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라스 전투
'''Battle of Talas'''
751년 중앙아시아의 탈라스 강 근처[1] 에서 벌어진 당나라와 아바스 왕조 간의 전투. 역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중국과 이슬람 제국의 전쟁이며 중국의 서역팽창 저지와 중국이 독점하고 있던 종이를 제조하는 기술인 제지술이 이슬람 문명으로 전파되어 유럽까지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투 중 하나다. 이후 당나라가 완벽하게 패배함으로써 실크로드 교역로를 포함한 중앙아시아가 이슬람 세력권에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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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 군대의 진격로
당시 당나라는 서진 정책으로 꾸준하게 신장지역에 한족들을 이주시키며 중앙아시아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유목민들을 방어하려고 한 상황이었고, 서역[2] 까지 진출까지는 아니지만 영향력이 있던 상황이였다. 당시 당나라 군대의 지휘관은 고구려 유민 출신[3] 인 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 고선지였다.
당나라는 이후 서역(현 신강) 서쪽에 있는 소그디아나[4] 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샤슈[5] 왕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 시르강 서쪽을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아바스 왕조의 호라산 총독 아브 무슬림은 지야드 이븐 사리프와 지원군을 파견하고, 결국 751년 7월 ~ 8월에 당나라와 티베트 연합군 약 7만 명은 약 10만 대군을 거느린 아바스, 카를룩 연합군을 상대로 지금의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접경을 흐르는 탈라스 강 근처에서 격돌한다. 다만 탈라스 전투가 정확히 어느 곳에서 일어났는지는 불확실하다. 전쟁 이름은 압바스가 전쟁이 끝남을 선포한 탈라스가 아닌 나린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크다. 니콜라이 프르제발스키는 키르기스스탄 나린 지역에서 발견되는 전쟁 도구 등 유골로 니란 지역이 정설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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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 동원병력과 사상자 숫자에 대한 세세한 기록들이 없다보니 탈라스 전투에서의 양측 병력동원과 사상자 숫자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다수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대략적으로 아랍 측이 30만을 동원해 22만의 사상자를 냈으며, 당군이 7만에서 최대 10만을 동원해 3만 정도의 사상자를 내고 4만 명이 도주했다고 추정하고 있으며, 바르톨드와 이븐 알 아시르 등의 러시아, 중동학자들은 양측의 병력을 아바스 왕조 군을 넉넉히 잡아서 10만 정도, 당나라를 넉넉히 잡아서 대략 5~6만에서 최대 7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몇몇 학자들 양군이 소수를 동원했다고 주장하며, 양군 도합 3만이 못되며, 아랍 측이 최대 2만, 당군이 최대 1만 정도라고 하는 등 탈라스 전투에서의 '''양측 병력동원과 사상자 숫자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해서 정설이 없다.'''
다만 다수설의 경우에는 이슬람 제국과 비슷하거나 더 많았던 로마제국의 총병력 최대치가 5~60만으로 추정되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원정에 동원한 최대 병력이 20만 언저리인것을 감안하면 두 나라보다 인구도 딸리고 동원 체계도 정교하지 못한 이슬람 제국이, 그것도 국가 전체가 아니라 일개 지방 총독 따위가 30만을 동원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소수설의 경우 아무리 변방에서 싸웠다고 하더라도, 두 제국이 고작 3만 정도밖에 동원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의견들이 있다. 하지만 당나라는 보급 문제 때문에 서역 원정군을 소수정예화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보병이 화살받이였던 다른 지역과 다르게 서역의 당나라 군 보병은 행군 시에 말을 타고 이동하고 전투 시에 말에서 내려 싸우는 정예병이었다. 서역 원정은 원정 보급로가 엄청 길었기 때문에 한나라 때는 원정군 대부분이 사막에서 굶어죽었으며, 당나라는 백만대군을 동원하고도 보급 문제 때문에 고구려한테 패배한 수나라의 후신이었다.
이 전투는 사실 양 제국의 중앙조정에서 크게 관심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양쪽의 지방 총독'''들이 주도한 싸움이었다. 실제로 승리한 아바스 왕조든 패배한 당나라든 양측의 중앙조정에서 결과를 놓고 엄청 크게 기뻐하거나 상심한 흔적은 없다.
톈산 산맥(천산 산맥) 북쪽에 유목생활을 하는 유목민 카를룩족[6] 이 아바스 왕조로 돌아섰기 때문에 당나라군은 괴멸하고 전투는 패배했다. 이때 이슬람군의 피해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당나라군도 피해가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당나라에 복귀한 병사들은 겨우 고선지를 비롯한 지휘관 및 소수의 병사만이었다고 한다. 고선지의 대표적인 흑역사 중 하나. 아니 이 전투 하나로 완전히 인생이 뒤바뀐다.
페르가나 등 중앙아시아 일대가 이슬람 문명권에 장악되며 돌궐 제국 해체 이후 방황하던 튀르크 인들이 용병으로서 아바스 왕조로 대거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의 경우 당대의 영향력보다는 후대에 미친 영향력이 월등히 지대했다. 당대 탈라스 전투의 영향력을 살펴보자면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전투를 기점으로 그동안 계속되던 당나라의 서역 팽창이 저지됐다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실크로드 무역 자체는 꾸준히 전개됐고, 이 지방 교역을 꽉 잡고 있던 소그드 상인의 명성 또한 훗날 위구르 제국이 서역을 경영하기 위해 그들과 손잡을 정도 였다. 아바스 왕조와 당나라 양쪽 모두 이 전투를 매우 중요시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고선지가 이 전투에서 패배 후에도 별다른 질책을 받지 않고 계속해서 중용된 것도 같은 맥락의 일.[7] 또한 본래 중앙 아시아는 한나라 이래로 중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강했으나 이 전투를 기점으로 급격히 이슬람화가 가속되어 현대에는 중앙 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이슬람 국가이다.
아무튼 무리할 정도로 신강지역에 영향력을 쓰려던 당나라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중앙아시아는 이슬람화 되는 쪽으로 역사의 가닥이 잡히며 양 제국 모두 이 상황에 납득한 것이 당시 탈라스 전투의 의의라고 할 수 있다.[8] 게다가 당나라가 탈라스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한들 안사의 난을 겪은 후에는 과거 같은 서역 운영이 불가능했을 것이며, 안사의 난 이후에도 꾸역꾸역 유지되던 당나라의 무역은 780년대 당나라와 토번과 격돌한 사이 빈집털이를 한 위구르 제국의 장안 공격에 의해 최종적으로 끝장나게 된다. 당시 안사의 난을 도우기 위해 잠시 장안을 점유하고 있던 위구르였고 위구르에 의해 절도사들이 모두 정복되어 사실상 당나라 세력은 위축된다.[9]
하지만 이런 당대의 영향력과 달리 후대에 끼친 영향력은 막대했다.
우선 압바스 왕조가 잡은 당나라군 포로 중에 종이를 만드는 기술자가 있었고, 이 때문에 '''제지기술이 이슬람으로 넘어가게 된다.'''
또한 그 당시까지 중앙아시아에서는 중국 문화권과의 밀접한 관계 아래 불교 문화가 번성하고 있었으나, 탈라스 전투의 패배를 시작으로 꾸준히 이슬람화가 진행되어 결국 현대에 이르기까지 쭉 이슬람 문화를 중심으로 한 투르키스탄 문화권으로 바뀌게 된다.
포로 중에는 경행기의 저자인 두환도 있었다. 군인도 아니었던 두환은 고선지를 따라갔다가 그만... 아무튼 그는 지중해까지 끌려가 이슬람 제국의 여러 곳을 전전했다. 그는 762년 페르시아만에서 상선에 편승해 광주를 거쳐 다시 장안으로 돌아와 경행기를 쓰게 되었고, 이로 인해 유럽과 이슬람의 사정이 중국에 상세히 알려졌다. 중국판 마르코 폴로인 셈.
1. 개요
751년 중앙아시아의 탈라스 강 근처[1] 에서 벌어진 당나라와 아바스 왕조 간의 전투. 역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중국과 이슬람 제국의 전쟁이며 중국의 서역팽창 저지와 중국이 독점하고 있던 종이를 제조하는 기술인 제지술이 이슬람 문명으로 전파되어 유럽까지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투 중 하나다. 이후 당나라가 완벽하게 패배함으로써 실크로드 교역로를 포함한 중앙아시아가 이슬람 세력권에 넘어갔다.
2. 시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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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 군대의 진격로
당시 당나라는 서진 정책으로 꾸준하게 신장지역에 한족들을 이주시키며 중앙아시아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유목민들을 방어하려고 한 상황이었고, 서역[2] 까지 진출까지는 아니지만 영향력이 있던 상황이였다. 당시 당나라 군대의 지휘관은 고구려 유민 출신[3] 인 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 고선지였다.
당나라는 이후 서역(현 신강) 서쪽에 있는 소그디아나[4] 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샤슈[5] 왕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 시르강 서쪽을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아바스 왕조의 호라산 총독 아브 무슬림은 지야드 이븐 사리프와 지원군을 파견하고, 결국 751년 7월 ~ 8월에 당나라와 티베트 연합군 약 7만 명은 약 10만 대군을 거느린 아바스, 카를룩 연합군을 상대로 지금의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접경을 흐르는 탈라스 강 근처에서 격돌한다. 다만 탈라스 전투가 정확히 어느 곳에서 일어났는지는 불확실하다. 전쟁 이름은 압바스가 전쟁이 끝남을 선포한 탈라스가 아닌 나린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크다. 니콜라이 프르제발스키는 키르기스스탄 나린 지역에서 발견되는 전쟁 도구 등 유골로 니란 지역이 정설로 있었다.
3. 양측의 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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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 동원병력과 사상자 숫자에 대한 세세한 기록들이 없다보니 탈라스 전투에서의 양측 병력동원과 사상자 숫자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다수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대략적으로 아랍 측이 30만을 동원해 22만의 사상자를 냈으며, 당군이 7만에서 최대 10만을 동원해 3만 정도의 사상자를 내고 4만 명이 도주했다고 추정하고 있으며, 바르톨드와 이븐 알 아시르 등의 러시아, 중동학자들은 양측의 병력을 아바스 왕조 군을 넉넉히 잡아서 10만 정도, 당나라를 넉넉히 잡아서 대략 5~6만에서 최대 7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몇몇 학자들 양군이 소수를 동원했다고 주장하며, 양군 도합 3만이 못되며, 아랍 측이 최대 2만, 당군이 최대 1만 정도라고 하는 등 탈라스 전투에서의 '''양측 병력동원과 사상자 숫자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해서 정설이 없다.'''
다만 다수설의 경우에는 이슬람 제국과 비슷하거나 더 많았던 로마제국의 총병력 최대치가 5~60만으로 추정되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원정에 동원한 최대 병력이 20만 언저리인것을 감안하면 두 나라보다 인구도 딸리고 동원 체계도 정교하지 못한 이슬람 제국이, 그것도 국가 전체가 아니라 일개 지방 총독 따위가 30만을 동원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소수설의 경우 아무리 변방에서 싸웠다고 하더라도, 두 제국이 고작 3만 정도밖에 동원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의견들이 있다. 하지만 당나라는 보급 문제 때문에 서역 원정군을 소수정예화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보병이 화살받이였던 다른 지역과 다르게 서역의 당나라 군 보병은 행군 시에 말을 타고 이동하고 전투 시에 말에서 내려 싸우는 정예병이었다. 서역 원정은 원정 보급로가 엄청 길었기 때문에 한나라 때는 원정군 대부분이 사막에서 굶어죽었으며, 당나라는 백만대군을 동원하고도 보급 문제 때문에 고구려한테 패배한 수나라의 후신이었다.
이 전투는 사실 양 제국의 중앙조정에서 크게 관심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양쪽의 지방 총독'''들이 주도한 싸움이었다. 실제로 승리한 아바스 왕조든 패배한 당나라든 양측의 중앙조정에서 결과를 놓고 엄청 크게 기뻐하거나 상심한 흔적은 없다.
4. 전투 양상
톈산 산맥(천산 산맥) 북쪽에 유목생활을 하는 유목민 카를룩족[6] 이 아바스 왕조로 돌아섰기 때문에 당나라군은 괴멸하고 전투는 패배했다. 이때 이슬람군의 피해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당나라군도 피해가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당나라에 복귀한 병사들은 겨우 고선지를 비롯한 지휘관 및 소수의 병사만이었다고 한다. 고선지의 대표적인 흑역사 중 하나. 아니 이 전투 하나로 완전히 인생이 뒤바뀐다.
5. 전투 이후
페르가나 등 중앙아시아 일대가 이슬람 문명권에 장악되며 돌궐 제국 해체 이후 방황하던 튀르크 인들이 용병으로서 아바스 왕조로 대거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5.1. 직후의 영향
이 전투의 경우 당대의 영향력보다는 후대에 미친 영향력이 월등히 지대했다. 당대 탈라스 전투의 영향력을 살펴보자면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전투를 기점으로 그동안 계속되던 당나라의 서역 팽창이 저지됐다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실크로드 무역 자체는 꾸준히 전개됐고, 이 지방 교역을 꽉 잡고 있던 소그드 상인의 명성 또한 훗날 위구르 제국이 서역을 경영하기 위해 그들과 손잡을 정도 였다. 아바스 왕조와 당나라 양쪽 모두 이 전투를 매우 중요시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고선지가 이 전투에서 패배 후에도 별다른 질책을 받지 않고 계속해서 중용된 것도 같은 맥락의 일.[7] 또한 본래 중앙 아시아는 한나라 이래로 중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강했으나 이 전투를 기점으로 급격히 이슬람화가 가속되어 현대에는 중앙 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이슬람 국가이다.
아무튼 무리할 정도로 신강지역에 영향력을 쓰려던 당나라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중앙아시아는 이슬람화 되는 쪽으로 역사의 가닥이 잡히며 양 제국 모두 이 상황에 납득한 것이 당시 탈라스 전투의 의의라고 할 수 있다.[8] 게다가 당나라가 탈라스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한들 안사의 난을 겪은 후에는 과거 같은 서역 운영이 불가능했을 것이며, 안사의 난 이후에도 꾸역꾸역 유지되던 당나라의 무역은 780년대 당나라와 토번과 격돌한 사이 빈집털이를 한 위구르 제국의 장안 공격에 의해 최종적으로 끝장나게 된다. 당시 안사의 난을 도우기 위해 잠시 장안을 점유하고 있던 위구르였고 위구르에 의해 절도사들이 모두 정복되어 사실상 당나라 세력은 위축된다.[9]
5.2. 인류의 역사를 바꾸다
하지만 이런 당대의 영향력과 달리 후대에 끼친 영향력은 막대했다.
우선 압바스 왕조가 잡은 당나라군 포로 중에 종이를 만드는 기술자가 있었고, 이 때문에 '''제지기술이 이슬람으로 넘어가게 된다.'''
또한 그 당시까지 중앙아시아에서는 중국 문화권과의 밀접한 관계 아래 불교 문화가 번성하고 있었으나, 탈라스 전투의 패배를 시작으로 꾸준히 이슬람화가 진행되어 결국 현대에 이르기까지 쭉 이슬람 문화를 중심으로 한 투르키스탄 문화권으로 바뀌게 된다.
포로 중에는 경행기의 저자인 두환도 있었다. 군인도 아니었던 두환은 고선지를 따라갔다가 그만... 아무튼 그는 지중해까지 끌려가 이슬람 제국의 여러 곳을 전전했다. 그는 762년 페르시아만에서 상선에 편승해 광주를 거쳐 다시 장안으로 돌아와 경행기를 쓰게 되었고, 이로 인해 유럽과 이슬람의 사정이 중국에 상세히 알려졌다. 중국판 마르코 폴로인 셈.
[1] 대략 지금의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국경 근처이다. 탈라스 강은 두 나라에 걸쳐 흐르고 두 나라 모두 탈라스라는 지명이 군데군데 있는데 어차피 카자흐나 키르기스나 뿌리가 같은 데다 둘 다 정주민이 아닌 유목민족 출신이라 열강이 진출하기 전에는 국경개념 자체가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탈라스 전투가 정확히 지금의 카자흐스탄 땅에서 일어났냐 키르기스스탄 땅에서 일어났냐를 따지는 건 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딱히 남아있는 것도 없고. 정작 키르기스스탄 사람들한테도 탈라스 하면 탈라스 전투의 전장으로보다는 키르기스스탄의 국민적인 영웅이자 신화적 존재인 마나스의 고향인 도시로 훨씬 유명하다.[2] 지금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3] 고구려 유민 출신이기는 하나 아버지 대부터 당의 장수였다.[4] 지금의 타지키스탄. [5] 지금의 타슈켄트. [6] 신부 이야기의 카르르크가 사실은 이 카를룩족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자세한 것은 카르르크 항목 참고[7] 고선지가 처형된건 이보다 4년 뒤고 이유도 안사의 난 관련이다.[8] 사실 탈라스 전투 이전까지 당나라의 영향력 팽창 상당수는 중앙정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절도사들의 의지에 따라 시행되는 경향이 강한 것도 한몫 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교역은 탈라스 전투와 상관없이 계속 이어졌다.[9] 사실 당나라의 서역 후퇴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건 탈라스 전투가 아니라 위구르 제국의 서역(신강) 정복이다. 이유? 현재 중국 신장 '''위구르''' 지역에 해당하는 이 지역의 거주민족을 생각해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