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1. 가문의 내력과 계통 등을 정리한 책
1.1. 족보는 사기다?
1.1.1. 김, 이, 박씨가 많은 이유
1.1.2. 조선 말의 상황
1.1.3. 현대의 족보 위조
1.2. 북한에서
1.3. 관련 문서
2. 확장된 의미
2.1. '서열'로서 나이/직급을 가리키는 말
2.2. 도박 용어
2.3. 시험 기출문제
2.3.1. 한국
2.3.2. 외국
2.4. 특정 집단의 역사를 가리키는 속어
3. 영화


1. 가문의 내력과 계통 등을 정리한 책


보첩(譜牒)이라고도 한다. 한 가문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알기 쉽게 부계 중심으로 정리한 도표 형식의 책으로, 가문의 단합과 조상에 대한 공경이라는 유교적인 가족관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그 시초는 중국으로, 제왕연표(帝王年表)라는 황족의 혈통 계보 책에서 비롯되었다. 개인이 족보를 가지게 된 것은 한나라 때 현량과 제도를 통한 인재 선발에서 응시생의 가족 내력을 확인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한반도에 족보가 처음으로 건너온 것은 1562년(명종 17)의 문화유보(文化柳譜)라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안동 권씨의 "성화보"(成化譜)이다. 굳이 조선시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의 문벌귀족들도 족보와 유사한 혈통 증명 체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혈통과 가문에 대해 연구분석하는 학문을 보학이라 한다. 순종황제가 보학에 능통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성씨가 일반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고려시대에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각 지역 호족세력이나 건국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성씨와 본관을 하사하면서부터다.
현대 한국에 들어서는 대전광역시에 있는 회상사라는 곳에서 현행 족보의 9할 가량을 전문적으로 만들어서 제작하고 있다. 여러 종중이나 정치가들의 선물도 많이 받아서 꽤 유명한 곳이다.[1] 2010년에 족보 5-6천권을 분실했다.@
'''가계도'''는 족보를 현대적으로 도식화 해서 나타낸 것이다.
족보의 변천사를 보면 당시 시대상의 변화도 알 수 있는데, 예를들어 조선 초기에는 아들과 딸이 모두 족보에 기재가 되고 순서도 출생일 순으로 적혔던 것을 볼 수 있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딸은 거의 기재가 되지 않는다거나 기재가 되는 경우도 출생일 순이 아니라 아들이 앞에 오고 딸이 뒤에 기재되는 형태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는 종친회 사이트에서 인터넷 족보를 제공하여 편하게 족보를 열람할 수 있다. 그런데 족보는 등초본과는 달리 법적 효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잘못된 내용이 올라가 있어도 본인이 정정하지 않는 이상 바로잡히지 않는다. 특히 현대인들은 족보 자체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아, 족보에 잘못된 내용이 올라가 있어도 이를 바로잡지 않거나 잘못된 내용이 올라가 있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현대 인물에 대해 논문을 쓰거나 위키 문서를 작성하면서 족보의 내용을 자료로 삼을 때는 반드시 언론 기사나 해당 인물 본인의 증언에 비추어 교차검증을 할 필요가 있다.

1.1. 족보는 사기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35년 넘게 한국학을 개척, 발전시킨 에드워드 와그너 박사(1924 ~ 2001년)는 한국학을 연구하면서 족보가 부정확하기보다는 정확한 측면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냈고 족보에 대한 연구를 혁신시킨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2] 조선 후기에 들어서 족보를 지위를 위해 사고 팔거나 위조한 경우도 있지만 흔히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족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할 정도는 아니다. 족보 또한 하나의 역사적 문서이기 때문에 여느 역사적 문서들이 그렇듯 족보도 족보 하나만으로 곧이곧대로 믿는게 아니라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병도와 더불어 한국사 학계의 1세대 대표 학자로 꼽히는 이기백 교수는 생전에 신라 말기의 사병(私兵) 문제를 연구한 「신라사병고(新羅私兵考)」를 발표하면서 흥양 이씨 족보를 역사적 자료로 활용했고[3] 진주 소씨 족보를 통해 상대등 알천(閼川)을 새롭게 인식했다며 족보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바 있다. 진주 소씨는 신라의 상대등 알천의 후손을 칭하는 집안으로, 이기백에 따르면 1979년에 진주 소씨 서울 종친회에서 사람이 찾아와 종친회보(宗親會報)에 알천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알천은 신라의 왕족이고 김씨이므로 소씨일 수가 없다는 생각에 적당히 거절하여 보냈는데, 나중에야 신라 말에 김해(金海)의 호족이었던 김율희(金律熙)가 소율희(蘇律熙)라고도 기록되기도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金은 음이 '김' · '금'이지만 그 뜻은 '쇠'이기 때문에 蘇라는 글자와 서로 통용되어 쓰일 수 있을 뿐 아니라, 8세기 원성왕과 왕위를 다투다 패한 왕족 김주원이 강릉으로 낙향한 것처럼 실제로 김춘추와의 왕위 계승을 두고 대립하기도 했던 알천이 김춘추에게 패한 뒤 지방인 진주로 낙향했을 가능성을 유추해내기에 이르렀다.
족보의 기록을 하나의 단서로 삼아 조상[4]의 무덤을 찾은 사례가 토요미스테리극장을 통해 소개된 일도 있다.관련내용 리뷰
특히 족보들 중에서도 양반 종가집에서 대대로 계승하는 족보는 그 금전적, 문헌학적[5], 서지학적, 사회학적[6][7] 가치가 상당하다.

1.1.1. 김, 이, 박씨가 많은 이유


한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4대 성씨인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경주 김씨'''는 전부 과거 한반도에 존속했던 왕국의 국성이며, 조상이 각각 가야(김수로), 신라(박혁거세), 조선(이성계), 신라(김알지)의 왕족이다. 이들 성을 가진 인구를 모두 합치면 천만 명을 넘는다.
이 때문에 흔히 사람들은 "원래는 성씨를 가진 사람은 인구의 극소수였는데 근현대에 와서 족보 매매를 해서 그렇다", "족보 위조다", "원래 노비였던 사람들이 성을 가지게 될 때 유명한 성씨인 김,이,박을 주로 골라서 그렇다" 등등의 말들을 한다. 하지만 양반만 성씨가 있었다는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실제로는 양반 뿐만 아니라 평민들도 성씨를 가지고 있었다'''. 문헌을 살펴보면 심지어 노비들도 일부는 성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데 계유정난 당시 김종서를 내리친 수양대군의 노비 이름은 '임어을운'이며 세조 시기 나계문을 폭행해 숨지게 한 홍윤성의 노비 이름은 '김석을산'이다. 다만, 노비의 경우 천하다는 의미로 성을 생략한 경우가 많았고 성씨 자체는 있었으나 혈연관계를 문서로 세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3대 동안 관직을 지내지 못하면 양반의 자격이 사라진다고 여겼기 때문에 양반의 후손이라고하여도 실제 양반으로 인식되는 계층은 적었다. 실제로 일개 농민에 불과했던 전봉준도 엄연히 천안 전씨 족보에 기록된 인물이며, 스스로 '상놈의 패를 찼다'라고 자조한 김구김자점의 방계 후손으로 그 선대를 상고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또한 한국의 성씨가 특정 성씨들에 치우쳐 있는 것은 족보 위조나 족보 매매, 노비들의 유명 성씨 선택 같은 것 때문이 아니다. '''한국인의 성씨는 원래부터 편중되어 있었다'''. 다음은 그 증거이다.
인조 15년 무과 입격자 배출 상위 5개 성씨
김(金) 1252 명 (22.7%) 2000년 현재 김씨 인구 21.6%
이(李) 793 명 (14.4%) 2000년 현재 이씨 인구 14.8%
박(朴) 462 명 (8.4%) 2000년 현재 박씨 인구 8.6%
최(崔) 336 명 (6.1%) 2000년 현재 최씨 인구 4.7%
정(鄭) 179 명 (3.3%) 2000년 현재 정씨 인구 4.4%
특정 성씨가 머리가 좋아서 더 많이 붙는게 아닌이상 각 성씨별로 합격 확률이 비슷하다고 보면 조선시대의 성씨 비율도 현대 성씨 비율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근현대에 와서 김, 이, 박씨가 많아진게 아니라는 얘기이며, 노비들이 성씨를 선택할 때도 기존 성씨의 인구 비율과 비슷한 비율로 각 성씨를 선택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씨의 경우 본관이 경우 조선시대에 120개가 넘었고 이씨의 경우에도 100개가 넘는 본관이 있었으나 나중에 주요 본관들로 많이 합쳐졌다. 박씨 등 다른 성씨도 마찬가지. 이것이 각 성씨별 현재 본관의 갯수가 많이 적어진 이유다.

1.1.2. 조선 말의 상황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는 양반 내에서도 계급이 분화되어, 한양에 모여 살면서 관직을 독점하는 '권반'과 향촌 내에서 모여 살며 지방에서라도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어 살았던 양반 사족인 '향반', 그리고 권력도 경제력도 없이 도태된 '잔반'이 생겨난다. 잔반들은 암울한 경제 사정을 타파하기 위해 부농층에 족보를 팔았고 부농층은 족보를 사고 다른 마을로 이사한 후 양반 행세를 하면 되었다. 아니면 아예 돈을 주고 양반집안에 양자로 들어가기도 했다.

임금이 낮에 경연을 가졌다. 그때 사헌부집의 유수가 아뢰었다. "역관(譯官) 김경희가 자기 마음대로 활자를 만들어서 비치해 둔 다음, 다른 사람들의 족보를 많이 모아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시골에서 군역을 모면하려는 무리들을 꾀어다가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책장을 바꾸어 가짜 족보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돈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형조에 명령하셔서 엄중 조사하여 무거운 벌을 주도록 하십시오." 그러자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 《영조실록》1764년 11월 12일

족보가 이런 식으로 위조되어 농민들에게 들어갔다. 양반이란 지위는 단순히 현대적 관점에서 귀족 작위를 받는 명예로써의 가치와는 다르게, 농민으로 하여금 가혹한 '군역'을 면제받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조선 후기 양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세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게 되었고, 이에 따라 흥선대원군 시기에 이르러선 양반에게도 군포를 거두는 호포제가 법제화되었다.
이런 양반들의 증가현상은 당시 인구조사로도 확연히 드러난다. 조선 초기에는 지배계급인 양반이 가장 적고, 중인, 상민, 천민 순으로 숫자가 많아지는 피라미드 구조였는데, 이 시기에 상민은 줄어들고 양반은 폭발적으로 늘어나서 일부 지역의 경우에는 오히려 양반이 상민보다 많은 역피라미드의 인구구조가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철종 때 공노비 20만명을 해방시켜 상민을 늘렸으나, 그래도 이 추세를 막지는 못했다.
본래 있던 양반들은 위기감을 느끼며 족보를 확장하지 못하도록 상소도 올리고 신문고도 때리고 했지만 시대적인 흐름을 그들이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8] 결국 어정쩡한 타협으로 본래의 양반 족보 안에 "별보"라 하여 혈연관계가 증명되지 않은 사람들의 족보 등재를 묵인하기도 했다. 이를 보다 못한 구한말 지식인들은 그것을 강하게 비난했다. 자기 조상을 부정하는 패륜적인 행위를 비난했다. 증산종교의 교조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은 "지금은 근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시대이니 혈통 줄을 바르게 하라.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바꾸어서 계보를 위조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라며 그런 행위를 하는 자를 비판했다.
박홍갑이라는 역사학자는 "우리 성씨의 경향을 보면 생물학적인 계보라기보다는 사회, 문화적인 계보다."라고 말했다.#

1.1.3. 현대의 족보 위조


일단 근현대 이후 족보가 처음 만들어졌다면 신빙성을 갖기가 어렵다.
대표적으로 회산 감씨의 경우 고려 공민왕 시기에 노국대장공주를 따라온 원나라의 한림학사 감둥리[9]의 16세손 감철(甘喆)이 북벌을 중지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함받은 뒤로 본관을 회산으로 한다고 감씨 문중에서 족보라고 주장하는 문서에 기록되고 있기에 감철은 조선시대의 인조 이후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봉해졌다고 주장하는 회산군(檜山君)은 이미 조선 성종이 재위할 때 성종이 자신의 다섯째 아들인 이염(李恬)을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데 이후 감철(甘喆)이 북벌을 중지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졌다는 기록은 그 이후의 조선왕조실록이나 야사에서조차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조선시대에 왕족이 이미 봉해진 작위를 일개 양반이 봉해졌다고 족보를 만들었다면 그 일족은 역모죄로서 멸족당했을 것이다. 실제 감씨에 대한 기록은 임진왜란 시기에 공을 세운 여일 감경인(汝一 甘景仁)이 있으나 그 이후에는 기록이 없어 역사학자들은 감씨 문중은 조선 중기 이후로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해 몰락 양반이 되었고 직계 명맥이 끊기면서 방계들로 맥을 이어갔으며 이들도 맥이 단절될 시기에 일어난 갑오개혁으로 다른 계층들이 유입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신분제 폐지로 인해 다들 양반 성씨를 쓰게되자 양반 임을 드러내기 위해 족보를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문제는 양반이라 해도 3대에 한번은 초시라도 합격해야 양반직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벼슬에 뜻이 없고 학문에 힘쓰는 산림 처사라도 초시나 향시 생원시와 진사시에 응시해서 통과해야만 했다. 그래야 군역과 부역을 면제하고 학문에 힘쓸 수 있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공무원 시험을 볼 생각 없는 사람이 대학교수학자가 되기 위해 또는 생계를 위해 국가전문자격증과 석박사학위를 딸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초시에 합격하면 이를 증명하는 증명서가 발급되는데 이것이 존재해야 양반직을 유지할 수 있고 살제로 조상이 양반인 가문들은 족보에 이를 내세웠다. 문제는 이들은 객관적인 증명자료 없이 족보에서만 양반이라고 주장하기에 역사학자들도 외면한 것이다.
감씨 문중에서 내세우는 족보가 '''대한민국 건국된 이후에나 만들어진 족보'''(족보: 1952년, 대동보 : 1976년)인 것도 있지만 기록조차 왕족의 작위까지 조상이 받았다고 하는 등 왕족의 작위까지 자기 가문들이 받았다고 하는 역사왜곡이 심해 족보를 수집하여 연구하는 역사학자들도 객관적이지 않고 허구에 가깝다는 이유로 외면했다. 족보 내용에 조선 성종의 아들인 왕자 이염이 봉해진 회산군 작위를 이후에 태어난 자기 조상이 봉해졌다는 구절들이 있어 전주 이씨 문중의 어그로를 끌어 소송까지 갈 뻔했으나 전주 이씨 문중에서 많고많은 성씨들이 너도나도 족보를 조작하는 것이 하루이틀도 아닐 것이라며 일일이 소송으로 대응하면 전주 이씨의 가풍을 해치므로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고 하여 소송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해당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최근에야 만들어진 족보이면서 너무 뻔뻔하게 조작을 했고 정동 양반이라고 주장하여 대표적으로 현대의 족보 조작의 하나로 알려졌다. 심지어 이들도 감씨 직계가 아닌 감씨 방계들의 하나로 이미 감씨 직계는 명맥이 끊겼다고 알려져 있다.[10] 그 외에도 족보 자체가 너무 최근에 만들어져서 족보의 효력이 없다는 얘기도 나오는데다 구글 등에서 회산 감씨 족보를 검색하면 회산 감씨 족보와 대동보를 5만원에 판다는 감씨 문중으로 보이는 판매자의 글이 있다. # 문중의 일원이라면서 족보를 헐값에 판다는 것도 문제지만 해당 판매글의 상세 항목을 보면 족보는 1952년에 만들어졌고 대동보는 1976년도에 만들었다고 나온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족보가 아닌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나 만들어진 족보였기에 족보를 연구하는 이들에게도 족보로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독립운동가 등의 후손이 되면 얻는 국가유공자 혜택을 노리고 족보나 대동보를 조작까지 하다가 적발되고 처벌받는 사례들이 생기면서 족보 조작에 대해서 더 엄격해졌다. 대표적으로 족보 조작이 발각된 사례로 지난 1995년 국가보훈처(이하 보훈처)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차도선 의병장(1863년~1939년) 등 5명의 애국선열 유해봉환을 추진했는데 차도선 의병장의 종손을 자처한 가짜들이 나왔다. 당시 보훈처 관계자들은 중국을 방문해 길림성 무송현 두지동 옛집 타작마당에 있던 차 의병장의 묘소와 손녀 등의 유족을 확인했다. 친손녀 차월겸(66․차 의병장의 셋째 아들 '원복'의 3녀)씨는 한국 정부의 유해봉환 요청에 따라 1995년 청명에 할아버지 시신을 화장해 보관했다가 같은 해 6월 연변 장백호텔에서 보훈처 직원들에게 유해를 전달했다. 보훈처는 같은 해 6월 23일 대전국립묘지에서 안장식을 진행했다. 그러나 친손녀가 보훈처 직원에게 전달한 차 의병장의 유해는 가짜 종손 차상옥(당시 차씨 종친회 사무총장·2007년 사망)이 유족대표로 참가한 가운데 안장됐다. 뿐만 아니라 국립묘지 비석엔 가짜 종손이 손자 대열에 끼었고, 차 의병장의 출생지는 가짜 종손의 본적인 '충남 청양'으로 뒤바뀌는 수난을 당해야 했다.
이렇게 차도선 의병장의 종손을 자처한 가짜들이 나온 이유는 차도선 의병장의 유족들이 모두 중국에 거주하고 있어 확인이 어렵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차도선 의병장의 후손으로 넣어 국가유공자 후손들이 받는 혜택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차상옥이 가짜 종손인 것이 밝혀진 이후에도 가짜 종손을 자처하는 이들이 줄줄이 등장했지만 모두 조작으로 밝혀졌는데 종손 보증 요구에 시달렸다고 한다. 친손녀들이 종손 보증을 거부하자 소위 '첩' 설을 내놓으며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일제의 감시와 체포 등으로 부인 곁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여자를 얻어 살 수 있다'라면서, 호적에는 없지만 차도선 의병장의 종손자를 자차하는 집안이 '큰집 혹은 작은집' 이라는 황당한 주장까지 했다는 것이다. 즉, 의병장이니까 첩을 두었을 수도 있다 라는 억지 주장이었는데 차 의병장의 손녀 옥겸(59·차 의병장의 셋째 아들 '원복'의 4녀)씨는 "종친회 사람들이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해대기에 '그러면 우리 할아버지가 바람둥이냐'고 항의했다"면서 "종친회 사람들로부터 종손으로 인정해달라는 강요에 너무 많이 시달렸다"고 털어놨고 언론의 족보 조작이 발각되고 언론사들의 취재가 이어지자 종손을 자처하던 이들은 남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자신들은 차도선 의병장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였으나 보훈처에서 족보 조작이라고 판단을 내렸기에 더이상 우기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
이러한 이유로 보훈처도 각각의 가문에서 내세우는 족보에 소위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경우 이를 증명하지 못하면 국가유공자 후손으로 혜택을 얻기위해 족보를 조작한 범죄행위로 보겠다고 밝힌 상태다. 보훈처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온 이유는 처음에 이들은 자기들의 가문을 포장하기 위해 그렇게 했겠지만 이들의 아들, 딸, 손자, 손녀들은 집안 어른들이 허위로 만든 족보를 보고 알고보니 우리 집안에 독립운동가가 있었다라고 생각하여 보훈처에 유공자 혜택을 신청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유공자 후손이 아닌걸 알면서도 허위 족보를 내세워 혜택을 받으려는 이들도 있으나 집안 어른들이 허위로 꾸민 족보를 믿고 혜택을 신청하는 이들도 많아서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족보만을 믿고 혜택을 받으려고 하면 족보 조작으로 혜택을 받으려는 범죄행위로 보겠다는 것이다.

1.2. 북한에서


북한에서는 북한 정권이 수립하고 나서 봉건적 유물을 없애고 종파주의를 막는다는 핑계로 본관호적을 폐지하고 그와 동시에 족보를 새로 업데이트 하는 일 자체를 금지했다. 반동으로 몰릴까봐 기존 족보도 소실된 것이 많고, 고려 태조 왕건의 왕씨 가문 족보도 후손이 불태워버릴 뻔 하다가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 반쯤 불탄 족보는 1992년 북한 정부에 기증되어 국보로 지정된다.
그래서 북한의 젊은 층은 족보나 본관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자신들의 조상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태반이라고 한다. 다만 북한내에서도 족보를 역사적인 사료로 이용은 하고있고, 기존에 있던 민간의 족보를 회수하여 박물관 등지에 보존하고 역사연구에 쓰고 있기는 하다.

1.3. 관련 문서



2. 확장된 의미



2.1. '서열'로서 나이/직급을 가리키는 말


한국어는 상하관계를 설정해야 대화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11] 그때 족보 확인하다고 하곤 한다. 민증 깐단 말도 있고.

2.2. 도박 용어


화투, 플레잉 카드 등을 사용하는 도박에서, 점수가 성립되는 패를 정의해둔 리스트. 화투나 플레잉 카드 뿐만 아니라 슬롯머신 등에서도 이렇게 맞히면 대박 탈 수 있다는 식으로 활용된다. 마작의 역도 족보의 일종.

2.3. 시험 기출문제




2.3.1. 한국


시험 등에 있어 기출문제나 출제경향을 모아놓은 것. 대학생 시험의 필수요소다.
기출문제를 대놓고 알려주거나 시험지를 들고 가게 해주는 과목은 족보의 희소성이 없다. 어차피 모두가 그 문제를 알게 되니까. 즉 원래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데 어쩌다 보니 유통된 족보가 가장 희소한 족보. 보통 학생들이 나중에 기억해낸 문제를 엮거나 어쩌다 보니 우연히 시험지가 유출되거나 해서 만들어진다. 물론 냈던 문제를 또 내는 교수에게 특히 유용하다. 특히나 듣는 사람이 적은 과목일수록 족보의 가치는 급상승한다. 저학년 필수과목들은 듣는 사람이 많으니 족보 구하기 쉽기라도 하지, 고학년 전선 과목은 과생활을 안 하면 아예 찾아볼 수도 없거나, 찾더라도 5년 이상 된 구닥다리 자료들이나 겨우 찾을 수 있다.
교수들이 담당하는 과목들이면 몰라도 비정규직인 강사들은 1~2년마다 여기저기 옮겨다니니 이런 과목들은 족보의 가치가 몇 년 안가 퇴색되고 강사가 바뀔 때마다 첫 학기 시범타 학생들이 희생해야 한다. 그나마 신임 강사 첫 학기 한정으로 아싸들도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다.
몇몇 교수는 아예 족보를 공개하기도 하는데, 이 때의 기출문제는 해당 과목에서 중요한 내용이 된다. 교수가 생각할 때 이 과목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알아야 할 것을 담고 있으니 물어볼 만할 걸 또 묻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족보 자체를 부정행위로 간주하는 교수도 있다.[12] 게다가 난이도가 안드로메다로 가는 과목이나 이슈가 자주 바뀌는 과목은 족보의 효용성이 오히려 떨어진다. 결정적으로 신생 과목은 아예 족보가 없는 게 태반이다. 족보는 무엇보다도 참고서일 뿐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족보 없이는 절대 풀 수 없는, 가르친 범위 외의 문제를 출제하는 교수들도 많다. 암만 강의평가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직접 말씀을 드려도 소용없다. 이런 경우 학과 내에서의 선배와의 인맥이 성적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물론 교수들도 족보의 존재에 대해 당연히 알고 있다. 자기들이 학부생이던 시절에도 다 돌던 것이니 모를 리가 있나. 그저 귀차니즘이 도져 바로잡기 귀찮아하느냐, 열정적으로 자기 과목의 족보를 무용지물로 만들기 위해 매번 새로운 문제를 출제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또는 기출문제를 살짝만 변형시켜서 그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 암기한 학생을 먹이기도 한다.
학교 인터넷 커뮤니티에 학생들이 강의평과 함께 족보를 올려놓거나 금전 거래를 하는 경우도 있다. 방송통신대는 아예 학교 당국에서 정식으로 공개한다.
의과대학을 다니는 의대생들에게는 족보가 선택이 아닌 필수로 여겨진다. 족보를 보면서 공부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나, 학교 다닐때 전교 1등 정도는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의대생들조차도 의과대학에서 다루는 엄청난 양의 과목들의 시험을 족보 없이 헤쳐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학교마다 족보의 계승 방식도 천차만별. 학생회의 주도로 족보를 제작해서 매 학년 올라갈때마다 제작비를 거둬 공동구매하는 곳도 있는 반면 동아리나 고등학교 동문 등의 소위 '라인'을 따라 아는 사람들끼리 몰래몰래 전수해주는 곳도 있다. 교수님들의 족보에 대한 반응도 천지 차이인데 일단 대체로 의대 출신 교수들은 다는 아니지만 족보의 존재를 잘 알고 있기도 하고 본인의 경험 상 족보 없이 공부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족보 이용을 딱히 문제 삼지 않기도 하지만 이런 방식을 굉장히 탐탁지 않게 여기는 교수들도 있다. 어느 쪽이든 문제를 낼 때 학생들의 족보 사용을 고려해서 내기는 한다. 족보만 봐도 유급은 안 하도록 깔아주는 문제는 그대로 내고, 진짜 변별을 위해 몇 문제는 새로 내는 식으로. '공식적으로는' 교수 앞에서 족보를 보이거나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하지만 진짜로 족보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교수는 없다고 봐도 된다. 어떤 교수는 족보대로 문제가 나오는 이유는 문제 내기가 귀찮아서가 아니라 실제로 중요한 내용이 그 내용이기 때문이라고도 하는 등 오히려 학생들이 족보 내용만큼은 확실히 기억한다는 점을 이용하려는 경우도 있는 듯.
꼭 의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취업을 위해 국가시험을 치러야만 하는 학과의 경우에는, 그 국가시험의 족보를 만드는 경우가 대다수다. 간호사나 의료기사 등 국가시험 합격이 곧 취업으로 이어지는 학과에서는, 학생 개인이든 학과 자체를 위해서라도 족보는 거의 필수적이다. 특히 의료계의 면허시험(국가시험)은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인데다가, 일정 점수만 넘었다면 합격이므로 굳이 경쟁을 조장할 이유가 없으니 족보의 존재를 막을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학생들과 교수들 사이에서는 권장사항이다. 여기서 말하는 족보는 해당 과목의 교수의 시험문제라기보단 '''국가고시 기출문제집'''을 의미하는 바가 더 크다. 실제로 문제도 거기서 내고.
족보라는 말 대신 다른 은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흔하다. 의대, 간호대를 비롯한 의학계열에서는 야마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학교에 따라 다른 말을 쓰는데 지방 쪽으로 갈수록 야마라는 말이 널리 쓰이는 듯. 시간이 갈수록 야마라는 말은 점점 없어지는 추세이다. 교수들이 족보에 질색하는 모 학교의 경우 아예 족보를 부르는 은어를 매년 바꿔가며 김치(기출)라거나 rc(력시 키출)라고 부르기도 하고 선배한테 sos를 쳐서 받아낸다는 의미로 소스라고 부르는 학교도 있다.
어찌되었건 족보 문화에 장단은 확실하다. 학생회 주도로 전체에 배포하는 경우도 있지만 동아리나 학회, 군대를 더 늦게 갔다온 동기 등 라인을 타고 전해지는 경우가 더 흔한데 후자의 경우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결국 선배들과 친하게 지내서 족보를 얻는 쪽이 시험을 더 잘 볼 확률이 크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부 게으른 교수의 경우는 아예 예전 문제를 다시 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학기 내내 수업을 안 듣고 전날 밤 족보만 쓱 훑어도 A+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폐단이 심하다.
고등학교 내신이나 수능도 족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립학교 내신의 경우 5년마다 교사가 바뀌긴 하나 웬만하면 전임자와 비슷하게 내려고 하니 중요하다. 웬만한 학원에선 학교별로 비치중이다. 개성 없는 고등학교 시험문제 현실상 사실 별 도움은 안되지만, 실제로 가끔 매년 문제를 그대로 내는 선생님이 있다. 보통 예체능계의 과목에서 많이 있다. 의외로 수학 같은 과목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득세한 것이 바로 족보닷컴같은 불법[13] 사이트다.
수능은 출제경향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필수. 수능은 '''출제기관에서 족보를 공개한다'''.

2.3.2. 외국


미국의 대학에서는 족보, 즉 기출문제 유출 행위가 대부분 부정행위로 취급되어 최소한 학점에 불이익이 생기거나 더 나아가면 중징계를 받을 수 있다. 실제로 미국 유학을 갔던 한국 학생의 목격담에 의하면, 학교 기숙사에서 가끔 불시에 일어나는 방 검사 및 소지품 검사에서 이런 걸 갖고 있던 한국 학생이 적발되었는데 그 과목에서 그의 학점이 0점 처리된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애초부터 기존에 출시된 시험문제지를 보유하는 것 자체를 ' 트릭이나 써서 점수를 얻으려는 행동'으로 보고 컨닝처럼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설령 기숙사 생활은 안 한다고 해도 친구들 앞에서 이런 거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 어떤 식으로든 안 좋은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주의. 그래도 미국 로스쿨의 경우는 모든 기출 문제를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이를 참고해서 공부할 것을 권장하는 등 모든 미국의 대학이 족보를 부정행위로 간주하지 않는다. 또 많은 유럽 학교에서는 지금껏 냈던 시험문제와 답을 '''교수가 직접''' 데이터베이스에 올리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인지, 몇몇 시험은 구글링하면 쉽게 답을 찾을수 있다.
일본에서도 족보가 문제시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교수마다 성향이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시험문제지와 답안지가 따로 있어서, 문제지를 가지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고,[14] 교수에 따라 홈페이지에 시험 문제지를 업로드 해놓고 공부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며, 작년도 시험문제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복사해서 비치해놓는 경우도 있다. 물론, 답까지 올려 놓는 경우는 잘 없다.
위의 사례처럼 부정행위로 간주하여 제재를 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모든 기출을 공개하고 지식 함양을 위해 풀 것을 권장하는 교수도 많으며, 서양권에서도 이는 관점이 갈리는 이슈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기출문제 형식으로 공개되는 것으로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족보와는 그 성질이 다르다. 예를 들면 다음 링크글의 의견들을 보라.(영어 주의)
'''#''' '''#'''

2.4. 특정 집단의 역사를 가리키는 속어


이런 경우는 보통은 특정 집단이 해체되거나 재구성, 합병되는 과정에서 어느 단체의 역사를 계승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벌어지는 속어로 자주 사용된다. 보통 이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논쟁은 '''족보싸움'''이라고 부른다. 한국인의 정통성을 좋아하는 종특과 이왕이면 더 오래된 단체의 역사를 계승하자는 생각, 또는 특정 집단의 흑역사는 계승하지 않겠다는 생각, 기타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정말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진다.
대표적으로 자주 거론되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개족보 문서도 참조.

3. 영화


임권택 감독의 1978년작 영화. 자세한 것은 족보(영화) 참고.

[1] 이 회상사 초대 회장 박홍구의 아들이 정치인 박병호와 국회의장 박병석이다.[2] 와그너는 족보에 나타난 문과 급제자를 통해 우수 혈통에 관한 연구를 한 적도 있다.주간한국 기사[3] 조선 후기에 향리층들이 모여 지은 《연조귀감(椽曹龜鑑)》이라는 책에 인용된 향리들의 족보 가운데 《흥양이씨보(興陽李氏譜)》의 "신라 말기에 귀족의 후예들이 다투어 호무(豪武)를 써서 주(州)와 현(縣)을 제패하였다," 하는 기술이 인용되었는데, 이기백은 이 기록이 신라 말기 지방의 세력가 즉 호족이 군사력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너무도 당시의 실정을 잘 드러내는 기록이라고 평가했다.[4] 무려 700년 전 고려 시대의 인물인 허유전(1243∼1323)이었다.[5] 족보가 제작되던 당시의 시대상이나 작성 배경 같은 것.[6]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인 안동 권씨 성화보나 문화 류씨 가정보 같은 경우 후대 족보와 비교해 보면 부계뿐 아니라 모계 역시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중기 이후 시대상의 변화 과정을 여타 족보들과 비교해 확연하게 알 수 있다.[7] 특히 직업적 특성상 양자를 들여 집안의 계보를 이었던 내시들의 경우 "낳아주신 은혜만큼이나 키워주신 은혜도 귀중하다"는 이유로 양자로 이은 계보를 족보 기록으로써 정리했다. 이것이 양세계보(養世系譜). 조선 시대의 내시들 자신이 남긴 몇 안 되는 기록이다.[8]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은 1678년 풍양 조씨 족보의 서문을 쓰면서 “근래 사대부 집안에서 조금씩 보첩을 '수명(修明)'하는 것을 일삼고 있다”며 족보의 급격한 보급·확산 추세가 사회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수준임을 밝힌 바 있다.[9] 공민왕에게서 제왕을 뜻하는 이름인 '규'를 하사받았으나 이후 비리가 드러나면서 천민으로 강등되면서 이름인 규도 박탈되어 천민 감둥리로 사망한다.[10] 직계가 단절되어 방계들이 실제로 직계에서 갈라져 나온 것인지 갑오개혁 이후로 전혀 관계없는 이들이 편입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족보의 내용 등의 오류를 보면 후자에 가깝다.[11] 요새는 이딴 거 안 따지고 계속 상호존대를 하는 경우도 많다.[12] 특히 프로그래밍 과목의 경우 실습 족보 패턴이 정해져있지만 조금만 바꿔도 아예 전혀 다른 문제가 되는지라 출제 조교 내지는 교수가 족보 먹으라는 셈 치고 내는 경우도 있다.[13] 저작권법 위반으로 2006년 http://www.law.go.kr/precInfoP.do?precSeq=70565손해배상 판결을 받은 바 있다. 그럼에도 아직도 운영되고 있다...[14] 문제지와 답안지가 같이 있는 경우도, 채점 끝나고 교수 연구실에 찾아가면 볼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