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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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翰林
1921년 2월 10일 ~ 2012년 4월 29일
대한민국의 전 군인,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평창(平昌)#. 가톨릭 신자로서 세례명은 가브리엘이다.
1921년 함경남도 안변군에서 태어났다. 만주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한 뒤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신경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 동기이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미군정 영역으로 들어왔다.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2월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대한민국 육군 제1야전군사령관으로 재직 중이던 1961년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이한림은 군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여 박정희 등의 군사정변 주도 세력과 대치하였으나, 결국 쿠데타군 측으로부터 견제되었다.[1][2] 그리하여 1961년 8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되었다.
예편 이후 수감되었다가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캘리포니아주립대 산타바바라(University of California Santa Barbara)에서 공부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정일권의 권유로 박정희 정권과 화해한 후 귀국하여 1969년부터 1971년까지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장관 재직 당시 주무 부처 장관으로서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을 지휘한다. 1974년부터 1980년까지 주 터키 대사, 주 오스트레일리아 대사를 지냈다.
만주군 복무 경력, 일본육군사관학교 경력으로 인하여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이후 2012년 4월 29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91세.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약 4개월 뒤에 군사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장도영 중장 역시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향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 정부수반이던 장면 총리는 어디론가 사라져서 숨었고, 국군통수권자이던 윤보선 대통령은 주한미국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의 진압명령 요청을 거부하였다.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은 표리부동한 모습을 보이다가 계엄령 하에서 계엄사령관 자리에 앉았다. 거기다가 문민통제라는 원칙에 따라서 임명된 국방장관은 민간출신에 그나마도 여러번 교체되었다. 수도권에 주요병력을 통제하는 1군사령관이던 이한림은 진압할 충분한 힘은 가졌지만, 움직일 명분이 없었기에 사실 움직이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반란이 될 수 있었다.[2] 여담으로 당시 전속부관이 박준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