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랄 웃 딘 밍부르누

 

페르시아어: جلال الدين منكبرتي(Jalāl al-Dīn Menguberdī, 1199년 ~ 12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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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25숨짜리 동전에 그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1. 소개
2. 생애
2.1. 왕국의 멸망
2.2. 파르완 전투, 몽골에게 패배를 안기다.
2.3. 인더스 강변 전투에서의 패배
2.4. 서아시아의 폭풍
2.5. 영웅의 최후
3. 대중매체에서


1. 소개


호라즘 왕조의 마지막 술탄(제8대 술탄)이자 칭기즈 칸에 끝까지 대항하였던 호라즘의 영웅. 동전에도 새겨져 있을 정도로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영웅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호칭인 잘랄 앗 딘은 영광, 본명인 밍부르누는 튀르크어로 '하늘이 내린' 이란 뜻이다.

2. 생애



2.1. 왕국의 멸망


제7대 술탄인 알라 웃 딘 무함마드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던 중 궁정 내부 대립으로 인해 왕국 남부지방인 가즈니[1]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이 지역을 다스렸다.[2]
1219년 여름, 칭기즈 칸이 전군동원령과 함께 중앙아시아를 기습침공하게 되는데, 잘랄 웃 딘은 몽골군의 약점인 수전(水戰)을 주장하였다. 강 어귀에서 몽골군이 강을 건너는 틈에 생기는 헛점을 타 선제공격, 침입을 막자는 것이어다. 만일 이 전략을 택했다면 몽골군의 침략을 물리치거나 상당기간 지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3]
그러나 술탄은 시르다리야강을 중심으로 각 요새에 호라즘의 전병력인 약 40만명을 분산시켜 방어선을 만드는 전략을 채택한다. 이에 대해 경쟁 부족과 외척들의 반란을 걱정해서 일부러 병력을 집결시키지 않고, 분산방어전략을 채택했다는 설이 있다.[4]
결과적으로는, 술탄의 방어전략은 대실패로 끝났다. 칭기즈 칸은 자신의 군대를 넷으로 나누어 각 아들들과 자신이 이끌고서 1220년 초부터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게 되는데, 1년도 안 되어서 국경의 요새와 도시들이 무너지고 몽골군은 수도 우르겐치로 집결했다. 술탄 알라 웃 딘은 수도가 함락되기 전에 피신했다가 1220년 말에 카스피해의 한 섬[5]에서 병사하고 만다. 수도 우르겐치 또한 1221년 4월에 함락되었다.
술탄은 죽기 전에 아들 잘랄 웃 딘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고, 이에 따라 잘랄 웃 딘은 1221년에 수도인 우르겐치로 돌아와서 술탄에 즉위함과 동시에 자신의 본거지였던 가즈니로 돌아와서 지역의 유력세력을 규합함과 동시에 병사를 모은다.[6] 주력은 터키 용병 및 아프가니스탄의 토착민들이었다.

2.2. 파르완 전투, 몽골에게 패배를 안기다.


그리고 동년, 잘랄 웃 딘이 이끄는 호라즘의 6만 병력은 카불 근교의 파르완에서 시기 쿠투쿠(忽都忽)[7]가 이끄는 몽골의 선봉부대와 조우했다. 당시 몽골군은 약 3만명 규모로 추정되는데, 이 전투에서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안겨주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참고로 파르완 전투라 불리는 이날의 격돌은 '''몽골군이 패배한 최초의 전투'''이기도 하다.

2.3. 인더스 강변 전투에서의 패배


그러나 칭기즈 칸은 파르완에서의 패배와 함께 손자 무투겐이 전투 중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는 소식에 격노한다. 징키즈 칸은 자신이 직접 사마르칸트에 진주중이던 본대를 이끈다. [8]에 따라 호라즘 세력은 각지에서 연패하면서 인더스 강 근처까지 밀려가게 되는데, 1221년 11월 25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삼면에서 포위되어 죽을 고비를 겪는다.
여기서 그가 한 선택은 '''폭풍우로 불어난 20척 아래 인더스 강에 말을 타고 뛰어들어 강 건너편으로 탈출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용맹함을 본 칭기즈 칸은 감탄하면서

'''"저런 아들을 둔 아비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로다"'''

라며 크게 칭찬하고, 더 이상 뒤를 쫓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 나오는 일화).
이렇게 해서 그는, 소수의 부하와 함께 구사일생으로 인도로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잘랄 웃 딘이 돌아올 것을 염려한 칭기즈 칸은 아들 오고타이에게 지시하여 잘랄 웃 딘의 본거지인 가즈니를 공격한다.
한편, 인도로 탈출한 그는 델리 술탄 왕조의 술탄 일투트미쉬에게 몽골과의 싸움을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한다. 이후 1224년에 몽골군의 본대가 돌아가자 그 틈을 타서 이스파한으로 간다. 여기서 이란지역에 남아있던 수비군과 충돌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아제르바이잔으로 옮겨갔고, 이란 북부의 타브리즈를 본거지로 삼아 조지아(그루지야) 지역을 정복한다. 그렇게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천부적인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근처 지역의 세력을 제압하고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해갔다.

2.4. 서아시아의 폭풍


칭기즈 칸에게 대항하기 위해 잘랄 웃 딘은 점점 세력을 키워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주변 국가와 크고 작은 충돌이 많았다. 특히나 인접 세력인 룸 셀주크 왕조아이유브 왕조와는 관계가 크게 악화된다. 이것은 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1225년 그는 아제르바이잔의 엘디귀즈 왕조를 멸망시킨 후 타브리즈를 수도로 삼았다. 비록 호라산 지역에서 몽골제국에 패배하긴 했지만 아직 이란 대부분은 그와 동생인 기야스 앗 딘 피르샤의 수중에 있었다. 몽골에게 중과부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잘랄 웃 딘과 기야스 웃 딘은 서아시아에서 제국을 재건하기로 하였다. 동생이 후제스탄을 두고 압바스 칼리파와 충돌하는 동안 잘랄 웃 딘은 1226년 조지아 왕국을 침공, 가르니 전투에서 조지아 군대를 대파하고 트빌리시를 점령하였다. 20여년전 이란 북부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복수격이었다.
1226년 잘랄 웃 딘은 반란을 일으킨 케르만 총독 부라크를 복속시키며 영향력을 과시하였다. 이에 그를 경계하는 세력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먼저 룸 셀주크아이유브 왕조가 그를 제압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고, 이에 술탄은 아이유브 왕조의 변경을 공격, 반 호 인근의 아흘라트를 함락시켰다. 1227년, 몽골군이 이스파한 방면으로 진격해오자 잘랄 웃 딘은 그에 맞서 싸웠고 비록 패배했지만 적에게도 큰 피해를 입혀 그들을 옥수스 강 넘어로 철수하게 만들었다. 이에 술탄의 명망이 높아지자 불안해진 동생 기야스 웃 딘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 (1228년) 이후 그는 케르만으로 달아났지만 잘랄 웃 딘의 칼날을 두려워한 부라크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로써 재통합된 호라즘 제국은 아나톨리아 동부 ~ 아제르바이잔 ~ 하마단, 파르스 ~ 케르만에 이르는 영토를 지니게 되었다.

2.5. 영웅의 최후


1230년, 잘랄 웃 딘은 재차 아흘라트를 점령하고 아나톨리아를 넘보았다. 이에 위기를 느낀 셀주크 술탄 케이쿠바드 1세는 아이유브 군대와 연합하여 그와 맞섰고, 에르진잔 인근에서 벌어진 야스체멘 전투에서 잘랄 웃 딘은 대패하였다.[9] 이로써 그동안 길러온 정예병의 대부분을 잃은 술탄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고타이 칸이 보낸 초르마칸 노얀의 몽골-튀르크 토벌군까지 들이닥치면서 캅카스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이후 디야르바크르로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몽골군에게 패하여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깊은 산 속을 전전하다가 마야파리킨 인근에서 그에게 원한을 가진 쿠르드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10]
몽골 제국과의 전투에 평생을 바치면서, 패하고 또 패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났던 잘랄 웃 딘은 끝내 패배 후 이민족에게 목숨을 잃고 말았지만 호라즘의 영웅으로서 후세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


  • 원조비사에서 원판의 경우 호라즘 제국의 왕자로 등장하는데 능력치는 정치 C 전투 C 지도 A 매력 B로 나름 준수한 편이다. 하지만 국내 정발판에서는 호라즘 대신 고려가 선택국가로 지정되어 버려서 그대로 얼굴 데이터만 남고 삭제되어 버렸다. '원조비사'의 비운의 인물, '잘랄' 이야기
  • 징기스칸 4에도 등장하는데, 그 명성에 걸맞는 우수한 능력치를 자랑한다. 특이한 점으로는 시나리오에 따라 능력치가 상승하여 등장한다는 점.
    • 정치 47 / 무력 85 / 지력 63 병과적성 BBBE 전투특기 기병 돌격(최초등장시)
    • 정치 51 / 무력 91 / 지력 74 병과적성 AAAE 전투특기 화공 추가(상승시)
  • 재야무장으로 등장할 시에는 플레이어의 국가가 몽골과 적대관계에 있으며 국경을 접하고 있는 경우에 임관을 청하는 이벤트가 발생한다. 평생 몽골에 대항한 잘랄 웃 딘다운 이벤트라 할 수 있겠다.
  • KBS에서 방영한 바 있는 드라마 칭기즈 칸에서도 후반부에 등장했다. 무함마드 술탄과 돌궐 출신 후궁의 아들로 나오는데, 술탄의 모후인 타르겐 태후는 잘랄 웃 딘을 '출신이 더럽다'며 썩 탐탁치 않게 여기며 다른 왕자를 후계로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술탄 역시 아들을 그리 정겹게 대하는 편은 아니라서, 잘랄 웃 딘이 사마르칸트를 자신에게 맡기고 피신하라 할 때는 '날 쫓아버리고 나서 네가 술탄이 되겠다는 게냐'고 몰아 세우기도 한다. 군사적 재능은 뛰어나서 몽골 침공 초기에 전병력으로 대적해야 한다 하는 등 조언을 하지만 술탄은 그의 조언을 듣지 않고, 테무얼메리 장군을 제외한 이들의 견제를 받아서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무함마드 술탄이 죽을 때는 결과적으로 술탄에게 후계자로 지명되어 왕위를 계승하지만 그 직후에 이에 반발하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반란 세력이 술탄으로 삼으려던, 타르겐 태후와 무함마드가 총애하던 왕자와는 형제간의 우애가 깊어서 왕위 다툼을 벌어진 않고 왕자는 잘랄 웃 딘을 술탄으로 인정한다. 술탄이 된 이후 각지를 다니며 민심을 안정시키고 병력을 모으는 등 상황을 타개하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지만 결국 몽골군에게 패배해 도주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극중에서는 테무얼메리[11] 장군과 함께, 막장스러운 호라즘에서 유능한 비운의 인물로 묘사된다.
[1]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동쪽지역.[2] 전승에 따르면 잘랄의 어머니는 힌두계로, 곧 알라 웃 딘 무함마드의 서자였다. 따라서 무함마드의 정비(正妃)였던 테르켄 카툰(이 사람은 칸그리계)에게 핍박을 당했다고 한다.[3] 실제로 고려는 전쟁수도인 강화도를 그렇게 지켰고, 바다 건너 일본태풍 덕에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몽골군은 강 주변에서 위험천만한 순간들을 여러 차례 맞았으며, 몽골군의 막장 종특은 끝까지 고쳐지지 않았다. 지형극복기술이 크게 발전한 현대에도 자연하천은 강력한 방어선이다. 괜히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이 낙동강 방어선을 펼친게 아니다.[4] 하필이면 호라즘 왕국은 강국이기는 했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은게 아니라서 부족들이 배반할 수도 있었고 특히 외척의 힘이 매우 강했다.[5] 지명은 아베스쿤으로 지금은 물에 잠겨서 흔적도 남지 않은 섬이라고 한다.[6] 이 때 잘랄 웃 딘의 술탄 즉위에 반대한 왕족들은 그의 동생을 술탄에 추대하려고 했으나 동생은 오히려 잘랄 웃 딘에게 가담하였다.[7] 칭기즈 칸의 의제(혹은 양자)로 본래 타타르족 전쟁고아였지만 칭기즈 칸이 당시 영아였던 그를 어머니 호엘룬에게 맡겨 키웠다. 원조비사에는 이 사람의 에피소드가 몇 가지 나오는데 칭기즈 칸이 그를 대단히 아꼈고 가족으로 여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다. 칭기즈칸 일족 가운데 제일 먼저 몽골 문자를 익혔으며 원조비사 저자의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인물이다. 또한 몽골의 법률 예케 자사크에 따라 법을 다루는 재판관이기도 했다.[8] 중국 드라마 칭기스칸에서는 도시의 ''''살아있는 것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 이 지역을 황폐화시키지만 이것은 역사와 다르다. 당시 징기스칸에게 튀르크 기병은 매우 중요하였고 튀르크인들을 군대로 쓰기 위해선 도시에 황폐화나 모든 자들을 죽이는 것은 불리하였다. 물론 화약의 사용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정도 건축물의 파괴는 있었다.[9] 잘랄 웃 딘을 무찌른 케이쿠바드 1세는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면서 현재 터키에서 가장 추앙받는 술탄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10] 이 때가 1231년 말이다.[11] 호라즘 제국의 대표적인 명장인 티무르 말릭(Timur Malik)이다. 말릭은 이슬람권에서 왕, 통치자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티무르 공' 정도의 의미로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