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 불가침조약

 


영어: Nazi German-Soviet Non-Aggression Treaty
독일어: Deutsch-Sowjetische Nichtangriffspakt
러시아어: Договор о ненападении между Германией и Советским Союзо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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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신혼 생활은 얼마나 오래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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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렘린에서 만나 악수하는 이오시프 스탈린요아힘 폰리벤트로프

'''이데올로기상으로 불구대천의 원수인 두 나라'''가 은밀한 회의에 열중해서 터무니없는 현실 정치(Realpolitik) 속에서 동유럽 국가들을 조각내는 것, 그것은 기괴한 일이었다. (···중략···) 이데올로기는 스탈린에게 대수롭지 않았다. 소련 국경 저 먼 쪽에서는 국가 이성(raison d'etat)이 더 우세해졌다. 그는 파시스트 독일과 조약을 맺을 수 있는 만큼 손쉽게 제국주의 서구와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소련이 보기에 유럽의 반동 국가들은 모두 사회주의라는 쇠바퀴에 깔려 종국에는 모두 가루가 될 것이었다.''' (···중략···) 무엇보다도 독일은 소련이 1939년에 그저 꿈에서나 바랄 수 있던 것을 내놓았다. 그것은 '''유럽에서 옛 차르 제국을 재건할 가능성'''이었다. 그 가능성이 독일의 동의를 받아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 제공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작은 완충 국가들의 네트워크 대신에 독일과 소련이 국경을 맞대는 상황을 가져오리라는 사실은 감내할 만했다.

- 리처드 오버리 저, 류한수 역,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 p. 77-79

1. 개요
2. 독일-소련 관계의 파국
3. 1938년 위기와 소련
4. 리트비노프 구상
5. 1939년 위기와 서방-소련의 접촉
5.1. 소련과 영불의 동상이몽
5.2. 집단안보를 거부하는 폴란드 제2공화국
5.3. 소련의 입장
5.4. 영국의 입장
6. 소련의 정책 변화
7. 독일의 접근
8. 조약 체결
9. 결과
10. 관련 어록


1. 개요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소련이 체결한 불가침조약. 서명자인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리벤트로프의 이름을 따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이라고도 한다.
서유럽 국가들이 뮌헨 협정으로 히틀러를 봐주는 실수를 저질렀다면,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히틀러가 이성적 판단과 거리가 먼 광인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 조약으로도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피할 수 없었다. 오히려 독소 불가침조약은 2차대전 이전까지 했던 각종 외교 협정과 정 반대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을 일으킨 직접적인 트리거였다.'''
골때리게도 독소 불가침조약의 협정문 원본은 소실되어 버렸다. 나치 독일 보유분은 내용을 공개한 서유럽 연합국이 파기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소련 보유분은 행방이 여전히 묘연하다. 서명문이 발견되면 세계기록유산에 무조건 오를 후보 중 하나라고 꼽히는 물건[1]이다. 좋은 의미가 아니라 제2차 세계 대전을 이해할 결정적인 문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은 또다른 조약 내용이 있을 수도 있다.

2. 독일-소련 관계의 파국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만 해도 독일과 소련은 '''매우 사이좋은 우방국'''이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서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군비를 제한받음과 동시에 국제 연맹 가입을 거부당하고 있었고,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유로 역시 국제 사회에서 왕따당하는 처지였다. 비록 양국이 1차 대전 때 피터지도록 싸웠다고는 하나, 소련에게 있어 그것은 러시아 제국의 일이었고, 독일 역시 독일 제국의 문제였다.
때문에 독소 양국은 1922년 라팔로 조약이라는 우호 조약[2]을 체결하여 독일은 소련에게 여러 선진 군사 기술을 제공하고, 소련은 군비 제한이 많은 독일에게 비밀리에 신기술 연구 및 군사 훈련을 할 수 있는 시설을 자국 영토 내에 제공하는 등 서로 편의를 많이 봐주었다. 아울러 양국 모두 폴란드라는 가상 적국[3]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기도 했다. 독일은 국경 인정 문제로, 소련은 1920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이후로 폴란드와 사이가 안 좋았다.
그러나 이런 양국 관계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수상에 취임하면서 깨져 버렸다. 그는 시종일관 "때려잡자 공산당!"을 외쳤으며 자연스레 소련과의 관계는 나빠졌다. 그리고 히틀러는 전체주의를 통해 민주정체도 부정했기 때문에, 자신의 체제가 우월하다고 전 세계적으로 선전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스탈린도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체제 경쟁을 했던 것은 똑같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독일-소련 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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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소련 관계를 나타내는 1937 파리 엑스포 때의 사진. '''1941년 독소전쟁리허설'''이라고 불리는 사진이다. 왼쪽이 나치 독일의 독일 국가관, 오른쪽이 소련의 소련 국가관이다. 소련은 활동적인 노동자를, 독일은 세계를 내려다보는 독수리를 형상화했다. 바로 이 당시 두 열강은 스페인 내전이란 전장에서 대리전을 한창 치루는 중이었다. 중간에 위태로운듯이 낀 에펠탑이 당시 전세계적으로 극우, 극좌 사이에서 위태롭던, 역사학자 마크 마조워의 말을 빌리자면 자유 민주주의 위기를 보여주는듯 하다.

3. 1938년 위기와 소련


1938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수데텐란트 할양을 요구하며 유럽에 전쟁이 터질 위기가 도래하자 소련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 군사 동맹을 체결한 상태였으며, 유사시 동맹국의 안전 보장을 위해 참전하여 독일과 싸워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하지 않아, 폴란드 혹은 루마니아의 영토를 통과해야 했다. 이 가운데 폴란드는 죽으면 죽었지 소련군에게 영토 통과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했기 때문에, 루마니아로부터 영토 통과 허용을 약속받았다.
이때 영국, 프랑스는 소련과 처음으로 접촉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을 크게 신뢰하지 않아 이들이 선택한 건 독일과의 화평이었고, 그 결과가 바로 뮌헨 협정, 일명 '''서구의 배신'''이었다.

4. 리트비노프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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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당시 폴란드 외무부 장관 유제프 베크(좌)와 대담하는 막심 리트비노프(우)
소련은 체코위기 당시 체코와 동맹을 맺고 있었고, 소련군은 유사시 루마니아를 통과하여 체코에 출동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정작 서유럽이 체코를 포기하고 독일에 할양하자 크게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히틀러는 집권 당시부터 소련을 비난했고, 소련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독일이 곧 소련과의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위기감이 소련 지도부를 덮쳤다.
소련 외교부 장관인 막심 리트비노프는 체코위기 당시부터 영국-프랑스와 동맹하여 독일을 포위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영불이 독일에게 양보한 뮌헨 협정으로 이는 물거품이 되었으나, 독일이 뮌헨 협정 이후 폴란드에 계속 압력을 가하자 소련은 다시 영불과의 집단안보체제를 구상하게 되었다. 독일이 소련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폴란드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군이 바로 소련으로 쇄도할 것이라는 것이 바로 소련 지도부의 판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트비노프는 폴란드의 안보가 곧 소련의 안보라고 판단했다. 폴란드를 독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소련 혼자서는 버겁고, 영불을 끌어들여 소련-폴란드-영국-프랑스의 집단안보체제를 구성, 독일의 야욕을 저지할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5. 1939년 위기와 서방-소련의 접촉



5.1. 소련과 영불의 동상이몽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를 강점한 이후에도 야욕을 버리지 않고 폴란드에게 폴란드 회랑을 요구하면서 유럽에는 다시 전운이 고조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동맹국이 사라진 이상,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에 직접적인 병력 지원이 가능한 새로운 동맹국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는 바로 소련이었고, 여기서 소련과 서방국가들은 다시 접촉했다. 소련과 나치 독일은 스페인 내전에서 간접적으로 싸운 적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은 절박한 상황이었다. 1938년과 달리 이번엔 양측 모두 상당히 진지하게 접촉하며 의견을 주고 받았다. 최우선적으로 독일의 팽창 저지와 제압을 목표로 하는 데에는 양측의 의견이 동일했다.
1939년 4월 17일, 막심 리트비노프는 외무장관직에서 해임되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외무장관이 되었다. 몰로토프는 '발트해-지중해까지 모든 나라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고, 그 나라 중 어느 한 나라라도 독일의 공격을 받을 경우 영국, 프랑스, 소련 세 열강이 '''모두 전쟁에 돌입한다''''는 내용의 동맹 관계를 제안하는 내용을 적은 문서를 영국, 프랑스에 전달했다.
그러나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우선 회담 시작 전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문서를 전달받은 지 6주가 지나서야 영국에서 답신이 왔으며, 그나마도 동맹 관계를 구축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비 회담을 열자는 데 동의하는 것이었다. 초조해진 몰로토프는 7월 17일, 영-불-소 외교 회담에서 군사 협약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이 되어서야 영국, 프랑스 협상단은 비행기가 아니라 여객선 '시티 오브 엑스터(City of Exeter)'호를 타고 레닌그라드에 입항한데다가, 곧바로 모스크바에 가지 않고 하루를 관광으로 소비하여, 소련 측에 '''저것들 놀러왔나?''' 같은 나쁜 인상을 심어주고 말았다.
8월 12일이 되어 모스크바에서 겨우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회담에 참가한 협상단도 문제였다. 소련 측 협상단장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최측근이자 친구,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였다.[4]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보고할 필요 없이 바로 군사 협정에 서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증명하는 문서를 영불 협상단에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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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 도착한 영불 협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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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협상단장
레지널드 드락스 경(1880-1967)
프랑스 협상단장
조제프 두망(1880-1948)
반면 영불 협상단장의 자격은 소련에 비해 상당히 떨어졌다. 프랑스 협상단장은 프랑스 제1군관구사령관 육군 대장(Army General) 조제프 두망(Joseph Doumenc)이었는데 보로실로프와 마찬가지로 협상 서명권을 지니고 있었기는 하나[5] 당시 프랑스군 내 서열 40위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영국은 한 술 더 떴다.''' 영국 협상단장 레지널드 드락스 경(Reginald Drax)[6]은 당시 해군 소장이었는데, 일개 함장 출신인 데다 영국 정부에 보고만 할 수 있을 뿐 '''협상 권한이 없었다.''' 자국의 거물들을 협상단으로 때려박은 소련에서는 영-불의 진위를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7]
소련 협상단은 매우 당황하고 불쾌해했으나 계속 협상을 이어나갔다. 곧이어 소련은 소련군이 독일로 진군할 수 있도록 동유럽 국가, 특히 폴란드(당시 영-불과 동맹국)가 길을 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협약을 양국 정부와 맺었는가를 질문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영-불 측은 처음부터 소련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았다. 1920-30년대 서방권 외교 기류였던 윌슨의 이상주의는 역사의 선악을 구분하는 흑백논리적인 경향이 있었고 당시 영불 협상단 측도 공산주의자 스탈린을 역사의 '악역'으로 보았기에 당연히 서로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협상진행이 될리 만무했다.


5.2. 집단안보를 거부하는 폴란드 제2공화국


우리는 독일과의 관계에선 자유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인과 붙으면 영혼을 잃어버리게 된다.

-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8]

리트비노프가 구상한 집단안보는 위와 같이 영불도 소극적이었지만, 폴란드도 마찬가지 였는데, 폴란드는 독일 못지않게 러시아/소련과 역사적인 여러 악연이 있었으며, 영토할양을 요구하는 독일에 강경한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안보에 참여하라는 소련의 요청도 거절했다. 영불이 소련의 제안에 소극적으로 나선 것도 바로 독일과 직접 국경을 맞댄 폴란드가 "소련과 군사협정을 맺지 않았으며 맺을 생각도 없다."고 영불에게 단호하게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폴란드와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아주 사이가 좋지 않으며 그 역사도 아주 유구하다.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폴란드는 심심하면 모스크바 대공국-루스 차르국을 쥐어팼고 러시아가 선공했지만 패배해서 모스크바가 불타고 차르가 끌려가서 '모스크바 대공'의 자격으로 폴란드 국왕에게 속신을 한 적도 있다. 그 후로는 반대로 1772년, 1793년, 1795년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영토가 3번이나 강제 분할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그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가혹한 통치를 받았는데, 폴란드가 3국에게 분할 통치를 받는 동안 경제적으로는 동유럽에서 그나마 발전했던 대폴란드 지역에 여러 관세 및 산업화를 위시로한 혜택을 주었지만 폴란드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강경한 탄압을 가했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 기간에는 1919년-1921년 소련과 전쟁을 치른 경험까지 있었다.[9] 그리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는 벨라루스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을 할양받는데, 일단 소련이 폴란드를 지원하면 폴란드 내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건 당연지사고 심하면 일전에 얻은 동부 영토까지 그대로 떼어먹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10]
이렇게 소련과 역사적인 악연이 있기는 했지만 뮌헨 협정 이후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압력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는 어떻게든지 안보방침을 재고할 필요성은 있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우방인 프랑스는 폴란드의 생각과는 달리, 1차대전 때 엄청난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독일과 충돌을 야기할 수 있는 군사적 압력을 가하는 데 매우 소극적이었으며,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 폐기를 선언한 후에도 적극 제지하기는커녕, 독일의 공세적인 군비확장에 미온적인 대응을 할 뿐이었다. 폴란드가 믿고 있었던 또 다른 나라였던 영국은 아래에도 나오지만 상설 육군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독일의 팽창주의적인 도발에 기껏해야 외무성 성명이나 발표하는 정도였다. 폴란드-독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영국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독일에 대한 해상봉쇄가 전부였다. 이런 이런 폴란드의 실책을 서방에서는 전간기의 외교실패 중 하나로 본다. 내용이다.[11][12]
폴란드는 독립 영웅 피우수트스키의 지도 아래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는데, 그는 과거의 사회주의자였으나, 후에 우파로 전향하였고 독립 후에는 1925년 쿠데타를 일으켜 권위주의적인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그는 발트해(발트3국)로부터 흑해(우크라이나)에 이르는 거대한 연방을 구성하고 폴란드가 그 맹주가 되어 서로는 독일, 동으로는 소련(러시아)와 맞서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미엔지모제(Międzymorze)[13]라고 부르는 이 정책은 사실상 실체적인 의미는 없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폴란드-루마니아-헝가리 간의 삼국동맹이 진지하게 논의된 정도였으나 이마저도 루마니아와 헝가리 간의 트란실바니아 문제로 인하여 파토나고 말았다.
한편 전쟁이 발발할 시 각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수치에 관해 소련 협상단은 120개 사단,[14] 중포 5천여 문, 전차 9천여 대, 항공기 5천여 대를[15] 투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는 110개 사단, 전차 4천여 대를 파병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영국 협상단은 '''16개 사단'''이라고 밝혀 보로실로프가 '''"통역 잘못한 것 아님?"''' 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황당한 소련이 세부 사항을 캐묻자 영국은 사실은 단 '''4개 사단'''만이 전투 가능하다고 실토했다. 회담 종료 후 스탈린이 영국 대사에게 구체적으로 더 묻자, 사실 4개 사단 중에서도 2개만이 제대로 된 사단이고, 나머지 2개 사단은 좀 더 뒤에야 완편된다는 것이었다. 이뭐병...[16]
이런 어처구니없는 답변이 돌아오자 소련은 멘탈붕괴한 나머지 할 말을 잃었고, 영국이 '의도적으로 소련과 독일의 전쟁을 부추기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여기에 육군대국 프랑스는 "100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 라 하여 나름 한몫을 하...나 싶었지만, "마지노선 밖으로 나가지 않음." 노선을 밝혔다. 해석하자면 "프랑스는 우주방어 할 테니 소련이 피를 흘려주시오" 인데 (그 와중에 영국은 4개 사단이다) 이런 대답을 들은 소련의 기분이야 뭐...

5.3. 소련의 입장


소비에트군 총참모부는 스페인 함락 이후 나치와 제국주의 블록의 침략이 소비에트 연방에 파멸을 가져올 것을 두려워했다. 나치는 이미 1938년에 오스트리아를 병합했고, 1939년 3월 리투아니아 정부를 위협했다. 이탈리아도 1939년 4월 알바니아를 점령했고, 두 파시스트 열강 이탈리아와 독일은 1939년 5월 결정적인 강철조약(Pact of Steel)에 서명했다. 1938년 뮌헨 회의에서 파시즘 블록에 대한 영국의 유화책은 제국주의와 파시즘 블록의 공모를 암시했다. 이것이 바로 1939년 8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약의 맥락이었다. 거기서 소비에트는 불가피한 나치의 공격 이전에 군사력을 건설할 시간을 벌기를 희망했다. 파시즘과는 어떤 타협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 정치’의 영역이다. 다가올 전쟁 이전에 시간을 버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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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의 붉은 별 p.132

소련의 의심에는 역사적인 근거가 있었다. 러시아 혁명 직후 서방 세계는 직접 군대를 파병하여 러시아 내전에 개입해 사회주의 정권을 붕괴시키려다가 실패한 전례가 있었다. 즉, 소련으로선 서방 세계가 나치 독일, 일본 제국 같은 파시즘 국가와 소련의 전쟁을 유발하여 양측을 모두 공멸시키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에 충분했다. 특히 3월 10일에 있었던 공산당 대회 선언문에서 스탈린은 다가올 전쟁을 제국주의자들끼리의 전쟁이라고 부른 점에서 이런 의심을 느낄 수 있다.
당장 이 수치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첫 대륙 원정군 규모인 4개 사단에도 못 미치는 소규모 병력만 즉시 투입 가능한 데 반해 전쟁은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와 있다고 보였으므로, 소련 입장에선 '''영국인들이 제대로 싸울 의지 자체가 없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17] 영국은 이미 1938년 후반부터 방위 산업 생산 규모를 대폭 확장하기 시작한 상황이었으므로 소련인들은 실제로 영국군이 훨씬 많은 병력을 동원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아직 지상군보다는 공군, 그리고 공군보다는 '''동맹국들이 싸우는 데 필요한 금융 자본의 확보'''에 더 열심인 상황이었다.[18]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영국도 독일과의 전쟁이 다시 벌어지면 참호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동(폴란드)서(프랑스)로 각각 100만의 대군[19]을 면전에 둔 독일군은 적어도 한동안 지체될 것이지만, 영국 육군의 개입 없이도 독일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건 확실하다. 1차 대전 때도 영국 육군은 초반 2년을 매우 소극적으로 임했고,[20] 이는 대륙의 전쟁에 개입하는 영국의 전통이기는 하지만, 당장 '''미치광이 히틀러'''와 독일군의 총칼에 맞설 수 있는 소련이 "'''돈 댈 테니까 내가 올 때까지 좀만 참으셈."''' 이라는 태도를 좋게 봤을 리는 만무하다.
요약하면 영국이 보인 행동은 지금까지 대륙 전쟁에 개입할 때의 전통을 따랐지만, 소련의 입장에서는 설득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확실한 전쟁 준비보다는 금융 자본의 확보에 주력하고 있는 영국 측의 태도가 당장 나치와 총칼을 맞댈 수도 있는 소련에게 '''"이 새끼들 같이 싸울 생각은 안 하고 돈벌이에만 급급해?"''' 라는 커다란 의심을 불러 일으킨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영국의 금융 자본은 1차 대전 때도 프랑스에 전쟁 자금으로 각국에 엄청난 차관을 빌려주었고, 패전국인 독일에 전쟁 배상금을 탕감해주면서도, 정작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에는 그런 혜택 없이 받을 것을 전부 받아가서 커다란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반영 감정이 고조된 바 있었다. [21] 영국이 육전에 대한 대비보다는 전쟁에 필요한 자본을 확충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던 것은 대륙 국가들이 당분간은 어떻게든 독일을 막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이는 엄청난 오판이었다.[22] 소련 입장에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 문제로 전쟁이 시작되면, 군병력 동원이 오래 걸리는 자신들을 대신해서 소련과 폴란드가 힘을 합쳐 적어도 6개월에서 1년쯤 독일군을 동부에 붙들어 주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소련은 그런 장기 지연전의 결과로 소련군만 피를 흘리고 마는 게 아닌가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경우, 독일과 소련이 다같이 기진맥진해 있을 때 영불이 기습 공격으로 두 나라를 동시에 무너뜨리는 것조차 가능해 보였다. 매사에 의심 많은 스탈린으로서는 그런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물론 러시아 제국 시절 때부터 영국과 수십 년 동안 적대적인 관계[23]였기 때문에 소련의 그런 의심은 충분히 타당했다. '''적어도 스탈린에게는''' 타당해 보였다.
게다가 상술했듯 1939년 다자 안보 체제 구축 회담 당시 영국-프랑스의 대표단은 소련 측 대표단에 비해 격이 많이 낮은 인물로 구성되어 있었고, 영국 협상단은 국가 원수를 대신해 협상에 서명할 권한조차 없었다. 결과적으로 독일과의 전쟁 발발 시 유럽 본토에 투입 가능한 병력을 '''4개 사단'''이라고 실토해 버렸기에 소련 입장에선 더더욱 믿음이 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5.4. 영국의 입장


그러나 반대로 보면 단순히 스탈린이 계산하기에,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 게 더 도움이 되어서 혹은 단순한 오판, 확증편향적 오류에 근거한 판단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영국이 육전을 피하려고 한 것은 이기적이긴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이기적이지 않은 국가는 없다.''' 프랑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영국도 1차 대전때 엄청난 인명피해를 냈으며,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나는 육상전에는 될 수 있으면 참전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당연하다.[24] 이는 1차 대전 때 젊은이의 1/3이 전사한 프랑스가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국방예산의 절반 가까이를 쏟아부어 알자스-로렌 국경에 마지노 요새를 건설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나치당이나 나폴레옹과 같이 갑자기 팽창하는 강대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동맹을 맺은 것이지 애호와 우정의 감정으로 친교를 맺은 것이 아니다. 차관을 빌려 주면 다른 꿍꿍이가 없는 이상은 이자까지 쳐서 갚게 만든다. 물론 프랑스가 가장 많이 피를 흘려서 영국이 승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프랑스가 영국을 위해 피를 흘린 것은 아니다. 독일이 승천하기 이전에는 서로 물어뜯던 사이였으며 그런 차관의 가장 피해자인 프랑스조차도 영국과 동맹을 맺은 것은 필요에 따라서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러한 이유로 영국이 싫어서 동맹을 못 맺었더라면 프랑스부터가 영국과 동맹을 맺지 않았다. 독일 차관의 경우 미국이 개입하기도 했다는 점을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소련 수뇌부도 국제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어느 나라가 이기적이지 않은 아름다운 마음을 품고 정성을 다하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랑 편을 먹어야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가느냐'''다. 그리고 구태여 영국을 빼더라도 프랑스군이 있었으며, 정말로 영국이 섬나라의 이기적인 습관 때문에 그렇게 일이 돌아갔었던 것이라면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기 때부터 영국에게 학을 떼고 협력하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가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던 이유는 프랑스가 무리하게 공세로 나서다가 개박살난 것도 있으며 영국 입장에서는 삼국 협상을 맺긴 하였지만 협상 내용상 반드시 영국이 참전했어야 할 의무는 없었는데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했기 때문에 개전한 것으로, 당시 영국 입장에서는 당장 징병제로 전환한들 보급할 장비가 모자라 괜히 인명과 자원을 낭비하게 될 뿐이었다. 그리고 차관을 모은다고 하지만 '''금융 자산은 전쟁에 매우 중요하며 지리학적인 특성에 따라서 다른 전략을 취하는 것은 상식 중에 상식이다.''' 억울하겠지만 그게 국제 사회이며 독일을 못 막았을 때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이 피를 보는 것은 인접국인 프랑스지 영국이 아니다. 또한 영국이 피를 안 흘렸냐고 한다면 영국은 결국 병력을 모아서 대륙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나폴레옹 시대든 세계 대전이든 말이다. 애초에 영국은 금융 자산을 지키기 위해 폴란드의 차관 요청도 거절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소련이 영국과 프랑스와 접촉한 이유는 극단적인 반공 국가인 나치 독일을 견제해야 하는데 자신만 싸운다면 두들겨 맞고 엄청난 피를 흘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즉 소련도 영국과 프랑스, 폴란드가 대신 싸워 주길 원하는 것이지 영국, 프랑스, 폴란드가 소련을 믿고 따라준다면 앞서 나서서 파시스트를 분쇄하고 세계 평화를 되찾아보겠다가 아니다. "내가 싸우는 동안 저 놈들이 뒤통수를 쳐서 수확을 죄다 가로챌 속셈인 거 아냐?" 라는 식의 의심은 어느 동맹국 사이에서도 일상적으로 있어 왔던 상황이다.
특히 서방 군대가 러시아 내전에 개입했기 때문에 소련이 위협을 느꼈다고 하는데 당시 소련은 최근까지도 세계 혁명 운운하던 '''공산주의''' 국가였다. 그 와중에 동맹국인 러시아 공화국의 수뇌부를 갈아버린 소련을 막기 위해서 군대를 보내지 않는 게 말이 안된다. 오히려 안 보냈으면 신의없는 서방 동맹을 운운할 만한 일 아닌가. 동시에 폴란드의 불안은 대국적이지 못한 것처럼 묘사하는데 그 폴란드는 물론 소련에게 선빵을 치기도 했지만 러시아에게 수백 년 간 쥐어짜인 기억 또한 가지고 있는 국가였다.
둘째로 몇 개 사단이나 당장 동원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영국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게 현실이며 전통적인 해상 국가였던 영국이 소련이 보기에 비교적 흡족할 만큼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말하는 쪽이 더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애초에 영국은 1936년부터 재무장을 시작해서 재무장 시작일로부터 3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 비대한 해군의 유지비에 막대한 재정이 소모되고 섬나라라는 특성상 육군이 예산 배정에 우선순위가 되는 것이 더 이상하다. 또한 당시는 1939년으로 아직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시기로서 영국과 프랑스가 경제적으로 편했던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결국 그게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소련에게 들이밀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영국-프랑스가 좀더 성의의 제스처를 보였더라면, 나치와 대결할까 봐 절박했던 소련이 독일 측에 붙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래저래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에 성의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폴란드를 더 믿고 있었으며, 동맹 체결에도 건성이었다. 이는 러시아 내전에서 영국-프랑스와 악연이 있던 소련의 의심과 겹쳐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여기에 대해 추가적인 자세한 내용은 "필사적인 포옹 : 독·소 불가침 조약 (1939·08·23)과 소련 측의 동기분석"을 중심으로 수정주의적 해석으로는 Geoffrey Roberts의 논문을, 전통주의적 해석은 The Deadly Embrace: Hitler, Stalin and the Nazi-Soviet Pact라는 책을 보기를 권한다.

6. 소련의 정책 변화


스탈린은 협상 내내 상당히 유연한 자세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협상 태도를 보고나서 이들이 소련과 군사 동맹을 맺을 생각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렇게 되면 이들이 독일과 소련을 싸우게 하고 뒤로 빠지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이 의심은 상당히 그럴듯 했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인들 중에도 정말 그런 이이제이를 바란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영국과 프랑스의 분위기는 그곳에 산재한 소련 간첩망에 의해 스탈린에게 보고되었고, 의심 많은 스탈린은 결국 영불을 불신하게 되었다.
이미 영프와의 협상을 하기 전, 1939년 5월 영/불/소와 집단 안보 체제를 주장하던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장관을 해임하고[25] 심복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를 외무장관에 앉혔다. 그러나 리트비노프의 해임은 독일에 우호적인 제스처가 아니었고, 오히려 어느 정도 자기 생각이 있는 리트비노프[26] 대신 예스맨인 몰로토프를 앉혀 자기 뜻대로 영불과의 협상을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5월 이후에도 소련은 독일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27]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도 연합국과의 회담은 진전이 없었다. 결국 1939년 8월 20일부로 영-불과의 회담은 허무하게 종료되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소련은 영불 '부르주아' 와의 협상을 일종의 '추진력을 위한 무릎꿇기' 정도로 생각했으며 어차피 소련의 입장에서는 영불 서방국가들이나 나치의 파시스트나 똑같은 부르주아 반동분자일 뿐이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과 스탈린 특유의 외교관계를 실용적이고 무감정하게 보는 태도가 합쳐지면서 스탈린은 '또다른 부르주아들' 에게 협상테이블을 마련할 준비를 하게된다.

7. 독일의 접근


이때 스탈린의 마음을 흔든 것은 다름 아닌 '''독일'''이었다.
독일 또한 지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선을 마구 넓혀서 패배한 이후 양면전쟁의 위험성을 뼈저리게 깨달았으며 아울러 소련과 서방 세계가 접촉하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실제 참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침략 전쟁에 소련이 개입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만약에 대비하며 동부에서의 세력 균형을 위해 소련을 묶어둘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계획의 스타트를 끊게 될 폴란드 침공에 소련이 폴란드 편으로 개입하면 초장부터 만사를 그르칠 수 있으므로[28] 히틀러는 소련을 어떻게 묶어둘 것인지 고심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영불이 폴란드를 구하러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고, 폴란드군은 별 문제 없겠지만 그 뒤에 있는 소련의 개입은 우려하고 있었다.
8월 2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리벤트로프는 이런 걱정을 하는 히틀러에게 스탈린과 협상하도록 권했고, 히틀러는 리벤트로프의 제안을 받아들여 소련에게 ''''발트해에서 흑해까지의 지역의 결산''''[29]을 제안했다.
소련으로서는 구미가 매우 당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서방놈들과 함께 자기들 도움은 죽어도 싫다는 폴란드를 돕느니, 세력권을 나눠서 서로 맛있게 잘 먹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독일의 제안이 훨씬 당근이었다. 또한 냉정한 현실주의자인 '''스탈린은 만약 히틀러가 미치지 않고서야 서방 특히 대영제국을 뒤에 두고 소련을 적대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헨리 키신저의 말에 따르면 '''불행히도 히틀러는 자신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이성적 판단과는 거리가 먼 바보였다''' 라고 평했다. [30] 8월 17일 소련은 독일과의 회담에 동의했고, 8월 19일 양국은 독소 신용 협정(German-Soviet Credit Agreement)를 체결하였다. 경제 협정 체결 후 하루 뒤인 8월 20일,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스탈린 귀하'''

1939년 8월 20일

1. 본인은 독일과 소련의 관계 개선을 위한 디딤돌인 새로운 독소 무역 협정의 서명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2.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의 체결은 장기적인 독일 정책임을 의미합니다.

3. 귀측의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전달한 불가침조약을 수락하지만 이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점들을 가장 신속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4. 독일과 폴란드 간의 갈등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습니다. 폴란드의 대국에 대한 무례한 행위는 언제라도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5. 양국이 함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의도가 있다면 빨리 서둘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귀하가 나의 외무장관을 8월 22일(화), 혹은 늦어도 8월 23일(수)에 맞이할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귀하의 즉각적인 회신을 요망합니다.

'''아돌프 히틀러'''

스탈린은 이 전보를 받고 매우 기뻐하며 다음날 답신을 보냈다.

'''히틀러 총통 귀하'''

1939년 8월 21일

귀하의 서한에 감사합니다. 나는 독일과 소련간의 불가침 협정을 계기로 양국 간의 정치적 관계가 개선되었으면 합니다. 양국의 국민들은 평화로운 관계가 필요합니다. 독일 정부가 불가침 조약에 합의키로 한 사실은 정치적 갈등의 제거와 양국 간의 평화와 협력을 구축할 계기가 될 것입니다. 소련 정부는 독일 외상 리벤트로프의 8월 23일 모스크바 방문에 동의하는 것을 귀하께 알립니다.

'''이오시프 스탈린'''[31]

히틀러는 전보를 보낸 후 답장을 기다리며 잠도 못 이룰 정도로 긴장했다고 하며 스탈린으로부터 긍정적인 톤의 답장을 받자 미친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8. 조약 체결


이어 스탈린은 답신을 보낸 8월 21일 외무라인에 영불과의 협상 모색을 중단시키고 독일과의 협상 준비를 하도록 한다.
8월 23일 히틀러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리벤트로프를 위시한 독일 외교단이 소련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당시 모스크바 공항에는 하켄크로이츠 깃발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리벤트로프는 허겁지겁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몰로토프의 영접을 받으며 공항에서 점심을 먹은 후 바로 크렘린으로 갔다. 크렘린에서는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한 스탈린이 '''직접''' 외교단을 맞이했다. 사실 의전에서 일개 외무장관을 최고권력자가 맞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좀 더 환영 제스처를 보였다면 바지사장이었던 소련 국가 원수 미하일 칼리닌이 영접했겠지만, 당시 전쟁이 임박했음은 유럽인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최고 권력자였던 스탈린이 직접 나옴으로써 환대의 의사를 표시했다.
원래는 양국의 외무장관인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가 협상을 해야 했으나, 실제로는 스탈린이 여기에 동석해서 사실상 스탈린이 리벤트로프와 교섭하게 되었다. 협상은 리벤트로프가 도착한 8월 23일 오후부터 밤 늦게까지 계속되었으나, 의외로 양 독재국가는 아귀가 잘 맞아서 여러 현안에 대해 쉽게 합의했다.[32][33] 스탈린과 리벤트로프는 협상이 의외로 술술 풀리자 점점 의기투합하여 나중에는 서로 극단적인 농담까지 주고받았을 정도였다.[34] 실제로 리벤트로프는 스탈린에게 1936년의 독-이-일의 3국 협정은 겉으로는 소련을 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영-불-미가 주도하는 서방 질서를 흔들기 위한 것이라고 협상 시간 내내 계속 주지시켰으며, 이는 영불에게 의심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던 스탈린의 입을 귀까지 찢어지게 만들 만큼 기쁘게 하는 것이었다.
영불과의 협상이 질질 끌어서 1년이 지나도록 진척이 없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소련-나치 독일은 '''단 하루 만에''' 유럽의 운명을 결정할 모든 현안에 대해 합의하고 다음 날인 24일 모든 항목에 대한 합의문을 작성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아래 그림과 같이 스탈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리벤트로프와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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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렘린에서 조약에 서명하는 몰로토프. 몰로토프 바로 뒤에 있는 사람이 리벤트로프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이 강철의 대원수. 리벤트로프의 왼쪽 군복 입은 사람이 당시 소련군 총참모장이었던 보리스 샤포슈니코프 원수.
스탈린은 조약 체결후 환영 만찬에서 리벤트로프에게 "히틀러 총통에게 전해주시오. 나는 이 협약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맹세했고, 리벤트로프도 이 조약에 대해 끝까지 충실하겠다고 다짐했다.[35][36] 하지만 스탈린은 미래에 대해 완전히 낙관하진 않았다. 그는 리벤트로프에게 "우리는 서로 욕을 잘도 해댔습니다. 그렇지 않았나요?"[37] 라고 발언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소련과 독일 사이의 해묵은 원한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도 없고, 이후 재발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image]
조약을 체결하고 의기양양하게 베를린에 돌아온 리벤트로프를 좋아 죽겠다는 듯이 맞는 히틀러. 환희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 결과


공개된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독일과 소련은 10년 기한의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그리고 양국은 경제협력을 통한 상호이익의 증진을 도모한다.
'''그러나 언론에 공개된 위의 내용은 껍데기에 불과했고, 공개되지 않은 아래 부분이 이 조약의 핵심이었다.'''
[image]
왼쪽은 협정에 의한 국경선, 오른쪽은 실제로 분할된 국경선.
  • 독일소련 양국은 폴란드절반으로 분할한다.[38]
  • 소련은 루마니아베사라비아(지금의 몰도바)를 차지한다.
  • 양국은 발트 3국을 분할하여, 에스토니아라트비아는 소련이, 리투아니아는 독일이 각각 차지한다.
  • 핀란드는 소련이 차지한다.
  • 소련과 독일은 서로 필요한 여러 물자를 다수 지원한다.
이 조약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폴란드 침공에서 독일과 소련은 공동작전으로 폴란드를 분할했으며, 이후 독일의 묵인 아래 소련의 압력을 받은 루마니아는 베사라비아에 북부 부코비나를 얹어서 소련에 할양했다. 발트 3국은 소련의 협박에 모조리 소련에게 넘어갔는데,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군이 소련령으로 합의되어 있던 바르샤바 주 동부와 루블린 주까지 차지하자 그 대신 원래 독일이 차지하기로 되어 있던 리투아니아를 소련에게 넘겨주었다.
이 조약에서 합의된 분할 대상 중 핀란드는 통째로 소련에 넘어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겨울전쟁에서 침공해 온 소련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며 선전하였다. 결국에는 국력의 격차를 넘지 못하고 패배해서 영토의 11% 정도(산업능력의 30%)를 소련에게 넘겨주게 됐지만, 이웃하는 발트 3국과는 달리 소련에 흡수되는 운명은 면했다.
물자 지원도 이전에는 소련에서 일방적으로 퍼준 것으로 취급했지만 현재 연구로는 소련에서 독일로 간 것 만큼 독일에서 난방용 석탄(연간 300만 톤), 최신 기계류(엔지니어 파견 포함), 발전설비, 방산 기술(비스마르크급 전함 설계도 등)이 넘어가면서 일방적인 흑자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일방적인 흑자가 아니었다고 해도 독일이 이득을 본 것은 사실이다. 독일의 대 소련 수입액이 3억 1800만 마르크인 데 반해, 대 소련 수출액은 5억 3600만 마르크였고[39], 독일이 소련에게 보내주는 공급량은 소련의 공급량과 비교하면 57 ~ 67%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 자세한 내막에 대해 알아보자면, 소련은 독일에게 막대한 원자재와 전략 자원들을[40] 보내주었고 소련의 철도망과 수로, 항구를 이용하고 영토를 통과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 연합군의 경제 봉쇄를 무력화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독일은 보내주기로 약속한 각종 기계와 설비, 기술을 매우 불성실하게 보내주었다.[41] 그리고 1941년에 이뤄진 독일의 물자 공급은 거의 사보타주 수준이었고,[42]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하기 몇 시간 전까지 소련이 보내주는 물자를 받아챙기다가 소련을 침공했다.
이 조약의 체결로 소련의 개입을 막는 것이 가능해져 동부에 또 하나의 전선이 탄생할 가능성을 막은 이후 '''불과 8일 뒤에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그 첫 번째로 폴란드를 침공하여 소련과 나눠먹은 이후 폴란드 침공 종료 8개월 후에는 프랑스를 항복시켰고 최전성기를 달리게 되었다. 소련도 동유럽에서 확보한 지역을 발판으로 세력을 크게 키웠으며, 독일과 함께 세계구도 차원에서의 세력분할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야욕은 마침내 동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소련에게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소련을 기습 공격한다. 독소전쟁의 시작이었다.
독소 불가침조약의 대가로 스탈린이 독일에 넘겨준 것은 원자재와 전략물자들만이 아니었다. 바로 (소련측이 불순하다고 생각한) 독일 공산당원 명부도 넘어갔고 나치 독일하에서 은신하고 있던 여러 명의 독일 공산당원들이 투옥-처형되었다. 물론 이들은 트로츠키주의자로 간주된 자들로서, 스탈린이 별로 쓸모 없다고 생각한 자들이었다.[43] 이들 뿐만 아니라, 자국으로 망명한 독일인 중에서도 스탈린 체제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된 자들은 독일로 바로 송환했고, 이들은 당연히 송환되자마자 투옥되거나 처형되었다.[44]
사실 비밀조항은 독일이 항복하고 나서 독일 외무부의 문서가 서방 연합국 측에 압수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알려졌다. 소련 측은 붕괴될 때까지 이 조항의 존재를 부인했고, 러시아 연방이 소련의 모든 과거를 부정하면서 이 조항을 사실상 인정했다. 다만 러시아는 이에 대한 책임은 모두 소련에 넘기고 있고, 과거에 대한 사과는 거부하고 있다.
80주년을 맞아 폴란드, 루마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외무장관들이 스탈린 시대와 나치 시대 등 전체주의 시대의 범죄에 대해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철저한 조사를 요구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폴란드, 우크라이나는 2차 세계 대전 발발에 나치 독일과 소련 모두 공동책임을 져야한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10. 관련 어록


歐洲天地 複雜怪奇(유럽 천지가 복잡하고 괴기하다).

- 히라누마 기이치로[45]

"독-이-일 반공 협정은 사실 소련이 아니라 영미를 겨냥한 것입니다. 스탈린 수상께서도 이 반공 협정에 가입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 리벤트로프의 농담, 협정 후 만찬장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오늘부로 나도 반공주의자요."

- 스탈린의 농담,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회상록에서.

'''우리는 서로 욕을 잘도 해댔습니다. 그렇지 않았나요?'''

- 스탈린, 리벤트로프를 맞이하며[46]

[1] 참고로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선전포고문은 세계기록유산이다.[2] 이때 게오르기 주코프에리히 폰만슈타인 등의 미래의 각군 원수들이 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3] 특히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치하 폴란드는 주변국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4] 스탈린의 최측근을 협상단장으로 임명한 데서 소련이 이 협상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협상 자리에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보리스 샤포슈니코프 원수 등 소련군 고위 사령관들이 다수 참석하였다.[5]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는 두망 장군이 서명권을 지니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6] 본명은 레지널드 에일머 랜펄리 플렁켓언리얼드락스(Reginald Aylmer Ranfurly Plunkett-Ernle-Erle-Drax). 조지 6세 직속 해군 장교였다. 최종 계급은 해군 대장[7] 주영 소련 대사였던 이반 마이스키(Ivan Maisky)는 영국 외무장관인 핼리팩스 경(Lord Halifax)을 협상단장으로서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8]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군 총사령관[9]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폴란드군은 일방적인 침략을 한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요청을 받아 러시아 소비에트군을 방어하기 위해 출병한 것이었다. 우크라이나는 2월 혁명 때 진작에 러시아에서 독립을 선언했으며 볼셰비키 역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1918년 5월 레닌의 선언을 통해 이를 승인했음에도 이를 뒤집고 우크라이나를 합병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것이었다. 이에 우크라이나 정부는 분쟁지역을 모두 폴란드에게 넘겨주는 조건으로 연합을 제의했고 폴란드가 이를 승인하면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10] 폴란드가 전간기에 획득한 동방영토 크레시(Kresy)는 기초적인 산업조차 없는 낙후한 땅이었기에 이득은 거의 없었고 완충지대로서의 의미가 더 강했다.[11] 이 사이트의 해당 내용은 미국 의회 도서관의 출판부에서 펴낸 책(Glenn E. Curtis, ed. Poland: A Country Study. Washington: GPO for the Library of Congress, 1992)에서 발췌한 것이다. 여기 실린 내용은 소련을 악마화하던 냉전시대에조차 폴란드 2공의 대외정책은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이 취한 외교실패의 대표적인 예로 언급될 정도이다.[12] 다만 해당 문단의 내용은 지나치게 서구권 중심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애초에 폴란드가 자신들을 멸망시키려 하는 국가와 동맹을 체결하지 않았다고 외교실패로 보는 건 명확하게 폴란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냉전 시기에는 폴란드 역시 공산주의 국가였다는 걸 잊으면 안된다. 게다가 소련은 '''폴란드의 의사는 별로 중요치 않으니 삼자회담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의했으나 영국이 이를 묵살했다.'''는 점도 간과하면 안된다.[13] "바다에서 바다까지"라는 뜻이다.[14] 실제로 소련은 독소전쟁 때 수백 개의 사단을 동원했으니 소련의 호언장담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독일 국방군은 독소전쟁을 개시할 당시 소련군이 유럽 전선에 동원 가능한 병력을 180개 사단 정도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180개 사단을 모조리 전멸시킨 독일군 앞에는 소련군 '''360개 사단'''이 기다리고 있었다.[15] 1941년의 소련은 1938년부터 시작해서 9000대 이상의 폭격기와 1만 3천의 전투기, 장갑차 2700여 대를 생산해서 주요 전선에 배치해 두었고 탱크 2만 2천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생산 속도와 배치 과정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해 볼 때, 영-불 양국과 협상을 하던 1939년의 소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카드를 영-불 양국에 보여줬다고 해도 무방하다.[16] 물론 1차 대전 때 대륙에 파견된 영국군 사단만 해도 80여 개에 달했기 때문에, 16개, 4개, 2개 운운하는 건 영국이 독일의 확장 야욕을 진심으로 억누르고자 하는지 의심스럽게 보일 수 있기는 하다. 미국의 성장과 대공황으로 영국의 국제적 지위가 많이 하락하긴 했으나,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나라인데다, 당시 인도 제국 등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영국은 해군과 공조하는 해병이 매우 잘 정비되어 있기로 유명했는데,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강한 나라가 완편 사단을 겨우 2개 동원할 수 있다는 건 듣는 입장에서 '얘네 장난하나?' 싶게 만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영국은 실제로 전간기에 상당히 군비감축을 했기 때문에 능력이 1차 대전 때보다 매우 줄어든 상태였고, 1차 대전에도 본격적으로 지상군을 투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동안 프랑스가 혼자 막아내야 했던 것을 고려하면,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전력이 많을래야 많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수병들한테 지급할 월급도 부담스러워 삭감하려고 했었을 정도였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싶다면 영어 위키백과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협상 과정 문서를 참조하면 좋다.[17] 뒷날 독소전쟁 당시 소련에는 하루에 민간인 1만 5천명, 군인 7,000명 이상으로 합계 2만 2000명 이상이라는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전쟁 끝날 때까지 매일 매일. '''즉 한두 사단 병력규모, 작은 도시 하나 정도의 사람들이 매일 증발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영국군 4개 사단 따위는 1주일이면 소멸한다는 이야기니...[18] 이는 대륙 전쟁에 말려들 때 영국의 관습적인 대응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도, 제1차 세계 대전 때도 시작은 똑같았다. 대륙에서 전쟁이 악화되더라도 본진은 털릴 일이 잘 없기 때문에 전쟁에 필요한 자본을 확보하는 데 우선적으로 신경을 썼던 것. 그뿐만 아니라 해군에 집중하는 섬나라의 특성상 영국 육군의 규모는 다른 대륙국에 비해서 규모가 작았던 만큼 대규모 병력을 확보할 시간도 필요하다. 게다가 나폴레옹 전쟁과 1차 대전 모두 영국은 결국은 대규모의 육군을 투입해서 싸웠다.[19] 여기에 유사시 연합국을 도울 수 있는 소련군 500만이 플러스 요인이다.[20] 대전 발발 2년 후까지 징병제가 아니라 모병제였다. 그 동안 독일 서부군의 주공은 모두 프랑스군이 막아냈고, 프랑스가 엄청난 손실을 봤다.[21] 요컨대 벌금은 탕감해줄 수 있지만, 빚은 탕감해줄 수 없다는 논리. 물론 국가 간 채무관계는 중요하지만, 제1차 대전에서 프랑스가 탱커 역할을 하면서 독일 서부군의 주공을 막아낸 것을 감안하면 프랑스 국민으로서는 분노할 만 하다.[22] 물론 대륙 국가들이 독일과 전쟁을 하게 되는 동안 돈놀이를 해 보겠다는 의도 또한 부정할 수 없기는 하다.[23] 1850년대 크림 전쟁부터 쭉 적대 관계. 1900년대 초에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때도 진영 이름이 동맹이 아닌 '''협상'''이었다. 다시 말해 오월동주. 삼국 협상 가운데 동맹 관계는 오직 러시아-프랑스 뿐이었다.[24] 이런 점은 현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아프가니스탄에서 육군은 철군하면서 무인기 작전만 줄기차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이다.[25] 해임 당시 라브렌티 베리야가 그의 집을 수색하는 등 거의 숙청될 뻔 했으나, 스탈린의 신임을 잃지는 않았는지 미국 대사로 전보되었다. 리트비노프는 독소전쟁 당시 미국에서 여러 활약을 하여 미국의 분위기를 소련에 우호적으로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한다.[26] 리트비노프는 레닌과 함께 혁명 운동을 한 고참 볼셰비키였고, 1920년대 소련이 서유럽 여러 국가들과 다시 외교관계를 복원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능력있는 외교관이었기 때문에, 스탈린도 함부로 이런 인재를 숙청할 수 없었다.[27] 하지만 스탈린과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독일 측은 리트비노프 경질을 우호적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리트비노프는 반독일주의자였고, 뮌헨 협정 당시부터 독일에 극단적으로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리트비노프는 나치가 극혐하는 유대인이었다. 이런 인사 경질에서 독소 협력의 가능성을 포착한 것이 바로 리벤트로프였으며, 아래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히틀러에게 독소 회담을 제안한다.[28] 그 당시 히틀러는 폴란드와 전쟁을 벌이기로 이미 결정해 놓고 있었는데, 폴란드군 자체는 몰라도 소련이 폴란드를 돕는다면 전쟁을 첫판부터 완전히 그르칠 여지가 있었다.[29]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는 이를 '''유럽에서 옛 차르 제국을 재건할 가능성'''이라고 표현했으며, 스탈린은 리벤트로프를 만날 때 '''어린애같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기록했다.[30] 스탈린은 강철 인간이라는 별명답게 굉장히 기계적이고 냉정한 외교를 지향했으나 이것이 대표적 단점이기도 했다. 스탈린은 너무 기계적인 나머지 타국의 결정에 감정적인 판단이 들어가는 것을 고려하지 못하고 장기적 판을 말아먹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이후 냉전기의 동유럽 분할 때도 비슷한 실수를 하고 만다. -헨리 키신저 diplomacy 인용- [31] 두 전보의 출처는 이 글이며 원 출처는 드미트리 볼코고노프의 스탈린 평전이다. 단 원래 스탈린 평전 원본에는 히틀러의 편지에 6번 조항까지 있는데 인터넷 스캔본은 6번 조항이 누락되어 있다.[32] 팽창주의를 펼치는 독재국가끼리의 외교협정은 쉽게 맺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두 나라 사이에 있는 다른 작은 국가들을 어떻게 나눠먹고 선을 그을까 하는 문제에서, 민주국가는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이 논의를 해서 절차를 밟아야 하지만 독재국가는 독재자 1인의 의사만 있으면 반영되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과 소련이 바로 그랬다.[33] 둘다 독재국가인 것을 제외하고도 둘의 필요성이 너무 절실했고 그리고 적절했다. 소련은 유럽 국가들과 독일이 서로를 견제하는 동안 국력을 키울 시간을 얻었고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제조약을 휴지조각으로 생각하던 히틀러에게도 독소불가침은 유럽을 쓸어먹고 소련의 통수를 치기까지의 귀중한 시간을 벌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34] 리벤트로프가 스탈린에게 '''"독일 반공협정에 소련도 가입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스탈린이 이에 '''"오늘부터 나도 반공주의자요." 라고 화답'''한게 바로 이때 나왔다. 히틀러 집권 이래 독소 양국간의 관계를 본다면, 이런 농담은 마치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이 교황에게 "교황 성하도 이슬람교 신자가 되는 게 어떻습니까?" 말하자 교황이 "오늘부터 나도 무슬림이오." 라고 대답한 것과 같은 충격적인 발언으로, 리벤트로프가 가져온 보따리가 스탈린에게 그만큼 크게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35]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리벤트로프는 독소전쟁 개전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개전 후 소련 외교관들에게 "나는 이 전쟁에 반대했다고 스탈린 각하께 전해주시오." 라고 변명하듯 말하기도 했다. 게다가 전쟁 내내 소련과의 강화를 모색했다. 사실 외무장관이니만큼 전쟁을 해봤자 성과는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으며 대소 개전은 자신이 기껏 만든 성과를 갈아엎어 버리는 짓이니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36] 국익을 추구해야 하는 외교관 입장에서 사방팔방에 적을 만들어대는 히틀러의 비이성적 행동은 절대 이해할 수 없고 또 그러기도 싫은 짓이었을 것이다.[37]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77[38] 조약 원문은 이렇게 노골적인 표현은 아니고, "폴란드에 중대한 정치적 변동이 있을 때, 독일과 소련의 양국의 영향력의 경계선은 XX을 기준으로 한다."는 식으로 완화된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39] 독일이 2억 1800만 마르크의 이득을 본 셈이다.[40] 220만 톤의 농업 생산물, 100만 톤의 석유와 목재, 2만 6천 톤의 크롬광, 1만 4천 톤의 구리, 3천 톤의 니켈, 500톤의 몰리브덴과 텅스텐.[41] 독일은 기한도 자주 어겼고 수량도 잘 지키지 않았지만, 소련은 기한과 수량을 철저하게 지켰다.[42] 대표적인 예시를 들자면, 독일은 소련에게 순양함 '류트조프'를 인계해주기로 했는데 각종 기계장치와 장비 없이 선체만 보내주었고, 43년에 인수를 마무리짓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독일은 1941년에 가장 많은 물자를 보내주기로 약속했지만 6월 22일에 소련을 침공했다.[43] 독일 공산당은 나치에 의해 해산 전까지 36만명의 당원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이들이 모두 처형된 것은 아니다.[44] 스탈린에 충성하는 독일인들은 당연히 송환되지 않았고, 이들은 독소전 때 소련을 위해 일했으며, 독소전이 끝나자 동독 정권을 세우는 데 일조한다.[45] 당시 일본 총리. 애당초 일본이 독일과 동맹을 맺은 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일본에게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는 막장외교를 보였고, 결국 당시 일본 내각은 외교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사퇴한다.[46]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