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터 섬
라파누이어: Rapa Nui
스페인어: Isla de Pascua'
영어: Easter Island
에스페란토: Paskinsulo, Paska Insulo
1. 개요
남태평양에 위치해 있는 조그마한 화산섬. 오세아니아 폴리네시아 지역의 동쪽 끝으로 현재 칠레 영토이나, 내부적으로 분리독립 목소리가 있는 곳이다. 실제 면적은 163.6 ㎢로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도(113.5 ㎢)보다 약간 큰 정도, 울릉도의 약 2배, 서울특별시의 약 1/4, 제주도의 1/10 정도 크기이다. 인구는 2017년 통계에 따르면 약 7,700명. 신비의 거석상 "모아이"로 유명하다. 인구의 약 절반 정도가 원주민으로 분류되며, 스페인어와 라파누이어가 쓰인다.
1722년 네덜란드인 탐험가 야코프 로헤베인(Jacob Roggeveen)이 이 섬을, 유럽인 최초로 발견했을 때가 마침 부활절(Pasen, Easter day)이라서 이름이 이스터 섬(Paasch-Eyland, Easter Island)이 되었다. 이스터(Easter)는 영어 이름이고, 현재는 칠레 영토이므로 역시 부활절을 의미하는 스페인어 파스쿠아(Pascua)라고도 표기된다. 원주민들이 쓰는 이름은 '''라파누이'''(Rapa Nui)인데 원주민 말(라파누이어)로 큰 땅이라는 뜻.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라파누이 국립공원'''(Rapa Nui National Park)으로 등재되어 있다. 또한 '테피토오테헤누아(Te pito o te henua, 세계의 배꼽)'라고도 불린다.
칠레 본토와 3,000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그나마 제일 가까운 나라가 칠레다. 가는 방법도 화물선을 얻어타고 가지 않는 이상, 남미로 들어가서 칠레의 산티아고를 통해 들어가거나, 도쿄를 통해 오세아니아 지역의 타히티로 들어가서 비행기 타고 가는 방법밖에 없다. 어차피 타히티도 만만치 않은 오지라서, 남미의 허브 공항 중 하나인 산티아고에서 출발하는 게 그나마 저렴하고 편수도 많다. 산티아고와 이스터 섬의 거리는 3,700km이다. 비행 시간은 6시간.
특산물도 딱히 없고 숲도 없는 황무지에 가까운 태평양의 외딴 섬이지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섬들 곳곳에 몇 미터가 넘는 석상, 모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걸 보려고 연 10만명 정도의 관광객이 방문한다. 모아이는 당시 이 섬의 풍부한 식생을 바탕으로 하여 채석장에서 통나무를 굴려 석상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양쪽에서 사람이 줄로 당겨서 한발 한발 걷게 했다는 설이 대두되었다. 다만 이렇게 걷게하는 건 소형 모아이만 가능하기 때문에 대형 모아이들을 운반할 땐 나무를 사용했다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한국 기준으로, 이동 거리, 시간, 비용 등을 따졌을 때, 가장 방문하기 어려운 여행지 중 하나로 꼽힌다.
한국에서는 가수 서태지가 8집 "Atomos"의 테마 중 하나로 이스터 섬을 정하고 타이틀곡을 모아이로 이름 붙였는데, 이 곡의 뮤직 비디오를 찍기 위해 실제로 방문한 적이 있다. 서태지 이전에도 각종 어린이용 과학 서적 등에 무 대륙 등과 엮여서 소개되었으며[4] 그 때문에 은근히 인지도는 있던 편. 그 외에도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제작팀이 방문한 적이 있다. # "모아이 석상의 비밀을 찾아서 칠레 이스터섬"(600회, 2019년 4월 27일)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2. 역사
남태평양 한 가운데 있는 이 섬은 오랫동안 변변히 큰 포유류도 없고, 지나가던 새와 나무밖에 없었다. 이 섬에 인간이 도착한 것은 세계적인 대항해 민족인 폴리네시아인들이 태평양의 여러 섬으로 진출했던 대항해의 결과였다.
이 섬의 전설에 따르면 히바( Hiva )라는 섬에서 온 호투 마투아(Hotu Matu'a)와 그가 이끌던 부족들이 섬에 상륙한 최초의 인류라고 하며, 이에 따르면 그 기원은 폴리네시아 계열으로 추정된다.
구전 전승과 고고학적 연구 결과와 얼마 안 되는 서양인들의 탐험 기록에 의하면 이 섬의 역사는 고립된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문명의 성취가 있었음에도 결국 몰락과 붕괴를 한 사회로 알려져 있다. 이스터 섬은 유지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개발이 어떻게 한 사회를 무너뜨리는지[5] 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받아들여진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토르 헤이에르달은 이스터 섬의 문명이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학계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이 학설의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발사나무로 만든 뗏목 콘티키호를 제작하여 직접 남미에서부터 남태평양을 횡단하는 탐험에 성공했다. 비록 그의 주장은 헛점이 많았지만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탐험은 남아메리카에서 이스터 섬으로 가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인 훔볼트 해류를 예인선으로 배를 끌어서(...) 통과했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으며, 예인선 없이 이루어진 비슷한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따라서 고대 남미인도 현대적인 동력 엔진을 탑재한 예인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전까지는 그의 탐험은 사실 학술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6] 이스터 섬의 문화나 원주민들의 DNA 분석 결과, 동식물의 분포 등 모든 점에서 이스터 섬은 남아메리카가 아니라 폴리네시아와 강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2.1. 인류의 도착과 발전
최초의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이스터섬에 도착한 시기에 대한 추정치는 서기 300년경에서 1200년경까지 학설이 다양하다. 고고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한 최선의 추정치는 서기 1200년경이라는 설이 있다. 원주민들의 정착 초기에는 넓은 숲을 포함한 풍부한 식생과 이를 바탕으로 한 고래잡이, 새잡이, 열매채취, 제한적 농업까지 이루어지며 발전을 이루었다. 대략적인 계산으로는 정착 전에 1억 그루 가량의 야자나무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스터 섬은 다른 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한 차례 '운 좋게' 폴리네시아인들이 도착한 이후로, 1722년 유럽인이 섬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폴리네시아 사회와의 지속적인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폴리네시아인들은 카누를 이용한 뛰어난 항해술을 가지고 있어서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개척하고 서로 교역도 할 수 있었지만, 사방 수천 킬로미터 내에 다른 큰 섬이 하나도 없는 외딴 섬인 이스터 섬에 도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주변에 핏케언 제도, 투아모투-갬비어(Tuamotu-Gambier) 제도, 마르키즈(Marquesas) 제도의 히바오아 섬 등이 있기에 이 섬들을 전진기지삼아 도착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최초의 고대 원주민이 이스터섬에 어떻게 도착할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이스터 섬에 살던 원주민들이 남미 대륙으로 이동한 것은 1722년 네덜란드인이 도착하기 훨씬 전일 것이라고 유전체 증거를 통해 밝혀졌다. 최신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스터 섬 원주민들이 1300년과 1500년 사이에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접촉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스터섬 원주민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의 접촉을 보여주는 유전체 데이터 폴리네시아 지역에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라는 안데스 고구마가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있었다. 때문에 폴리네시아인들과 아메리카 대륙의 교류가 있었음을 추측하고 있었다.
2.2. 이스터 섬과 문명의 그림자
하지만 이후에 가속화된 경쟁적 석상 쌓기, 즉, 모아이 건설로 인하여 파멸이 시작된다. 섬의 부족들은 종교적/주술적 의미로 이 모아이 상을 세웠으며, 처음에는 작게 만들어졌지만 점점 더 커다란 모아이가 만들어졌다. 큰 모아이를 만드는 것으로, 섬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힘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즘으로 보자면 모아이는 '''이렇게 큰 모아이를 만든 것이 자랑.moai''' 같은 용도로 쓰였던 것이다. 유럽 중세에 교회 높이로 경쟁한 것이나 현대 국가도 거대한 랜드마크를 만드는 것처럼.
석상이 만들어진 곳은 섬의 중심부에 있는 채석장이며, 나무를 이용해서 해안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만드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이 석상들을 해안까지 옮기려면 대량의 나무가 필요하다보니 섬의 나무는 빠른 속도로 소모되기 시작했다.[7] 물론, '''모아이만''' 만드느라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려면 식량을 생산할 밭을 만들어야 했고, 밭을 만들려면 나무를 베어내고 개간을 해야 했다. 또한, 해산물을 얻으려면 카누를 만들여야 했는데 카누를 만들려면 또 나무를 베어내야 했다. 하지만 실용적인 목적이 없는 모아이 만들기에도 엄청나게 많은 나무가 쓰였던 것은 확실하다는 게 정설이었다.
모아이를 밧줄로 묶어 뒤뚱거리게 하며 모아이를 옮겼다는 가설이 대두되면서 나무를 사용했다는 설은 힘을 잃었으나, 크기가 비교적 큰 모아이를 옮길 때엔 나무를 쓰는 게 차라리 나으므로 밧줄과 나무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모아이 운반법이 혼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나무를 깔아 옮긴다는 1차적이고 그럴듯한 방법이 밧줄로 운반하는 방법 때문에 완전히 무시되었을 가능성보단 경우에 따라 사용되었을 쪽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모아이 운반법에 대한 가설은 차치하고, 이스터 섬에서 나무라는 중요한 자원이 거진 말라버린 것은 사실이다. 나무가 사라지면서 섬 전체가 사막화되기 시작하여 들여왔던 가축도 닭만 남기고 다 사라졌으며, 농사마저도 짓기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돌뿌리 농법'''이라는 대체 수단을 쓰기 시작하는데, 석상을 만들다가 나온 돌멩이나 바위를 깨서 만든 돌멩이를 그나마 상태가 나은 땅 위에 올려놓고 그늘을 만들어 거기에서 토란 비슷한 뿌리 식물을 키운 다음 어느 정도 자라면 그 돌멩이들이 뿌리식물을 지탱해서 척박한 땅 위에 서 있게 해주는 농법이다. 하나하나 식물에 맞춰서 돌멩이를 움직여줘야 했으므로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 모아이 하나 만드는 데 필요한 바위로 수만 평의 농지에 필요한 돌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나무와 돌 등의 자원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주민들은 더욱 큰 석상을 지으려 했다. 그것도 자원이 인구를 지탱하기에도 벅찰 정도였음에도 큰 공사가 많이 단행되었다. 마치 잃을 게 없는 사람이 마지막 행운을 바라는 심정으로 도박에 돈을 걸듯이, 자멸에 박차를 가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8] 다만, 종교적인 목적만으로 모아이를 세운 건 아니었다. 자원이 한정되다 보니 서로 세력을 만들고 전쟁에 이겨 자원을 차지하려는 쟁탈전이 치열해지게 되는데, 쟁탈전에서 이기려면 머릿수가 많아야 하고, 사람을 모으려면 힘을 과시해야 하므로 더 큰 석상을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석상을 만드는 일은 자원의 고갈 속도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이런 악순환 끝에 섬의 나무는 거의 베어졌고 마지막 나무가 베어지는 순간까지 섬의 중심에서는 모아이가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실제로 완성되지 못한 모아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다만, 1722년 유럽인들이 도래했을 때 이스터섬에 작은 소형 나무 몇그루는 있었다고 한다.
섬에서 나무가 모두 사라지자, 카누마저 만들 수 없었다. 카누도 없으니 이스터 섬은 배 한 척 없는, 문자 그대로 '섬'이 되어 버렸고 당연히 수상 자원을 구할 수도 없게 되었다. 중요한 자원인 나무가 없어지자, 섬의 생활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매우 짧은 기간 동안은 위태로운 평화기가 지속된 듯 보이나,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믿어온, 모아이를 만드는 행위가 사실은 섬의 자원을 무의미하게 소모시키는 행위였다는 것을 깨달은 주민들 사이에서는 큰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과정에서 모아이의 눈이 파괴되고 모아이를 쓰러뜨리는 행위가 벌어졌다. 대부분의 모아이는 이 때 쓰러지고 파괴되었는데, 현재 섬에 세워져 있는 모아이는 대부분 다시 세운 것이다.[9]
정리하자면 이스터 섬에 인간 상륙 → 섬의 자원을 이용하며 인구 증가 → 인구 포화상태, 자원이 고갈되기 시작 → 남은 자원을 사이에 둔 분쟁이 커짐 → 분쟁에서 이기려면 지지자들을 끌어모아야 하고 그러려면 힘을 과시할 필요성이 생김 → 더욱 대형화된 모아이로 인한 자원의 고갈 속도 가속화 → 식생의 황폐화 → 황무지화 → 바다새의 멸종, 선박용 목재의 부족으로 인하여 주요 식량 자원인 고래 사냥이 불가능 → 토지의 척박화로 인한 대규모 식량 부족 → 정치체제 붕괴로 이어지는 다이나믹 막장 롤러코스터를 보여준다. 인구 증가가 정점에 다다른 시점부터 사회 시스템의 완전 붕괴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00년.'''
이스터 섬이 동남아시아처럼 열대우림이 우거지는 곳이 아니며, 의외로 나무가 빨리 자라지 않는 기후인 데다가 토양이 침식에 취약하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결국, 섬의 주민들은 전쟁과 식량 자원의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으로 대다수가 사망했다. 섬은 문명 수준이 전성기의 300~400년 이전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유럽인들에게 발견된다.(1722년.) 당시의 인구는 전성기의 20분의 1밖에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0]
모아이 석상과 이스터 섬을 연구한 학자는 '''이 섬의 역사를 연구하면 할수록 모아이 석상을 증오하게 된다'''[11] 라는 말까지 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식량이 떨어져 식인 문화까지 생겼으니, 가루를 내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할 만도 할 것이다. 이스터 섬의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이스터 섬의 언어에는 식인에 관련된 관용어구[12] 가 많이 남아있을 정도로 식인이 일반적이었으며, 그만큼 이 섬은 피폐해져 있었다. 다만, 식인은 원래 폴리네시아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문화이므로 식량 부족으로 식인을 하게 됐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지구의 미래 모델로도 여겨질 수 있다. 즉, 자원 낭비를 한 '계'가 어떻게 무너지는가에 대한 중요한 증거.[13]
2.2.1. 숲이 사라진 이유에 관한 의문과 대답
그러나 석연찮은 점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아무리 기념물적 구조물이 중요하다 해도 직접적으로 먹고 사는데 영향을 끼치는 나무가 다 없어져 가버리는데 나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현지인들이 그걸 무시하고 계속 베어 없애버릴 수 있었을까 싶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통나무를 밑에 깔아서 모아이를 옮겼다면 그걸 버리지 말고 남겨두었다가 다음 모아이를 만들고 옮길 때 다시 쓰는 게 나무를 베는 시간도 절약하고 나무도 아끼는 등 더 효율적이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의문도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답변으로 내셔널 지오그래픽 2012년 7월호에 실린 기사가 있다. 위 기사에 따르면 석상을 밧줄로 묶은 뒤 양쪽에서 교대로 잡아당겨 석상이 뒤뚱거리며 앞으로 걷는듯이 옮겼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이러한 방법을 사용했다면 이스터 섬의 문명이 모아이를 건설하기 위해 통나무를 베다가 생긴 무분별한 환경파괴로 멸망했다는 가설은 힘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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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4.4톤의 모아이석상을 이러한 방법으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실험에 따르면 석상을 1시간에 약 100미터 옮길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이러한 반론들 역시 강력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인간이 고립된 섬에 들어왔을 때 토착 동식물을 전멸시킨 경우는 한두 번이 아니며 가깝게는 대한민국의 마라도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현대 사회에서도 버젓이 진행되고 있는데 지구온난화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각 나라들이 자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이산화탄소 배출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든지, 혹은 열대우림 벌채를 가속화한다든지 하는 사례. 인간 개인의 생각으로는 환경적 자살행위에 가까운 행위가 인간 집단과 사회적 관계 등이 얽히면서 버젓이 자행되어 붕괴까지 이르렀던 것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한두 군데의 일만도 아니다.
그리고 나무를 덜 소모하는 석상 이동법을 찾아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통나무 벌채가 모아이와 관계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당시에 석상을 이동하는 방법이 이미 실전된 상황에서 당시 원주민들이 나무를 덜 소모하는 방법으로 석상을 옮겼다는 것 자체를 증명할 방법은 없다. 무엇보다도 '이스터섬이 화산 활동으로 생성된 후 장장 50만 년 동안이나 빙하기 등을 꿋꿋이 살아남았던 야자수숲이 어떻게 인간이 들어오자마자 거의 수백 년 만에 없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에 대한 대답은 되지 않는다.
보다 근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스터 섬의 숲이 전멸한 계기는 인간의 벌채만이 아니라 이스터 섬에 사람이 정착하면서 같이 유입된 쥐에 의한 것도 크다고 한다. 쥐를 들여온 이유는 폴리네시아인들은 쥐를 식용으로 길렀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의 야자수로 자라야 할 야자 열매가 땅에 떨어지는 족족 쥐들한테 계속 먹히다 보니... 실제로 당시 야자열매에 쥐의 이빨 자국이 발견된 경우가 많다고. #
2.2.2. 반론
관련 링크
가이아 이론이나 환경주의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아주 좋은 사례기 때문에 폭넓게 인용되었다. 그리고 2010년대까지 중고등학교 교사들이 이야기하는 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주요 과학 잡지에 발표되는 연구는 자뭇 조심스런 내용을 말하고 있다. 정착 이후 인구 증가와 자연 환경 파괴, 인구 정체와 어느 정도의 감소까지는 상식적인 선에서 인정되지만 자체적으로 균형점을 찾았으리라 짐작되고 있고, '종교와 기념상과 전쟁에 미쳐서 소수만 남아 석기 시대로 돌아가 지옥도인 것을 유럽인이 발견해 구원했다'는 식의 풀이는 점점 부정되는 분위기다. 유럽인이 도래하며 공동체를 파괴했고, 후손들은 구전 기억을 잃고, 인구 급감과 삼림의 소멸 역시 유럽인의 식민지화 시기와 연관됐다는 증거가 축적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것이 이스터 섬의 멸망의 원인은 될 수 없었다고 한다.
1722년, 네덜란드인 탐험가 야코프 로헤베인(Jacob Roggeveen)이 유럽인 최초로 이스터 섬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이스터 섬의 인구가 3,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다만 이스터 섬 최전성기의 인구가 최대 15,000명으로 추산되는 실정이고, 18세기의 선원들이 인구 조사를 하려고 섬을 방문한 것도 아니므로 섬이 인구 측면에서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는 건 부정되지 않는다.[14]
이 또한 위와 같이 기존을 학설을 뒤집었다고 주장하는 기사.#2 고고학자인 칼 리포와 테리 헌트는 이스터 섬에서 수집한 마타아라는 도구가 기존에 알려졌던 용도인 ‘무기’가 아니라 농경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내용을 antiquity라는 잡지를 통해 발표했다. 화살촉과 같이 생긴 세모꼴의 흑요석을 막대기 끝에 끼운 형태의 마타아는 이스터 섬 원주민들이 서로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칼 리포 등은 마타아의 용도를 연구한 끝에 이 도구가 끝이 뭉툭하고 모양이 제각각이며, 농경지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을 볼 때 농경과 관련된 도구라고 주장하여 소위 "전쟁 연관설"을 부정했다. 이들은 또한 1700년대에 유럽인들이 오기 전까지 전통적인 학설과는 달리 인구수는 줄곧 많지 않았으며, 유럽인들이 퍼뜨린 질병 때문에 이스터 섬이 쇠락하게 되었다고도 주장했다. 흑요석 도구라면 풀떼기를 베는 것에는 적합하겠지만, 위 연구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정작 끝이 뭉툭해서 저걸로 무엇을 했을지 의문스럽다. 원문은 #3.
2.3. 재안정화
그러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후기는 그 정도로 막장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게, 후기에 자원이 떨어져서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것은 맞으나 섬에 살던 세 부족이 그렇게 멍청한 인간들은 아니었다. 모아이 건설의 중지로 더 이상의 황폐화는 막았지만 기근, 식인, 전쟁의 반복으로 섬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가 되어있었다.[15] 결국 1640년경에 기존의 사회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되어 복구될 가능성도 없어지면서 다른 형태의 시스템이 등장하였다.
모아이 숭배와 신앙은 사라졌고, 후기 이스터 섬에서 나타난 새로운 신앙은 조인(鳥人) 마케마케였다. 부족들은 당장 먹을 게 없는데도 쌈박질이나 하는 멍청한 행각은 그만두고 버드맨 의식[16] 이란 평화로운 방식으로 섬을 주도하는 부족을 1년마다 뽑고 자원을 분배했다. 물론 자원이 극단적으로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도 자신들의 미래를 점치기는 힘들었다. 이들은 식량부족으로 사탕수수 즙을 먹었는데, 그것 때문에 20세가 될 때까지 치아가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이렇듯 최소한 어느 정도의 희망은 있었지만 이 조그만 희망마저 철저히 깨부숴버린 건 바로 남아메리카에서 찾아온 페루인의 도래다.
2.4. 외지인의 도래와 대멸망
당시 페루인들은 그나마 삶을 영위하고 있던 이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데려갔으며 당연하게도 노예로 끌려간 사람 중 살아돌아온 사람은 얼마 없었다. 게다가 유럽인이 정기적으로 상륙하면서 섬에 없던 전염병이 들어섰다. 남아메리카 노예상들의 침공과 전염병의 유행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대부분이 유럽인들을 따라 섬을 탈출했고 이 결과 19세기 말 인구수는 100명 정도로 줄었다.
2.5. 칠레령이 된 이후
1888년 칠레가 이스터 섬을 차지했다. 1953년까지 이스터 섬은 항가로아 마을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칠레에서 특허를 준 회사의 목장이었고, 1966년까지는 칠레 해군이 이스터 섬을 관리했다. 그리고 칠레에서 온 자본가들과 관리자들이 섬 주민의 재산을 거의 모조리 빼앗고 작은 마을들에 몰아 넣었다. 이는 섬 주민들을 저임금 노동자로 부려 먹기 위해서였는데 나중에 20세기 초 언론에서 문제가 되고, 프랑스 핏줄이 섞인 라파누이 원주민들 때문에 프랑스 정부가 문제 삼으면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1966년이 되어서야 이스터 섬 주민에게 칠레 시민권이 주어졌으니 그때까지는 칠레 시민으로도 인정도 못 받고 창살 없는 감옥에 산 셈이다. 그 뒤로도 쭉 학교에서 자기 언어도 말하지 못하게 하는 문화 탄압을 받았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군사 독재 정권에서는 아예 라파누이어를 금지하려는 시도도 한 번 있었다. 2007년 이스터 섬은 "특별 지역"이 되었다.
2.5.1. 칠레 정부와의 갈등 및 분리주의
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이 국제 사회에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주된 이유는 칠레 본토 출신 이주민들과 이스터 섬 원주민들의 경제적 격차. 칠레 정부는 공식적으로 10년 동안 이스터 섬으로 이민 온 사람들이 2,300명[17] 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원주민들은 그 2배인 4,000명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스터섬 인구가 1982년 1936명에서 2017년 기준, 7750명으로 증가하는 동안, 원주민 비율은 70%에서 46%로 떨어졌다.# 원주민 비율도 줄어들고, 각종 이권을 이주민들이 독차지하고 있어서 원주민들의 불만이 가중되고 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섬의 자연 환경이 캐막장인지라 주로 관광업/어업/농업[18] 으로 먹고 사는데 이스터 섬의 모아이가 크게 유명해지면서 그 유명세로 관광업이 흥하자, 칠레 이주민들이 이스터 섬으로 와서 사업을 벌였다. 칠레 이주민들은 자본을 이용해 큰 가게를 차리고 자릿세 1만 페소[19] 를 정부에 내고 장사를 하는데 칠레 이주민들이 세운 가게에서 파는 농산물은 이스터 섬에서 기른 것이 아닌 수입한 것이며 이곳의 그 유명한 모아이상도 칠레 이주민들이 만들어서 판다.
원주민들은 정부에 자릿세를 내지 못해 칠레 이주민들의 가게 옆에서 노점상으로 자기가 키운 농산물을 팔고, 자신들이 직접 만든 모아이 석상과 전통 장식품을 팔지만 칠레 이주민들의 가게에 밀려서 잘 팔리지도 않고 모아이상도 안 팔려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법대 나온 원주민도 이스터 섬에 남으면 허드렛일을 하는 등 취업 상황이 좋지 못하다. 고학력을 요구하는 일자리는 칠레 본토 출신 이주민들이 차지하기 때문이다. 칠레 본토 출신 이주민들이 운영하는 회사나 가게의 경우, 관광객들을 상대로 영업하며, 지난 몇 년간 몇 배에 달하는 매출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정작 원주민들은 더 가난해져 가는 것.
이렇게 되자, 원주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2009년과 2010년에는 원주민들이 칠레 정부에게서 독립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칠레 경찰이 이스터 섬에 파견되어 공기총을 이용한 무력 진압을 했지만, 공기총에 맞은 원주민들이 피를 흘리고 부상을 입는 경우까지 발생해 오히려 원주민들의 불만은 늘어났다.
현재 원주민들은 국제 사회에 칠레 정부로부터 독립을 호소 중이며, 칠레 정부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서 원주민 보호 구역을 늘리고 배수 시설을 점검하는 등 불만을 잠재우려고 칠레 원주민들에게 온갖 약속을 해주고 있으나 원주민들은 항상 정부는 말만 그랬다면서 이젠 더 이상 안 믿는 눈치다.
2010년에는 히토랑이 부족이 피노체트 행정부 시절에 빼앗긴 땅에 지어진 호텔을 점거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칠레 경찰은 공기총을 사용하면서까지 이들을 진압했고, 25명이 부상당했다. 6개월간의 점거 끝에 칠레 경찰은 점거자들을 끌어내 체포했다.
만일 독립을 하게 될 경우 섬 의회가 옹립한 라파누이 마지막 왕의 손자인 발렌티노 투키를 국왕으로 추대한 바 있어 입헌군주국으로 독립할 계획이라고 한다. # 만약 실제로 독립된다면, 덤으로 가장 고립된 국가 타이틀을 가질수도 있다.
2.6. 그 외
"원래 섬에는 지배층인 장이족(남아메리카에서 왔다고 함)과 피지배층인 단이족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단이족이 반란을 일으켜서 장이족을 모두 죽였다. 모아이는 장이족이 세운 것이다. 장이족 멸망 후 이스터섬의 문명 수준은 급격히 떨어졌다."라는 이야기가 상당히 퍼져있지만, 이는 토르 헤이에르달 등이 퍼뜨린 '''근거 없는 이야기'''다. 고고학적으로 봐도 섬에 남아메리카에서 기원한 집단이 따로 있었다고 볼 근거가 없으며, 대학살이 벌어진 흔적도 없고, 원주민들의 DNA에서도 남아메리카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스터 섬의 주민들이 모두 모아이와 관계없는 피지배층이었다고 볼 이유가 전혀 없다.
다만 이 설을 바탕으로 한 창작물은 나와 있다. 1994년작 영화 라파 누이에서는 이러한 설을 바탕으로 하여 장이족 청년과 단이족 처녀의 사랑과 도피, 전쟁을 다루고 있다. 한국에서는 백봉기 작가의 소설 '사라지지 않는 노래(2009)'에서 장이족과 단이족의 대립, 대립 후 장이족과 단이족의 혼혈족에 의해 겨우 찾아온 평화, 이들의 후손들이 문명인들에 의해 노예로 끌려가면서 그들만의 언어와 문자가 실전된 이유를 다루고 있다.
3. 자연
최근 화구 쪽에 아주 작은 묘목이 발견돼서(정말 조그맣지만) 숲을 복원할 거라는 얘기가 들려오지만 섬이 워낙 척박해서 성공 가능성은 매우 낮은 모양.
이러면 아직도 섬 전체가 나무 한 그루없는 벌거숭이라고 생각되겠지만, 오늘날에는 섬에 많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울창한 숲도 여기저기 있다. 섬이 고립되어있을때야, 새로 심을 나무를 다른 지역에서 가져올 방법이 없었지만, 인류의 기술이 발달되고 다른 지역과 연결된 이후부터는 당연히 다시 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화학 비료를 이용해서 농사도 짓는다. 오늘날에는 모아이 석상이 있는 거 말고는 웬만한 다른 섬들과 차이가 없어보인다.
섬의 가장 남쪽엔 오랑가(Oronga) 지역이 있는데 이곳에서 남쪽으로 3,600여 km를 가면 포인트 니모가 나온다. 이스터 섬은 사람이 항상 거주하는 지역 중에서 포인트 니모와 가장 가까운 곳이다.
4. 사회
4.1. 교통
마타베리 국제공항이 있다. 칠레의 LATAM 항공만 이 공항에 들어온다.
5. 문화
이런 섬에도 CF 라파누이라는 축구팀이 있다. 이 팀은 2009년 칠레의 유명 축구팀 콜로-콜로에 4대 0으로 패했다.
5.1. 롱고롱고 문자
이스터 섬에서 사용된것으로 추정된 상형문자. 미노스 문명 유적에서 발견된 선문자 A, 크레타 고대문자(파에스토스 원반), 인더스 문자 등과 함께 아직 해독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문자이다.
6. 종교
토착 종교는 크게 두 분류가 있지만 두 개를 합쳐서 '''라파누이 신화'''로 부른다.
6.1. 기원 설화
이스터 섬의 기원 설화로는 '''호투 마투아(Hotu matu'a)'''에 관한 설화가 있다.
라파 누이 신화에 따르면 호투 마투아는 자신의 2개의 카누, 혹은 2개의 카누를 엮어 만든 하나의 카누 를 타고 이스터섬, 그러니까 라파 누이에 나타났다. 그의 카누에는 '''히바의 땅''' 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온 폴리네이아인 이주자들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카나게나 해변에 상륙하였고 섬 전체로 퍼져나갔다.
6.2. 조상 숭배
그 유명한 모아이 상이 바로 조상들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후술할 조인 숭배가 생겨나기 전까지 라파 누이 인들이 믿었던 종교이다. 라파 누이인들은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생관계라고 믿었으며, 죽은 자는 산 자에게 건강이나 풍요 등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고 그럼으로써 영적 세계에서 더 나은 자리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즉 모아이 석상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인 셈,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거주지는 해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모아이 석상은 이 해변가를 따라 세워졌다. 모아이 석상들은 라파 누이인들이 영적 세계가 있다고 믿었던 바다를 등지고 서있는데 이는 모아이 석상 앞에 있을 그들의 자손들을 굽어살피기 위함이었다.
6.3. 조인 숭배
후대에 섬이 황폐화되고 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등 개판 5분 전이 되자 라파 누이인들은 조상 신앙을 버리고 새로운 종교인 조인 숭배, 그들의 말로는 '''탕가타 마누'''(조인, 탕가타는 인간을, 마누는 새를 의미.)의 신앙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조인 숭배는 비록 섬에 카톨릭이 유입되자 배척되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도 섬의 토착 신앙으로서 인기를 유지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교회의 장식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탕가타 마누, 조인 숭배에는 총 여덟 명의 신이 나타난다.
- 마케마케(Makemake) - 조인 숭배 신화의 우두머리 신이자 인간의 창조자. 풍요와 산란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 하와-투-타케-타케(Hawa-tuu-take-take) - 알을 주관하는 신이다.
- 비에 호아(Vie hoa) - 하와-투-타케-타케의 아내.
- 비에 카나데아(Vie kanadea)
7. 창작물에서의 이스터 섬
워낙 신기한 곳이라서 서브컬쳐, 특히 오컬트 관련물에서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 초고대문명설의 귀중한 소재가 되었다. 초고대문명설에서는 이곳이 무 제국이나, 레무리아 대륙이 가라앉고 남은 잔해라고 설명한다.
- 이 섬의 멸망을 모티브로 한 영화로 1994년작 영화 라파 누이가 있다. 사실 라파누이 자체가 이스터섬을 뜻하는 말이다.
- 디멘션 W에서는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코일사고로 생명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됐다.
- 개구리 중사 케로로의 5기 극장판인 기적의 4차원 섬의 주무대가 바로 이 이스터 섬이다. 그리고 본편에서는 모아이 석상이 연직 방향으로 땅 속에 들어갔다 나오질 않나, 지하에서 거대한 망치가 발견되질 않나... 쿠루루는 외계 문명이 이곳에서 두더지 게임을 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라파누이라는 이름의 발견물 겸 상륙지로 나온다. 태평양 전체를 훑다시피하는 지리학 연계 퀘스트들을 모두 통과해야 라파누이 발견용 퀘스트가 뜨는 발견물로 악명이 높다. 더군더나 퀘스트를 상대적으로 가까운 리마에서 받는 게 아니라, 멀리 떨어진 자카르타에서 받아가야 한다. 그래도 선행 퀘스트 대다수가 자카르타에서 뜨다보니 항로가 익숙해지긴 할 것이다.
- 서태지의 8집 타이틀곡 모아이의 주 배경이 되는 곳이다. 서태지가 이스터 섬으로 여행갔다가 8집 앨범 컨셉의 영감을 얻었다고 하며, 그런 이유도 모아이 뮤직비디오에서도 이 섬이 주요 배경으로 나온다.
- 에르네스토 게바라(체 게바라의 본명)와 동료인 알베르토 그라나도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남미 전역을 여행한 후 직접 쓴 여행기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이 이스터 섬을 언급한다. 두 사람은 이 이스터 섬에 가서 모아이를 구경하기 위해 목적지를 산티아고로 잡았고, 칠레 비자를 얻기 위해 수수료로 400칠레페소나 썼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두 사람이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배가 출발해서 배편을 놓치고 말았다. 한 달에 한번 있다는 항공편도 있을지 없을지 불확실한 상황이어서 결국 이스터 섬 여행은 포기해야 했다고.
- 문명 6에서는 폴리네시아어인 라파누이라는 이름의 문화 중심 도시국가로 나오며, 종주국 보너스로 모아이를 건설할 수 있다.
- 냥코 대전쟁에서는 세계편과 미래편의 스테이지로 등장하는데, 적군의 성 모양이 모아이 석상이며, 세계편의 경우 보스로 투뿔소가 2차례 나온다.
- Easter Island라는 모아이 석상을 모티브로 한 무료 디펜스 게임이 있다.
- 아웃런 2의 확장판인 SP에서는 Giant Statues라는 코스명으로 패러디됐다.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일 것[4] 서태지도 어린 시절 이걸 봤을 가능성이 높다.[5] 문명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명저 '문명의 붕괴(Collapse)'에 이스터 섬의 사회 붕괴에 대한 상세한 고찰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있다.[6] 사실 이 부분도 폴리네시안들이 고구마를 일찍부터 기르고 있단 점과 상충한다. 폴리네시안들이 남미에 들렸다가 고구마와 함께 해류를 뚫고 남태평양 섬들로 돌아왔거나, 고구마 자신이 우연히 해류를 따라 섬에 정착하게 되었거나인데 둘 중 뭐가 되었던 남미에서 폴리네시아로 오는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7] 적당한 크기의 모아이라면 나무 없이도 '걷게 하여' 옮길 수 있었지만, 후기로 가면 모아이의 덩치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끝내는 나무를 축낼 수 밖에 없게 되었다.[8] 일부 학계에서는 이 사실을 근거로 모아이가 이스터 섬 주민들이 그들의 신의 모습을 본따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원이 떨어져갈수록 신의 모습을 본딴 석상을 만들어 자원이 생기길 기도했을 것이라고. 하지만 결과는…[9] 1980년대에 한 일본 회사가 중장비를 동원해서 세워주었다고 한다.[10] 약 3~5천명 수준.[11] 외국인이 아닌 현지인이면서도 이런 말을 했다. 자국의 문화 유산임에도 이런 말을 할 정도면 얼마나 비참한 배경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12] 아침에 먹은 네 엄마의 살이 이빨에 끼어있다라는 식의 표현.[13] 지구는 닫힌 계가 아니다. 하지만 인류의 기술력이 아직 미진하여 태양 에너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인류가 소모하는 광물, 원소의 양 대비 운석으로 대표되는 외권의 자원 유입량은 상당히 적기 때문에 지구를 사실상 적어도 인간 생존 상황에 있어 닫힌 계라 봐도 무리는 없다. [14] 근데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현재도 이스터 섬의 인구는 수천명 수준이다. 현대의 기술력으로 농사를 짓고 또 외부서 물자를 가져올 수 있는 지금도 그런데 과연 과거에 저만한 인구수를 지니는 게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아무리 과거 이스터 섬이 풍요로운 섬이라고 하지만 현대보다 더 높은 인구밀도와 인구수를 보여주는 게 가능할지는...[15] 야자수가 전멸해버려서 토양 침식이 심해짐은 물론이거니와 식수를 구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16] 거창한 의식은 아니고, 험한 바다를 헤엄쳐 건넌 뒤 바위섬에 있는 새 둥지에서 알을 가져오는 것. '''가장 먼저 가져온 사람이 속한 부족이 주도 부족이 된다'''.[17] 칠레 본토인이 아닌 외국인 노동자.[18] 그나마도 관광온 관광객들한테 판다.[19] 한화 가치로 약 26만 원 가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