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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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昭君
양귀비, 서시, 초선과 더불어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
기원전 1세기경의 인물로,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복주누약제 선우(復株累若鞮單于)의 처로 원래는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다. 정확한 생몰연도는 불확실하다. 다만 호한야 선우와 결혼한 시기 등을 통해 출생 년도를 추정할 뿐이다.
본명은 장(嬙)으로 성과 합쳐 '''왕장'''이 본명이지만, 자가 소군이기에 흔히 왕소군이라 불린다. 또 호한야 선우는 왕소군을 '''녕호 연지(寧胡 阏氏)'''로 봉했다. 훗날 사마소의 이름인 '소(昭)'를 피휘하여 '''왕명군'''(王明君) 혹은 '''명비'''(明妃)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양귀비나 초선 등에 비하면 일반 대중들에게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 인물. 그러나 중국에서는 지지가 확고한 미녀이다. 포사, 양귀비 등 대부분 중국사에 등장하는 미녀들이 국가의 멸망에 관여하는 좋지 못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데 비해, 왕소군은 평화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숭고한 여인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왕소군이 자의로 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정말 자신을 희생한 것인지는 불명.
2. 혼인 과정
한서 원제기에서는 경녕(竟寧) 원년(기원전 33년) 봄 정월에 호한야 선우가 입조하여 위와 같이 혼인을 요청하자, 대조(待詔) 액정(掖庭) 왕장(王檣)을 신부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서경잡기>에 의하면, 평소 한원제는 후궁이 많아서 화공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뒤, 그걸 보고 누구와 동침할지를 결정했다. 당시에는 후궁으로 들어가서 황제 얼굴도 한 번 못 보고 죽는 여자도 많았기 때문에, 후궁들은 화공인 모연수에게 예쁘게 그려 달라고 뇌물을 바쳐댔다. 하지만 왕소군만이 뇌물을 주지 않아서 황제의 총애를 받을 수 없었다.[1]
당시 흉노와 전한은 당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흉노 지도자인 대선우 호한야가 한족 궁녀를 보내 달라는 요청을 하여 적당히 후궁을 보내게 되었다.[2] 원제는 그래서 초상화만 보고 흉노로 보내도 아깝지 않을 왕소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가기 전날에 왕소군을 만나보았더니 웬걸, 왕소군이 천하절색이었다. 그 아름다움을 접하고 넋이 나갔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 왕소군을 흉노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흉노에게 보내기 전에 하룻밤을 함께 했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다. 그리고 초상화를 그린 모연수는 당연히 분노한 원제에 의해 처형되었다.
3. 유복한 노후
위에 나온 저런 사연 따위를 알 리 없는 호한야 선우는 '이런 미녀를 주다니 전한이 우리 흉노와 잘 지내고 싶다는 거구나'하고 입이 찢어져라 기뻐했으며 정중히 그녀를 대접했다. 그리고 당연히 호한야 선우의 연지#s-3가 되어 아들을 낳았고, 호한야 선우의 사후 당시 흉노족의 수계혼 관습대로 호한야 선우의 아들인 복주누약제 선우[3] 의 처가 되어 딸을 낳았다.
지금은 물론 당시 한족의 생각으로도 아버지의 처첩을 자식이 물려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패륜이었기에 이를 왕소군의 비극이라고 하기도 한다.
채옹의 '금조'에 따르면, 왕소군이 흉노의 수계혼 풍습에 따라 의붓아들과 합방할 것을 강요받자 거부하고 자살했다고 전하며, 민간 전승에서는 심지어 국경을 넘어간 후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함으로써 원제에게 절개를 지켰고, 흉노가 그 의기를 높이 사서 그곳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왕소군은 사실 흉노 땅에서 오래오래 살면서, 한족 문화를 흉노에 전파하는 데에 많은 기여를 했다. 후한서 흉노 열전에 금조를 참고해서 쓴 범엽은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서모들은 모두 자기 아내로 들이지만, 친어머니는 들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그 부분은 채택하지 않았다. 왕소군과는 상관이 좀 떨어지지만, 이 시기를 전후해 흉노와 한 왕조는 비교적 우호 관계를 유지했고 흉노의 침략 또한 사그라들었다. 왕소군을 비극적인 여인이라는 모습으로 인식할지언정 나쁘게 보지 않는 것엔 이런 점도 작용한 듯하다.
4. 가계
- 호한야선우(계후산)
- 아들, 우일축왕 이도지아사(右日逐王 伊屠智牙師)
- 복주류약제선우(조도막고)
- 딸, 수복거차(須卜居次)[4] 운(云)
- 딸, 당우거차(當于居次)
5. 미녀와 비극 코드
이런 미녀와 비극 코드(...)는 후대 창작자들을 강하게 사로잡아, 다양한 작품에서 소재로 다루게 되었다.
왕소군이 흉노족에게 시집을 갈 때 고향 생각에 금을 켜자 기러기가 그 소리에 취해 떨어졌다고 하여 낙안(落雁)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과는 좀 다르다. 원래 이 말은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 편에 나온다. 제물론에서는 진헌공의 애첩인 여희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면서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 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물고기가 가라앉고 기러기가 떨어지고 달은 숨고 꽃도 고개를 숙이는 미모'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각각 침어, 낙안, 폐월, 수화에 대응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4대 미녀가 정해진 것이다.[5]
미인도에는 미녀들을 상징하는 아이템이 있는데, 왕소군의 경우는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호복이고, 보통 함께 사용된 것이 비파다.
그래서 만일 말 옆에서 모피옷 비슷한 것을 입고 비파 같은 현악기를 든 미인 그림을 봤다면 90%는 왕소군을 묘사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6]
그 외에 흉노의 추운 날씨(고향에서 보던 꽃과 풀이 없으므로)를 비관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춘래불사춘'이라는 시를 지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이건 사실과 다르다. 이 시는 정확하게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 동방규가 지은 시 '소군원(昭君怨, 왕소군의 원망)'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또한 죽은 뒤 흉노 땅에 묻혔는데, 그 무덤의 풀이 겨울에도 시들지 않아 청총(靑塚)이라 부른다고 한다.
네이멍구 지역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 그녀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확신할 수는 없다.
유명한 시인 이태백과 백거이나 시와는 별 상관 없어 보이는 왕안석, 석숭도 왕소군을 읊은 시를 남기는 등 미인의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아래는 이태백이 남긴 시 2수이다[7]
대만의 개그 만화 "크레이지 스토리"에서 위에서 언급한 형사취수 관련 풍습을 재치 있게 패러디했다.
왕소군이 흉노 땅에 시집가면서 흉노족 시녀들이 "우리 임금님은 세상에서 제일 못생긴 추남"이라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믿고 실망하는데, 웬걸... 실제로 보니 '''준마를 타고 평원을 달리는 잘 생긴 청년왕'''이 흉노족의 선우였던 것. 한족과 흉노족의 미의 기준이 달라서 생긴 해프닝이었다고(....) 그리고 잘 생긴 남편 → 죽고 나니 잘 생긴 아들 → 죽자 잘 생긴 동생 등으로 가면서 역하렘을 했다는 내용으로 형사취수 풍습도 대차게 비틀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원본이 개그만화이니 실제로 믿으면 곤란하다.
반삼국지의 마지막 부분에도 간접적으로 출연한다. 위나라가 망한 후 왕소군의 묘 부근에서 초막을 짓고 야생인간으로 살던 조식이 그곳에서 북방민족의 왕이 된 조창과 재회하는 것이 소설의 끝이다.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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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온라인에서 중국 문명의 보좌관으로 등장한다.
[1] 당연히 모연수가 뭔가 훼방을 놓은 것이지만 정확한 언급은 없다. 추녀로 그렸다는 설도 있고, 눈물점을 찍어서 과부상으로 그렸다는 설도 있다.[2] 다른 이야기로는 부마국이 되려고 공주를 보내 달라고 했으나, 공주가 너무 어린 나머지 춥고 험한 북쪽으로 공주를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렸던 원제가 호한야 선우한테 공주 대신 궁녀를 보내주겠다고 하고 양해를 구한 이야기도 있다.[3] 전우 연지와 호한야 사이에 난 아들로 이름은 조도막고이다.[4] 거차는 흉노 말로 공주를 뜻하며, 수복과 당우는 흉노 귀족의 이름이다.[5] 그리고 이 댓구에 끼지 못한 조비연은 4대 미녀 취급을 받지 못한다.[6] 왜 100%가 아니냐면 채염 문희가 있기 때문이다. 이쪽도 사정이 비슷해서 이미지가 서로 섞인다.[7] 이백의 시는 조각조각으로 떨어져 나오기 때문에, 첫 번째 시의 앞 4연이 위에 언급된 동방규의 소군원에 붙어 나온 것도 있다. 즉 오언율시 2수인지 오언절구 1수인지 헛갈린다. 아래 시까지 줄줄이 이어져서 하나의 시처럼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건 이것대로 헛갈리는 게, 애초에 오언율시니 칠언절구니 하는 정형시 구조가 두보 이후에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즉 아래시는 1+2+3도 있고, 1 2+3도 있고, 1 2 3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