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식스
Essex
고대 영어: Ēast Seaxna Rīce, Ēastseaxe
영어: Kingdom of Essex
라틴어: Regnum Orientalium Saxonum
527~825
영국의 고대 7왕국 시대에 앵글로색슨족이 세운 왕국 중 하나다. 초기의 정착지는 1965년 런던 대확장 이전 미들섹스 주의 영토였다. 주요 도시는 영국의 수도 런던으로 에식스의 수도가 룬덴(런던)이었다.
이 왕국은 2명의 국왕이 공동 통치를 하는 기간도 존재했고 7세기 중반에는 머시아의 속국으로 전락하였으나 명목상으로는 계속해서 존재했다. 9세기 말에는 웨식스의 세력권 아래서 웨식스의 왕자들이 다스리는 하위 왕국으로 존재하다가 웨식스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웨스트랜드 에식스는 1958년 휴즈사의 H-34 헬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헬기이다. 첫 비행은 1958년에 했으며, 제식 도입된 것은 1961년이다. 포클랜드 전쟁에도 실전 투입된 헬기이다.
19세기 초에 활동했던 에식스의 이름을 딴 미국 메사추세츠주 낸터킷 선적의 포경선으로 1820년 11월 20일 남태평양에서 향유고래에 받혀 침몰했다.
길이는 27m고 배수량은 238톤이었다. 침몰 당시 선장 조지 폴라드 주니어, 1등 항해사 오웬 체이스, 2등 항해사 매튜 조이, 급사 토마스 니커슨 등 20명이 승선해 있었고[1] 침몰 후 구명 보트 세 척에 나눠타고 표류를 시작했다. 표류 과정에서 식량이 떨어지자 처음에는 먼저 사망한 사망자를 먹기 시작했다가 극한의 상황에서는 제비뽑기로 생존자 중 한 명을 죽여 연명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들은 침몰한 위치에서 남동쪽에 위치한 이스터 섬을 목표로 했는데 사실 해류상 서쪽에 위치한 마르키즈(Marquesas) 제도나 소시에테(Societe) 제도를 목표로 삼는 것이 항해에 더 용이했다. 그러나 그 섬들이 식인종들이 사는 섬일 거라는 편견[2] 때문에 이스터 섬을 목표로 삼아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해 94일간의 비참한 표류로 이어진다. 이렇게 이들은 살 수 있는 기회를 그저 편견으로 날려버리고 오랜 표류 끝에 칠레에 도착했다. 생존자는 21명 중 1등 항해사 보트에서 세 명, 선장 보트에서 두 명[3] 총 5명이 살아남았고 2등 항해사 보트는 전원이 사망했다. 그 외에 표류 중 도착한 헨더슨 섬에 남았던 생존자 세 명은 다른 선박에 구조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꽤 유명해져서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과 에드거 앨런 포의 '낸터킷의 아더 고든 핌 이야기'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모비 딕에서는 '향유고래에게 공격당해 침몰한 포경선'이라는 소재를, '낸터킷의 아더 고든 핌 이야기'에는 표류 중 제비뽑기로 희생자를 선정해 식인을 한다는 소재를 제공했다.
어쨌든 이들은 사람을 죽여 식인했기에 재판을 받았다. 정상 참작이 되기는 했지만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이라 그 부분에서 유죄가 성립되어 오래 복역하지는 않았지만 몇년 정도 투옥되었다. 하지만 생존자 모두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생존자인 오웬 체이스(1787~1859)는 치매에 걸렸을 때조차 먹을 것을 썩을 정도로 모아두고 사건을 잊지 못하면서 괴로워했다고 한다.
'바다 한가운데서'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룬 논픽션이 출간되어 있다. 표류나 식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면 읽어볼 만 한 책이다. 그리고 이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하트 오브 더 씨가 2015년 12월 3일에 국내에서 먼저 개봉(북미는 12월 11일 개봉)했다. 주인공이 바로 오웬 체이스다.
1799년에 건조되어 취역한 미 해군 군함으로 19세기 초에 미국의 첫 대외 원정인 1차 바르바리 전쟁에서 활약했다. 이후 1814년에 미영전쟁에서 영국 해군에 의해 나포되어 HMS Essex로 개명되고 영국 해군 소속으로 활약했다가 1837년에 처분되었다.
에식스급 항공모함 참조.
위의 함급의 1번함 CV-9 에식스를 의인화했다. 에식스(전함소녀) 참조.
위의 함급의 1번함 CV-9 에식스를 의인화했다. 에식스(벽람항로) 참조.
1. 영국의 칠왕국
고대 영어: Ēast Seaxna Rīce, Ēastseaxe
영어: Kingdom of Essex
라틴어: Regnum Orientalium Saxonum
527~825
영국의 고대 7왕국 시대에 앵글로색슨족이 세운 왕국 중 하나다. 초기의 정착지는 1965년 런던 대확장 이전 미들섹스 주의 영토였다. 주요 도시는 영국의 수도 런던으로 에식스의 수도가 룬덴(런던)이었다.
이 왕국은 2명의 국왕이 공동 통치를 하는 기간도 존재했고 7세기 중반에는 머시아의 속국으로 전락하였으나 명목상으로는 계속해서 존재했다. 9세기 말에는 웨식스의 세력권 아래서 웨식스의 왕자들이 다스리는 하위 왕국으로 존재하다가 웨식스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2. 영국의 에식스(주)
3. 영국 웨스트랜드 사의 헬리콥터 웨스트랜드 에식스
웨스트랜드 에식스는 1958년 휴즈사의 H-34 헬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헬기이다. 첫 비행은 1958년에 했으며, 제식 도입된 것은 1961년이다. 포클랜드 전쟁에도 실전 투입된 헬기이다.
4. 미국의 포경선
19세기 초에 활동했던 에식스의 이름을 딴 미국 메사추세츠주 낸터킷 선적의 포경선으로 1820년 11월 20일 남태평양에서 향유고래에 받혀 침몰했다.
길이는 27m고 배수량은 238톤이었다. 침몰 당시 선장 조지 폴라드 주니어, 1등 항해사 오웬 체이스, 2등 항해사 매튜 조이, 급사 토마스 니커슨 등 20명이 승선해 있었고[1] 침몰 후 구명 보트 세 척에 나눠타고 표류를 시작했다. 표류 과정에서 식량이 떨어지자 처음에는 먼저 사망한 사망자를 먹기 시작했다가 극한의 상황에서는 제비뽑기로 생존자 중 한 명을 죽여 연명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들은 침몰한 위치에서 남동쪽에 위치한 이스터 섬을 목표로 했는데 사실 해류상 서쪽에 위치한 마르키즈(Marquesas) 제도나 소시에테(Societe) 제도를 목표로 삼는 것이 항해에 더 용이했다. 그러나 그 섬들이 식인종들이 사는 섬일 거라는 편견[2] 때문에 이스터 섬을 목표로 삼아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해 94일간의 비참한 표류로 이어진다. 이렇게 이들은 살 수 있는 기회를 그저 편견으로 날려버리고 오랜 표류 끝에 칠레에 도착했다. 생존자는 21명 중 1등 항해사 보트에서 세 명, 선장 보트에서 두 명[3] 총 5명이 살아남았고 2등 항해사 보트는 전원이 사망했다. 그 외에 표류 중 도착한 헨더슨 섬에 남았던 생존자 세 명은 다른 선박에 구조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꽤 유명해져서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과 에드거 앨런 포의 '낸터킷의 아더 고든 핌 이야기'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모비 딕에서는 '향유고래에게 공격당해 침몰한 포경선'이라는 소재를, '낸터킷의 아더 고든 핌 이야기'에는 표류 중 제비뽑기로 희생자를 선정해 식인을 한다는 소재를 제공했다.
어쨌든 이들은 사람을 죽여 식인했기에 재판을 받았다. 정상 참작이 되기는 했지만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이라 그 부분에서 유죄가 성립되어 오래 복역하지는 않았지만 몇년 정도 투옥되었다. 하지만 생존자 모두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생존자인 오웬 체이스(1787~1859)는 치매에 걸렸을 때조차 먹을 것을 썩을 정도로 모아두고 사건을 잊지 못하면서 괴로워했다고 한다.
'바다 한가운데서'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룬 논픽션이 출간되어 있다. 표류나 식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면 읽어볼 만 한 책이다. 그리고 이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하트 오브 더 씨가 2015년 12월 3일에 국내에서 먼저 개봉(북미는 12월 11일 개봉)했다. 주인공이 바로 오웬 체이스다.
5.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지명
6. 미국 해군의 전함
6.1. 미 해군 소속의 프리깃함
1799년에 건조되어 취역한 미 해군 군함으로 19세기 초에 미국의 첫 대외 원정인 1차 바르바리 전쟁에서 활약했다. 이후 1814년에 미영전쟁에서 영국 해군에 의해 나포되어 HMS Essex로 개명되고 영국 해군 소속으로 활약했다가 1837년에 처분되었다.
6.2. 에식스급 항공모함
에식스급 항공모함 참조.
6.2.1. 전함소녀의 캐릭터
위의 함급의 1번함 CV-9 에식스를 의인화했다. 에식스(전함소녀) 참조.
6.2.2. 벽람항로의 캐릭터
위의 함급의 1번함 CV-9 에식스를 의인화했다. 에식스(벽람항로) 참조.
[1] 원래 21명이었으나 한 명이 9월에 에콰도르에서 하선했다.[2] 이후 프랑스가 점령하면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를 이루지만 당시에는 아직 원주민들이 각기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3] 제비뽑기 사태가 여기서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