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사건
靈巖事件
1. 개요
1947년 6월 2일,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조선경비대[1] 4연대와 경찰 사이에 교전이 벌어진 사건. 국가기관, 그 중에서도 두 무력집단이 주먹다짐도 아니고 화기가 동원된 전투를 벌였으니 해방정국의 정치적 혼란이 어느 정도였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2. 배경: 국방경비대와 경찰 간의 잦은 갈등
미군정은 남북분단이 기정사실화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남한의 독자적인 군대의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한반도 남부에 독자적인 군대를 창설한다는 것은 소련과의 상호협의를 포기하고 독자 정부를 세우겠다는 의지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군대를 대신하여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했다. 국방경비대는 사실상 군대를 지향하고 있었지만 대내외적으로는 경찰예비조직을 표방했다.
문제는 국방경비대가 경찰의 보조 조직을 표방하다보니 여러 면에서 경찰에 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급식문제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국방경비대는 열악했다. 워낙 모병 자체도 힘들었지만 기껏 모은 병사들도 태반이 탈영했다. (제4연대의 경우, 입대한 사병의 1/3이 도망가는 형편이어서 편성 병력은 정원의 60~70%에 불과했다.) 국방경비대의 훈련은 기본훈련과 국내 치안 훈련만 시켰을 뿐이고 개인화기 이외의 다른 무기 훈련은 금지시켰다. 하지만 경찰은 M1 개런드와 M1 카빈 등의 미국제 신식무기와 미군 차량, 대검, 기관총에 독자적인 전화와 무선통신망까지 갖추고 있었다. 반면 경비대는 독자적인 군복을 만들지 않고 남아도는 일본 군복을 그대로 입었고,[2] 계급장도 경찰 모자의 귀 단추로 쓰이는 무궁화를 사용했기 때문에 경비대원들은 심한 열등감을 느꼈다. 게다가 경찰'''예비대'''라는 자신들의 위상까지 겹쳐 이 열등감은 배가된 상태였다.
국방경비대와 경찰의 인적구성도 군경 간의 갈등을 부추겼다. 경비대 간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본군이나 관동군 출신들은 군국주의적 사고 때문에 경찰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었다. 여기에 국방경비대의 일부 간부들과 대다수 병사들은 반정부적이거나 심지어 좌익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다. 경비대는 각 도청 소재지를 중심으로 한 향토연대로 구성되었는데, 해당 지역에서 모병을 했기 때문에, 지방색이 매우 강했다. 사실 미군정이 경비대의 머릿수를 채우는 데에 급급하다보니 사병의 성향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던 것도 이유이기도 했다.
심지어 반정부분자로 수배되어 경찰을 피해 다니던 인물들이 이미 군대에 들어와 있던 인맥을 통해 경비대에 입대하는 경우도 많았다. 후에 여순사건을 주도했던 14연대의 경우, 부대 내의 남로당 조직원들이 반정부 경향을 가지고 있거나 사회운동을 하다 수배 받은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심지어 입대했거나 예정인 수배자들의 명단을 작성해 경찰서장에게 보여주며 "군대에 가면 사상운동 하는 것이 아니고 군사훈련에 열중하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염려 말고 도장 찍어라"고 해서 20~30명씩 허락받기도 했다.
게다가 중도파 경비대원들이 보기에도 경찰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온상이었다. 일제 때 관리를 하던 자들과 악랄한 지방 경찰들이 해방 이후의 공공기관과 치안직에 그대로 등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일본도를 차고 일제 때처럼 행패를 부리고 다녔다. 특히 미군정이 실시한 미곡 공출정책을 수행하는 임무를 경찰이 맡았는데, 일제 때의 공출과 똑같이 폭력을 행사하고 다니며 쌀을 뜯었기 때문에 민중의 원망이 상당했고, 이 소식은 경비대원들에게도 알음알음 알려졌다.[3]
이것은 이승만이 조장하였다고도 볼 수 있는데,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한국독립당)나 지하운동하던 공산주의 세력(조선공산당), 심지어 친일하던 김성수 세력(한민당)등도 해방후 정당을 만들어 정당정치를 하며 권력 다툼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당내에서 당권 경쟁을 하는 정당 정치 자체를 혐오하였다. 이승만은 당을 만드는 대신 일제시대부터 근무하던 관료조직과 경찰조직에 손을 뻗었다. 특히 경찰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적들을 탄압하였다. 그에 반해 군인들은 일본군,학병,만주군,중국군,독립군 세력들이 섞여 있어서 이승만의 입김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이러한 경향은 이승만이 친위세력이자 극우테러단체인 대한청년단원들을 단체로 군에 입대시켜 친정부 쪽으로 기울이게 함으로서 어느 정도 해소되는데, 다만 이로 인해 훗날 행해질 학살 사건들에서 군인들이 맹목적으로 묻지마 학살을 일으키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경찰 측에서는 경비대를 경찰 조직의 하부 기관쯤으로 보아 무시했고, 사상적으로 불순한 오합지졸로 인식했다. 제1연대 연대장 배로스 중령이 경비대와 경찰의 충돌이 일주일에 한번 꼴로 발생한다고 말한 바와 같이 경비대와 경찰 사이의 충돌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자주 발생하고 있었다. 경비대원들은 경찰에게 모욕을 당하고 얻어맞고 유치장으로 끌려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는 사병뿐만 아니라 부사관이나 장교들도 마찬가지 현실이었다. 이에 군인들도 휴가 나가면 친일경찰들을 두둘겨 팼다며 자랑하며 복귀하는 것이 기본이고, 경찰들은 반대로 휴가나온 군인들을 불러세워 불심검문하며 괴롭혔다.
경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은 좌익 세력이 강한 지역일수록, 남북분단이 기정사실화 되고 경비대가 팽창하면서 점점 심화되어 갔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 제4연대는 화약고나 다를 바 없었다.
3. 발단과 전개
제4연대에서는 경찰과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났다. 군인이 외출만 하면 경찰에게 얻어맞고 돌아오자 제2중대장 최홍희 참위는 대원들에게 맨손무술[4] 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외출하여 얻어맞고 귀대하는 대원을 제대시켜 버렸다.
1947년 4월에는 4연대 어떤 병사의 형이 소요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순천 경찰서에 수감되었는데, 그 일을 전해들은 4연대 사병들이 광주에서 90km 이상 떨어진 순천까지 원정하여 경찰서를 습격했던 것이다.
순천 사건이 수습되기도 전에 영암사건이 터졌다. 1947년 6월 1일 고향에 가있던 한 명의 4연대 하사가 귀대하려고 경찰차에 편승했다. 그런데 경찰이 군인의 모표를 소재로 삼아 사쿠라꽃 같다며 경비대를 조롱했고, 당연히 당시 반일감정이 드세던 시기에 일본과 관련되어서 비아냥과 시비를 떨어대니 하사는 참지못하고 상호구타가 벌어졌고 결국엔 하사를 폭행 현행범으로 연행해 버렸다. 제 1대대 부관이 사정을 알아보러 영암경찰서로 갔지만, 경찰은 “경비대는 경찰의 보조기관이고 위법행위를 취조하는 것이 경찰의 임무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부대로 돌아오던 일행이 지서에 이르렀을 때 보초 순경이 공포를 발사했다. 이에 격분한 헌병이 순경을 구타하자, 경찰은 헌병을 연행하고 미 고문관에게 경비대 폭행으로 경찰관 8명이 부상했다는 허위보고를 올렸다.
한편 4연대에 사건 경위가 알려지자 병사들 300여 명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총과 실탄을 휴대한 채 ‘경찰 타도’를 외치며 영암으로 질주했다.
6월 2일 새벽, 영암경찰은 망루에 기관총을 장치해 놓고 경비대에게 총격을 가했다. 경비대는 기껏해야 일제 99식, 38식 소총을 가지고 있을 뿐이어서 상대가 되질 못했다.
이때 부대를 수습하려고 급히 출동한 연대장 이한림 소령이 호위병을 데리고 협상을 위해 다가갔으나, 경찰이 수류탄을 투척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 가까스로 경찰서에 뛰어 들어간 연대장은 사격중지를 경찰에 요구했지만 그 또한 체포되었다. 이는 미군 경찰고문과 경비대 고문이 와서야 진정될 수 있었다.
4. 결과
충돌 결과 4연대 병사 6명이 사망했고, 십여 명이 부상했다. 하지만 경찰은 우세한 화력 덕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나오지 않았다. 4연대에서는 이 사건 관련자들이 전출, 면직되었지만, 경찰에서는 오히려 이 사건에서 공을 세웠다 하여 진급한 자도 있었다. 사건 뒤에도 경찰은 군대에 정보수집 왔다 하여 군인들을 붙잡아 폭력을 행사했다.
후에 14연대가 여순사건을 일으킬 때, 주동자였던 4연대 출신의 좌익계 장교와 하사관들이 “경찰들이 쳐들어온다. 응징하러 가자”고 선동했을 때, 대다수의 부대원들이 이를 동조했으며 여수와 순천에 진입하여 제일 먼저 경찰관을 처단했다.[5]
[1] 남조선국방경비대에서 1946년 6월 명칭이 변경되었다.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2] 비록 전투모 모표와 계급장을 달리 했다고는 하지만 이로 인해 경비대원들은 종종 일본군으로 오인받았다. 일례로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모 소위는 임지로 출발하기 위해 부산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무장한 일본군으로 오인한 사람들은 기겁을 했고 뒤이어 경찰들까지 출동해 모 소위를 체포하였다. 당연히 그는 경비대 장교라며 신분을 밝혔지만 경찰들은 비웃으며 그를 구타한 뒤 칼을 압수하는 무장해제를 한 뒤에야 돌려보냈다. 물론 이 문제는 유야무야 상호합의간에 처리되었지만... 당시 경비대의 현실은 이렇게 위아래를 구분하지 않고 경찰에게 굴욕적인 취급을 받았다. - 출처: 우리는 대한민국의 군인이었다 윤용남 저.[3] 기타 사항으로 조미공동회담에서 최능진은 "매일 많은 사람들이 증거도 없이 체포된다. 어떤 경찰관은 '저 놈이 맘에 안드니 데려다가 두들겨 패고 감옥에 처넣자'는 사례를 들며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인민의 80%는 공산주의로 돌아설 것이다."라고 우려했다. 심지어 경상도 출신의 어느 한 지식인은 미군정 관리에게 '''친일경찰을 제거해 주면 한국인은 모두 공산주의를 반대할 것'''이라는 편지를 쓸 정도였다.[4] 태권도는 1955년 이후에 생겼다[5] 당시 경찰들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은 매우 부정적인 평이 주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