의 민족으로, 마사게타이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서기 3세기부터 8세기까지 돌궐 제국의 비호 아래 동서무역을 장악한 것으로 유명하다. 언어로는 소그드어를 사용했다.
소그드인들은 자신들의 무역 네트워크를 지켜주고 도시의 성벽을 보호해주는 튀르크인 전사들과 대개 평화적으로 교류하며 서로간의 통혼도 잦았다. '''유목 제국은 전사 집단에게 사치품을 주어 위신을 세워주어야 전사들의 충성을 받을 수 있는데, 돌궐 제국은 소그드인들의 동서 무역을 통한 무역 수입만으로 이 문제를 큰 전쟁 없이도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주로 중앙아시아 트란스옥시아나 일대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였으며, 동서로 장안과 콘스탄티노플을 연결하는 실크로드 교역로를 주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소그드인들은 국제 경제와 문화의 교류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는 소그드인의 문화와 무역 시스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소그드인 가정에서는 아이가 다섯살이 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는데, 이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가서 장사를 하면서 고국에 있는 친척들과 편지로 정보를 교환하고 의사소통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소그드인은 다른 지역에 가서 장사를 할 때도 상업 공동체를 구성하고 본국과의 연락 체계를 유지했으며, 심지어 중국에서도 소그드인의 우편망이 기능하고 있었다. 소그드인이 진출한 지역은 동아시아 외에도 동로마 제국을 포함한 유럽이 있었다. 트란스옥시아나의 소그드인들은 에프탈족과 서돌궐 제국에게 안정적인 수입만 제공해 준 것뿐만이 아니라 도시에서 생산되는 여러 공산품을 직접 공급하고 외교관으로 봉사하는 등 이들 유목민들이 단순한 전사집단에서 국가로 성장하는데 막대한 기여를 했다.
소그드인은 태어날 때부터 아교를 바른다[1] 는 중국 속담이 있었을 정도로 장사에 수완이 좋았다고 전해진다. 서돌궐이 소그디아나를 정복한 뒤에도 이란 사산 왕조나 동로마 제국으로 보내는 사신으로 소그드인을 보냈다. 당나라가 현 신강 지역에 튀르크 유목민들을 막기 위해 설치한 안서도호부를 위구르가 점령할 때 지원하였다.
중동의 소그드인들은 우마이야 왕조에 맞서 호라산의 압바스 왕조 세력을 후원시켜 아바스 왕조 성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추정된다.[2] 당나라에 체류하던 소그드인들이 안록산의 난을 지원했다 실패한 것과 대조적이다.
2. 지리적 요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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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드인들은 오늘날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를 중심으로 거주했으며 트란스옥시아나의 사마르칸트와 부하라가 이들이 거주하는 주요 도시였다. 특히 사마르칸드와 부하라를 비롯한 트란스옥시아나 남부는 토지가 기름져서 쿠샨 왕조의 개간 사업 이후 농업이 발달했고 수공업 또한 발전했다고 알려져있다. 세계의 4대 발명품이라 불리는 중국의 발명품들과 유리, 향료, 약재 등 뿐만 아니라 코끼리나 기린 등의 동물들까지 소그드인들을 통해 동서로 전파되면서 둘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그 덕분에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는 그 당시 교역이 활발한 국제도시가 되었다. 훗날 이 지역들은 투르크족들이 이주해오면서 투르크족의 땅이라는 뜻의 '투르키스탄'이라고 불리게 된다(다만 소그디아나 지역 뿐 아니라 다른 트란속사니아 서부, 호라산과 호라즘, 일리 지역, 페르가나 계곡, 신장 남부지역까지 합쳐서 투르키스탄이라고 불리게 된다.)
3. 종교
소그드인들은 개방적이고 실리를 추구하는 종교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동로마 제국과 여타 유럽 국가에서는 기독교인처럼 행동하고, 인도와 중국에서는 불자처럼 행동했는데, 이는 이들이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마니교를 믿고 공부하면서, 여러 종교와 문화에 대한 기초 교양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학다식하고 개방적인 소그드인들은 인도의 불교 관련 문헌들, 마니교 경전, 조로아스터교 등의 여러 종교들을 중국으로 전달하는 등 여러 종교가 세계 곳곳에 전파되는 데 기여했다. 중국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서도 조로아스터교 사원들이 다수 들어서 있었는데,이 사원을 드나들던 신자들은 주로 장사를 하러 중국 땅으로 건너온 소그드인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 당시 중국에서는 조로아스터교를 명교(明敎)라 칭했다.
4. 멸망
이렇듯 동서를 연결하며 실크로드 역할을 해왔던 소그드인들은 8세기 무렵 이슬람화된 이후 9세기 무렵 페르시아계 사만 왕조에 편입되었으나, 13세기 흑사병 창궐로 몰락하기 시작한다. 실크로드 교역의 절정기였던 13~14세기에는 소그드인들 대신 위구르인들이 등장해 위세를 떨치게 된다.
소그드인들과 다르게 몽골 제국과 친하면서 소그드인 못지 않은 교양을 지녔던 이들 위구르인들은 몽골 제국의 행정 관료로 활약하면서 유라시아 경제 자체를 통째로 주무르기도 하였다. 소그드인들은 14세기 이슬람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으나 중앙 유라시아 전역이 이슬람화하고 이들도 마니교 대신 이슬람을 받아들임으로써 특색을 잃고 사실상 동화되었다.
오늘날 타지키스탄에 거주 중인 야그노비인이 소그드인의 직계후예로 여겨진다. 이들의 후손 중 하나인타지크인들은 16~17세기에는 우즈베크인에게 말을 수입해서 파슈툰족에게 말을 되파는 제한적인 중개 무역에 종사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수출한 말들은 최종적으로 무굴 제국에서 아주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한다.
그러나 18세기 중반부터 제국의 상태가 약해지면서 무굴 제국의 지주들의 재력이 감소하고 전략 물자로서의 말의 가치가 점점 감소하자, 19세기에 실크로드 육로 무역은 붕괴되고 타지크인과 야그노비인들은 가난한 목동으로 전락해버렸다. 러시아 제국에게 합병된 이후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부하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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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타지키스탄의 수그드 주 야그노바 계곡 등에 거주하는 야그노비인의 야그노비어는 학계에서 종종 신 소그드어(Neo-Sogdian)라고 부르면서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 한다.
5. 여담
- 발해 유적지에서 소그드 주화가 발굴되고 있으며, 고고학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소그드인 공동체가 발해의 상공업에 있어서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가설이 힘을 얻고 있다. 발해에 머물던 소그드인들은 주로 발해의 특산품인 말과 모피를 당나라의 곡식이나 옷감과 교환하는 일을 맡아 보면서 발해 귀족들에게 여러 사치품을 공급하는 일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안록산이 절도사이던 시절 발해에서 수입한 말을 거래하는 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는 사서의 기록으로도 교차 검증 되는 내용이다.
[1] 새로 태어난 아기의 손에 부모가 아교를 바르고 금화를 쥐어주었다. 손에 들어온 돈을 아교 바른 것처럼 절대로 놓치지 말라는 의미에서였다. 또 입에는 꿀을 발라 주었는데 이것은 장사할 때 꿀처럼 달콤한 화술로 거래 상대를 뼛속까지 휘어잡으라는 기원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2] 최근에 제기되고 연구되는 가설로 아직 정설은 아니다.[3] 페르시아 출신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육로 무역보다는 해상 무역을 선호한 것으로 여겨진다.[4] 신라의 온군해의 경우에는,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귀국하던 중, 바다 위에서 고구려의 군사들을 만났을 때에 김춘추와 옷을 바꿔입고 대신 죽은 사람이다. 정말로 소그드인 계통이었다면 외모가 확 튀었을 텐데, 그랬다면 고구려인들이 속아넘어갈 턱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