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견미
林堅味
(? ~ 1388년)
고려 말기의 인물. 평택 사람으로 군인 출신. 공민왕 때까지는 최영의 일파로 분류됐다. 우다치에 소속되었다가 공이 있어 중랑장이 되었는데, 홍건적을 피해 공민왕을 호종(피난)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오른다. 이 때 각 도 호족들의 사병을 군사로 징발하자고 주장하나 권문세족들이 응하지 않았다. 이에 임견미가 공민왕에게 울며 간언을 했고, 결국 그의 말대로 되었다. 홍건적이 평정되자 계속 승진해 밀직부사가 되었으며, 1363년 흥왕사의 변을 꾸민 김용이 죄를 자복하게 해 조정에 자리잡았다.
1374년(공민왕 23년) 목호의 난을 평정하러 최영을 따라 제주도에 내려갔다가 공민왕이 변을 당했다. 급히 개경으로 회군한 후 우왕이 즉위하자, 판삼사사에 오른 최영과 최고 정무기관인 도평의사사에 들어갔다. 이후 지문하성사, 평리 등을 거쳤다. 그런데 수문하시중이 된 이인임이 자기 세력으로 포섭하려 하자 최영을 버리고 이인임 일파로 갈아탔다.
우왕 때 내재추가 설치되면서 왕명의 출납을 홍영통, 조민수 등과 함께 도맡았다. 이인임을 믿고 권세를 부리다 못해 우왕이 두 번 호출해야 할 정도로 교만해 졌다. 그의 비위를 문제삼으려 했다가 그 기세에 눌린 우왕은 오히려 공민왕 실록 편수와 시중의 직위를 내리게 된다. 마침내 수문하시중에 올라 정방제조가 되었고, 제멋대로 양민의 땅을 뺏고 대토지를 소유해 신흥 권문귀족 반열에 올랐다. 홍영통, 조민수 역시 임견미와 같은 직위에 있었지만 허울 뿐 전혀 인사 행정에 관여할 수 없었을 정도. 나중에는 이인임의 말조차 듣지 않을 정도로 세를 불리기까지 했다.
1384년에 북원에서 우왕을 인정한다는 책봉 사신을 보냈다는 정보를 입수한 명나라는 여진족을 시켜 방해하려 했는데, 김득경 장군이 여진족을 공격했다가 고려가 명나라의 문책을 받게 되었다. 명나라 군사를 죽인 김득경을 북경으로 압송하라는 조서를 가지고 명나라 사신이 입국했다. 고려 조정은 북원과 교섭할 시간을 벌기 위해 명나라의 요구를 들어주고 안심시키려 한다. 임견미는 따로 집에서 연회를 베풀어 명국 사신 정여를 후하게 대접하고 김득경을 내주기로 했는데, 사실 임견미와 도당은 김득경 대신 가짜를 보내려 했지만 김득경이 자청해 명나라로 갔다. 자청했다고는 하나 명나라에 내준 시점부터가 토사구팽이었다. 임견미는 하륜의 조언대로 자객을 보내 김득경이 철주에 도달했을 때 그를 암살해버렸다.
선친인 임언수가 문하시중에 추증되도록 힘쓰는 한편, 이인임, 염흥방 등 권문세족과 야합해 양민의 토지를 함부로 빼앗았다. 힘없는 소지주들 땅을 뺏는 거야 도의적으로는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문제될 게 없었지만 배천 조씨 호족인 조반의 토지를 빼앗은 사실이 밝혀져 궁지에 몰린다. 이인임 일당도 호족들 토지까지 건드리지는 않았는데 욕심에 눈이 멀었던 것. 결국 이 행태에 분노한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세력을 제압당하고 결국 처형당한다. 이것이 무진피화(戊辰被禍) 혹은 정월지주(正月之誅)로, 조선 초 편찬된 고려사의 임견미 열전에 따르면 임견미와 그의 사돈인 염흥방 및 반익순, 도길부 등이 멸문지화를 당해 첩이나 딸들까지 관비가 되었다고 한다. 연좌돼 처형된 사람만 당시 1천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임견미 열전 참고
당대의 권신 이인임조차 그를 질투가 심하고 음흉하다며 당나라의 간신 이임보에 비교하면서 그를 깠다.
(? ~ 1388년)
1. 생애
고려 말기의 인물. 평택 사람으로 군인 출신. 공민왕 때까지는 최영의 일파로 분류됐다. 우다치에 소속되었다가 공이 있어 중랑장이 되었는데, 홍건적을 피해 공민왕을 호종(피난)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오른다. 이 때 각 도 호족들의 사병을 군사로 징발하자고 주장하나 권문세족들이 응하지 않았다. 이에 임견미가 공민왕에게 울며 간언을 했고, 결국 그의 말대로 되었다. 홍건적이 평정되자 계속 승진해 밀직부사가 되었으며, 1363년 흥왕사의 변을 꾸민 김용이 죄를 자복하게 해 조정에 자리잡았다.
1374년(공민왕 23년) 목호의 난을 평정하러 최영을 따라 제주도에 내려갔다가 공민왕이 변을 당했다. 급히 개경으로 회군한 후 우왕이 즉위하자, 판삼사사에 오른 최영과 최고 정무기관인 도평의사사에 들어갔다. 이후 지문하성사, 평리 등을 거쳤다. 그런데 수문하시중이 된 이인임이 자기 세력으로 포섭하려 하자 최영을 버리고 이인임 일파로 갈아탔다.
우왕 때 내재추가 설치되면서 왕명의 출납을 홍영통, 조민수 등과 함께 도맡았다. 이인임을 믿고 권세를 부리다 못해 우왕이 두 번 호출해야 할 정도로 교만해 졌다. 그의 비위를 문제삼으려 했다가 그 기세에 눌린 우왕은 오히려 공민왕 실록 편수와 시중의 직위를 내리게 된다. 마침내 수문하시중에 올라 정방제조가 되었고, 제멋대로 양민의 땅을 뺏고 대토지를 소유해 신흥 권문귀족 반열에 올랐다. 홍영통, 조민수 역시 임견미와 같은 직위에 있었지만 허울 뿐 전혀 인사 행정에 관여할 수 없었을 정도. 나중에는 이인임의 말조차 듣지 않을 정도로 세를 불리기까지 했다.
1384년에 북원에서 우왕을 인정한다는 책봉 사신을 보냈다는 정보를 입수한 명나라는 여진족을 시켜 방해하려 했는데, 김득경 장군이 여진족을 공격했다가 고려가 명나라의 문책을 받게 되었다. 명나라 군사를 죽인 김득경을 북경으로 압송하라는 조서를 가지고 명나라 사신이 입국했다. 고려 조정은 북원과 교섭할 시간을 벌기 위해 명나라의 요구를 들어주고 안심시키려 한다. 임견미는 따로 집에서 연회를 베풀어 명국 사신 정여를 후하게 대접하고 김득경을 내주기로 했는데, 사실 임견미와 도당은 김득경 대신 가짜를 보내려 했지만 김득경이 자청해 명나라로 갔다. 자청했다고는 하나 명나라에 내준 시점부터가 토사구팽이었다. 임견미는 하륜의 조언대로 자객을 보내 김득경이 철주에 도달했을 때 그를 암살해버렸다.
선친인 임언수가 문하시중에 추증되도록 힘쓰는 한편, 이인임, 염흥방 등 권문세족과 야합해 양민의 토지를 함부로 빼앗았다. 힘없는 소지주들 땅을 뺏는 거야 도의적으로는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문제될 게 없었지만 배천 조씨 호족인 조반의 토지를 빼앗은 사실이 밝혀져 궁지에 몰린다. 이인임 일당도 호족들 토지까지 건드리지는 않았는데 욕심에 눈이 멀었던 것. 결국 이 행태에 분노한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세력을 제압당하고 결국 처형당한다. 이것이 무진피화(戊辰被禍) 혹은 정월지주(正月之誅)로, 조선 초 편찬된 고려사의 임견미 열전에 따르면 임견미와 그의 사돈인 염흥방 및 반익순, 도길부 등이 멸문지화를 당해 첩이나 딸들까지 관비가 되었다고 한다. 연좌돼 처형된 사람만 당시 1천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임견미 열전 참고
당대의 권신 이인임조차 그를 질투가 심하고 음흉하다며 당나라의 간신 이임보에 비교하면서 그를 깠다.
2.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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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악역 연기의 대가 정호근이 열연. 역사대로 이인임의 오른팔로 권세를 부리다가 이인임의 몰락과 함께 처형당한다. 정호근의 악역 연기 포스가 물씬 풍기는, 작중 몇 안 되는 평면적 악역. 도당에서 주로 최영, 이성계에게 얄밉게 한 마디씩 톡톡 던져서 화를 돋구는 것이 특징. 자세한 것은 임견미(정도전)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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