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전쟁
한자: 英美戰爭 또는 美英戰爭
영어: Anglo-American War 또는 War of 1812, America's Forgotten War
1. 개요
1812년 6월부터 1815년 2월까지 미국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영국령 캐나다였던 토론토 일대가 미국에 함락당하고 역으로 영국군에 의해 워싱턴 D.C.가 불바다가 되는 등 나름 치열한 전쟁이였으나, 결국 종전협상으로 뚜렷한 승자없이 마무리되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흔히 War of 1812이라고 부른다. 간혹 미국에서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매디슨의 이름을 따서 Mr. Madison's War이라고 부르거나 America's forgotten war로 부르기도 한다.
2. 전쟁 배경
미국은 독립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독립했으나, 이것은 프랑스 등 지원국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국력으로는 여전히 유럽 국가에 밀리는 신생국에 불과했다.
한편, 영국은 미국독립전쟁이 끝나고 한숨 제대로 돌릴 틈도 없이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 돌입했다. 1807년 경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유럽 대부분을 점령하고 대동맹국들 중 유일하게 저항하던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대륙 봉쇄령을 발효했다. 영국은 그 대응으로 우월한 해군력을 활용하여 프랑스 연안 곳곳을 해상 봉쇄하는데, 이는 혁명전쟁 초기부터 나폴레옹이 몰락할 때까지 실시했던 초장기간 해상차단 작전의 연속이었다. 영국 해군은 프랑스의 모든 항구도시 외곽 바다에서 무수한 전열함으로 봉쇄선을 치고 초계활동을 벌였다. 이건 군함의 숫자가 많고 숙련된 선원과 해군장교가 풍부했던 영국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영국은 프랑스의 원양 무역을 차단하고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동맹국들에 자금지원과 병력을 파견하는 등 총력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대프랑스 전략의 일환으로 영국은 프랑스와 교역하는 모든 선박들에 대한 강제검열을 개시했다. 그런데 단순히 검열에 그치지 않고 프랑스와 교역을 하는 상선에 영국에서 세금을 높이 때렸다. 세금 납부나 검열을 거부하면 깡패 같은 해군력으로 가차없이 발포해 나포했다. 여기에는 미국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미국은 전 국민이 영어를 썼던 터라 영국 탈영병들이 가장 숨기 좋은 곳이었다.[1] 더욱이 이때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지 40여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던터라 아직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의 분화가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때다. 그래서 미국 상선은 더욱 집중적인 수색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미국 내에서도 점점 불만이 고조되었는데, 직접적인 원인은 당시 미국 선원의 수준이 좋은 편에다 같은 영어를 썼기 때문에 때론 멀쩡한 '''미국인들조차 강제로 영국 해군에 징집당하는''' 황당한 경우도 일어난다는 것이었다.[2] 당연히 미국 정부는 분노했고 영국과의 관계는 다시 막장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런 영국의 강제 징집은 프레스 갱(press gang)이라 불릴 정도로 악명 높았다. 우선 영국 내에서는 아무나 보이면 잡아다 해군으로 만들었는데 시의원이 잡혀가거나 프레스 갱에 의해 끌려갔다가 막 제대한 인원을 다시 끌고 가는 등 폐해가 심각했다. 혼블로워에서도 밤중에 호각을 신호로 길거리에 나와있는 모든 남성을 무차별로 징집해가는 당시의 막나가는 상황이 잘 묘사된다. 항구와 해안 도시에서 점점 인원을 채우기 어려워지자 내륙까지 징발원들이 돌며 징집했고, 이에 마을 단위로 징발원을 공격하는 사태까지 벌어져 영국 본토에서는 징발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눈을 돌린 게 미국 상선에 탄 미국 선원이었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국의 법률 중 영국의 시민은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있는데 미국은 너무나도 신생 국가여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국 사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강제로 끌고 갔다고 억지로 변호하기는 하지만... 이는 영국이 내세우는 영국 시민이라는 기준이 한 번 영국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영국인이라는 궤변이었기 때문에, 이 논리에 따르면 당시 미국인의 상당수는 여전히 영국 시민이었고 따라서 영국은 미국 시민을 마구잡이로 징병해도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농담이 아닌게, 영국은 같은 논리로 영국군의 이동 정보를 전달한 한 영국 태생의 미국 시민을 자국민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반역죄' 로 기소했다가 미국이 반발하여 포기하기도 했다.
한편 당시 미국 북쪽에 위치한 영국령 북아메리카(British North America; BNA, 현재의 캐나다) 식민지는 전략적으로 미국에게 위험요소였다. 영국령 북아메리카는 서부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무기를 공급했기 때문에 테쿰세의 저주로 유명한 테쿰세가 티피카누 전투를 일으키는 등 영토확장에 매우 위험한 존재로 떠올랐다. 미국은 세력확장을 막 시작하고 있었기에 영국령 북아메리카까지 탐냈고, 이런 조건이 갖춰지자 제임스 메디슨 대통령은 영국에 전쟁을 선언하게 된다.
그러나 양국은 정작 '''전쟁에 대한 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다.''' 우선 영국은 대부분의 전력을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에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신경쓰기 어려웠다. 게다가 정작 선전포고를 한 미국도 영국과 친하고 교류도 많이 하는 연방주의자들의 근거지인 북부가 전쟁에 반대했고, 민병대는 주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였다. 이 시기는 아직 미국 연방정부가 힘이 매우 약하고 미국인들 사이에서 '하나의 나라, 하나의 국민'이라는 소속감이 형성되기 전이었다.[3] 이런 미지근함이 어느정도였냐면 국경 근처 민간인들은 서로 이웃사촌이라는 생각이 강하여[4] 전쟁이 시작되자 이곳 민간인들은 "우리 잘 지내는데 왜 그래"라고 반응할 정도였다. 나이아가라 근처 양군 지휘관들은 전쟁 직전까지 심심할 때 만나 술 마시고 카드 게임도 했다고 한다. 이런 점들 때문에 미국은 전쟁을 선언하고도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육군이 고작 7천명에 군함도 14척 뿐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최악은 영국과 인디언에 대한 전쟁을 선동했던 정치가들이었는데, 이들은 전쟁을 선동하면서 정작 상비군 확대나 전쟁 노력을 결집시킬 연방정부의 권한 강화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철저히 반대했다. 덕분에 제대로 된 전쟁 준비가 아닌 전쟁 선동 정치가들의 괴변과 허풍을 기반으로 시작된 영국령 북아메리카 침공은 그야말로 대참사로 끝나게 된다.
한편 미국의 선전포고 이후 영국은 아직 미국의 선전포고 소식을 듣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국 선박에 대한 강제적인 수색 명령의 수위를 낮추며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주영 미국 대사관은 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중요성을 못느껴 본국에 전달하지 않았고''' 결국 미국과 영국은 피할 수도 있었던 전쟁에 끼어들게 되었다.
3. 경과
3.1. 지상전
미합중국 육군은 전쟁 초기에는 현재 토론토인 요크도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등 여러 도시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결국 위에서 언급한 점들 때문에 서서히 발목을 잡혀 영국령 캐나다의 중심도시인 몬트리올 점령에 실패했다. 그 이유도 걸작인게, 4,500명 중 1천명은 국경 진군을 거부했고, 나머지 병력도 방어군의 허세에 공격을 포기했다. 거기다가 캐나다의 프랑스계를 포섭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프랑스계는 '''본국의 나폴레옹 체제에도 반대하며 부르봉 왕조를 지지하던 가톨릭-왕당파 성향이었기에''' 당연히 청교도 세력권의 미군을 반겨주지 않았고 미군은 캐나다 점령을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영국은 나폴레옹이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하자 병력을 아메리카로 돌릴 여유가 생겼고, 나중에는 블래든스버그 전투에서 레드 코트들이 미 육군을 격파한 후 무방비 상태에 놓인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기습해 불태워버렸다. 독립 이후 '''미국의 수도가 외국 군대에게 점령당했던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미국은 백악관과 미국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여러 관청이 불타는 수모를 겪었다. 이때 메디슨 미국 대통령의 아내 돌리 메디슨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와 기밀 서류를 안고 영국 육군이 백악관에 도달하기 직전에 급히 탈출했다.
영국군은 수도를 점령했으니 전쟁도 끝나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미국은 각 주들이 거의 독립적인 국가 수준이었고 수도가 점령되었어도 고장만 안전하면 괜찮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패배감도 느끼지 않았고 워싱턴 DC를 수복하기 위한 마땅한 반격도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영국군은 길어진 전쟁에 불만이 폭주하게 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서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상태라 전쟁이 점점 더 길어지자, '''그냥 없던 걸로 하자'''는 내용의 겐트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당시 교통과 통신 사정상, 실제 전투는 조약 체결 뒤로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전투가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스 전투인데 루이지애나에 상륙하려 한 영국군을 상대로 미군이 맞선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앤드루 잭슨이 이끄는 미 육군은 단 '''62명'''(혹은 83명)의 사상자가 나온 반면 영국 육군은 무려 '''2,034명'''[5] 의 사상자가 나와 크고 아름다운 교환비율을 달성했다. 실상은 라인배틀을 시도하는 영국 육군에 대해서 미 육군이 라이플로 무장하고 철저히 은엄폐하고 원거리 게릴라식 저격 전술을 펼친 것. 아직도 활강식 머스킷으로 무장한 영국군보다 사거리가 긴 독립전쟁 당시의 물건인 켄터키 소총으로 무장한 미군이 훨씬 먼 거리에서 사격을 가했고 이러한 전투 양상은 영국군이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투였고 결국 부대 자체가 궤멸되어버린다. 이 전과로 앤드루 잭슨은 미국의 영웅으로 부상했고, 후일 대통령이 되는 기반을 닦았다.
이 뉴올리언스 전투는 인류와 오랜 역사를 같이 해온 전열보병 중심의 대열 전투가 몰락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사실 이미 그 전에 미국 독립 전쟁 때도 미군에서 켄터키 소총으로 무장한 민병대 및 대륙군 스나이퍼들을 다수 동원해 영국군 장교를 저격하여 무더기로 죽였을 때부터 이미 허점이 드러나고 있기는 했지만... 여담으로 스나이퍼라는 단어가 탄생하고 널리 알려진 전쟁이 바로 저 미국 독립 전쟁이다.
3.2. 해전
당시 미국과 영국의 해군력은 넘사벽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은 해전에서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당시 미 해군의 최고 등급의 함선은 44문 대형 프리깃 3척과 38문 프리깃 3척이 고작이었고 나머지는 슬루프나 브릭 같은 등외함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영국 해군의 전체적인 규모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전력이었다. 하지만 그 미국의 대형 프리깃함이라는 물건이 영국의 3급 전열함이나 4급함에 준하는 스펙이었고(프리깃은 통상 5~6급함) 미 해군은 대형 프리깃의 기동성을 이용해서 최대한 함대결전을 회피하며 38문 프리깃을 상대로 하는 단함전투나 영국 상선을 상대로 사략전술을 펼쳤다. 심지어 '''미국 상원의원이 직접 사략선단을 운용하기도 했고''' 그 결과 영국 상선 '''1300척 이상이''' 전쟁 기간 동안 나포되어버리고 영국의 해상보험료도 폭등했다. 영국이 되찾은 상선은 300척에 불과했으니 상당한 피해를 준 셈이다. 미 해군은 해군 장관이 바뀌는 동시에 단함전투 대신 통상파괴로 전략을 바꿨고, 이후 영국 상선에 붙은 보험료가 급격히 치솟는 등 영국을 효율적으로 괴롭혔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단한 활약을 보인 함선은 컨스티튜션이었는데, 미 해군 사상 첫 단함전투 승전 사례를 기록했다. 미 해군이 창설되면서 유럽의 강대국들처럼 대규모 함대를 만들 형편이 안되자 6척의 대형 프리깃[6] 을 주력함으로 건조하는데 유럽 해군의 프리깃 정도는 가볍게 발라버리고 전열함한테도 '''상황에 따라서는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정도'''의 괴물로 설계했다고 한다. 사실 44문 대형 프리깃 자체가 3급 전열함과 38문 프리깃 중간에 끼인 어중간한 함급이고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대형 프리깃 운영을 잠깐 하다 낭비라고 판단하여 다들 버리거나 38문 프리깃으로 다운그레이드시켰는데, 미국의 입장에서는 이 어중간하다는 대형 프리깃을 제대로 활용한 것이다. 컨스티튜션은 38문 프리깃함인 게리에르와의 전투에서 전열함급의 방어력으로 게리에르의 포탄을 튕겨냈고 24파운드 포의 화력을 앞세워 압도적으로 발라버렸다. 영국 해군에서도 '''"사실은 전열함하고 맞장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이외에도 38문 프리깃 자바를 나포해 그곳에 있던 전열함들의 설계도와 건조 자제들도 모조리 노획해 영국 전열함 두 척의 건조에 큰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
이 함선은 '''지금도 미 해군의 현역이다'''. 미영전쟁 이후로도 활약하다가 한동안 도크에 있었는데, 컨스티튜션의 해체 기사 오보로 인해 이 상징적인 함선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고, 뒤이어 대규모 복원작업을 통해 항해까지 가능한 수준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영국의 HMS 빅토리와는 다르게 컨스티튜션은 운영 인원도 배치되어 있고, 자력항해도 가능하다.
이외에도 USS 유나이티드 스테이츠가 38문 프리깃 HMS 마케도니안을 단함 전투에서 압도했다. 이 함선은 나포된 뒤 그대로 미해군에 편입해버렸다.
그러나 컨스티튜션을 비롯한 대형 프리깃들의 활약만으로 완전하게 승리할 수는 없었다. 대형 프리깃과의 단함 전투가 어렵다는 현실을 파악한 영국 해군은 단함 전투를 금지해버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컨스티튜션과 동형함인 프레지던트는 프리깃 3척의 합공으로 나포되기도 했다. 거기다 영국은 상선 보험료가 오르는 수준이었지만 미국은 영국 전열함들의 해상봉쇄에 대해 같은 전열함으로 맞서는 것 말고는 답이 없어서 모든 해상무역로가 봉쇄될 수준이었다.
또한, 단함전투에서 미국이 무조건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36문 프리깃인 USS 체사피크와 USS 에섹스가 영국 프리깃과의 단함 전투에서 참패해 나포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외에도 캐나다와 자연 국경을 형성하는 오대호 등의 호수와 강에서도 슬루프 간의 단함전투들이 빈번하게 벌여졌으며 남아메리카, 태평양 등 지구 곳곳에서도 미해군 함정과 영국 해군 함정 간의 교전이 벌여졌다.
4. 영국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이유
당시 영국은 세계 최강 군사대국이며 육군과 해군은 양과 질 그 모든 면에서 미군을 크게 압도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상황이면 영국이 이기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 영국은 승리하지 못했는데, 이는 대내외적으로 영국이 전쟁을 수행할 여건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대내적으로 영국은 앞서 말했다시피 나폴레옹 전쟁에서 소모된 막대한 인력과 전비로 인해 애초에 미국과 또 다시 전쟁을 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이와중에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대중과 병사들의 곪아가는 불만과 장교에 대한 프래깅 행위는 폭주하고 있었으니 영국 입장에선 외부의 적보다 내부 관리부터 신경써야 할 지경이었다.
대외적으로도 매우 넓은 미국 동부 지역 일대를 육해군으로 평정하고 봉쇄하는 것은 총력전을 각오하지 않는 한 애초부터 무리였고, 그동안 유럽에서의 전쟁에 익숙했던 영국군이 미국식의 게릴라, 대규모전의 전쟁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도 전쟁에 악영향을 끼쳤다.
컨스티튜션이 프리깃 답지 않은 거대한 함체에 고화력의 무장을 갖춰 단함 전투에서 영국 프리깃을 압도한 것도 그렇거니와 전열보병 전투에 익숙했던 영국군 지휘관들이 미국에선 독립전쟁 시기 대륙군을 계승한 미군의 게릴라식 저격전술에 말려들어 가장 먼저 자기들이 저격을 맞고 죽는 바람에(...) 지휘체계가 붕괴된 것도 큰 타격이었다.
거기다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포섭해 미국과의 전쟁에 요긴하게 써먹으려고 했던 것도 애초에 이들의 숫자가 적고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있어 전쟁을 결정적으로 뒤집을 수 있는 수단은 되지 못했다.
5. 기타
미국은 전쟁을 겪으면서 통합된 연방 정부 체제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일단 미군 병력 대다수가 자기 고향 아니면 다른 주의 지역을 방어하는데 소홀히 하거나 심지어 탈영했을 뿐더러 각 주들이 정부 아래에서 제대로 된 단합도 안되었다. 심지어 각 주마다 독자적인 화폐를 발행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 전쟁 이후 미국은 본격적으로 연방 정부 체제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노력을 가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갈등이 빚어져 탄생한 것이 바로 남북전쟁.
이후 미군은 본격적인 상비군 기틀을 갖추고 해군 증강의 토대도 마련되었다. 당시 미해군은 글로벌 관점에서 보자면 약소한 해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 해안 방어를 넘어서 전세계에서의 자국 무역 항로 보호를 목표로 삼았고''' 미영전쟁을 통해 해군력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었다. 그래서 미 의회 차원에서 해군 증강에 대한 지원이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워싱턴 D.C와 가까웠던 메릴랜드의 메켄리 요새는 영국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성조기는 계속 게양되어 있었고 이를 보고 감명받은 변호사 프랜시스 스콧 키가 성조기를 찬양하는 시를 쓰면서 현재 미국의 국가인 "The Star-Spangled Banner"가 탄생하였다. 그런데 멜로디는 영국 노래 멜로디로 작곡가도 당시 영국에 살고 있었다. 다만 과거에는 이미 있는 곡에 가사를 새로 붙이는 콘트라팍툼이라는 게 흔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미영전쟁보다 훨씬 이전 이야기지만 종교개혁 당시에는 구교와 신교 사이에 가사 수정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을 정도였다.
해당 전쟁은 현대에는 캐나다에서 주로 재조명되는 편이다. 물론 당시엔 영국의 식민지였지만 지금의 캐나다 내에서 싸움이 많이 벌어진 것도 있고, 캐나다가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독립한 탓에 역사적으로 드라마틱한 사건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 전쟁이 미국이나 영국보다 캐나다에서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실제로 전쟁 초기에 본국이 나폴레옹을 상대하느라 유럽 대륙에 묶여 있던 기간에는 영국령 북아메리카가 거의 자력으로 막아낸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래저래 캐나다의 미약한 민족주의 감정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전쟁임은 분명하다. 캐나다 측에선 미국의 선제 공격을 받고도 결국 땅을 지켜냈으니 이를 본인들이 승리한 전쟁으로 여기는 편이다. 원래 전쟁, 특히 방어전에서는 방어에 성공한 쪽이 승리한 것으로 보는 게 맞다.
특히 미국의 수도를 잠시 점령해 유일하게 백악관을 불태워본 군대를 가진 나라라는 상징성 때문에 막 역사를 배우는 캐나다 학생들에게 국뽕맛을 보여주는 핵심 컨텐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미국 쳐들어가서 수도를 점령하고 백악관도 불태웠음"하고 자랑하는 캐나다인도 있다. 그걸 들은 미국인은 질세라 "우린 캐나다한테 털린게 아니라 영국이랑 싸운거거등??"이라고 응수하고, 그러면 캐나다인은 다시 "그때 그 양반들이 우리 조상이니까 캐나다인이지 참나, 그럼 너희 독립전쟁은 영국인이랑 영국인이 싸운거임요?"라고 반박하는게 정해진 수순이다. 물론 캐나다도 토론토가 공격당하는 등 피해를 안 입은건 아니다.
헌데 2010년대 후반 도널드 트럼프가 국가안보를 이유로 캐나다산 철강에 고율 관세를 매기려 하면서 "캐나다가 백악관 불태운 적도 있으니 적국!" 드립을 치자, 캐나다에선 영국 식민지 시절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왜 우리에게 그러냐며 반대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 200년도 넘은 식민지 시절 전쟁까지 끌여들여 적국이라고 선언하면, 현재 주요 국가 중 미국의 적국이 아닌 국가를 찾기가 꽤 힘들 것이다.[7]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방미했을 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캐머런 총리 앞에서 200년 전에 불탄 백악관 자학드립[8] 을 쳤다. 서로뿐만 아니라 청중들까지 웃으면서 넘겼고 캐머런 총리는 오바마에게 다시는 못 쳐들어오겠네 식의 드립을 쳤다.[9]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청중들까지 모두 웃으면서 넘어갔다.
미디어에선 비중있게 취급하는 전쟁은 아니지만, 의외로 정치사적으로는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선 이 전쟁으로 반영감정과 미국인으로서의 애국심이 고취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친영주의자들이 다수였던 당시 연방주의자들은 반역자들이란 인식이 박혀 이후 중앙정계에서 세력이 약해져 와해되어버린다. 매디슨에 이어 먼로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이런 기조에 사실상 쐐기를 박아버린 것과 마찬가지의 사건이었다. 또한 이 전쟁 이후 미국은 유럽 국가가 다시 아메리카 지역에 손을 뻗치게 되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고 후일 먼로 독트린이 나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전쟁 이후로도 캐나다는 한동안 미국의 북부를 위협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져 국경 문제에서 충돌하기 일쑤였고 남북전쟁 이후 아일랜드계 미국 민병대가 캐나다를 공격한 페니언 침공[10] 과 같은 충돌은 영국과의 협상으로 국경이 정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의 영국의 태도에 실망한 캐나다가 본국으로부터 정치, 외교적 독립을 추구하는 계기가 된다.
알파캣 작가의 플린트 락 머스킷 나폴레옹의 바다는 영미전쟁을 배경으로 한 웹툰이다.
1812년 서곡은 원래는 유럽 대륙에서의 나폴레옹 전쟁에서 러시아의 승리를 기념하고자 만든 곡이지만, 정작 1812년 전쟁 당시 프랑스와 친밀했으며 영국과 싸운 미국에서 히트를 쳐서 유명해졌다.
국방TV의 프로그램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이 전쟁에 대해서 3부작으로 다뤘다.
한편 미영전쟁이 일어난지 약 120년 후, 미군은 이 미영전쟁의 연장선상에서 아예 캐나다와 영국 본토까지 공격하여 모두 점령하는 이른바 '전쟁 계획 레드'을 세웠고, 실제로 이 작전을 위해 1935년 5,700만 달러의 예산을 미국 연방 정부로부터 지원받았다.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 국경 사이의 5대호에 대규모 공군 기지를 세워서 캐나다를 공격하는데 사용하려 했으나, 전쟁 계획 레드가 실수로 유출되는 바람에 영국은 미국에 대한 경각심을 세워 캐나다에 대한 방비를 강화했고, 그리하여 전쟁 계획 레드는 결국 서류 상의 작전으로만 남고 말았다. 당시 미국은 영국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잠재 적국 및 예상되는 소요 사태 등에 대비하기 위한 전쟁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색부호 전쟁 계획 문서 참조.
[1] 사실 영국 입장에서 탈영병일 뿐, 이쪽 입장에선 미국으로 진작에 귀화한 사실상 미국인인 경우도 꽤 있었다. (이중엔 아일랜드계도 많았다.)[2] 영국인이었다 미국인으로 귀화한 영국계 미국인은 물론이고(미국 정부는 당연히 이들 역시 미국인이라며 항의했다), 당시 돌던 위조 신분증은 진짜 미국에서 평생 자란 멀쩡한 미국인조차 영국군에 징집되어가는 황당한 경우를 발생시켰다.[3] 미국이 본격적으로 하나의 나라라는 사실을 자각한 것은 이보다 50년쯤 뒤 남북전쟁을 겪고 이겨낸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시기부터로, 이전에는 주의 독립성이 현재보다 훨씬 강했다.[4] 애초에 영국령 북아메리카에 미국 13주 출신들도 많았는데, 왕당파여서 피난 온 사람뿐만 아니라 그냥 땅 얻으러 간 사람도 많았다. 본래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도 퀘벡 지역보단 뉴 잉글랜드(지금의 뉴욕과 매사추세츠)와 더 가까워서 국경이 없는 듯한 교류가 활발했다. 국경을 넘어 친지들 놀러가는 일은 일상이었고, 아이들을 국경 너머에 있는 학교에 보낼 정도였다.[5] 이중 시망자는 285명.[6] Original Six. USS 체서피크(Chesapeake), 프레지던트(President),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컨스티튜션, 컹그레스(Congress), 컨스텔레이션(Constellation).[7] 당장 한국만 해도 신미양요가 1871년, 그러니까 2021년 기준으로 150년 전의 일이다.[8] 좀 더 원문에 가깝게 말하면, '200년 만에 영국인이 이 자리에 또 오셨네요. 좀 다른 상황이지만(under somewhat different circumstances). 그들은 꽤 인상적이었고(made quite an impression), 이 장소를 진정으로 빛냈습니다(lit up the place. 즉 불타고 있는 그 불빛으로 빛났다(...)). '정도이다.[9] 정확히는 '그 때보다는 좀 더 잘 지키고 있네요(little better defended).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지금은 여기 있는 영국인을 위험해하지 않아도 돼요(You are clearly not taking any risks with the Brits this time).' 정도다.[10] 이 사건은 캐나다 집단주의의 각성을 부른 동시에 아일랜드인의 저항정신을 일깨운 사건으로도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