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

 

1. 경관이 좋은 곳에 세운 휴양주택
1.1. 현대 사회의 별장
1.2. 다차(구 소련의 별장)
1.3. 서브컬처의 별장
2. 고려, 조선의 무관 관직명


1. 경관이 좋은 곳에 세운 휴양주택



[image]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 년 살고 싶어

남진 - 「님과 함께

別莊 / Villa
평소에 사는 이외에 있는 집.

1.1. 현대 사회의 별장


현대에는 시골이나 휴양지 등에 지어놓고, 휴가철에 때때로 가서 쉬는 용도로 쓰인다.
대도시에서 가까운 교외 지역에는 집단 별장 지대가 개발되는 경우가 많다.
그냥 사면 끝이 아니고, 황금목장처럼 별장이 흉가(…)가 돼서 많은 매니아들을 끌어들이고 폐가/한국 항목에도 등재되는 오컬트 관광지(…)로 만들지 않으려면 관리비가 많이 필요하다.
한국에서는 별장에 대해 '''재산세 4%'''라는 엄청난 중과세를 때리고 있다. 한국에서 별장이 적은 이유는 이 재산세 4% 때문.[1] 보통 재산세는 1%에 못미치는데, 한국은 땅은 더럽게 좁은데 인구는 꽉꽉 들어찬 상황이라 만약 서울에 별장이 즐비하다면 그야말로 낭비 그 자체이기 때문에 재산세를 이렇게 정해 놓은것이다.
차라리 펜션 회원권이 관리비도 싸고 이용은 거의 비슷하게 할 수 있으니 훨씬 실속있는 상품인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튼 멋지게 질러보고 싶은 사람도 있는 모양.
그 만큼 사치품으로 여겨지디보니 창작물에서는 부자 캐릭터의 상징 쯤으로 쓰인다. 다만 아래에 소개되어있다시피 구 소련권이나 몽골 등 몇몇 공산권 국가에서는 나라가 별장 만들 땅을 국민들에게 공짜로 나눠줬던 역사가 있어 지금도 별장이 보편화되어있다. 물론 권력층이나 부유층이 소유하고 있는 별장[2]을 제외한 대다수의 별장은 한국인이 상상하는 호화별장과는 거리가 멀고, 대체적으로 전원주택에다가 조그마한 텃밭이나 꽤 널찍한 마당정도가 딸려오는 형태다. 몽골도 인구는 적은데 땅이 썩어넘쳐나는지라 왠만한 사람들은 다 초원에 게르 집을 별장으로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도시에서 허름한 아파트에 월세로 거주하는 청년이 차로 한나절 이상 달려야 하는 초원 한복판에 꽤 큰 천막집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복지가 잘 되어있는 스웨덴같은 북유럽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이 시외에 작은 사우나를 갖춘 미니 별장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집이 웬만큼 여유가 있지 않고선, 실제 별장보단 부루마불을 통해 먼저 접해본 사람들이 많을 지도 모른다.
덤으로 별장을 관리하는 별장지기도 있다. 과거 산골에 있던 별장지기들은 1년내내 여기서 살면서 청소하고 별장을 관리하다보니 정년퇴직한 노내외가 주로 맡아서 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건축가인 김집이 회고하길, 어릴적 살던 마을이 근처에 있던 지리산에 별장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겨울에 지나가던 사람이 들르기라도 하면 별장지기가 그리도 반가워하며 차라도 대접하였다고 한다. 워낙에 사람이 안와서 겨울에는 외로워 죽겠다고 이야기도 한참 했다고 한다.
굳이 휴양용이 아니더라도 자택 이외에 다른 지역에 계약해놓은 오피스텔, 아파트를 보고도 별장이라 하는 모양.

1.2. 다차(구 소련의 별장)


세상 사람 치고 별장같은 거 하나 안 가지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냐만, 소련만의 독특한 20세기 역사적 경험과 기억에 기반해, 러시아를 비롯한 구 소련권 사람들에게 있어 다챠라고 부르는 별장은 마치 '''미국의 노란 통학버스와 수영장 딸린 집''' 비슷하게 '''먹고 살기 좋았던 시절 중산층의 신화'''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소련에서는 별장을 국민들에게 무상 분배하였고 이를 '다차'라고 한다. 본래는 18세기 표트르 대제가 귀족들에게 땅을 나누어준 게 시초였는데, 후에 이 다차가 별장이라는 뜻을 가지면서 귀족들의 별장이라는 뜻의 단어가 되었다. 이 당시의 다차들은 귀족들의 휴식시설로 이용되어오다가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귀족들이 몰락하면서 한동안 노동자들의 휴식시설로 이용되기도 했다. 스탈린 시절에는 특권층과 문화인들을 대상으로 다차가 보급되었다. 스탈린 본인도 다차의 텃밭이 있었고 이 텃밭에서 나무나 과일을 재배하는게 그의 취미 중 하나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시골에 연고가 있는 일반인들이 안쓰는 오두막을 빌려서 다차로 쓰기 시작하면서, 일반인들도 다차에서 농사를 짓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사실 이는 원칙적으로는 불법이었지만 경공업의 미발달과 농업집단화로 신선채소류가 부족해 문제가 되고 있었던 터라서 손을 대기 힘들었다.
그래서 흐루쇼프가 집권하자 개인의 다차보유를 합법화한 건 물론(1955년) 국가 차원에서 무료로 다차를 보급하기 시작하고, 1958년에 다차건설 협동조합의 설립을 공인하며 시골에 연고가 없는 일반인들에게도 다차가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브레즈네프 시기 들어와서 완전히 대중화했다. 이 당시에 기본적으로 약 180평의 땅을 국가에서 분배해 줬고, 이를 받는 사람은 제법 행운아였다 한다. 물론 무상으로 주지만 누구나 원하는 대로 받는 건 아니었고 오래 기다려야 했으며,[3] 공헌도 평가에 따라 지급되는 땅 크기도 달랐다. 하지만 성분에 따라 크기는 천차만별이었지만 대부분의 가정은 코딱지만하더라도 다차를 하나는 가진 경우가 많았다.
러시아인들은 '''코딱지만한 땅'''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창의력 을 발휘해 한껏 별장을 꾸몄다. 전원주택을 건설하고 사우나 시설도 만들고, 꼬치를 먹기위해서 화로도 들여놓고, 텃밭도 개간하고, 울타리도 만들고, 개집도 만들고, 잔디도 가꾸고, 수도시설도 들여놓고... 이게 농담이 아닌 게, 수도고 전기고 아무것도 없이 땅만 덩그러니 주기 때문에 기초공사부터 개간까지 개인이 전부 해내야 했다. 다만 조합별로 따로 다차 관리자를 선출해서 다차 건설과 관리를 따로 도맡게 하는 경우도 존재하며, 다차만들 땅을 받았을때 다차 관리인들에게 건설을 맡겨놓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관리자가 없는 다차들도 존재하는데 이런 다차의 경우, 범죄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라고 한다.
흐루쇼프 집권기에는 대개 직장과 연계된 조합을 통해서 부지가 할당됐다. 그 결과 작가촌, 광부촌, 화가촌, 건설노동자촌, 수력기술자촌처럼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직업별 다차촌이 양산됐다. 또, 흐루쇼프의 정책 실패로 인한 식량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텃밭이나 가축을 가꾸는 다차가 더욱 활발해졌다고 한다. 도시 바깥 교외의 다차에서 텃밭을 가꾸고 휴가를 보내는 것은 구 소련이 무너지고 별장 무상분배가 중단된 지금도 러시아의 일상적인 문화가 되어 있다. 러시아에서 주택담보대출이 활성화하지 못한 원흉(?)으로도 손꼽히기도 하는데 소련시절에 아파트 한 채와 다차는 무료로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이혼을 하거나 자녀를 많이 두지않는 이상, 굳이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는 가정이 많아서이기 때문이다. 물론 러시아에서도 시장경제가 활성화되고 사유화와 부동산 투기로 인해서 대도시 지역의 집값과 임대료가 그리 싼 편은 아니긴 하다. 거기에다가 이자율도 비싸기 때문에 분가를 하려는 젊은층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아래에서 언급되지만 오히려 이를 이용해서 자신은 다차에서 살고 도심지역의 아파트는 세를 놔서 두둑하게 돈을 버는 경우도 있다.
1980년대까지는 소련 각 가정에서 다차에서 생산된 농작물과 축산물 가운데 먹다 남은것들을 암시장에 내다 팔아서[4] 용돈벌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며[5], 90년대 러시아 경제가 막장일로를 걸었을때 다차 덕분에 그나마 러시아에 대기근이 오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당시 러시아 서민층들이 다차에 의존한 게 많았다. 물론 소련 시절에 다차에서 농사를 지었긴 했지만, 대체로 일반적인 상점에서 사오기 힘든 싱싱한 채소류나 과일류를 먹기 위한 목적이 강했던 데 반해, 90년대 러시아에서는 말 그대로 생계수단에 가까웠다는 게 차이점이다.
당시 러시아의 서민들 중 다차를 소유한 사람들은 다차에서 생산된 농축산물로 식비를 아끼고, 남은 농축산물을 시장이나 기차역 가판대에서 내다팔아서 생활비를 충당하며, 노인들 가운데서 아파트는 자식들에게 주면서 자신은 다차에서 거주해서 생활비를 아끼는 경우도 많았다. 바로 이런식. 다만 이 당시 혼란기를 틈타 돈을 벌어들인 부자들은 다차를 크고 호화스럽게 짓어서 호화 다차들이 많이 늘어나기도 했고 아예 단독주택으로 바뀌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경제사정이 나아지면서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경우가 많아져 다차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졌지만 여전히 경기침체가 올때마다 다차의 이용도는 높아지는 경향은 여전하다.
구 동독에도 다차와 굉장히 흡사한 별장이 있었다. 소련의 다차만큼이나 보급률이 높았다. 영화 굿바이 레닌에 비교적 잘 나와있으니 관심있으면 참조.

1.3. 서브컬처의 별장


하렘, 러브코미디, 학교학원 등등의 일상계 작품들에서 거의 100% 확률로 등장하는 장소이다.
80% 정도는 여름방학 및 여름철을 맞이하여 단체로 바다으로 떠날때, 부자+아가씨속성의 히로인의 집안 소유 재산 목록중에 마침 가려고 하는 곳의 별장이 있거나, 아니면 먼저 "XX에 별장이 있으니까 XX로 놀러가자" 는 제안을 한다.
여기서 더 나가면 별장 전용 집사메이드가 있는 경우까지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실에서 따로 5인 이상이 숙박할 수 있는 규모의 별장을 지닌 친구판타지의 영역이고, 그나마 조금 현실적인 경우는 친구의 친척이 숙박업을 한다거나, 위치가 촌에 가까운 곳이라 일단 몸을 누일수 있는 큰 창고 정도는 존재하는 집이 있다거나 하는 수준이다.
현실로 보면, 5인이상이 지내려면 필요로하는 최소한 15평 이상의 공간에 부엌이나 화장실이 딸린 집을 오로지 피서용으로 지닌 집안이 있다면, 보통의 서민집안과는 차원이 다른 부잣집일 확률이 100%다. 서브컬쳐의 작품에서야, 일단 5~6명정도 모이면 그 중 한명은 무조건 부잣집, 높으신 분의 자녀, 어딘가의 재벌회장의 자녀, 큰 병원집 자제 등등이지만, 현실은 별장은 커녕 전세나 월세살이 하는 집안이 훨씬 더 많다.

2. 고려, 조선의 무관 관직명


한자로는 別將으로 통칭된다.
고려시기에는 고려시대 정7품 무관직으로, 246명이 주로 중앙군에 배치되었다. 응양위를 제외한 나머지 영이 200명 단위 부대의 부지휘관으로 종사하였다고 한다.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이의민최충헌이 처음 나왔을 때의 지위가 별장이었다. 현재의 소령과 비슷한 느낌.
조선시기에는 별장으로 통칭되는 무관직이 많았는데, 정리 해 본다면 아래와 같다.
  • 조선시대 산성, 포구, 작은 섬 등의 수비를 맡은 종9품의 무관직.
  • 조선초기 의흥친군 10위에 두었던 칠품 무관직. 고려시대의 별장과 비슷한 지위였을 것으로 보인다.
  • 조선시대 지방 군영(병영)에 두었던 정3품 무관직. 마병을 지휘하였다.
  • 조선시대 후기 호위청과, 총융청을 제외한 나머지 오군영에 두었던 정3품 당상관. 좌우별장으로 나뉘어 마병을 지휘하였다.
  • 조선 후기 용호영의 최상급자로, 통칭 금군별장으로 불리었던 종2품 당상관.


[1] 다만 고급 주택 기준에 부합하는 별장만 이렇게 뗀다. [2] 이러한 별장을 러시아에서는 빌라라고 한다. 외래어을 써서 차별화(?)한것.[3] FM대로라면은 보통 신청한 뒤에 5년에서 10년 정도를 기다려서 받아야 되지만, 다차를 일찍 받을려는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에 시골의 오두막을 임대하거나, 사람이 살지않은 빈집을 매입해서 다차로 개조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전자는 임대료가 가파르게 올라서 후기 들어서 꽤 부담이 되었고 후자의 경우는 편법에 가까웠던지라 관리들한테 일정수준의 돈을 찔러져야되어서 상당한 수고가 들었다고 한다.[4] 물론 불법이지만 암암리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오히려 초창기에는 원예작물을 키우면 땅을 몰수당했다는 얘기도 있다.[5] 북한에서 농업 관련 일을하다 탈북한 모 새터민은 다차의 경지면적은 소련 전체 경지의 1% 정도였지만 생산된 농작물량은 소련 전체 농작물의 25%에 달했다고 하면서 북한 농업의 최대 문제점은 '''내것이 아니라서 생산성이 낮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북한에서도 소련식으로 땅을 나눠주는 정책을 아예 안 편것은 아니라서 1990년대 초반에 배급이 후달리니 텃밭을 가꾸는 식으로라도 먹고살라는 식으로 텃밭을 가꿀수있게 허가를 내기는 했다.. 산림황폐화와 비료부족때문에 언발에 오줌넣는 수준에 그쳤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