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행밀

 


'''묘호'''
'''태조(太祖)'''
'''시호'''
무충왕(武忠王)→효무왕(孝武王)→무황제(武皇帝)
''''''
양(楊)
''''''
행밀(行密)
''''''
화원(化源)
'''연호'''
천복(天復, 902년~904년)[A]
천우(天祐, 904년~905년)[A]
'''생몰 기간'''
852년 ~ 905년
'''재위 기간'''
902년 ~ 905년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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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당나라 말기의 절도사이자 오대십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군주이다.

2. 생애


여주 합비 출신으로 852년에 태어난 양행밀은 처음에 도적으로 일어났다가 붙잡혔는데 자사였던 정계(鄭棨)가 용모가 비범한 것을 보고 풀어주고는 삭방으로 군역을 보냈다. 군역을 다 하고 돌아와서 결국 또 도적이 되었는데 세력을 규합하여 고향 여주를 점령하자, 당나라 조정이 회유책으로 양행밀을 여주의 자사로 임명하였다.
당시 회남의 실력자는 고병이었다. 고병은 늙어 가면서 차츰 신선술에 의지하게 되었고, 여용지라는 인물의 참소에 빠져 세력이 와해되어 갔다. 결국 부장인 필사탁의 반란으로 실권을 잃고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회남의 난리가 시작되었다. 황소의 잔당으로 채주, 허주를 아우르며 황제를 참칭하고 있던 진종권이 아우 진종형을 보내 회남을 꾀하고자 했으나, 그 역시도 부장인 손유에게 죽임을 당했다. 양행밀은 필사탁에 의해 고병이 죽자 이를 애도하는 등, 나름대로 난리를 수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손유가 이끄는 북방 병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나중에 양행밀이 도망가려 하자 문객이 강북과 강남의 거리 차이를 이용한 지연전술을 건의하였고, 그에 따라 겨우 이길 수 있었다. 이 때 흡수한 잔존 병력이 바로 그의 친위 부대인 흑운도(黑雲都)다. 나중에 주근의 연주까지 손에 넣으니 양행밀은 이때부터 하북 세력들과 비등한 전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뒤 양행밀은 주변 지역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당나라 조정에 의해 892년에 회남 절도사가 되었다. 덕분에 후량을 건국하지 않았던 주전충은 하동과 연의 북쪽 세력과 양행밀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는데, 이 세력의 균형 속에서 양행밀은 902년에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오왕(吳王)으로 책봉될 수 있었다.
나중에 주전충이 조정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소종 등을 시해하고, 연호를 변경하였으나 양행밀은 당나라의 신하라는 입장을 관철하며 기존 연호를 습용하였고, 이러한 기조는 그의 사후에도 유지되었다. 양행밀은 905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장남인 양악이 옹립되어 오왕을 습봉하였다.[1] 양행밀은 양융연이 재위한 시기에 시호가 무충왕이었는데 나중에 효무왕이 되었으며, 양부가 황제로 즉위한 이후에는 태조 무황제로 추존되었다.

3. 기타


양행밀은 당나라의 잔존병과 도적 무리를 모아 만든 일종의 친위군인 흑운도(黑雲都)를 키웠는데, 양행밀은 이들을 동원하여 반대 세력을 물리쳤으나, 그 결과 흑운도의 중심 인물인 서온과 장호가 오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서온은 양행밀의 장남인 양악을 시해하고, 양오의 권신으로 성장하며 찬탈의 밑작업을 준비하다가 죽었으며, 서온 사후 그의 양자였던 이변도 권신으로 성장하여 훗날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남당을 건국하였다.

4. 둘러보기






[A] A B 당소종의 연호를 습용하였다.[1] 정식으로 책봉받은 왕작은 아니다. 이미 주전충이 장악한 조정에서 양악에게 내린 봉작은 홍농군왕이었고 오왕이 아니었다. 군왕과 일자왕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