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흥방
1. 개요
廉興邦
(? ~ 1388년)
고려 말기의 인물. 염제신의 아들로, 공민왕의 5비 신비 염씨는 그의 누이가 된다.
자는 중창(仲昌). 호는 '''동정'''(東亭), 어은(漁隱). 파주 염씨.
2. 생애
신진사대부로 공민왕 때 과거에 장원 급제해 계속 승진해 좌대언이 되었다가 파직되었는데, 염흥방은 유학을 일으키기 위한 숭문관의 옛 터를 고쳐서 다시 짓는 일을 주관하면서 품계에 따라 문신들에게 베를 기부하게 했는데, 윤상발이 옷을 팔아 베를 마련한 것을 알고 베를 내지 않는 자에게 윤상발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열흘 만에 베 1만단이 들어올 정도였다.
지신사가 되었다가 홍건적을 평정하고 개경을 수복하는 공을 세웠다고 해서 2등 공신에 책봉되어 밀직부사가 되었다가 제학으로 옮겼으며, 우왕 때 이인임에게 밉보인데다가 임견미가 문신을 싫어했기에 쫓겨나 외지로 유배되었다. 그렇지만 임견미가 염흥방이 대대로 벼슬을 한 가문인 것을 알고 혼인을 요청했으며, 살기 위해서 이인임, 임견미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게 되는 바지서방이 되었고 그 보상으로 서성군으로 봉해졌다.
2.1. 부정부패
염흥방은 삼사좌사가 되자 우왕이 정무를 돌보지 않아 주변 사람들이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시행한 일도 있었으며, 염흥방은 명나라에 보내게 될 사신에게 뇌물을 받고 사신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했다.
그의 권세를 믿고 종들도 제멋대로 횡포를 부렸고 이인임, 임견미와 함께 노비들을 동원해 토지를 가진 사람의 토지를 탈취했는데, 그러다 전 밀직부사 조반(趙胖)의 토지를 빼앗은 일로 인해 권력을 전횡한 일이 조정에서 공론화되면서 몰락하게 된다. 결국 당시 군부에 있던 최영, 이성계의 군사에게 붙잡히고 끝내 처형되었다. 또한 염흥방과 더불어 전횡을 일삼은 그의 형제인 염국보, 염정수와 이부형인 이성림까지 싸그리 목숨을 잃으면서 가문의 씨가 말랐다.
이런 사람이라 어찌보면 염씨 집안의 흑역사지만 그의 후손인 염씨 문중에서는 그래도 '최영, 이성계 등의 음모로 살해되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1] 항간에는 조선 태조는 사실 최영의 명에 따라 염흥방을 축출했고 실은 최영에게도 과거 신돈과 권력 투쟁과 이후 권문세가와 결탁했다는 식으로 비판을 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권문세가에게 약점잡힌 것이 많아 변절했다고 한다(...) 그래도 하도 밀 상황이 아니어서 대신 아버지인 염제신을 밀기도 한다.
3. 사후
3.1. 성황신으로 모셔진 염흥방
염흥방은 안동 지방에서 조선시대 중기까지 성황당의 신인 성황신으로 모셔졌다고 한다. 안동 지방의 사람들이 안동 지역에서 강력한 세도를 과시하던 염흥방 일파에게 아첨을 할 용도로, 염흥방의 족보를 파뒤집어 염흥방의 외할아버지가 안동 지방의 사당과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핑계삼아 성황신으로 모신 것으로 보이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염흥방 일파가 자취를 감추었으나 오랫동안 성황신으로 모셔왔기에 지역민들은 별다른 의구심을 품지 않고 염흥방을 성황신으로 모신 것으로 추정된다.
3.2. 염흥방 신앙 타파 시도
후에 이조 판서를 지낸 새로운 지역 유지인 김진이 미신 타파를 이유로 사당을 잠가버린 후 계몽 운동을 벌여 염흥방에 대한 신앙은 시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워낙 오랜 세월동안 모셔진 탓에, 성황신으로서 이름이 남아 있으며 안동 소개 홈페이지에는 지역 명칭 유래 등에 거론되고는 있다.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은 이조판서를 지낸 부친인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일생에 대해 기록한 우복집(愚伏集)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했다.
김진에 의해 사당이 박살나기 전까지, 염흥방이 신으로 모셔진것은 염흥방의 일파가 살아생전 안동 지역을 주름잡던 지역 유지였으며, 그의 사후 잔존한 세력이 조선 시대 중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안동 지방의 지명에 대한 전설에서도 확인되는데 이 논문을 보자면 안동 지방에 영가지라는 별장을 가지고 있던 염흥방이 처형된 뒤 세력이 안동 지방에 잔존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 김공 진(金公璡)[2]
의 묘갈명(墓碣銘)〉-《우복집(愚伏集)》縣之南山有祠, 俗傳高麗廉興邦乃其神, 巫覡輩倚以作妖, 肆爲誣惑. 公馳往數之曰: “汝以前朝巨奸, 死有餘罪, 豈可容汝! 不靈之鬼以惑愿民乎!” 卽毀撤之, 俗以稍定.
임하현의 남쪽에 사당이 하나 있는데, 고려 시대 염흥방이 사당에 모셔진 신이라고 한다. 무당들이 요사스러운 일을해 백성들을 무혹시켰다. 김공이 이를 꾸짖으며, 간신으로 죽은 죄인이 신으로 대접 받으며 백성을 현혹하는것을 두고 볼수가 없구나라 하며 사당을 부수어버리니 백성들이 제정신을 차렸다.
4. 창작물
-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김민상이 배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연극 출신이다보니 목소리가 사극의 발성과 안 맞는다는 지적이 있긴 했으나[3] 초반의 신진 사대부의 모습과 변절 후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염흥방(정도전) 참조.
-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이 인물을 모델로 한 홍인방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며, 배우 전노민이 배역을 맡았다. 실제 역사의 염흥방과 마찬가지로 한때 정도전과 함께 고려의 개혁을 주장했던 사대부 출신이었다가 권력에 취해 타락했다는 설정.
5. 같이보기
[1]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문중의 입장에서는 이런 흑역사의 인물이 문중에 있다면 감추거나 미화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실제로 조선 시대에 이성계의 방계 조상인 전주 이씨 출신인 이의방은 출신 가문 자체에 대한 언급이 최대한 금기시 되었다[2] 한문에서 이런 식으로 성 + 公 + 이름이나 본관 + 성 + 公 + 이름으로 쓰는 경우가 꽤 많다. 아니면 성 + 직업 + 이름이나 성 + 호 / 자 + 이름 식으로 쓰든가. 그래서 오늘날도 묘비를 한자로 쓸 경우 이런 식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3] 이는 정도전을 맡은 조재현도 초반에 같은 지적을 당한 바 있다. 하지만 조재현 역시 배역에 녹아들면서 정치 9단 책략가로 거듭나는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