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로색슨 신화

 


글자 그대로 게르만족의 일파인 앵글로색슨족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전에 믿었던 전통 신앙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8~9세기 이전까지, 앵글로 색슨족들은 오딘토르티르 같은 게르만 신들을 섬기는 게르만 다신교를 믿어왔다. 다만 신들의 이름이 스칸디나비아와 다를 뿐이다. 오딘과 토르와 티르를 앵글로 색슨족들은 워든(Woden)과 투노르(Thunor)와 티우(Tiw)라고 불렀다.
그밖에도 영국으로 이주한 앵글로색슨족들은 세악스네아트(Seaxneat), 혹은 삭스노트(Saxnot)[1]라 불리는 신을 숭배했다. 이 신은 북유럽 신화를 기록한 원전인 에다에 그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앵글로색슨족들만의 고유한 신으로 여겨진다. 세악스네아트는 색슨족의 수호신이자 색슨족 왕가의 조상신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서 에식스 왕조는 자신들이 세악스네아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에식스 왕조는 오파(Offa) 왕의 6대 조상이 세악스네아트이며, 그 위의 7대 조상은 워든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일설에 의하면 세악스네아트는 원래 색슨족들의 최고신이었다가, 훗날 워든의 아들로 그 위치가 낮아졌다고 한다.
색슨족들은 봄과 생명과 출산을 다스리는 두 명의 여신인 흐레타(Hretha)와 에오스트레(Eostre)도 믿었는데, 오늘날 부활절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 이스터(Easter)도 색슨족들의 여신인 '에오스트레'[2]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서기 7세기 이후 색슨족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나서도 에오스트레 신앙은 부활절 축제를 알리는 이스터(Easter)로 바뀌어 계속 그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이 밖에도 색슨족들은 이르민(Irmin)라 불리는 전쟁의 신을 숭배했다. 이르민은 색슨족이 사용한 고대 영어에서 강력함, 완벽함이란 뜻을 담은 말이었다. 브리튼으로 이주한 색슨족들은 삭스노트를 수호신으로 숭배한 반면, 독일 본토에 남아있었던 색슨족(작센족)들은 이 이르민을 최고신으로 섬겼다. 일설에 의하면 이르민은 고대 게르만족들의 최고신이었던 티르(티우)와 같은 신이라고도 한다.
다른 고대 사회에서처럼 앵글로-색슨족의 왕들도 반신(半神)적인 존재인 신들의 자손으로 여겨졌다. 대부분의 왕들은 워든이나 프레이(풍요의 신) 같은 게르만족 신들로부터 핏줄을 이어받았다고 주장을 했으며, 훗날 8세기에 활동한 알프레드 대왕의 아내도 자신의 조상이 워든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흔한 인식과는 달리, 앵글로 색슨족들은 그리스도교로 쉽게 개종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전통 신앙인 게르만 다신교에 꽤나 오랫동안 집착했다. 그들이 5세기 초반부터 영국으로 이주하여 토착민인 켈트족들을 정복한 이후로 약 150년 동안 영국의 초기 그리스도교는 거의 죽은 상태였다.[3] 그러다가 597년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이 보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장과 다른 선교사들이 켄트의 타넷섬에 상륙하면서 그리스도교가 다시 전파되었다.
앵글로 색슨 7왕국들 중의 하나인 노섬브리아의 에드윈 왕(Edwin: 586~633년)은 폴리누스 주교가 기도를 한 덕분에 자신을 죽이려던 암살자의 칼을 막아내고, 왕비가 무사히 딸을 낳았다고 생각해서 전통 신앙을 버리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에드윈 왕은 게르만 다신교를 믿었던 머시아의 펜다(Penda: ?~655년)에게 패배하여 633년 살해당했고, 노섬브리아 왕국은 그리스도교를 버리고 게르만 다신교로 돌아간 왕들에 의해 지배당하여, 한동안 그리스도교 전파는 큰 지장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57년 노섬브리아 왕실은 힐다의 수도원에서 열린 종교회의를 통해, 끝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 대한 앵글로-색슨족의 믿음은 그리 굳건하지 못했으며, 그들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자주 그리스도교를 버리고 전통적인 게르만 다신교로 돌아갔다. 7세기 린디스판(Lindisfarne) 수도원의 주교 아빠스 성 커스버트(Cuthbert)는 신이 내린 대재앙이 돌자, 자신의 교구민들 중 많은 수가 "나쁜 행동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더럽히고, 우상을 숭배하며 주문이나 부적으로 위기를 벗어나려 하였다."라고 한탄했다. 커스버트 주교가 언급한 대재앙은 전염병을 가리키는 듯한데, 전염병이 돌자 앵글로-색슨족 주민들이 그리스도교를 버리고 '우상'이라고 표현된 옛 신들을 섬기며, 주문과 부적을 썼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로마 교황이 임명한 테오도르 켄터베리 대주교는 669년 색슨족들이 게르만 신들을 섬기는 사원을 다시 세우는 장면을 보았으며, 리폰의 월프리드 주교를 제외하면 자신의 교구에서 주교가 전혀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런가 하면 동앵글리아의 레드왈드 왕은 켄트 왕국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그리스도교 교리를 배웠으나, 고향에 돌아오자 게르만 다신교를 믿던 왕비와 사제들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기묘한 절충안을 고안했으니, 예수와 게르만 신들을 함께 숭배했던 것이다.[4] 물론 독실한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은 이 또한 사악한 우상 숭배라고 비난했다.
이렇게 전통신앙과 새로운 신앙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던 앵글로-색슨족들은 747년 클로베쇼 종교회의에서 잉글랜드의 모든 백성들은 옛 게르만 신들을 숭배하거나 제물을 바치지 못하도록 하는 선언이 나온 후에야 비로소 모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색슨족이 브리튼에 최초로 상륙한 지 300년이 지나서야 그들은 전통신앙을 버리고 개종한 것이다.
하지만 수백 년 넘게 조상 대대로 섬기던 신앙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다. 독실한 그리스도교도였던 웨섹스의 알프레드(Alfred) 대왕은 침략해온 바이킹들과 평화 협상을 맺으면서 천둥의 신 토르(투노르)의 이름으로 맹세했다. 그런가 하면 영국의 변방인 맨섬에서는 무려 11세기에 <에다>에서 말한 라그나로크의 내용을 묘사한 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아울러 현재 일주일 중 화, 수, 목, 금요일의 영어 단어들은 모두 앵글로-색슨족을 포함한 고대 게르만족 신들의 이름에서 따왔다. 화요일인 튜즈데이는 하늘과 맹세의 신인 티우에게, 수요일인 웬즈데이는 워든에게, 목요일인 서즈데이는 투노르에게, 금요일인 프라이데이는 풍요의 신 프레이에게 각각 제사를 지내는 날이라 신들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그런가 하면 독일 본토에 살던 색슨족들인 작센족들은 잉글랜드로 이주한 동족들보다 더 전통 신앙에 집착하였고, 그와 반비례하여 그리스도교를 거부하는 정도도 심했다. 8세기 잉글랜드의 수도사 겸 학자인 가경자 베다가 쓴 책 <앵글족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 제5권 10단에 따르면 검은 헤우왈드(Niger Heuuald), 하얀 헤우왈드(Albus Heuuald)라고 불리는[5] 잉글랜드 출신 선교사 두 명이 작센 지역으로 가서 가톨릭을 선교하자, 작센족은 선교자들 때문에 자기네 전통 신들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할까 우려하여 두 사람을 칼로 찌르거나 온갖 고문을 가한 뒤 강물에 던져 죽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작센족들은 브리튼의 색슨족보다 약 100년 동안이나 전통신앙을 더욱 오래 보존하였다.
작센족들은 772년부터 845년까지 73년 동안 프랑크 왕국과 벌인 일명 '작센 전쟁'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전통 신앙을 버리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6] 프랑크 왕국의 군주인 카롤루스 대제는 열렬한 그리스도교 신자로 아직까지 이교인 북유럽 신화를 믿던 작센족들을 정복하여 노예로 삼고 강제로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는 목적으로 작센 전쟁을 벌였으며, 작센족들은 이에 반발하여 뛰어난 지도자인 비두킨트를 내세워 강하게 저항하였다. 비두킨트는 여러 차례 침략해오는 프랑크 왕국의 군대를 물리쳤으나[7] 785년 카롤루스에게 항복하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하지만 비두킨트가 항복한 이후에도 무려 60년 동안이나 작센 지역에서는 프랑크 왕국에 맞서는 작센족들의 반란이 잇달아 일어날 만큼, 작센족들의 저항이 거세었다. 그 과정에서 프랑크 왕국의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작센족들이 섬기던 이르민[8]을 비롯한 여러 게르만 신들의 성소로 간주된 거대한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이러한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무력에 굴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작센족들은 전통적으로 믿어온 앵글로색슨 종교를 버리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센족들은 그리스도교에 거부감이 매우 심했다. 이미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작센족들도 조상 대대로 해온 것처럼 계속 샘물에 봉헌물(제물)을 바치고, 동물을 죽여서 그 내장을 꺼내 미래를 점치는 풍습을 간직했다. 심지어 프랑크족 상인들이[9] 작센족들한테 신들한테 바치는 희생 제물로 쓰라며 노예를 팔아넘기는 일도 있었으며,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작센족 성직자들도 계속 염소와 황소를 신들한테 희생 제물로 바쳤다. 그밖에도 작센족은 프랑크 왕국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때마다 반드시 교회부터 먼저 불태우고 가톨릭 성직자를 죽였다.[10]
한편 앵글로색슨족의 후손인 영국과 미국이 각각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 세계 최강대국이 되자, 두 나라에서는 자신들의 선조인 앵글로색슨족들이 믿었던 종교 및 신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영연방 왕국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또한 강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영국과 미국처럼 앵글로색슨족의 종교 및 신화에 관심하였다. 그리하여 앵글로색슨족들의 영웅 서사시인 베오울프가 영문학에서 주목받고, 앵글로색슨족들이 믿었던 괴물이자 앵글로색슨 7왕국 중 웨섹스 왕국의 문장에 그려진 와이번[11]도 서구의 판타지 예술 작품에 널리 등장하게 되었다. 2013년 개봉된 영화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에 등장한 용 스마우그도 그 원형은 와이번에서 유래한 것이다.
  •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29~143쪽
용/ 분홍개구리/ 김영주 옮김/ 56쪽
도미니언/ 톰 홀랜드 지음/ 이종인 번역/ 책과함께
[1] 색슨족들이 사용했던 짧은 단검인 삭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즉, 이 세악스네아트는 삭스로 상징되는 신. 다만 일설에 의하면 세악스네아트의 기원은 북유럽 신화에서 가장 오래된 주신이자 하늘과 전쟁의 신인 티르라고 하며, 유럽 대륙 본토의 게르만족들이 숭배하던 전쟁과 태양의 신이었다고도 한다.[2] 독일에서는 '오스타라'라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 여신의 기원은 바빌론 신화에서 사랑과 풍요의 여신이었던 이슈타르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지만, 학계에서 이슈타르와 무관하다는 결론이 나온 걸로 봐서는 그냥 낭설일 뿐이다.[3] 영국의 켈트족들은 이미 로마 시대에 가톨릭을 받아들여 믿었지만, 그들을 정복하고 새로운 주인이 된 앵글로 색슨족들은 정착하고 나서 한동안 그리스도교에 무관심했다.[4] 공교롭게도 북유럽 신화를 가장 오랫동안 간직했던 아이슬란드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아이슬란드 주민들은 10세기 말엽에 이르러 본국 노르웨이의 압력 때문에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했지만, 그러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전통적으로 숭배했던 천둥신 토르를 그리스도교의 예수와 함께 믿었다. 심지어 14세기에 작성된 아이슬란드의 민담 모음집인 사가에서는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오딘을 수캐, 프레이야를 암캐라고 폄하하자 분노한 아이슬란드 주민들이 "신성모독을 일삼는 저 개만도 못한 버러지들을 당장 처벌하라!"하고 분노하여 항의했다는 내용도 있다.[5] 베다의 설명에 따르면 두 사람의 머리카락 색에 따라 각각 '검은' '하얀'이란 말을 붙였다고 한다.[6] 다만 이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작센 전쟁은 끝나는 날까지 잔혹한 대량 살육과 파괴가 줄을 이었다.[7] 이 과정에서 아달기실을 비롯한 프랑크 왕국의 고위 관리가 4명이나 전사하는 등, 프랑크 왕국이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8] 북유럽 신화에서 하늘과 전쟁의 신인 티르와 같은 신이라고 추정되고 있다.[9] 당연한 말이지만 이때 프랑크족들은 이미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교도인 작센족들한테 인신공양의 제물로 쓰라고 돈을 받고 노예를 팔아넘겼던 것이다.[10] 출처: 도미니언/ 톰 홀랜드 지음/ 이종인 번역/ 책과함께/ 283~288쪽[11] 날개 두 개에 발 두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불을 뿜는 용. 이름은 색슨어로 뱀을 뜻하는 단어인 Wivere에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