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신 고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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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축구감독. 2019년부터 스자좡 융창 감독을 맡고 있다.
이란계 미국인이며, 2002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력분석관을 하면서 한국에 알려졌다.
2. 생애
1964년 이란 제국 테헤란 네이리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집트인이었다고. 하지만 어머니와 이혼한 아버지가 그의 나이 13세 때 미국국적의 여성과 결혼하면서 미국으로 이주,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이 발생하자 귀국을 단념하고 미국에 눌러 앉았고, 미국국적을 얻었다.
UCLA 축구부[2] 소속으로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나름 수재다. 미국은 운동부도 일반학생과 똑같은 조건에서 학점을 따야하기 때문에, 운동을 하면서 공대를 졸업하기란 매우 쉽지 않은데, 이분은 상당히 공부를 열심히 한 듯. 하지만 미국에서는 축구가 비인기스포츠였기 때문에 프로선수 생활을 하지 않고[3] 아마추어 팀[4] 에서 선수생활을 하면서 유소년 지도자를 한다.
3. 감독 경력
처음에는 LA근교의 아마추어 유스팀들을 지도하였다. 이 당시 그가 가르친 제자가 미국대표팀을 지낸 피터 베이지너스나 존 오브라이언이었다.
UCLA여자축구부를 시작으로 그리고 카 카냐다 고교의 감독을 역임하였다.
1997년 지금은 없어진 축구팀인 골든 이글스 (2002년 해체, 샌 퍼너디너 연고)의 감독을 맡으며 프로팀을 지도하게 되었고, 1997-98년에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코치를 했다.
이후 2000년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할 전력분석관으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로 일하면서 4강진출에 큰 공을 세웠다. 히딩크와의 인연은 아메리칸 글로벌 사커 스쿨이라는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있을 때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 축구 선진국인 네덜란드 코치들과 교환연수를 추진했고, 핌 베어벡을 알게 되었다고. 핌 베어벡은 쓸만한 비디오 분석관을 찾던 히딩크에 고트비를 추전했고, 히딩크는 고트비의 능력을 보고 마음에 들어 자기 사단의 일원으로 삼았다.
이어 한국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 수원 삼성에서 코치로 2002-2004년 김호 감독을 보좌하였다. 당시 계약서에는 고트비의 신분이 코치로 되어 있었지만 김호 감독은 고트비를 전력분석관으로 활용했고 전력분석을 뛰어넘어 선수들을 가르치고 싶어했던 고트비는 이에 불만을 드러냈다고 한다.
2004-05년에는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에 진출하여 고향팀이나 다름 없는 LA 갤럭시의 수석코치를 역임했다.
2005년에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한국에 부임하자 다시 한국팀 수석코치가 된 핌 베어벡이 추천하여 함께 한국에 돌아왔다. 아드보가트 감독이 물러난 후에도 베어벡 감독을 보좌하여 2007년까지 한국팀의 코치로 있었다. 이때 한국팀을 따라서 2007년 AFC 아시안컵 최종예선을 치르러 이란 원정을 갔으나, 해외 망명 자국인을 반역자로 간주하는 이란 정부가 그의 입국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29년만의 고국방문이었고, 혁명때문에 나머지 가족과 떨어져 이산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친어머니와의 상봉을 매우 기대하고 있었다고. 그래서 이란 정부에 매우 실망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핌 베어벡이 물러나면서 고트비도 같이 한국팀에서 물러났고, 2007년에는 바로 고국팀인 페르세폴리스 FC에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처음에 이란의 적국이었던 미국국적 때문에 부임이 어려웠지만, 그 능력을 높이 산 페르세폴리스 구단 측은 어떻게 정부를 무마해서 그를 앉혔고 고트비는 능력을 발휘하여 2007-08년 시즌에서 이란 리그 우승을 이끈다.
이런 업적으로 고트비는 2009년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었다. 2011년 AFC 아시안컵에서 한국과 맡붙었고, 경기전에 "한국팀 선수들은 모두 내 제자라서 잘안다."며 승리를 장담했으나, 윤빛가람의 결승골로 한국에 1-0으로 패해서 8강전에서 탈락, 그길로 쫓겨났다. 그리고 그 차후 감독은 카를로스 케이로스로 대체되었다.
이란에서 물러난 이후 J리그에 진출하여 2011년에는 시미즈 S펄스 감독에 취임했으나, 2011년 10위, 2012년 9위, 2013년 9위, 2014년은 강등권을 전전하다가 결국 시즌 도중인 7월에 해임되었다.
2015-16에는 네덜란드령 퀴라소 축구 국가대표팀의 코치를 역임했다. 이때 그가 보좌한 감독이 파트릭 클루이베르트
2016년 5월 태국 부리람 유나이티드에 부임하여 리그 4위, 리그컵과 퀸즈컵에서는 우승하여 어느정도 명예를 회복했고, 2017년에 중국 슈퍼 리그에서 중국 갑급 리그로 강등된 스자좡 융창에 부임하였다.
2017년 스자좡 융창은 갑급리그에서 3위를 했으나, 승격에는 실패하였다.
2018년 4 연속무승으로 승격권에서 멀어지자 (6위) 9월 3일 전격 해임되었다. 올해 성적은 신통치 않았지만, 전년도 성적이 인상적이었던 듯, 중국을 떠나는 고트비를 여러 스자좡 서포터즈들이 전송했다. #
중국 U-21 대표팀을 맡고 있는 히딩크호의 스탭으로 간다는 설이 있었고, 중국에서 히딩크와 함께 있는 사진이 자주 보이고 있지만, 이란의 풀라드 FC 감독으로 취임했다.
2019년 7월 스자좡 융창은 팀이 중위권으로 쳐지자 고트비의 후임 야센 페트로프를 해임하고, 다시 압신 고트비를 불러들였다. 고트비는 팀을 다시 상위권으로 올렸고 칭다오 황하이, 구이저우 즈청, 창춘 야타이등과 선두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29라운드까지 3위를 달리고 있었으나, 2019년 11월 3일 운명의 30라운드에서 스자좡은 신장 톈산을 2-0으로 격파했고, 2위 구이저우가 베이징 체육대에 0-1로 짐으로서 가까스로 2위로 등극, 2020년부터 스자좡 융창은 중국 슈퍼 리그로 승격되었다.
스자좡 융창은 코로나 사태 때문에 2020년 양대리그 후 토너먼트로 치뤄진 슈퍼리그에서 최하위를 마크 1년만에 갑급리그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스자좡 융창측은 고트비 감독을 해임하지 않고 신임하여 다시 갑급리그에서 팀을 지휘하게 되었다.
4. 이야깃거리
- 자기홍보에 적극적인듯. 개인홈페이지를 보면 좀 자뻑(..) 증상이 보인다.
- 한국 생활을 오래한 지라 매우 친한 축구인들이 많다. 홍명보와도 매우 친한다.
- 시미즈 S펄스에서 해임될 때, 구단측이 잔여 계약기간 동안(1년 5개월) 의 임금을 지급하지 않아서[5] 2016년 일본법원에 10억원 (83만유로)대의 소송을 걸었다. 시미즈측은 승부조작 때문에 해임되었기 때문에 지급 의무가 없다고 주장. 다만 2017년 10월에 어떻게 합의가 된듯. 합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1] 페르시아어로는 افشین قطبی 이다.[2] UCLA는 미식축구와 농구가 유명하지만, 축구 역시 강팀이다.[3] 지금이야 메이저리그 사커의 인지도가 조금 늘어났지만 1980년대만해도 미국에서 축구는 아예 듣보잡이었다. 펠레가 뛰던 뉴욕 코스모스도 1985년 해체되었다. (현재 그 이름을 이은 팀이 있긴 한데, 2010년에 새로 창단한 팀이다)[4] 본인의 CV를 보면, 오토반, 발레이 이글스, 풋힐 플라이어스, 골든 이글스라는 팀에서 선수생활을 했다고 써 놨는데, 검색해보면 다 아마추어 클럽이다.[5] 중도 해임할 때의 스포츠계 관행이다. 다만 이렇게 받으려면 남아있는 계약기간중 다른 팀을 맡지 않아야 한다. 울리 슈틸리케의 경우, 2018년 7월까지 계약기간이 남아있음에도, 축협은 잔여연봉 18억원을 일시불로 지급했고, 슈틸리케는 사임후 3개월 후에 바로 톈진 터다의 감독을 맡아서 게약기간내에 이중으로 급여를 챙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