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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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ctus Beda Venerabilis
잉글랜드의 수도사제, 역사가, 가톨릭·정교회·성공회의 성인.
베다는 672년 또는 673년에 노섬브리아 왕국 (오늘날의) 타인 앤드 위어(Tyne and Wear)주의 재로우(Jarrow)에서 태어나 735년 5월 26일 같은 곳에서 선종했다. 그의 이름을 현대 영어로는 보통 비드(Bede)라고 하지만, 고대 영어식으로 비다(Beada), 베다(Beda)라고 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생전에 박사로 존경받아 '베다 베네라빌리스(Beda Venerabilis)'라고 불렸는데, 이는 '능히 공경받을 만한 베다'라는 뜻이다. 한국 천주교는 이 표현을 한자로 옮겨 '가경자(可敬者) 베다'라고 하였다. 현대 영어로는 Veranable Bede라고 쓰는 경우가 많다. 축일은 5월 25일로, 영국의 작가와 역사가들의 수호성인이다.
성 바오로 수도원 건설은 685년에 끝났지만 이듬해(686) 재로우에 큰 전염병이 돌았다. 710년에 씐 성 체올프리드(Ceolfrith) 전기에 따르면 이때 성무일도 전체를 노래할 수 있는 수사 2명이 살아남았는데, 전기 작가에 따르면 1명은 체올프리드, 다른 1명은 그가 가르친 어린 소년이었다. 전기의 저자가 따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이 소년이 13-14살쯤 되었을 베다였음이 거의 확실하다. 베다가 19살쯤 되는 692년 무렵, 부제로 서품받았다. 당시 교회법에 따르면 부제로 서품받으려면 최소한 25세는 되어야 했다. 베다가 영민하고 유능한 수사여서 예외를 허락받았을 수도 있지만, 당시 영국 교회가 교회법을 잘 지키지 않았을 뿐일 가능성도 있다. 30살 되던 해(703년쯤)에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2]
이후로 베다는 평생 재로우의 수도원에서 지내며 요한 복음서 등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글을 썼다. 그가 편집한 불가타 성경은 가톨릭에서는 1966년까지 쓰였다. 특히 그가 52세 되던 731년, 또는 732년에 탈고한 《앵글족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는 특히 중요한 대표저서이다. 이 책에서 서력기원을 채택한 것이 널리 퍼져 오늘날처럼 서력기원이 전세계에서 대중화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생전에는 평생 수도원에서 단순한 삶을 살고자 했지만 성경과 학문의 권위자로 명성이 널리 알려져 '우리의 스승, 존엄한 베다'라고 불렸다. 그가 평생 수도원에서 살긴 했지만 수도원에만 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영국 곳곳을 여행하였음은 분명하다. 베다에게 부탁을 받고 로마까지 가서 자료를 찾아 전해준 사람도 있었다.
62세쯤 되던 735년 5월 25일 오후 일몰이 지난 뒤 베다는 숨을 거두었다. 5월 26일 0시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받아들인 관습에 따라) 하루를 전날 해가 진 다음부터 시작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5월 25일 일몰 후는 26일로 간주되므로, 그가 숨을 거둔 날을 5월 26일로 보고 기념한다. 선종 후에는 재로우 수도원에 묻혔다가 더럼 대성당[3] 으로 이장되었다. 1899년 교황 레오 13세가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천국편 제10곡에 등장하는 유일한 잉글랜드인. 직접 입을 여는 건 아니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신과 함께 원을 이루는 영혼들을 소개할 때 이름만 나온다.
Sanctus Beda Venerabilis
1. 개요
잉글랜드의 수도사제, 역사가, 가톨릭·정교회·성공회의 성인.
베다는 672년 또는 673년에 노섬브리아 왕국 (오늘날의) 타인 앤드 위어(Tyne and Wear)주의 재로우(Jarrow)에서 태어나 735년 5월 26일 같은 곳에서 선종했다. 그의 이름을 현대 영어로는 보통 비드(Bede)라고 하지만, 고대 영어식으로 비다(Beada), 베다(Beda)라고 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생전에 박사로 존경받아 '베다 베네라빌리스(Beda Venerabilis)'라고 불렸는데, 이는 '능히 공경받을 만한 베다'라는 뜻이다. 한국 천주교는 이 표현을 한자로 옮겨 '가경자(可敬者) 베다'라고 하였다. 현대 영어로는 Veranable Bede라고 쓰는 경우가 많다. 축일은 5월 25일로, 영국의 작가와 역사가들의 수호성인이다.
2. 생애
- 베다의 생애는 그가 몇 살 때 있었던 일로 전하지만, 그의 생년이 672년인지 673년인지 불확실하거니와 생일을 모르므로 연도에는 늘 1년쯤 혼란이 있다. 일단은 그가 673년에 태어났다고 가정하여 나이에 맞추어 연도를 병기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1년 빠를 수도 있음을 유념하길 바람.
성 바오로 수도원 건설은 685년에 끝났지만 이듬해(686) 재로우에 큰 전염병이 돌았다. 710년에 씐 성 체올프리드(Ceolfrith) 전기에 따르면 이때 성무일도 전체를 노래할 수 있는 수사 2명이 살아남았는데, 전기 작가에 따르면 1명은 체올프리드, 다른 1명은 그가 가르친 어린 소년이었다. 전기의 저자가 따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이 소년이 13-14살쯤 되었을 베다였음이 거의 확실하다. 베다가 19살쯤 되는 692년 무렵, 부제로 서품받았다. 당시 교회법에 따르면 부제로 서품받으려면 최소한 25세는 되어야 했다. 베다가 영민하고 유능한 수사여서 예외를 허락받았을 수도 있지만, 당시 영국 교회가 교회법을 잘 지키지 않았을 뿐일 가능성도 있다. 30살 되던 해(703년쯤)에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2]
이후로 베다는 평생 재로우의 수도원에서 지내며 요한 복음서 등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글을 썼다. 그가 편집한 불가타 성경은 가톨릭에서는 1966년까지 쓰였다. 특히 그가 52세 되던 731년, 또는 732년에 탈고한 《앵글족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는 특히 중요한 대표저서이다. 이 책에서 서력기원을 채택한 것이 널리 퍼져 오늘날처럼 서력기원이 전세계에서 대중화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생전에는 평생 수도원에서 단순한 삶을 살고자 했지만 성경과 학문의 권위자로 명성이 널리 알려져 '우리의 스승, 존엄한 베다'라고 불렸다. 그가 평생 수도원에서 살긴 했지만 수도원에만 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영국 곳곳을 여행하였음은 분명하다. 베다에게 부탁을 받고 로마까지 가서 자료를 찾아 전해준 사람도 있었다.
62세쯤 되던 735년 5월 25일 오후 일몰이 지난 뒤 베다는 숨을 거두었다. 5월 26일 0시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받아들인 관습에 따라) 하루를 전날 해가 진 다음부터 시작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5월 25일 일몰 후는 26일로 간주되므로, 그가 숨을 거둔 날을 5월 26일로 보고 기념한다. 선종 후에는 재로우 수도원에 묻혔다가 더럼 대성당[3] 으로 이장되었다. 1899년 교황 레오 13세가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3. 매채에서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천국편 제10곡에 등장하는 유일한 잉글랜드인. 직접 입을 여는 건 아니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신과 함께 원을 이루는 영혼들을 소개할 때 이름만 나온다.
[1] 라틴어로 '(하느님께) 봉헌된 소년'이라는 뜻. 수도원에 입회하기를 희망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입회 절차를 밟지는 못하고 수도원에 거주하며 지내는 아이를 말한다. 한국 천주교의 일부 서적에서 '수도 지원 아동'이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오늘날은 이런 제도가 없고, 수도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만 18세 이상에 고등학교 졸업 이상이라야 입회가 가능하다.[2] 가톨릭에서 수도자 신분과 성직자 신분은 별개이다. 수도자이면서 또한 성직자 자격도 받은 이를 한국 천주교는 총칭하여 '성직수사'라고 부른다. 또한 성직수사 중에서도 신부인 이를 흔히 '수사신부'라고 부르는데, 베다 또한 수사신부였다.[3] 해리 포터 시리즈의 촬영지인 더럼 대학교 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