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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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에드워드 5세
(Edward V)
'''출생'''
1470년 11월 2일
잉글랜드 왕국 미들섹스 웨스트민스터
'''사망'''
1483년 (12세) (추정)
런던탑 블러디 타워 (추정)
'''재위'''
잉글랜드 왕국의 왕
1483년 4월 9일 ~ 1483년 6월 25일
'''아버지'''
에드워드 4세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
'''형제'''
엘리자베스, 메리, 세실리, 마거릿, 리처드, 앤, 조지, 캐서린, 브리짓
1. 개요
2. 즉위 및 폐위
3. 암살
4. 튜더 왕가에 의한 암살
5. 리처드 3세에 의한 암살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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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남으로 아버지가 잠시 네덜란드에서 망명 생활 할 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태어났다.

2. 즉위 및 폐위


1483년 4월 에드워드 4세가 죽자 12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며 숙부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섭정이 되었다. 하지만 실권자는 그의 모친 엘리자베스였으며 이러다 보니 우드빌 가문과 리처드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는데 이 분쟁은 엘리자베스의 남동생 앤서니 우드빌과 에드워드 5세의 이부 형[1] 리처드 그레이를 체포하고 죽이면서 리처드의 승리로 끝났다. 잠깐 설명이 필요하자만 에드워드 4세는 평민출신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했는데 그녀의 미모와 재산을 노리고 한 결혼이었다. 추밀원에서도 이미 결혼했기에 유감 표명은 했으나 왕이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무효까진 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의 옹립공신인 네빌가문은 똥친 작대기 수준으로 팽하고 우드빌의 형제들과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죽은 전남편 소생의 자식들에게 작위와 재산을 퍼주면서 친위세력을 형성했다. 이로 인해 불만을 가진 네빌 가문은 프랑스로 망명하여 에드워드 4세의 동생들 클러렌스 공작과 글로스터 공작(리처드 3세)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다가 클러렌스 공작과 나란히 처형되고, 글로스터 공작은 망하기전에 형에게 이중첩자짓을 해서 살아남게 된다. 단, 리처드 그레이는 우드빌의 차남이었고 그의 형 토마스 그레이는 살아남아 잘 먹고 잘 살았다. 성씨가 어디서 본 듯한 것이라면 맞다. 그는 제인 그레이의 증조부이다.[2]
에드워드 4세는 주색잡기에 빠져 일찍 세상을 뜨게되고 남은 어린 자식들은 위험한 처지에 있었다. 어쨌든 글로스터 공작은 왕의 숙부이기 때문에 섭정이 되어 에드워드 5세의 신병을 확보하고 안전을 이유로(?) 런던 탑에 처소를 마련하고 왕의 동생 요크공까지 불러들인다. 그리고 이야기꾼들을 동원하고 사제들에게 뇌물을 먹여서 런던 시내에 방방곡곡 에드워드 4세의 방탕한 사생활과 에드워드 4세시절 평이 나빴던 첩과 왕에게 아내를 진상한 남편을 처형하며 에드워드 5세의 사생아설을 널리 퍼뜨렸으며,[3] 한편으론 에드워드 4세시절 우드빌 가문에 원한이 많은 귀족들과 연합하여 공공연히 우드빌 가문을 탄핵하고 전 왕비를 쫓아내는데 성공한다.
그 해 6월 26일, 영주들과 평민들이 연 의회에서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을 무효이고 따라서 그의 자식들은 적자가 아니라는 리처드의 주장이 받아들어졌고 리처드는 리처드 3세로 즉위했다. 얼마 뒤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 리처드는 런던 탑에 갇혀 다시는 볼 수 없었다.

3. 암살


1674년 런던 탑을 수리하다가 어린 아이들의 유골이 나왔는데 찰스 2세는 그것이 에드워드 5세(당시 12살)와 요크공작 리처드 형제라고 생각했다. 이후 그 유골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다만 1933년 검사해본 결과 성별이나 연령은 특정되지 않았다. 후에 유골에 대한 재조사를 요청했으나 왕실 측은 거절했다고 한다. 과거에는 리처드 3세가 1483년 8월 자객을 보내 베개로 질식사시켰다고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버킹엄 공작 헨리 스태퍼드나 리처드 3세를 죽이고 왕이 된 헨리 7세의 소행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4. 튜더 왕가에 의한 암살


이 주장은 튜더 왕가의 시조가 되는 헨리 7세요크 왕조의 마지막 왕인 리처드 3세를 가문 통째로 제거하기 위해, '적통인 조카 에드워드 5세를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한 폐륜아'라는 누명을 씌워 민심을 이반시킨 후 리처드 3세를 전장으로 끌어내어 죽였다는 설을 기반으로 한다.
영국 레스터 대학에 의하면 리처드 3세가 사망한 1485년 이후에도 런던탑에서 에드워드 5세 형제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존재한다고 한다. 때문에 에드워드 5세를 이용해 리처드 3세를 제거한 후, 왕위에 올라 튜더 왕조를 개창한 헨리 7세가 요크 왕가의 마지막 계승자인 에드워드 5세를 암살했을 가능성을 레스터 대학 측에선 제기한다.
사실 이 가설은 리처드 3세가 뛰어난 행정통치력을 지닌 유능한 사람이었던 사실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토록 유능한 군주가 '찬탈자'라는 정통성의 약점을 물고 늘어진 정적에게 극적으로 몰락해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음모론'에 가까운 설이다.

5. 리처드 3세에 의한 암살


지배적인 통설은 리처드 3세가 두 형제를 죽인게 맞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4세와 요크 공작 리처드를 런던탑에 안전(?)을 이유로 감금한 것도 리처드 3세이고 리처드 3세의 전사 이후 헨리 7세의 경우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이자 리처드 3세의 둘째 형인 클러랜스 공작의 아들 워릭 백작도 즉위 10여년간 감금했다가 반란에 가담하자 죽였기 때문에[4] 리처드의 범행으로 보는게 타당하다. 사실 헨리 7세 시절 에드워드 4세와 리처드 3세의 조카 워릭 백작, 리처드 3세가 유일한 아들이 죽고 왕위 계승자로 지명한 링컨백작 존 드 라 폴[5]을 내세운 반란들은 물론, 에드워드 4세의 차남 요크 공작이 살아있음을 주장하며 요크 공작을 사칭한 반란들이 잦았지만 에드워드 5세 타령하며 일어난 반란은 없었다. 그러니깐 에드워드 5세가 숙부 손에 죽은건 이미 그 시대에 죄다 알고 있었다. 그나마 가짜 요크 백작도 잡혀서 죽이지 않고 상당기간 런던에 조리돌림하며 얼굴을 인증시켰기 때문에 형과 같이 살해 당한걸로 본다. 그리고 리처드 3세 시기에 이미 에드워드와 요크 공작 리처드의 누나 요크의 엘리자베스(헨리 7세의 왕비)도 리처드 3세의 강압 때문에 동생을 살해한 범인은 저주했으나 왕은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했기 때문에 최소한 리처드 3세 시기에 죽은건 맞다.
어찌 되었든 어린 나이에 정치분쟁에 휘말려 살해당한 것은 분명한 것으로 여겨지기에, 후세 사람들로부터 많은 동정을 받았다. 또한 리처드 3세가 죽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튜더 왕조헨리 7세요크 왕조의 마지막 계승자인 에드워드 5세를 살려두지 않았을 게 뻔하기에, 어른들의 권력욕 사이에서 어떻게든 죽임을 당했을 어린 두 왕자에 대한 세간의 안타까움은 더해간다.
후대에 그려진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인 요크 공작의 죽음을 다룬 그림들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이런 그림들은 대체로 정말 사악하고 우악스러운 인상을 한 리처드 3세의 수하들이 횃불과 배게를 들고 이들을 질식사시키려 다가오는 가운데,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은 아무것도 모른채 천사처럼 곤히 잠들어 있는 광경을 그리고 있다.

6. 관련 문서



[1] 엘리자베스가 에드워드 4세와 결혼하기 전에 첫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2] 이 가문은 1976년 남자 대가 끊길 때까지 백작을 해먹었다.[3] 이런 여론전은 후대 왕들이 많이 따라 배웠다고...[4] 그 이유는 워릭 백작의 이름으로 가짜들을 내세워 반란이 일어나자 진짜는 여기있다는 걸 증명하려고...[5] 리처드 3세의 누이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