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룩셈부르크

 



<colcolor=#ffc224><colbgcolor=#ff0000> '''이름'''
Rosa Luxembrug[1] (영어, 독일어)
Róża Luksemburg (폴란드어)
로자 룩셈부르크 (한국어)
'''본명'''
Rozalia Luxenburg (로잘리아 룩센부르크)
'''출생'''
1871년 3월 5일, 러시아 제국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 자모시치 (현 폴란드 루벨스키에 주 자모시치)
'''사망'''
1919년 1월 15일, 독일국 베를린
'''국적'''
독일
'''학력'''
취리히 대학교
'''소속 정당'''

'''직업'''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운동가
'''종교'''
무종교(무신론)
1. 개요
2. 생애와 저작
3. 죽음
3.1. 공산당의 창당
3.2. 준비되지 않은 혁명
3.3. 높이 나는 독수리의 최후
3.4. 사망 배경에 얽힌 독일 사회주의사
4. 후일담
5. 매체
5.1. 관련 서적
6.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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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수리는 때때로 닭보다 낮게 날 수는 있지만 닭은 결코 독수리처럼 높이 비상할 수는 없다. 이 모든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독수리였으며 독수리로 남을 것이다.

블라디미르 레닌

결과적으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특한 정치적ㆍ이론적 관점들의 표현들은 사문화되었고, 그는 혁명의 성지를 순례하는 폴란드독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단지 말뿐인 찬사 속에서 기억되고 있다. 혁명 독재를 두고 행했던 그의 비판은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가서나 주목받았다. 물론 대전 이후 그와 같은 비판이 유행하지만, 그것은 호환성 있는 자극제로서라기보다는 역사적 골동품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그의 사상에 대한 어떤 관심들은 이른바 '신좌파'가 레닌의 당 이론을 거부하고 수정주의를 공격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칠 줄 모르는 혁명적 잠재력에 계속 의존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대안적 모델을 모색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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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셰크 코와코프스키,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2권

폴란드 출생의 독일의 공산주의 혁명가 겸 사상가, 정치가, 경제학자.
1898년 제2차 인터내셔널에 참가해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독일 사민당의 핵심 이데올로그였으나 개량적이고 '''친전''', 관료적으로 변한 독일 사민당에 반대해서 스파르타쿠스단을 창설, 독일 혁명 직후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한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가고 우익 준군사 조직(자유군단)에 의해서 살해당한다.

2. 생애와 저작


그녀는 1871년 제정 러시아 통치 하의 폴란드 자모슈치의 유복하고 교양 있는 유대인 가정에서 로잘리아 룩센부르크(Rozalia Luxenburg)[2]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병을 얻어서 그때부터 다리 길이가 서로 짝짝이로 달라져(혹은 엉덩이 통증으로) 절름발이가 되었다. 이후 그녀의 가족은 바르샤바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는 동유럽 유대인스러운 세계 시민주의에 깊게 영향을 받게 되며, 이는 그녀가 폴란드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이탈리아어6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후 그는 그녀의 나이 15살에 유대인 혁명 서클과 폴란드 프롤레타리아당에 가입해 총파업 주도 등의 반정부 활동을 벌였으며, 제정의 탄압을 받아 스위스망명하게 된다.
망명 후 스위스 취리히 대학 철학부에 입학했다. 취리히 대학은 그녀가 유대인이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하지 않았던 곳이다. 이듬해 그녀는 법학부로 전과해 국민 경제학과 공법학 등을 전공하면서 경제학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공부한다. 이외에 역사와 정치학 등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의 연인이자 동지가 될 레오 요기헤스를 만났고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897년 그녀는 이후 폴란드의 산업 발전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898년, 취리히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독일 지인의 아들 '구스타프 뤼베크'와 위장 결혼하여 독일 시민권을 취득한 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1898년부터 제2차 인터내셔널에 참가하고 있던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한다. 이 독일 사회민주당은 현재 SPD까지 맥이 이어지는 동일한 정당[3]이다. 이후 사민당의 좌파 노선에서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떨쳤다. 특히나 그녀는 사민당을 이끌어 가던 인물인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과 사상적으로 대립했었다. 당시 로자는 베른슈타인의 개혁주의적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책 한 권을 집필했는데, 그게 바로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다. 로자는 그 책에서 베른슈타인 계파의 개혁주의적 사상을 일체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추구했던 로자 입장에선 어디까지나 개량주의일 뿐인 그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1905년 러시아 피의 일요일 사건에 참여하기 위해 바르샤바로 돌아가 폴란드 사민당을 창당하고 폴란드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게 되는데, 이 당시 계급 투쟁보다는 반러시아 운동과 폴란드 독립을 먼저 주장하던 폴란드 공산주의자들과 충돌하게 된다. 반국민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였던 그녀는 민족주의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경계하였는데, 그녀는 민족주의가 민족이라는 거창한 미명하에 계급투쟁을 방해, 억압하거나 민족 간 또는 민족 국가 간의 이기주의를 부추겨 결국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우려는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현실화된다. 폴란드 독립운동보다 계급 투쟁을 우선시한 그녀는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러시아 차르의 첩자라는 비난을 듣기도 하였으며, 이때 그녀는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는 등, 본격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수감에서 풀려난 그녀는 이후 베를린으로 돌아와 사민당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1907~1914) '자본 축적론'을 집필하기도 한다. 그녀의 독자적 활동은 1914년에 더욱 본격화되는데, 1914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 연설에서 군국주의 비판과 당시 독일 황제이던 빌헬름 2세를 비판하였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1916년 출소 후 그녀는 그녀가 우려하던 민족주의와 수정주의 두 가지 모두가 닥쳐온 것을 실감하게 되는데, 계급 투쟁을 뒤로한 채 제국주의 전쟁에 동조하고 있는 사민당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이후 전쟁 공채 집모를 찬성하기로 결의한 사민당에 반대하며 독일 사민당을 떠나 카를 리프크네히트, 클라라 체트킨 등과 함께 인터내셔널단(Die Internationale)을 결성하고, 로마 시대 노예 검투사의 반란을 일으켰던 스파르타쿠스(Spartacus)의 이름을 따서 스파르타쿠스단으로 개명한다. 스파르타쿠스단은 혁명을 통해서 전쟁을 끝내고 프롤레타리아 정부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1916년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어 또 다시 2년 반 동안 투옥된다. 1917년 2월과 10월에 발생한 두 차례의 러시아 혁명을 감옥에서 맞은 그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환영하면서도,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의 독재화를 우려했다. 1918년에 감옥에서 집필한 "러시아 혁명"(사후 1922년 출판)에서는 레닌과 트로츠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볼셰비키의 권위주의적 독재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억압, 민족주의적 태도 등을 비판하고, 혁명이 관료주의화되고, 부르주아적 독재로 귀착될 것에 대해 경고하였다.
그녀의 저작으론 마르크스자본론(Das Kapital)에 대한 해설도 있다. 그가 주장한 대표적인 이론으로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혁명론이다. 이는 1905년 러시아의 소비에트 운동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혁명에서 '''대중들의 자발성'''을 옹호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녀는 전위당을 통한 혁명을 주장하던 블라디미르 레닌과 정치적 입장이 갈린다. 또 동시에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의회주의, 즉 사민주의를 주장했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등의 사민당 주류와도 의견이 갈린다. 베른슈타인이 정통 마르크스주의 대신 영국의 페이비언주의[4]에 영향을 받아 수정주의적 입장을 견지했을 때 그녀는 베른슈타인을 가리켜 "영국인의 안경을 끼고 독일을 보려 한다."고 비판했다. 베른슈타인은 이러한 카를 카우츠키나 로자와의 공식 논쟁에서는 패배했지만 당내 지지는 더욱 높아졌다.
그렇다보니 그녀의 말 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이 바로 이 대목이다.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독재를 행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라는 것은 노동자의 자기 해방이 아니면 안 된다. 누구도 당신을 위해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사람은 없다."'''
때가 때인지라 독일에 망명했었던 블라디미르 레닌과는 절친한 동지였다고 하는 듯. 특히 사민당이나 멘셰비키에의 비판에 대해서는 말이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 제헌 의회를 구성하는 총선에서 레닌의 볼셰비키 당이 패배하자 '''의회를 무단으로 해체'''한 것에 대해서 맹렬하게 비판했다. 평의회에 기초를 둔 대중들의 자발적 조직에서 발원한 러시아 혁명에서, 의회의 해체는 대중들의 참여를 배제하는 기제로 작동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그렇게 되었다. 일부 트로츠키주의나 레닌주의자들의 강변과 달리, 러시아의 이러한 관료 독재 체제는 스탈린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미국 와이오밍 주 다음으로 유럽에서조차 선진적이었던 소련의 양성 보통 선거권도 자유 선거가 사라지면서 무의미해졌다. 게다가 이런 막장 사태는 이는 1989년 자유 경선 방식으로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이어진다. 이런 점에서 사회개량주의 중 하나였던 사회민주주의를 반대하면서 레닌주의, 스탈린주의에 반감을 가진 좌파들 상당수가 로자를 지지한다. 물론 실제적으로 의미가 있는 노선이라기보다는 로망이나 가치관을 존경한다는 의미에 가깝지만, 실천적 측면에서든 이론적 측면에서든 사민주의와 레닌-스탈린주의를 넘어선 일종의 '제3의 길'을 찾으려는 좌파도 엄연히 존재한다. 존재감이 없어서 그렇지.[5]

3. 죽음



3.1. 공산당의 창당


1918년 독일 11월 혁명으로 감옥에서 나온 그녀는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의 기관지인 "적기(Die Rote Fahne)"를 창간하고 사민당을 수정주의라고 격렬히 공격한다. 그해 12월 스파르타쿠스단과 다른 사회주의 세력을 규합하여 1919년 1월 1일 독일공산당을 창당하였다.
당시 로자의 노선은 당장 혁명을 일으키려 하지는 않았다. 독일 혁명당시 3분의 2 이상의 노동자/병사 평의회들이 아직 사민당의 지지세력 안에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단과 로자가 사민당의 총선 제안을 반대하려 하자 대부분의 평의회들은 그 주장에 반대했다. 스스로 무장을 내려놓고 사민당과 총선을 준비하려는 평의회들을 보고 로자는 '''독일 프롤레타리아는 스스로 정치적 자살을 선택했다'''라고 한탄했다. 그러나 로자는 아직 독일 내 공산주의 세력에게 희망이 있다고 보았다. 사민당은 경제적, 정치적 실패와 왕당파들에 대한 타협으로 인해 지지세를 잃고 있었고, 공산당을 사민당의 진보적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로자는 기왕 결의된 이번 선거에서 사민당에 대한 대안세력으로써의 정당을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로자와 스파르타쿠스단, 공산주의 청년조직들은 12월 23일 당 창립 준비 대회에 모였고. 그녀는 거기서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들의 튼튼한 요새인 의회선거에 뛰어들어 폭풍처럼 그 요새로 들이쳐야합니다. 우리는 모든 이슈를 혁명을 위해 사용해야 하며 선거 또한 우리를 튼튼하게 만들 방법입니다.

그녀는 혁명적 사회주의자였으나 대중적 반란(봉기)를 만들어낼 토대가 신생 공산당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직 노동자/병사 평의회들이 건재하기에 다가올 사민당의 실책과 경제위기 속에서 독일 공산당이 전진할 수 있을것이라 본 것이다. 그 기틀을 다지기 위해 선거 여론전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만드는것이 로자의 당시 주장이었다.
그러나 12월 23일 창립대회에 참가한 수백여명의 대의원들은 대부분 스파르타쿠스단이나 급진좌파 청년조직을 통해 들어와 겨우 1년도 안 되어 큰 영향을 미치고있던 레닌의 혁명에 크게 경도되어 있었다. 대의원 대부분은 로자의 지지자였지만 적극적 선거 참가에는 반대입장을 내었고 로자 역시 큰 반대없이 공산당의 다음 투쟁노선에 찬성표를 던졌다. 실제로 그녀는 베를린에서 당을 지도하며 혁명에 지도부로써 활동하였다. 그렇다고 공산당이 선거를 아주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바로 다가오는 1월 19일이 총선일이었고, 여러 여론조사에서 신생 공산당은 유의미한 지지를 얻으며 의석을 얻을것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6]

3.2. 준비되지 않은 혁명


베를린은 범좌파의 지지세가 강한 곳이었고 그중에서도 공산당에 많이 동조하는곳이었다. 베를린 경찰총국의 총장또한 독립사민당[7]과 공산당의 지지자였기에 활동또한 편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어떠한 절차도 거치지 않고 베를린 경찰총장과 시정 내의 노조원들을 일괄해고했으며, 해고 통지서도 해고자 본인이 아닌 아예 기업노동조합에 보내버렸다.
당연하게도 총장과 공무원들의 복직을 요구하며 기업노동조합은 베를린에서 총파업을 강행했으며 사민당은 이때를 노리고 바로 준비되어있던 자유군단을 풀어 파업을 잔인하게 억압했다. 수십만의 노동자들이 동조파업을 시작하고 기업노동조합의 지도부는 공산당, 독립사민당, 사민당 좌파에게 파업을 지지할 반란(봉기)를 일으켜주기를 요청했다. 공산당 지지세의 노동자/병사 평의회들이 무장하며 반란(봉기)를 시작하면서 1월 사건의 막이 올랐다.
그러나 이미 사민당은 대부분의 평의회들과 입을 맞추고 사건을 지지하지 말 것을 당부해놓은 상태였으며, 해고자 복직과 사민당 정권 비판 이외의 강력한 대중적 요구가 부재한 상태에서 혁명은 지지부진했다. 한때 백만이 넘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고 스파르타쿠스단 조직이 베를린 시내를 장악했지만, 공산당은 아직 대중적 지반이 약한 상태였기에 결과는 이미 자명했다.

3.3. 높이 나는 독수리의 최후


사건(1월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해방구"들이 점차 점령되면서 결국 수천의 스파르타쿠스단 조직이 베를린의 신문사에 갖힌 꼴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로자와 칼 리프크네히트에게는 공산당과 수십만 당원, 지지자들이 있었고 사민당 또한 공산당 지도부를 제외하고 잠재적 지지자가 될 수 있는 반란(봉기)자들의 체포에 막 열을 올리지 않은 상태였기에[8] 공산당원들은 로자에게 탈출을 종용했다.
로자는 탈출을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잔당들을 인솔하다가 체포당하게 된다. 사민당도 로자가 성녀가 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체포 후 감옥으로 이감할 것을 명했지만, 사민당 지휘 하의 자유군단은 지도부와 생각이 달랐다. 어차피 사민당을 증오하는 우익 군인들로 이루어졌지만 공산혁명만 막을 이유로 잠시 동맹했을 뿐인 자유군단이 사민당의 지도를 들을리가 없었다. 로자는 자유군단에게 체포되어 감옥으로 가는 동안 의도적으로 길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다가 개머리판으로 얻어 맞고,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이여, 단결하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살해되었다. 그리고 스파르타쿠스 사건의 또 다른 주역 중 한 명이자 로자의 동지인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또한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 점은 훗날까지도 좌파 진영 독일 사민당독일공산당의 협력을 가로막는 원인이었으며 독일공산당은 코민테른 성립 후, 스탈린의 지령 아래 사회주의 파시스트와 부르주아 의회제도 공화국을 타도한다는 명분아래 지속적으로 여러번 폭동을 일으키며, 나치당과 함께 바이마르 공화국 근간을 흔드는 원인이 되었다. 스파르타쿠스단의 생존자를 중심으로 성장한 독일공산당독일 사민당과 지속적으로 반목하며, 결국 나치에게 정권을 내줄 때까지 갈등하며 반목하는 원인이 된다. 심지어는 오늘날까지도 좌파 일각에서 '개혁주의'와 타협할 수 없는 근거로 들먹여질 정도이다. 향년 마흔 아홉의 나이였다.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919년 1월 15일 베를린의 밤, 에덴호텔 중앙홀로 군인들은 한 유태인 여자를 질질 끌고 나왔다. 그를 둘러싼 자유군단(Freikorps) 소속 군인들은 그에게 야유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저거 뭐야. 그 늙은 창녀잖아!”

한 군인이 그의 머리와 관자놀이를 개머리판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패전 후에 그들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카이저의 퇴진과 군대의 해산을 요구하는 선동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밀리에 제거하기 위해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의 입과 코에서 피덩어리가 물컹물컹 쏟아져 내렸다. 그의 시신은 란트베어 운하의 다리로 옮겨졌고 물 속으로 던져졌다.

다만 이와 다르게 자유군단이 그녀를 사로잡은 뒤 살해한 다음 감옥으로 이송 중 성난 군중에게 린치되었다고 발표했다는 말도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다룬 영화와 다큐멘터리 양쪽 모두에서 이렇게 묘사되었다.
당시에는 시체도 찾지 못했다.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도 '붉은 로자도 사라졌네 / 그의 몸이 쉬는 곳조차 알 수 없으니 /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말했고 / 그 때문에 부자들이 그를 처형했다네'라고 시를 쓴 바가 있다.
운하에 던져진 그의 시신은 5월 31일 떠올랐으며, 이후 그의 혁명동지들과 함께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나치 시기에 훼손된 적이 있지만, 이후로도 1월이면 꾸준히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또한 란트베어 운하의, 그가 물 속으로 던져진 곳에는 추모조형물이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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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조형물 - 란트베어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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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묘지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

3.4. 사망 배경에 얽힌 독일 사회주의사


독일 사민당은 이미 독일제국 시기를 거치면서 유력한 정당으로서 입지를 굳혀나갔고, 피를 거의 흘리지 않은 독일 혁명으로 카이저의 제국 정부의 자리를 사실상 군부의 동의속에 인수했다. 즉 독일 사민당은 주류세력 중 하나였다[9].
따라서 독일 사민당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달리 이미 장악한 정권을 가지고 혁명을 일으키는 산통을 깰 생각이 없었다. 인터내셔널을 팔아먹는 정당이 국가를 위한 전쟁을 지지하는 모순을 보였는데, 이런 분위기가 전세계적인 사민주의 정당의 풍토였다. 이런 상황에서 블라디미르 레닌볼셰비키가 그나마 전쟁을 반대하고 세계혁명을 지향한다는 것을 이유로 러시아 내에서조차 소수파였음에도 상당한 명분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로자는 반레닌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미르 레닌의 뒤를 이어 혁명을 시도하려고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패로 끝났지만 말이다. 결국 이들의 바이마르 공화국은 헌법적으로는 민주적이었지만 혁명 없는 경제적 평등와 사회적 안정 그 어느것도 성취하진 못했고, 기어이는 나치당히틀러제3제국을 열어버리고 만다. 그렇기에 독일 좌파는 분화하여 바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 이후 4일 뒤 치러진 제국 의회 총선에서 독일 공산당이 엄청난 성장세를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비판자들 중에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혁명을 일으키려는 세력들이 오히려 히틀러의 집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치당과 같은 과격한 정치집단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인정을 받은 것은 바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려는 집단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로자의 혁명 역시 실현 가능성이 낮았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스파르타쿠스단에 기반한 독일 공산당조차도 로자의 노선보다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카를 카우츠키(1854~1938)의 노선을 따랐다. 카우츠키와 로자는 자신들보다 최소 1~2세대 전에 활동했던 마르크스의 예상과 달라진 현실, 즉 자본주의의 역동성과 변화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성이 있었는데, 둘은 자본의 필연적 탐욕을 강조했으나 원인은 달라서 카우츠키는 과소소비론[10], 룩셈부르크는 자본축적론[11]을 주장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카우츠키는 혁명과 사회주의 도래의 '''필연성'''을 강조한 반면 룩셈부르크는 혁명과 민중의 '''자발성'''을 강조했다. 문제는 이 카우츠키의 노선을 따른 공산당은 '''(정권을 잡을 수는 있어도) 결국 나치도 자연히 망할거라고 믿고''' 독일 사민당과 반목하는 한편, 혁명을 시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즉, 로자의 노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차라리 그의 노선과 주장은 저런 수직적, '과학적' 사회주의 혁명론이 아닌 노동자, 농민 자체의 자발성, 자치성을 강조하는 아나키즘이나 자유주의 좌파 운동이 강했던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서 오히려 더 이 각광을 받았을 정도다.
그리고 정작 카우츠키는 여러 현실적 이유로 인해 공산당에서 독일 사민당으로 돌아갔으며, 개량주의 강령 작업을 주도하는 등 관료, 정당인으로서 살다 은퇴후 여유로운 말년을 보냈으나 결국 1934년의 나치 집권을 보고 데꿀멍하고 전쟁 이전에 사망했다. 그는 마르크스가 죽을 때 이미 20대 후반으로 나이차가 꽤 나는 엥겔스와 절친이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60을 넘겨 1차 대전과 전간기를 거쳐 나치의 집권과 몰려오는 전운까지 모두 보고 죽었다. 여담이지만 그와 17살 차이나는 로자가 그만큼 살았으면 '''1955년'''까지 생존했을 것이다.
전후 동독에서 그를 기념하여 로자의 우표를 발행하고 로자의 동상을 건립해 의장대가 지키게 했다. 베를린 U반에도 로자의 이름을 붙인 로자 룩셈부르크 플라츠역이 있었을 정도.[12] 그가 반레닌주의자였으나 의외로 친소국가인 동독이 기념한다는게 특이한 점이다.[13]
한편 고향인 폴란드에서는 그녀가 폴란드 독립보다는 세계혁명을 주장한 점 때문에 평가가 좋지 않다고 한다.#

4. 후일담


  • 같은 혁명가인 남편 레오 요기헤스와의 로맨스로도 유명하다. 로자가 더 사랑하는 경우였는데, 정보다는 혁명에 정신을 쏟은 남편과 그래도 나름대로 결혼 생활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로자의 심리가 드러나는 편지를 읽으면 로자가 심히 안쓰러워진다는 평이 많다. 레오는 로자의 죽음의 진실을 밝힌 뒤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인다.
  • 이상의 시에서 가끔 언급되는 인명이기도 하다.
  • 그가 살해된 뒤 5개월 뒤에 시신 1구를 건져 매장했지만 2차 세계대전 도중 묘지가 파괴되어 시신이 사라진 뒤...2009년 5월에 그의 시신으로 추정되는 머리와 손발이 없는 시신이 한 법의학 연구실의 지하에서 90년 만에 발견되었다. 당시에는 두개골 수집이 인기라서 머리가 없고, 시체를 유기 할 때 돌을 묶었기에 손발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링크 이 이야기는 기존의 무덤이 가짜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아직도 연구중인 것으로 보인다.
  • 여성이자, 과격파 공산주의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지만, 유명한 서프러제트 운동에는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당시 서프러제트 운동이 부르주아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남성 특권’에 맞선 투쟁에서는 사자처럼 행동하는 부르주아 여성들은 대부분 참정권을 얻고 나면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반동 진영의 유순한 양이 될 것이다.”[14]라는 말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또한 여성해방론,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원조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클라라 체트킨과 가까이 지내며 여성의 날을 제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15]
  • 군사독재 시절 철통같은 금서, 검열 풍토에서도 사회주의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평전이 검열을 통과한적이 상당했다고 한다. 국가 이름인 룩셈부르크로 착각했기 때문. 정작 우파적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의 책은 맑스로 착각돼서 검열되는 경우가 있었다고.

5. 매체


1986년에 로자 룩셈부르크를 다룬 영화가 나왔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자유란 이름으로 2010년 12월 12일 ZDF에서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바로 문서 처음에 있는 동영상이 그것이다.

5.1. 관련 서적


  •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
노동자 연대 측 출판사인 책갈피에서 영국의 트로츠키주의자 토니 클리프가 쓴 책을 번역한 책이다. 말그대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을 개략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그 어려운 '자본의 축적'도 이 책에서 개략적으로 다루고 있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반대하며 혁명을 준비했던 로자 룩셈부르크를 알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다만 노동자 연대의 관점에서 서술된 책이다 보니 소련을 사회주의로 규정하지 않고,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한다. 입문 차원에서 읽어볼 만 하다.
  • 《레드 로자》
로자 룩셈부르크의 일생을 개략적으로 다룬 그래픽 노블. 이것도 입문용으로 좋다.
  • 《정치경제학 입문》
로자 룩셈부르크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입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적은 글. 말 그대로 '입문'이기에 사회주의 고전들 중에서는 매우 읽기 쉬운 편이다. 로자 특유의 '자본축적론'에 대해서도 간략히 지나가듯이 나온다.
  • 《자본의 축적》
  •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한국어 판이 있으며 책세상 고전시리즈로 소개되었다.
  •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 《러시아 혁명》

6. 관련 항목


[1] 룩셈부르크 국명의 유래가 된 룩셈부르크 가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룩셈부르크의 독일어 철자는 Luxembrug가 맞지만 영어 철자는 Luxemb'''o'''rug로 조금 다르다.[2] 이름은 장미라는 뜻인데, 여담으로 빨간 장미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상징이다.[3] 현재는 룩셈부르크가 살아 있던 시대보다는 우경화되었다.[4] 영국에서 발원한 점진적 사회주의[5] 로자 룩셈부르크가 주창한 이데올로기는 훗날 룩셈부르크주의(보수공산주의)라 불리게 되는데 이는 좌파공산주의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존재감이 없다는 표현이 적절한 게 좌파공산주의 자체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소수다.[6] 사건 이후에도 8석을 얻으며 시작한 공산당은 바이마르 정권 내내 50~100석 정도의 의석을 유지했다.[7] 반전주의자들이 세웠던 사민당 분파[8] 사건에 참가했던 요한네스, 클라라 체트킨등의 공산당 지도자들은 이후 체포되지 않고 겨우 4일뒤에 있던 총선에서 당선되어 바이마르공화국 국회의원을 역임했을 정도였다.[9] 우파는 기존 세력들과 다를바도 없었고, 자유군단 등 실제 무력 세력조차 가지고 있었다(이들 상당수는 장교 등 군 출신이었다.).[10] 즉, 필연적인 잉여에 따른 세계화, 자본화의 진행.[11] 자본의 필연적 축적과 자본주의의 유지를 위한 필연적인 세계화와 제국주의의 진행.[12] 독일 통일 이후 동독 정치인들의 이름이 붙은 역명들을 바꾸었지만 이 역은 역명이 유지되고 있다. 자세한 역명 변경의 역사는 해당 항목을 참조.[13] 물론 룩셈부르크가 그것을 좋아했을 리가 없다. 그는 계속해서 레닌주의의 권위주의적인 자세를 비판했다.[14] '여성 참정권과 계급투쟁' 1912년 5월 12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제2차 사회민주여성대회에서 한 연설, Selected Political Writings, Rosa Luxemburg. Edited and introduced by Dick Howard. Monthly Review Press, 1971.[15] 여담이지만 콜론타이와 체트킨, 룩셈부르크 모두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비판적이었지만 그 중에서 룩셈부르크가 가장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비판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