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 웃 딘 무함마드
페르시아어: علاءالدین محمد خوارزمشاه (ʿAlā al-Dīn Muḥammad)
1169년 ~ 1220년
호라즘 왕조의 제7대 술탄으로, '''호라즘의 무함마드 2세'''라고도 불린다. 부왕 알라 웃딘 테키시(1132~1200)와 튀르크계 유목민 출신의 테르켄 카툰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국에는 칭기즈 칸에게 개털리고 나라 말아먹은 안습한 왕으로 흔히 알려져있지만 못난 왕은 결코 아니었다. 아버지대부터 급속도로 확대된 호라즘 제국을 물려받아 1204년, 고르 왕조의 시하브 웃딘 무함마드의 호라산 침공을 격퇴하고 역으로 고르 왕조의 거점인 헤라트를 빼았았으며, '''1215년 고르 왕조를 아예 멸망시켜버렸다.''' 이어 1210년에는 서요와 단교하고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중부에 있던 마와라안나훌을 장악하였으며, 1212년에는 서카라한 왕조를 멸망시킨 뒤 사마르칸트를 손에 넣는다. 이로서 무함마드 2세대에 호라즘 왕조는 서쪽으로는 이라크에 있던 아바스 왕조를 압박하고, 동쪽으로는 막 서요를 무너뜨린 몽골 제국과 맞딱트리는 최대 영토를 확보한다. 또한 이 때 그는 '''동방의 알렉산더, 지상의 알라'''라고 불리면서 호라즘과 그의 위상은 중앙아시아 및 이슬람권 지역에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러나 몽골 제국과의 한 사건이 그의 몰락을 초래한다.
1218년, 몽골 제국은 통상 사절단을 호라즘에 파견한다. 그러나 호라즘의 국경도시 오트라르의 총독 이날축이 통상 사절단을 간첩 혐의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1] 이에 칭기즈 칸은 사신을 호라즘으로 보내 사과와 함께 이날축을 처벌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오트라르 총독이었던 이날축(Inalchuq)이 무함마드의 모후인 테르켄 카툰의 사촌이었다는 것. 그래서 태후 테르켄 카툰은 이날축의 처벌에 반대하였고, 무함마드도 칭기즈 칸의 사신이 갖고 온 편지의 내용[2] 에 모욕을 느껴 사신을 살해하고 같이 온 무슬림은 '''수염을 깎아서''' 돌려보냈다. 수염을 깎이는 것은 무슬림 남성에게 큰 모욕이었기에 그는 돌아가서 칭기즈 칸에게 호소하였고, 결국 1219년 몽골군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게 된다.
호라즘은 명장 티무르 말릭을 중심으로 몽골군에 나름대로 저항하였으나 갑작스런 (혹은 무리한) 영토 확장으로 인해 유목민들을 비롯한 현지 주민들의 반감을 사 이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고[3] , 상기한 이날축 문제에서도 드러났듯이 어머니 테르켄 카툰과 그 친정가인 칸그리 부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들과의 대립으로 인해 군대를 집중해 대회전을 시도할 생각은 꿈도 못꾸고[4] 사마르칸트, 부하라 같은 각 도시에 군대를 분산하여 몽골군에 맞서다가 몽골군의 각개 격파로 전부 박살이 났다.
무함마드는 이후 니샤푸르를 거쳐 카스피해의 외딴 섬까지 갔다가 1220년 병으로 죽었다. 이후 그의 아들 잘랄 웃딘이 술탄을 칭하며 몽골군에 끈질기게 저항하지만 결국 인도로 피해 저항운동을 하다가 사망하게 된다.
1169년 ~ 1220년
1. 소개
호라즘 왕조의 제7대 술탄으로, '''호라즘의 무함마드 2세'''라고도 불린다. 부왕 알라 웃딘 테키시(1132~1200)와 튀르크계 유목민 출신의 테르켄 카툰 사이에서 태어났다.
2. 생애
2.1. 호라즘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끌다
한국에는 칭기즈 칸에게 개털리고 나라 말아먹은 안습한 왕으로 흔히 알려져있지만 못난 왕은 결코 아니었다. 아버지대부터 급속도로 확대된 호라즘 제국을 물려받아 1204년, 고르 왕조의 시하브 웃딘 무함마드의 호라산 침공을 격퇴하고 역으로 고르 왕조의 거점인 헤라트를 빼았았으며, '''1215년 고르 왕조를 아예 멸망시켜버렸다.''' 이어 1210년에는 서요와 단교하고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중부에 있던 마와라안나훌을 장악하였으며, 1212년에는 서카라한 왕조를 멸망시킨 뒤 사마르칸트를 손에 넣는다. 이로서 무함마드 2세대에 호라즘 왕조는 서쪽으로는 이라크에 있던 아바스 왕조를 압박하고, 동쪽으로는 막 서요를 무너뜨린 몽골 제국과 맞딱트리는 최대 영토를 확보한다. 또한 이 때 그는 '''동방의 알렉산더, 지상의 알라'''라고 불리면서 호라즘과 그의 위상은 중앙아시아 및 이슬람권 지역에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러나 몽골 제국과의 한 사건이 그의 몰락을 초래한다.
2.2. 망국의 군주가 되다
1218년, 몽골 제국은 통상 사절단을 호라즘에 파견한다. 그러나 호라즘의 국경도시 오트라르의 총독 이날축이 통상 사절단을 간첩 혐의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1] 이에 칭기즈 칸은 사신을 호라즘으로 보내 사과와 함께 이날축을 처벌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오트라르 총독이었던 이날축(Inalchuq)이 무함마드의 모후인 테르켄 카툰의 사촌이었다는 것. 그래서 태후 테르켄 카툰은 이날축의 처벌에 반대하였고, 무함마드도 칭기즈 칸의 사신이 갖고 온 편지의 내용[2] 에 모욕을 느껴 사신을 살해하고 같이 온 무슬림은 '''수염을 깎아서''' 돌려보냈다. 수염을 깎이는 것은 무슬림 남성에게 큰 모욕이었기에 그는 돌아가서 칭기즈 칸에게 호소하였고, 결국 1219년 몽골군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게 된다.
호라즘은 명장 티무르 말릭을 중심으로 몽골군에 나름대로 저항하였으나 갑작스런 (혹은 무리한) 영토 확장으로 인해 유목민들을 비롯한 현지 주민들의 반감을 사 이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고[3] , 상기한 이날축 문제에서도 드러났듯이 어머니 테르켄 카툰과 그 친정가인 칸그리 부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들과의 대립으로 인해 군대를 집중해 대회전을 시도할 생각은 꿈도 못꾸고[4] 사마르칸트, 부하라 같은 각 도시에 군대를 분산하여 몽골군에 맞서다가 몽골군의 각개 격파로 전부 박살이 났다.
무함마드는 이후 니샤푸르를 거쳐 카스피해의 외딴 섬까지 갔다가 1220년 병으로 죽었다. 이후 그의 아들 잘랄 웃딘이 술탄을 칭하며 몽골군에 끈질기게 저항하지만 결국 인도로 피해 저항운동을 하다가 사망하게 된다.
[1] 신화 위키의 호라즘 항목에 따르면, 이날축은 당시 '가이르 칸'이라는 호칭을 갖고 있었는데 통상 사절단 중 힌두인 상인이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예의를 갖추지 않아 불만을 갖고 있던 차에 그들이 가지고 온 공물에 욕심이 생겨 사절단을 죽였다고 한다.[2] 무함마드를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라고 호칭했다. 그런데 여기에 따르면 몽골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친근함의 표현에 불과하지만, '지상의 알라'로 스스로를 여기던 무함마드에게는 상당한 모욕이었다고 한다. [3] 그리고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이들은 잽싸게 몽골군의 편이 된다.[4] 이들이 전투 중 배신이라도 때리면 패배는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롭다. 실제로 회전 중 군대 일부가 배신해 패배한 사례는 굉장히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