핌 베어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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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오만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2005년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 대표팀 수석코치를 맡았고,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U-23 겸임)도 맡았다. 한국에서 활동할 때에 '''곰가방(Bear Bag)'''이라는 별명이 붙었을만큼 친근한 이미지였다. 2007 AFC 아시안컵에서 토너먼트 3연속 승부차기로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으나, 극도로 나쁜 경기력에 자진사퇴. 그 이후에는 호주 대표팀 감독으로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1승 1무 1패로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선전했다.
2019년 11월 28일 암투병 끝에 사망하였다.
2. 선수 경력
현역 시절은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의 로다 JC, NAC 브레다를 거쳐 스파르타 로테르담에서 6시즌 뛰었다.
3. 감독 경력
3.1. 대한민국 대표팀 이전
현역 은퇴 이후 1981년 DS'79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지도자 생활이 시작되었다. 1984년 우니타스 호린험, 1987년 더 흐라프스합 감독을 거쳐 1989년 페예노르트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다만 워낙 어린 나이에 감독을 맡았었고, 성적까지 좋지 않아서 이 시기엔 페예노르트 팬들 사이에선 평가가 별로 좋진 않았다. 더군다나 베어벡은 선수 시절엔 페예노르트의 지역 라이벌팀인 스포르타 로테르담에서 뛰었었다. 참고로 FM에서 열어보면 베어벡이 싫어하는 구단에 페예노르트가 등록되어 있다.
이후 베어벡은 와게닝겐, 흐로닝언, 포르튀나 시타르트를 거쳤고, 아시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8년 하반기부터 오미야 아르디자의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부터이다.
3.2. 대한민국 대표팀 코치
이후 잠시 네덜란드 대표팀 스카우터를 맡다가 거스 히딩크가 이끄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코치를 맡아[3]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4강에 진출하는데 뒤에서 공헌하였다. 월드컵 이후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의 감독으로 취임한 히딩크와 행동을 같이하여 PSV의 2군 감독을 맡았다.
3.3. 외유기
2003년 7월 2일 교토 퍼플 상가 감독에 선임되었다가, 부진으로 인해 교토 퍼플 상가의 J2리그 강등을 책임지며 1년만에 사임, 2004년 네덜란드령 안틸레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 딕 아드보카트 감독을 따라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수석코치와 아랍에미리트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를 맡았다.
3.4. 대한민국 대표팀 수석코치 및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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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은 압신 고트비 코치.
2005년 가을, 딕 아드보카트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수석코치를 맡아 2006년 독일 월드컵을 함께 하였다. 독일 월드컵 종료 이후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2007년 2월 영국 런던의 크레이븐 코티지에서 열린 유로 2004 챔피언 그리스와의 평가전에서는 1-0으로 승리를 거두며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팀을 2007 AFC 아시안컵 본선으로 이끌었고, 본선에서는 3위로 대회를 마쳤지만, 6경기 3골의 저조한 득점력으로 비판을 받았다.[4] 결국 2007년 7월 29일, 자진 사퇴하였다.
'''토너먼트 3연속 승부차기'''라는 기행(?) 속에서 이운재의 승부차기 선방만큼은 매우 빛을 발해 4강에 올라 3위까지 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룸살롱 사건이 터지면서 일부에서 '''술 먹은 이운재가 술 안 먹은 나머지보다 낫다'''는 말도 한다.
사실 베어벡 감독은 운이 매우 좋지 않았다. 아시안컵 직전부터 주력 선수들인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등 EPL 3인방은 부상으로 이미 엔트리에서 대거 이탈하였고, 다른 공격 옵션들인 박주영, 안정환 등은 리그에서 부진, 그나마 믿고 뽑았던 이동국은 미들즈브러에서 최악의 시즌을 보낸 후 잔부상에 시달려서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등 주전 공격진은 사실상 전멸당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수비축구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
득점은 빈곤하였지만, 실점도 불과 6경기 3실점이었기 때문에 나름 탄탄한 수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이 당시 대한민국은 3백에서 본격적으로 4백으로 전환하는 과도기였기 때문에 수비 부분에서는 나름 성공적이었다고 인정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빈곤한 득점력으로 인해 대표팀 역대 최장시간 무득점 기록을 세웠다. 아시안컵 조별리그 인도네시아전 김정우의 골 이후 해가 바뀌고 감독이 허정무로 바뀐 뒤인 월드컵 지역예선 투르크메니스탄전에서 곽태휘의 골이 터질 때까지 약 580분 동안 무득점이었다. 3번의 연장승부 동안 1골도 넣지 못한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정상적인 90분 경기로는 6경기 동안 무득점이어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 아무리 암흑기여도 깨지긴 힘들 것 같다.
특이하게도 이때 23세 이하 대표팀 감독도 겸임했는데, 경기력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는 꾸역승으로 올라간 준결승에서 이라크의 침대축구에 무너지며 0-1로 패하였고, 이어 이란에도 무기력하게 0-1로 패해 동메달도 못 땄다. 이듬해 올림픽 2차 예선은 무난한 경기력으로 큰 위기 없이 최종예선에 진출했다. 그래도 나름 오범석, 김치우, 염기훈, 이근호, 강민수 등 이 세대 신예들이 자연스럽게 국가대표에서도 중용되었다.
이후 모로코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아 참가한 런던 올림픽에서는 대한민국 올대 감독을 맡고 있었던 홍명보에게 브라질과 일본 등에 대한 전력분석 자료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5]
그리고 핌베어백이 한국축구에 남긴것은 바로 포백을 정착 시켰다는점인데, 이점은 한국축구 역사에 길이남을 유산이다. 이전 히딩크호 시절부터 쭉 시도 되어왔던 전술이었지만[6] 본격적으로 뿌리내린 시점은 베어벡호로 보는것이 정설로, 이후로 국가대표 수비진은 포백 구성이 베이스로 자리잡게 된다.
아래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전적 모음
'''결과 : 총 17전 6승 6무 5패'''
3.5. 호주 대표팀 ~ 오만 대표팀
2007년 12월 11일,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득실차에 밀려 16강 진출에는 실패했으나 세르비아, 가나, 독일과 같은 조에서 1승 1무 1패로 선전하였다. 즉, 독일한테 4:0으로 털린 것이 화근이 된 것이었다. 이후 2010년 8월부터 U-23 모로코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서 런던 올림픽에 참가하는 등 2014년까지 지도하였다. 이후 암 투병으로 현장에서 물러났다가 2016년 말에 오만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돌아왔다.
2019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에서는 우즈벡,일본,투르크메니스탄과 같은 조에 들어갔다. 우즈벡전은 분전했지만 2-1로 졌다. 문제의 일본전은 심판의 노골적인 편파판정으로 인해 1-0으로 패배했다. 투르크메니스탄전은 3-1로 이겨서 조 3위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토너먼트에 올라간 뒤 이란에 0:2로 패해 8강 진출이 좌절되었다. 대회 종료 후 오만 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놓으면서 감독직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계약기간이 남아있음에도 돌연 사퇴 및 은퇴 이유가 밝혀졌는데 암이 재발한 것으로 밝혀졌다.#
4. 사망
암 투병 끝에 2019년 11월 28일 향년 6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핌 베어벡 前 한국 감독, 암 투병 끝에 별세..'향년 63세'
그의 사망 후, 해설가 서형욱은 2002년 당시와 달리 A매치 때마다 발을 맞출 수 있는 기간이 이틀밖에 안되었다는 점, 여러 이름있는 명장들을 거치며 눈이 높아진 축구팬들의 의구심 가득한 시선, 아시안게임, 올림픽대표팀, A대표팀 감독을 겸임하는 과중한 업무 수행, 아시안컵에서의 수비적인 축구로 인한 비난과 같은 고된 임기를 거치면서도 아시안컵에서 3위로 마감한 점(베테랑 선수들의 술집 출입에도 불구하고)과 4백을 정착시킨 점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며,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고, 대한민국 축협이나 그가 거쳐간 구단의 선수들이나 그가 거쳐간 소속팀에서도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8] 특히 울산 현대의 수비수 강민수는 "내 지식 100% 그 분께 배운 것"이라고 말하며, 그의 사망을 슬퍼했다.
5. 기타
대한민국 국대 전임 감독인 조 본프레레와 딕 아드보카트가 각각 조봉래와 아동복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것처럼 이 감독도 한국화(?)된 별명이 존재했는데 '''곰가방'''(...)이라고 한다. 곰(베어)+가방(백)의 합성어인데, 본인도 이 별명을 잘 알고 있었다고...
다소 지나칠 정도로 유럽파를 우선시하는 태도를 보여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에도 유럽파의 컨디션을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자주 유럽으로 출장을 나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으며, 호주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에는 K리그 등 아시아 상위 리그로 이적하는 호주 선수들에게 "비록 하부 리그라도 유럽을 가는 것이 더 낫다"라며 선수들의 유럽 이적을 적극 권장하기도 했다.
단, 호주는 영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의 후손들이 주축이 되는 국가로,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유럽과 관련이 깊기 때문에 호주 선수들 입장에서는 EPL이나 EPL의 하위 리그에 진출하는 게 언어적 측면에서도 외국어를 따로 배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더 수월하고 다른 아시아 상위 리그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더 나은 측면이 있다.[9]
한편으로는 2002년 코치 때와 2006년 감독 때를 비교하면 탈모가 진행되는 게 확연했다.(...) 그래서 다소 인상이 달라보인다는 평도 있었다. 국가대표 차출 문제 등으로 국내 지도자들에게는 반감을 샀는지 K리그 구단 전부 담합해서 올림픽 대표 차출을 거부한 적이 있었다[10] . 사실 이는 국내 지도자들의 외국인 지도자에 대한 일종의 텃세이기도 한데, 히딩크 감독이 부진할 때도 대부분이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어도 세계적인 명장이라 명성도 높고 인맥도 좋은데다가 축구협회에서 강력히 지지해 주는 탓에 그런 공격을 지속하기가 힘들었고[11] 게다가 월드컵에서 환상적인 성적을 거두는 바람에 직접적인 비판을 꺼내지 못하게 되었다. 움베르투 코엘류는 선수 시절과 포르투갈 대표팀 감독 시절 경력 자체도 나쁘지 않고 사람 자체가 부드러운 사람이라 처음엔 대놓고 비판을 못했지만 오만 쇼크가 일어나자 곧 강한 비판을 했고 대표팀 내부에서도 국내 코치들과도 불화가 있었다. 그 다음인 조 본프레레는 비주류인데다가 아예 언론 자체랑도 사이가 안좋았으니 국내 지도자들이 처음부터 그를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아드보카트는 히딩크만큼은 아니어도 그 다음 수준 되는 커리어를 가진 탓에 역시 인맥이 좋았고 언론플레이에 능해 국내 지도자들이 대놓고 비판을 못했다. 또한 월드컵을 불과 몇달 남지 않은 상태에서 선임되어 임기가 짧았으며, 평가전에서 눈에 띌만한 패배 또는 약체와의 무재배가 없었던 까닭에, 월드컵을 제외하고 언론의 구설수에 오를 기회 자체가 없었다고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베어벡은 감독 커리어 자체는 그저 그런 수준이었기에 국내 지도자들이 상대적으로 만만하게 보고 거리낌 없이 공격적으로 반대하는 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 히딩크를 직접적으로 비판하기 힘든 대신 그는 히딩크의 제자처럼 인식이 되어 더욱 그런 분위기였다.
엄밀히 말하면 K리그 구단들이 축구협회의 국가대표 선수 차출 문제 때문에 계속 참고 참다가 마침내 베어벡 때 폭발한 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시안컵이 끝나고 베어벡이 사퇴한 후인 2007년 하반기에는 한국 축구 대표팀의 A매치가 전혀 없었는데, 아마도 K리그 구단들의 선수 차출에 대한 불만을 축구협회가 의식하고 서로 입장을 조율해서 아예 A매치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비록 여론의 비판에 물려 자진사임 형태로 한국을 떠나기는 했지만 대한축구협회와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특히 홍명보와는 종종 가족끼리 만나 식사를 같이 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베어벡이 사망했을 때 축구협회 전무로 있던 홍명보가 엄청 슬퍼했다고 한다.
6. 발언으로 알려진 루머
평소 축구 자체에 관심이 없거나, 있더라도 자국 리그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 국대에 대해서만 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한국 축구의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의 발언으로 축구 사이트 뿐 아니라 여러 기사들에서도 인용될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베어벡은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위의 발언은 2010년 디씨인사이드 국내축구 갤러리의 '뼈정우'라는 고닉이 만든 짤이 발원지로2014년 뼈정우가 국축갤에서 회상하기로는 원래 '''허정무 감독을 실드 치려고''' 만들었다고 한다."한국 국가대표 축구 팬이라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환상에 젖어 있다. 그들은 평소 축구를 위해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자신들의 대표 팀은 언제나 브라질처럼 플레이하기를 원한다. 또 자국 리그는 외면하면서 세계적인 선수가 나오길 갈망하고 선수들이 목표점에 다다르지 못하면 그들을 범죄자보다 더욱 혹독하게 비난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태도가 굉장히 정당한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한 번 결정한 것을 되돌리지 않는다. 한국에서 좋은 기억과 추억을 쌓았지만 감독으로서 경험한 최근의 1년은 너무나 괴롭기만 했다. 한국 대표 팀 감독직에서 사퇴할 것이다. 선수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대표팀 감독직에서 사퇴하면서 나는 행복해질 수 있겠지만, 그들을 여전히 책임감 없이 비난만 일삼아대는 이들 사이에 두고 온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핌 베어벡'''인 척 하는 모 이름없는 네티즌'''
베어벡이 K리그를 언급한 적은 있다. 취임하지 오래잖아 한 인터뷰 내용이다.
이에 처음부터 많은 K리그 팬들에게 비난을 받았고, 베어벡이 감독직을 사퇴한 이유도 K리그와의 일정 조율 및 선수 차출 과정에서의 갈등이 자신의 사임 배경임을 명확하게 밝히기도 했다. 베어벡은 오히려 K리그가 국가대표의 발목을 잡는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 발언들을 통해 명확히 드러나는데 사퇴하면서 되려 K리그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 베어백의 말처럼 주요 선수들이 해외로 선진 축구를 배우러 진출하면 자연스럽게 축구 수준은 높아지면서 K리그의 경쟁력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실력이 검증된 해외파와 소수의 국내파에게 지속적으로 국대에서 뛸 기회를 줘서 적절히 실험해 가며 월드컵에서 최상의 성적을 내는 것이 본래 축구협회와 국가대표 감독이 할 일이다."--앞으로 목표는.
▲2007년 아시안컵축구에서 우승하는게 목표다. 유럽 톱리그와 K-리그의 차이가 크다. K-리그 팀들의 수준은 네덜란드 2부리그와 비슷하다고 본다. 재능이 뛰어난 선수들을 유럽 등 해외에 보내 선진 축구를 배워야 한다.출처
전문 축구인이자 한국 국대 감독이었던 베어백이 아니라 그를 사칭한 네티즌이 지어낸 말에 불과하지만, 이는 여러 기사들에서도 인용될 정도로 매우 유명하다. 또한 이 발언은 한국 국대가 2002년의 4강 신화와 2010년 원정 16강 등 몇몇 성과를 제외하면 뚜렷한 업적이 없는 원인이 축피아라는 소리까지 듣는 무능한 축구협회가 아니라 평소 축구에 대해 무관심한 대중들에게 있다는 책임 전가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2002년과 그 유산이 남아있던 2010년의 성과가 예외적인 경우이고 근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평소 축구나 K리그에 무관심하면 리그 수준이나 시장 규모가 발전하지 않아서 뛰어난 선수들이 배출되기 어려워지고 그로 인해 국대가 부진하는 것은 당연한데 정작 그 원인 제공자들이 적반하장식으로 국대의 부진을 비난한다며 비판하는 것이다. 이 발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흔히 KBO리그보다 확실히 적은 K리그의 관중 수도 지적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나 근거는 여러모로 잘못되었다. 우선 KBO리그와 K리그의 관중 수를 비교하는 것은 두 프로 리그의 토양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전 세계 야구 시장에서 미국, 일본, 한국, 대만의 리그가 '''95% 이상의''' 지분을 차지하는 반면 축구는 유럽 4대 리그인 라 리가, EPL, 분데스리가, 세리에 A의 인기가 타 리그들보다 월등히 높지만, 자국 축구 리그를 운영하지 않는 국가가 드물어서 각국의 여러 리그들이 각자 세계 축구 시장의 지분을 함께 차지하고 있으므로 애초에 K리그가 세계의 축구 시장에서 큰 지분을 차지할 수 없다. 또한 위상이나 시장 규모도 K리그는 세계적인 기준으로 크지 않아서 실력이나 잠재력 좋은 선수들은 세계의 주목을 받기 좋은 유럽이나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일본, 중동, 최근에는 중국의 슈퍼 리그로 진출하므로 '세계적인 실력의 K리그 선수'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K리그가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지 못할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이다.
축구에 대한 대중의 높은 관심이 국대가 호성적을 거두는 전제조건이라면 남미 국가들, 특히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는 지속적으로 월드컵 결승 진출과 우승을 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2002년 이후 남미 국가들은 월드컵에서 우승하지 못하고 있으며 2018년에는 아예 전원이 4강 진출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열린 4번의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전부 유럽 팀에게 패배하여 탈락하였고, 남미 국가가 결승 진출에 성공한 것도 2014년의 아르헨티나 1번 뿐이다. 오히려 자국민들의 축구에 대한 관심이 자국 국대에게 악재로 작용한 사례로 미네이랑의 비극이 있다.
그리고 자국 리그의 수준이 높다고 국대가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자국 리그의 수준이 국대의 성적을 좌우한다면 월드컵 4강은 유럽 4대 리그를 운영하는 스페인, 잉글랜드, 독일, 이탈리아가 독점하다시피 해야 하고, 네덜란드나 크로아티아는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으며, 특히 한국이 월드컵 4강에 진출하거나 벨기에가 FIFA랭킹 1위를 차지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어야 한다. 그나마 독일과 이탈리아는 4회 우승이라도 했지만 잉글랜드는 아주 옛날에, 반대로 스페인은 2010년에야 비로소 딱 1번 우승했다. 반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자국 리그는 1970년대 이후 유럽 리그들보다 수준이 떨어졌으나, 1986년~2002년 시기에 디에고 마라도나, 호마리우, 호나우두같은 레전드 선수들의 활약으로 월드컵 우승이나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오히려 축구 수준의 차이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유소년 육성에 있는 게 보통이다. 벨기에 리그 수준 자체는 유럽에서도 크게 떨어지는 편[12] 이지만 육성선수들의 수준은 높아서 빅리그에 들어가는 선수들도 많고, 가끔 KDB처럼 크게 터지는 일도 있다. 반대로 잉글랜드는 리그 수준은 높았으나 정작 홈그로운 선수들의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아 고전하다가 최근에야 헤리 케인 같은 선수가 나오면서 반등을 시작한 상황이다. 한국과 일본의 리그 수준도 중국, 중동과 비교해서 높다고 할 수 없으나, 두 나라의 유소년 육성 능력은 유럽과 비교하기는 어려우나 중국, 중동보다는 더 양호한 편이다.
자국 리그의 시장 규모가 커지면 국가의 축구 수준이 높아지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이 그 논리대로라면 중국, 사우디, 이란 같은 국가들은 벌써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축구 강국이 되어 있어야 한다. 오히려 현재 뛰어나거나 잠재력이 큰 선수들에게 높은 연봉을 주어 자국 리그에서 뛰게 하기보다는 베어백의 말마따나 최대한 유럽의 축구 선진국들에 많이 진출시키는 것이 축구 발전에 도움이 된다. 물론 자국 리그의 번영을 위해서 외국인 선수를 적재적소에 영입하고 해외에서 뛰는 자국 선수들에게 나이가 들면 귀국을 종용하고 유럽 리그에서 완벽하게 자리잡지 못했다고 해도 어느 정도 실력이 입증된 선수들을 국내유턴시키는 방식으로 리그 발전도 이끌 수 있다.[13] 1990년대의 사우디의 경우 자국 리그 선수들이 자신들의 실력보다 지나치게 높은 연봉을 받아서 유럽에 진출하거나 자기 발전의 동기를 상실하였고, 이는 사우디 국대의 수준 저하를 불러왔다. 그리고 그 현상은 현재 중국에서 그대로 재현되어 유럽에서 뛰는 유명 중국 선수는 우레이 정도이고 적잖은 기간 동안 천문학적인 자금이 축구 시장에 투자되었지만 2020년 현재 축구 굴기는커녕 전혀 발전이 없어서 200억 이상의 연봉을 받던 마르첼로 리피 감독이 선수들에게 실망했다며 자진 사임하고 떠난 뒤 몰락 루트를 충실하게 타고 있다.
K리그가 세계 최고 수준의 리그가 아닌 것도, FC 코리아라는 용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평소에 축구에 무관심한 문외한 주제에 국대의 경기 결과에만 몰두하면서 과한 칭송이나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그것이 잘못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직접적으로 뛰어난 선수들의 등장과 좋은 활약, 그들이 활약할 수 있는 감독의 전략 구사와 선수 선발, 그런 유능한 감독을 선임하려는 축협의 노력에 달린 것이다. 국대가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선행되어야 사람들이 축구라는 종목 또는 선수들에게 관심을 갖고 국내 리그도 활성화되는 것으로 그 예가 2002년 4강 직후와 2018년의 독일전 승리 직후이다. 다시 말해서 저 발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선후나 직간접성을 뒤바꿔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비판을 하더라도 출처와 발언 배경은 확실히 알아본 후 숙고하고 해야 한다.
[1] Verbeek을 영어 발음대로 읽으면 '버빅', 독일어 발음대로 읽으면 '페어비크', 네덜란드 발음대로 후술한대로 읽으면 '페르베이크' 또는 '퍼르베이크'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베어벡'이 나올 수 없음에도 그가 처음 한국에 온 2001년 이래로 '베어벡'이라는 잘못된 이름 표기가 굳어지면서 그대로 이어졌다.[2] 풋볼 디렉터 (Director of Football)[3] 이 때 핌 베어벡이 수석코치였다는 잘못된 정보가 있는데 이 때의 수석코치는 박항서였다. 물론 핌 베어벡 또한 히딩크를 보좌하면서 많은 역할을 했지만 이는 히딩크가 데려온 코치들을 대표하는 정도였고 실제 히딩크와 선수들 중간에서 이어주는 역할을 하면서 히딩크를 전반적으로 보좌한건 박항서이다. 히딩크가 휴가 등으로 자리를 비울 경우에는 박항서가 감독대행 역할을 했고 결정적으로 2002 월드컵 당시 D조 포르투갈-미국 경기를 전력분석차 관전하러 갈 때는 통역사를 제외하면 박항서 혼자 동행했었다. 또한 히딩크호의 8강전 상대가 될지도 모를 스페인-아일랜드의 16강전 전력 분석을 위해 히딩크가 직접 관전하러 갔을 때는 박항서가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을 대비한 훈련을 지휘했었다.[4] 이때 바레인 쇼크로 인해 탈락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5] 당시 모로코는 애초 D조 2위를 목표로 8강 진출을 노리고 있었으나, 2무 1패를 기록해 3위로 밀려 광탈했다. 같은 조에는 일본, 온두라스, 스페인이 있었다.[6] 히딩크호는 쓰리백에 최적화된 홍명보의 막강한 영향력을 버릴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이후 감독들도 저마다 포백을 실험해오다 아드보카트호도 꾸준히 기동시켜왔음에도 정작 월드컵 본선에선 쓰리백으로 회귀하는 등 한국 국대에 깊숙히 스며든 쓰리백의 잔재를 지워내기란 어려웠다.[7] 승부차기 기록은 공식적으로는 모두 무승부로 취급된다. 이하 모두 같음.[8] 출처[9] 마찬가지로 호주 축구선수들이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리그로 진출하지 않는다면 대신 메이저 리그 사커에 진출하더라도 다른 아시아 상위 리그로 진출하는 것보다 더 적응면에서 수월할 수 있다.[10] 이 때문에 2007년 1월에 있었던 올림픽 대표팀을 이끌고 출전하기로 했던 카타르 대회는 최종적으로 불참하게 되었다. 대신 베어백은 이 무렵에 있었던 걸프컵을 관전하면서 같은 해 여름에 있을 2007 AFC 아시안컵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을 미리 대비하였고, 동년 2월에 대신 그리스와 친선경기를 치렀다.[11] 오해가 있긴 했지만, 2002 월드컵 이후인 2003년, 김호곤 감독이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할 때 네덜란드 전지훈련에서 히딩크 감독에게 받은 서운한 감정을 표현했던 일이 있었다.[12] 이승우의 진출로 벨기에 리그에 관심이 많아졌으나, 정작 벨기에 팀들의 경기를 보고 실망한 사람들 또한 많았으니...[13] 대표적인 예로 기성용과 이청용이 귀국하여 K리그를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