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냥코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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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냥코클럽의 싱글과 파생 솔로, 유닛 싱글 자켓 모음.
1985년부터 1987년에 걸쳐서 활동했던 일본 아이돌 그룹. AKB48의 프로듀서로 알려진 아키모토 야스시가 단독으로 기획했던 아이돌로 알려져있지만 어디까지나 아키모토는 작가진 중 한 명이었고 프로듀스자체는 후지테레비 '유우야케 냥냥'의 프로듀서진이 공동으로 맡았다. 멤버 닛타 에리가 밝힌 오냥코클럽과 AKB48과의 차이점은 'AKB48 멤버들 쪽이 프로 의식이 높다는 것.' 자신들은 스스로 일반인에 가까운 신인이었기때문에 방송에 나갈 땐 프로의 영역에 신인이 신세지는 느낌으로 출연했다고 회상했다. 오냥코클럽을 벤치마킹하여 만든 모닝구 무스메의 프로듀서인 층쿠도 고교시절 오냥코클럽의 팬이었다고 한다.
1987년 해산 후에는 계속 연예계에 남아 엔터테이너로써 활동하는 멤버와 결혼하여 평범한 주부가 된 멤버, 직장인이 된 멤버가 있는 등 각자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에는 중년의 나이가 된 오냥코의 몇 멤버들이 함께 CF에 출연하며 반가움과 향수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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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CM 촬영을 위해 다시 뭉친 오냥코클럽 전 멤버 11명.
2014년 11월 12일 AKB48의 방송 'AKB 조사'에서 오냥코클럽 멤버들의 현재를 조사했는데 다음과 같다.
오냥코클럽 디스코그래피.
당초에는 후지 테레비의 버라이어티 방송인 '''유우야케 냥냥(夕やけニャンニャン)'''이라는 프로그램을 런칭하면서 탄생된 일종의 이벤트성 아이돌 그룹이었다. 프로그램의 제작진들은 멤버들에게 연예계 활동보다는 학업을 우선시할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1] 또한 방송 관계자들에게도 비록 멤버들이 방송에 출연하긴 하지만 아직 '고교생'이라는 본분을 확실하게 인식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그들의 본업은 '''고교생'''이었으며 그들의 역할은 방송 내에서 사회를 맡은 인기 개그맨 톤네루즈와 함께 방송 진행을 돕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룹과 멤버들 자체의 인기가 높아져감에 따라 해당 방송은 오냥코 클럽이 메인이 되어버렸고 당시 메인으로 MC를 진행한 이시바시 타카아키는 이 방송을 너무 그만 두고싶었다고 한다.(...)[2]
당시 '냥냥'이라는 프로그램 이름과 후술할 변태적인 노래 때문에 상당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냥냥이란 말 자체가 성적인 은어로 쓰였기 때문에다.[3]
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의 여성 아이돌은 말 그대로 '우상'에 가까운 존재였으며 노래도 잘 하고 외모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지역에서 제일 예쁜 아이가 아이돌이 된다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었으나 오냥코클럽은 이런 여성 아이돌의 개념을 비틀어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조금 신경쓰이는 동급생'''이 방과후 부활동의 연장으로 방송에 출연한다는 컨셉으로 결성되었다. 멤버는 매주 열리는 방송 내 '아이돌을 찾아라' 코너에서 매주 5인을 선정해 5일간 오디션을 실행하는 방식으로 뽑았으며 오디션을 본 멤버 중에는 아예 일반인도 있었고 연예 사무소에 소속된 멤버도 있었다. 오디션 합격 후에도 소속사가 있는 멤버를 제외하면 모두 후지 테레비 사단 하에 있는 무소속 신인이었기때문에, 그 대부분의 멤버들은 오냥코가 해산한 뒤 일반인으로 돌아갔으며 이미 소속사에 속해있던 10명의 멤버들은 이후 솔로 데뷔 등으로 연예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카와이 소노코, 와타나베 미나요, 쿠도 시즈카, 타카이 마미코, 이와이 유키코, 아카즈마 카요 등은 오냥코 출연 전부터 이미 연예 사무소에 소속되있었다.
1985년 4월 연예계 데뷔 후 3개월만에 내놓은 전설의 데뷔곡 '세라복을 벗기지 말아요'가 공전의 히트를 친 이후 1987년까지 약 2년 반이라는 짧은 활동 기간 동안 사회 현상이라 불릴 정도의 인기를 얻었으며, 본진인 후지 테레비의 음악 방송 뿐만 아니라 타방송사의 '더 베스트 텐'과 같은 유명한 음악 방송 출연을 성사시키고, '묘조(明星)', '헤이본(平凡)'등 아이돌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등 아이돌 전성기의 한가운대에서 일약 급물살을 타며 본래 타겟인 일본의 남중생, 남고생 들에 한정되지않고 세대를 아우르며 폭 넓은 지지를 얻었다. 당시에도 도를 지나친 열성팬들이 많았는지, 최근 방송에서 멤버였던 쿠도 시즈카가 풀어낸 오냥코 시절의 일화에 따르면, 아침에 일어나보니 자신이 버린 쓰레기들이 일렬로 정리되어있었으며 살았던 맨션 앞에 버린 쓰레기들도 전부 일렬로 늘여져있어서 정말 기분나빴다고 한다. 폭주족이었던 팬들도 있었는데, 서로 다른 조직의 폭주족들이 자신이 타고 갈 차를 따라와 누가 먼저 제칠지 싸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최초 멤버를 뽑을 때 노래나 댄스 실력, 외모보다는 친근감을 우선해서 뽑은 의도적인 전략은 완벽히 적중해서, 멤버들의 소탈한 매력이 많은 남자 청소년들을 팬으로 만들었다. 당시 방송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여 ''' '유우야케 냥냥'을 보기 위해 부활동도 하지않고 방과후 집으로 달려가 방송을 보는 학생들이 증가'''했다는 도시전설이 오갈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팬클럽 '코냥코 클럽'의 회원수도 몇십만명의 회원수가 모이는 등의 인기를 얻었다. 오냥코클럽의 솔로 활동과 관련 유닛 싱글은 1986년 이 해 오리콘 싱글 1위 46곡 중 30곡이 오냥코 관련곡이었으며 총 52주중 36주를 점거하는 등 오리콘 차트를 독점했다. 인기 멤버였던 닛타 에리의 '冬のオペラグラス(겨울의 오페라글라스)'가 당시로써는 이례적으로 30만장 이상의 판매율을 보였고 차례차례 솔로로 데뷔한 멤버들은 모두 오리콘 등장 첫 순위가 1위였다. 단, 고쿠쇼 사유리의 'バレンタイン・キッス(발렌타인 데이 키스)'는 유일하게 2위로 입성해서 최근 모 프로그램에서 디스당했다.(...).
이러한 인기가도에서도 홍백가합전에는 한 번도 출장한 적이 없는데, NHK 관계자에 따르면 1985년 당시 사전조사에서 시청자 대상 투표수가 적었기때문이라 설명했다. 멤버 중 쿠도 시즈카만이 오냥코클럽이 해산한 후인 1988년 솔로로서 처음 홍백가합전에 출연했다.
그러나 86년을 기점으로 초기 멤버들이 학업 등의 이유로 탈퇴, 새로운 멤버들은 계속해서 영입되었고, 후기 멤버들로 결성된 '우시로유비 히카레타이(うしろ髪ひかれ隊)'도 히트하였으나 차츰 붐이 꺼져감에 따라 빠르게 해산을 고하게 된다.
1987년 6월 15일 유우야케 냥냥 방송 내에서 해체를 발표하고 9월 20일 요요기 홀에서 콘서트를 열고 해산.
파이널 콘서트에서 '회원번호의 노래'를 부르는 전 멤버들.
이 콘서트는 전국에서 3만명 가까운 팬들이 모였으며 티켓을 구하지못한 수백명의 인원이 인근 하라주쿠의 인도교를 메워 콘서트장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일동이 하나가 되어 멤버들을 보내준 팬들 사이에선 전설로 통하는 파이널 콘서트로 남아있다. 그러나 공연 마지막 앵콜이 울리던 사이 친위대를 포함한 일부 팬들이 폭주하여 입구 유리를 깨거나 의자를 부수는 난폭 행위를 일으키고 회장 밖에 있던 팬들마저 자신들도 들어갈 권리가 있다며 경비원들을 뚫고 난입하여 다음 날 뉴스와 잡지에 크게 보도되는 일대 사건이 되기도 하였다.
오냥코클럽이 해산 후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대부분의 멤버들이 학업을 다시 시작하거나 회사원이 되는 등 일상 생활로 돌아갔지만, 닛타 에리, 고쿠쇼 사유리, 죠노우치 사나에, 쿠도 시즈카처럼 연예계 생활을 지속한 멤버도 있었다. 톱클래스 인기 멤버였던 타카이 마미코는 프로듀서이자 작사가 아키모토 야스시와 결혼하여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멤버 내 제일의 미소녀로 칭해졌던 카와이 소노코는 오냥코 클럽의 거의 모든 작곡을 담당한 작곡가 고토 츠구토시와 1994년 결혼하였다.
해산 후에 일반인으로 돌아간 멤버들은 '그 사람은 지금?'같은 과거에 인기있었던 연예인의 근황을 찾는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였으며 연예 활동을 지속하는 멤버들은 90년대와 2000년대 현재에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동창회 기획으로 TV에 출연하고있는데 닛타 에리의 인터뷰에 따르면 방송에서 모이는 멤버들은 항상 고정적이라고. 2002년엔 초기 멤버와 참석 희망자 14명이 모여 '유통기한(ショーミキゲン)'을 내고 일시적 재결성을 하였다.
비록 그룹 자체의 턱없이 부족한 노래, 안무실력 등등 그룹이 오래 장수하기에는 너무나도 한계가 명확했기에 결코 오래가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래도 '''멤버들 실력과는 상관없이 기획과 아이디어가 좋으면 잠시나마 성공할 수 있다'''라는 사례를 남겼다는 데에서 의의가 있었다.
오냥코클럽의 성공은 기존에 야마구치 모모에, 마츠다 세이코등의 철저한 실력파들로 대표되어오던 일본 여성 아이돌 업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998년 등장한 모닝구 무스메 등 대형 아이돌 그룹의 활동 방식의 기반이 되었다. 반면 연예인으로서의 실력을 아직 갖추지 못한 평범한 여중고생들을 일약 인기 아이돌로 만듦으로써 일본 여성 아이돌 전반의 실력 저하를 낳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오냥코클럽의 성공 이후, 80년대까지 이어져 오던 정통파 아이돌의 개념은 90년대 부터는 아이돌이 아닌 하마사키 아유미, 오오츠카 아이, 코다 쿠미 등 여성 솔로 아티스트로 이어지게 된다.
아키모토 야스시와 후지테레비에서 오냥코클럽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미즈구치 마사히코는 1990년대 '헤이세이의 오냥코클럽'을 만들자는 목표로 새 아이돌 그룹을 구상하였다. 마침 아키모토가 세가의 외주인력으로 드림캐스트의 홍보 전략을 짜고 있었는데, 이것과 맞물려서 드림캐스트의 홍보용 아이돌이자 오냥코클럽의 직계 후손인 체킷코가 등장한다. 그러나 체키코는 당시 불었던 모닝구 무스메 열풍으로 인해 크게 활동을 하지 못하고 1년만에 해산하였다.
체킷코의 실패를 겪은 이후 아키모토는 2000년대에 AKB48이라는 그룹을 데뷔시켰다. 멤버들을 솔로, 유닛으로 분리해서 데뷔시키거나 멤버들을 정기적으로 추가 영입하는 등 AKB48의 주요 운영 방식은 이미 오냥코클럽 시절에 확립해둔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지만, 거기에 '전용 극장',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아이돌'이라는 컨셉을 덧붙여서 새로운 아이돌을 만들어냈다.
2010년대 들어 AKB48은 연예계는 물론 일본의 각종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 현상이 되었다. 영향력만 보면 80년대 당시의 오냥코클럽보다 현재의 AKB48이 더 크다고 평가할 수 있으나 그룹 외의 솔로 데뷔, 유닛 결성이라는 새로운 아이돌의 판매 방식은 오냥코클럽이 원조이자 시초라 할 수 있다.
한편 후지테레비에서도 체킷코의 실패를 거울삼아 2000년대 '아이돌링'이라는 방송을 만들고 방송 내에서 아이돌링!!!이라는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키는 등 오냥코클럽을 다시금 재현하려 했다. 하지만 아이돌링은 큰 성과를 얻는데는 실패하고 2015년 10월 31일 전원 졸업했다. 대신 후지테레비는 자사에서 아이돌을 키우기보다는, 각지의 군소 아이돌들을 모아 '도쿄 아이돌 페스티벌', '도쿄 아이돌 프로젝트' 등의 이벤트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후배격인 AKB48 멤버들이 부른 '세라복을 벗기지 말아요'.
데뷔곡인 '세라복을 벗기지 말아요'는 여고생이 빨리 성관계를 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충격적인 가사 내용으로 논란이 되었으며 한국에서도 '80년대 일본 아이돌의 위엄' 정도의 제목으로 가끔 욕을 먹는다.(…)
후지테레비의 인기드라마 스케반 데카에 멤버들이 주요배역으로 출연 하였으며, 전 멤버가 출연한 에피소드도 존재한다.
가면라이더 키바의 키도 아키라와 지로가 이들의 광 팬이라는 설정이며, 쿠레나이 오토야가 위조한 야마모토 수잔 쿠미코의 사인을 받아들고 격노하는 장면이 나온다.
2015년 7월 방송한 아이돌 애니메이션 비너스 프로젝트에 닛타 에리와 이쿠이나 아키코가 첫 성우 출연을 했다. 애니에서 그녀들을 모델(?)로 한 캐릭터로 신도 에리, 이나오카 아키코라는 두 명의 이름을 본 딴 캐릭터가 등장한다. 나이는 23세라는 말에 두 사람 다 매우 좋아했다.(...)
2015년 결성 30주년으로 CD-BOX '싱글 레코드 복각 냥냥'이 발매되었는데, 당시 레코드 자켓이나 봉투와 사진 등을 그대로 재현하여 오냥코 클럽 시절 발매된 전 싱글 126장 세트를 CD로 발매했다. 당시 멤버들에 따라 레코드 레이블도 각각 달랐고 이런 저런 사정으로 본인의 사진이나 작품들은 제외해달라고 요청하는 멤버들도 있어 발매가 쉽지 않았었는데 모두 발매를 허락하여 기적적으로 성사되었다. 가격은 무려 92000엔으로 어마무시한 가격이다.
주요 인기 멤버로는 닛타 에리, 고쿠쇼 사유리, 카와이 소노코, 타카이 마미코, 조노우치 사나에, 이와이 유키코, 와타나베 미나요, 와타나베 마리나 등이 있다. 그 외에 해산 후 솔로로 데뷔한 이쿠이나 아키코, 쿠도 시즈카 등이 있다. 쿠도 시즈카는 후기 멤버였기 때문에 오냥코클럽 당시에는 존재감이 낮았지만, 해산 이후 솔로 가수로서 성공하였다.
당시 방영되었던 유야케 냥냥에서 한 <NO MORE 연애흉내> 라이브.
프론트 멤버는 토미카와 하루미, 나가타 루리코, 이와이 유키코, 시라이시 마코.
오냥코클럽은 프론트 보컬이라는 이름으로 네 명의 멤버를 메인으로 세우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AKB48과 같은 '센터'라는 개념은 희박했다. 대충 보면 솔로로 데뷔한 멤버들은 주요 멤버라고 보면 된다. 또한 솔로 데뷔를 한 후에는 프론트 보컬로 세우지 않았다. 일종의 세대 교체인 셈.
굵은 글씨로 된 멤버는 2014년 현재도 연예 활동을 하고 있는 멤버다.
멤버들을 솔로 데뷔, 유닛 데뷔시킨 판매 방식의 시초이며 독자적인 전개로 아이돌계의 한 획을 그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이돌이지만 음반 판매량은 그리 높지 않다. 일본 음반 판매량의 전성기는 90년대 중후반이고, 80년대 중후반에는 아직 음반 시장이 크지 않아서 밀리언 셀러라는 개념은 낯설었다. 물론 일본 연예계나 사회에 끼친 영향은 이루 대단하지만, 음반판매량 자체만 놓고 봤을때 80년대 중후반의 기준으로 보아도 오냥코클럽의 음반 판매량은 큰 수치는 아니었다. 일본에서 80년대의 주류 음악은 아이돌이 아닌 J-ROCK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냥코클럽이 활동할 당시에는 LP나 카셋트테이프 형태로 음반이 나왔기 때문인 것도 없지는 않다. 단, 솔로가 더 잘 팔리기도 했던것이 오냥코 클럽의 특징이다.
기타 유닛, 솔로 멤버들의 음반 목록은 오냥코클럽/디스코그래피를 참고. 판매량에 대해서는 이 문서를 참고하면 좋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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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냥코클럽의 싱글과 파생 솔로, 유닛 싱글 자켓 모음.
1985년부터 1987년에 걸쳐서 활동했던 일본 아이돌 그룹. AKB48의 프로듀서로 알려진 아키모토 야스시가 단독으로 기획했던 아이돌로 알려져있지만 어디까지나 아키모토는 작가진 중 한 명이었고 프로듀스자체는 후지테레비 '유우야케 냥냥'의 프로듀서진이 공동으로 맡았다. 멤버 닛타 에리가 밝힌 오냥코클럽과 AKB48과의 차이점은 'AKB48 멤버들 쪽이 프로 의식이 높다는 것.' 자신들은 스스로 일반인에 가까운 신인이었기때문에 방송에 나갈 땐 프로의 영역에 신인이 신세지는 느낌으로 출연했다고 회상했다. 오냥코클럽을 벤치마킹하여 만든 모닝구 무스메의 프로듀서인 층쿠도 고교시절 오냥코클럽의 팬이었다고 한다.
1987년 해산 후에는 계속 연예계에 남아 엔터테이너로써 활동하는 멤버와 결혼하여 평범한 주부가 된 멤버, 직장인이 된 멤버가 있는 등 각자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에는 중년의 나이가 된 오냥코의 몇 멤버들이 함께 CF에 출연하며 반가움과 향수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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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CM 촬영을 위해 다시 뭉친 오냥코클럽 전 멤버 11명.
2014년 11월 12일 AKB48의 방송 'AKB 조사'에서 오냥코클럽 멤버들의 현재를 조사했는데 다음과 같다.
-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사람: 12명(23%)
- 결혼 등 일반인으로 돌아간 사람: 15명(29%)
- 알 수 없음: 25명(48%)
2. 특징
오냥코클럽 디스코그래피.
당초에는 후지 테레비의 버라이어티 방송인 '''유우야케 냥냥(夕やけニャンニャン)'''이라는 프로그램을 런칭하면서 탄생된 일종의 이벤트성 아이돌 그룹이었다. 프로그램의 제작진들은 멤버들에게 연예계 활동보다는 학업을 우선시할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1] 또한 방송 관계자들에게도 비록 멤버들이 방송에 출연하긴 하지만 아직 '고교생'이라는 본분을 확실하게 인식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그들의 본업은 '''고교생'''이었으며 그들의 역할은 방송 내에서 사회를 맡은 인기 개그맨 톤네루즈와 함께 방송 진행을 돕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룹과 멤버들 자체의 인기가 높아져감에 따라 해당 방송은 오냥코 클럽이 메인이 되어버렸고 당시 메인으로 MC를 진행한 이시바시 타카아키는 이 방송을 너무 그만 두고싶었다고 한다.(...)[2]
당시 '냥냥'이라는 프로그램 이름과 후술할 변태적인 노래 때문에 상당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냥냥이란 말 자체가 성적인 은어로 쓰였기 때문에다.[3]
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의 여성 아이돌은 말 그대로 '우상'에 가까운 존재였으며 노래도 잘 하고 외모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지역에서 제일 예쁜 아이가 아이돌이 된다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었으나 오냥코클럽은 이런 여성 아이돌의 개념을 비틀어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조금 신경쓰이는 동급생'''이 방과후 부활동의 연장으로 방송에 출연한다는 컨셉으로 결성되었다. 멤버는 매주 열리는 방송 내 '아이돌을 찾아라' 코너에서 매주 5인을 선정해 5일간 오디션을 실행하는 방식으로 뽑았으며 오디션을 본 멤버 중에는 아예 일반인도 있었고 연예 사무소에 소속된 멤버도 있었다. 오디션 합격 후에도 소속사가 있는 멤버를 제외하면 모두 후지 테레비 사단 하에 있는 무소속 신인이었기때문에, 그 대부분의 멤버들은 오냥코가 해산한 뒤 일반인으로 돌아갔으며 이미 소속사에 속해있던 10명의 멤버들은 이후 솔로 데뷔 등으로 연예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카와이 소노코, 와타나베 미나요, 쿠도 시즈카, 타카이 마미코, 이와이 유키코, 아카즈마 카요 등은 오냥코 출연 전부터 이미 연예 사무소에 소속되있었다.
1985년 4월 연예계 데뷔 후 3개월만에 내놓은 전설의 데뷔곡 '세라복을 벗기지 말아요'가 공전의 히트를 친 이후 1987년까지 약 2년 반이라는 짧은 활동 기간 동안 사회 현상이라 불릴 정도의 인기를 얻었으며, 본진인 후지 테레비의 음악 방송 뿐만 아니라 타방송사의 '더 베스트 텐'과 같은 유명한 음악 방송 출연을 성사시키고, '묘조(明星)', '헤이본(平凡)'등 아이돌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등 아이돌 전성기의 한가운대에서 일약 급물살을 타며 본래 타겟인 일본의 남중생, 남고생 들에 한정되지않고 세대를 아우르며 폭 넓은 지지를 얻었다. 당시에도 도를 지나친 열성팬들이 많았는지, 최근 방송에서 멤버였던 쿠도 시즈카가 풀어낸 오냥코 시절의 일화에 따르면, 아침에 일어나보니 자신이 버린 쓰레기들이 일렬로 정리되어있었으며 살았던 맨션 앞에 버린 쓰레기들도 전부 일렬로 늘여져있어서 정말 기분나빴다고 한다. 폭주족이었던 팬들도 있었는데, 서로 다른 조직의 폭주족들이 자신이 타고 갈 차를 따라와 누가 먼저 제칠지 싸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최초 멤버를 뽑을 때 노래나 댄스 실력, 외모보다는 친근감을 우선해서 뽑은 의도적인 전략은 완벽히 적중해서, 멤버들의 소탈한 매력이 많은 남자 청소년들을 팬으로 만들었다. 당시 방송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여 ''' '유우야케 냥냥'을 보기 위해 부활동도 하지않고 방과후 집으로 달려가 방송을 보는 학생들이 증가'''했다는 도시전설이 오갈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팬클럽 '코냥코 클럽'의 회원수도 몇십만명의 회원수가 모이는 등의 인기를 얻었다. 오냥코클럽의 솔로 활동과 관련 유닛 싱글은 1986년 이 해 오리콘 싱글 1위 46곡 중 30곡이 오냥코 관련곡이었으며 총 52주중 36주를 점거하는 등 오리콘 차트를 독점했다. 인기 멤버였던 닛타 에리의 '冬のオペラグラス(겨울의 오페라글라스)'가 당시로써는 이례적으로 30만장 이상의 판매율을 보였고 차례차례 솔로로 데뷔한 멤버들은 모두 오리콘 등장 첫 순위가 1위였다. 단, 고쿠쇼 사유리의 'バレンタイン・キッス(발렌타인 데이 키스)'는 유일하게 2위로 입성해서 최근 모 프로그램에서 디스당했다.(...).
이러한 인기가도에서도 홍백가합전에는 한 번도 출장한 적이 없는데, NHK 관계자에 따르면 1985년 당시 사전조사에서 시청자 대상 투표수가 적었기때문이라 설명했다. 멤버 중 쿠도 시즈카만이 오냥코클럽이 해산한 후인 1988년 솔로로서 처음 홍백가합전에 출연했다.
그러나 86년을 기점으로 초기 멤버들이 학업 등의 이유로 탈퇴, 새로운 멤버들은 계속해서 영입되었고, 후기 멤버들로 결성된 '우시로유비 히카레타이(うしろ髪ひかれ隊)'도 히트하였으나 차츰 붐이 꺼져감에 따라 빠르게 해산을 고하게 된다.
3. 해산
1987년 6월 15일 유우야케 냥냥 방송 내에서 해체를 발표하고 9월 20일 요요기 홀에서 콘서트를 열고 해산.
파이널 콘서트에서 '회원번호의 노래'를 부르는 전 멤버들.
이 콘서트는 전국에서 3만명 가까운 팬들이 모였으며 티켓을 구하지못한 수백명의 인원이 인근 하라주쿠의 인도교를 메워 콘서트장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일동이 하나가 되어 멤버들을 보내준 팬들 사이에선 전설로 통하는 파이널 콘서트로 남아있다. 그러나 공연 마지막 앵콜이 울리던 사이 친위대를 포함한 일부 팬들이 폭주하여 입구 유리를 깨거나 의자를 부수는 난폭 행위를 일으키고 회장 밖에 있던 팬들마저 자신들도 들어갈 권리가 있다며 경비원들을 뚫고 난입하여 다음 날 뉴스와 잡지에 크게 보도되는 일대 사건이 되기도 하였다.
오냥코클럽이 해산 후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대부분의 멤버들이 학업을 다시 시작하거나 회사원이 되는 등 일상 생활로 돌아갔지만, 닛타 에리, 고쿠쇼 사유리, 죠노우치 사나에, 쿠도 시즈카처럼 연예계 생활을 지속한 멤버도 있었다. 톱클래스 인기 멤버였던 타카이 마미코는 프로듀서이자 작사가 아키모토 야스시와 결혼하여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멤버 내 제일의 미소녀로 칭해졌던 카와이 소노코는 오냥코 클럽의 거의 모든 작곡을 담당한 작곡가 고토 츠구토시와 1994년 결혼하였다.
해산 후에 일반인으로 돌아간 멤버들은 '그 사람은 지금?'같은 과거에 인기있었던 연예인의 근황을 찾는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였으며 연예 활동을 지속하는 멤버들은 90년대와 2000년대 현재에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동창회 기획으로 TV에 출연하고있는데 닛타 에리의 인터뷰에 따르면 방송에서 모이는 멤버들은 항상 고정적이라고. 2002년엔 초기 멤버와 참석 희망자 14명이 모여 '유통기한(ショーミキゲン)'을 내고 일시적 재결성을 하였다.
4. 영향
비록 그룹 자체의 턱없이 부족한 노래, 안무실력 등등 그룹이 오래 장수하기에는 너무나도 한계가 명확했기에 결코 오래가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래도 '''멤버들 실력과는 상관없이 기획과 아이디어가 좋으면 잠시나마 성공할 수 있다'''라는 사례를 남겼다는 데에서 의의가 있었다.
오냥코클럽의 성공은 기존에 야마구치 모모에, 마츠다 세이코등의 철저한 실력파들로 대표되어오던 일본 여성 아이돌 업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998년 등장한 모닝구 무스메 등 대형 아이돌 그룹의 활동 방식의 기반이 되었다. 반면 연예인으로서의 실력을 아직 갖추지 못한 평범한 여중고생들을 일약 인기 아이돌로 만듦으로써 일본 여성 아이돌 전반의 실력 저하를 낳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오냥코클럽의 성공 이후, 80년대까지 이어져 오던 정통파 아이돌의 개념은 90년대 부터는 아이돌이 아닌 하마사키 아유미, 오오츠카 아이, 코다 쿠미 등 여성 솔로 아티스트로 이어지게 된다.
아키모토 야스시와 후지테레비에서 오냥코클럽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미즈구치 마사히코는 1990년대 '헤이세이의 오냥코클럽'을 만들자는 목표로 새 아이돌 그룹을 구상하였다. 마침 아키모토가 세가의 외주인력으로 드림캐스트의 홍보 전략을 짜고 있었는데, 이것과 맞물려서 드림캐스트의 홍보용 아이돌이자 오냥코클럽의 직계 후손인 체킷코가 등장한다. 그러나 체키코는 당시 불었던 모닝구 무스메 열풍으로 인해 크게 활동을 하지 못하고 1년만에 해산하였다.
체킷코의 실패를 겪은 이후 아키모토는 2000년대에 AKB48이라는 그룹을 데뷔시켰다. 멤버들을 솔로, 유닛으로 분리해서 데뷔시키거나 멤버들을 정기적으로 추가 영입하는 등 AKB48의 주요 운영 방식은 이미 오냥코클럽 시절에 확립해둔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지만, 거기에 '전용 극장',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아이돌'이라는 컨셉을 덧붙여서 새로운 아이돌을 만들어냈다.
2010년대 들어 AKB48은 연예계는 물론 일본의 각종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 현상이 되었다. 영향력만 보면 80년대 당시의 오냥코클럽보다 현재의 AKB48이 더 크다고 평가할 수 있으나 그룹 외의 솔로 데뷔, 유닛 결성이라는 새로운 아이돌의 판매 방식은 오냥코클럽이 원조이자 시초라 할 수 있다.
한편 후지테레비에서도 체킷코의 실패를 거울삼아 2000년대 '아이돌링'이라는 방송을 만들고 방송 내에서 아이돌링!!!이라는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키는 등 오냥코클럽을 다시금 재현하려 했다. 하지만 아이돌링은 큰 성과를 얻는데는 실패하고 2015년 10월 31일 전원 졸업했다. 대신 후지테레비는 자사에서 아이돌을 키우기보다는, 각지의 군소 아이돌들을 모아 '도쿄 아이돌 페스티벌', '도쿄 아이돌 프로젝트' 등의 이벤트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5. 그 밖에
후배격인 AKB48 멤버들이 부른 '세라복을 벗기지 말아요'.
데뷔곡인 '세라복을 벗기지 말아요'는 여고생이 빨리 성관계를 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충격적인 가사 내용으로 논란이 되었으며 한국에서도 '80년대 일본 아이돌의 위엄' 정도의 제목으로 가끔 욕을 먹는다.(…)
후지테레비의 인기드라마 스케반 데카에 멤버들이 주요배역으로 출연 하였으며, 전 멤버가 출연한 에피소드도 존재한다.
가면라이더 키바의 키도 아키라와 지로가 이들의 광 팬이라는 설정이며, 쿠레나이 오토야가 위조한 야마모토 수잔 쿠미코의 사인을 받아들고 격노하는 장면이 나온다.
2015년 7월 방송한 아이돌 애니메이션 비너스 프로젝트에 닛타 에리와 이쿠이나 아키코가 첫 성우 출연을 했다. 애니에서 그녀들을 모델(?)로 한 캐릭터로 신도 에리, 이나오카 아키코라는 두 명의 이름을 본 딴 캐릭터가 등장한다. 나이는 23세라는 말에 두 사람 다 매우 좋아했다.(...)
2015년 결성 30주년으로 CD-BOX '싱글 레코드 복각 냥냥'이 발매되었는데, 당시 레코드 자켓이나 봉투와 사진 등을 그대로 재현하여 오냥코 클럽 시절 발매된 전 싱글 126장 세트를 CD로 발매했다. 당시 멤버들에 따라 레코드 레이블도 각각 달랐고 이런 저런 사정으로 본인의 사진이나 작품들은 제외해달라고 요청하는 멤버들도 있어 발매가 쉽지 않았었는데 모두 발매를 허락하여 기적적으로 성사되었다. 가격은 무려 92000엔으로 어마무시한 가격이다.
6. 회원번호의 노래
7. 멤버
주요 인기 멤버로는 닛타 에리, 고쿠쇼 사유리, 카와이 소노코, 타카이 마미코, 조노우치 사나에, 이와이 유키코, 와타나베 미나요, 와타나베 마리나 등이 있다. 그 외에 해산 후 솔로로 데뷔한 이쿠이나 아키코, 쿠도 시즈카 등이 있다. 쿠도 시즈카는 후기 멤버였기 때문에 오냥코클럽 당시에는 존재감이 낮았지만, 해산 이후 솔로 가수로서 성공하였다.
당시 방영되었던 유야케 냥냥에서 한 <NO MORE 연애흉내> 라이브.
프론트 멤버는 토미카와 하루미, 나가타 루리코, 이와이 유키코, 시라이시 마코.
오냥코클럽은 프론트 보컬이라는 이름으로 네 명의 멤버를 메인으로 세우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AKB48과 같은 '센터'라는 개념은 희박했다. 대충 보면 솔로로 데뷔한 멤버들은 주요 멤버라고 보면 된다. 또한 솔로 데뷔를 한 후에는 프론트 보컬로 세우지 않았다. 일종의 세대 교체인 셈.
굵은 글씨로 된 멤버는 2014년 현재도 연예 활동을 하고 있는 멤버다.
8. 관련 유닛
멤버들을 솔로 데뷔, 유닛 데뷔시킨 판매 방식의 시초이며 독자적인 전개로 아이돌계의 한 획을 그었다.
- うしろゆびさされ組 (타카이, 이와이)
: 당초 '키위조'라는 이름이 될 예정으로 싱글 자켓에도 표기가 되었으나 그룹명이 변경되어 이미 '키위조'명의로 발매된 자켓은 폐기되었다. AKB48의 유닛인 와타리로카 하시리타이(渡り廊下走り隊)는 이 유닛의 후배라는 컨셉으로 기획되었다.
- うしろ髪ひかれ隊 (쿠도, 이쿠이나, 사이토)
: 이쿠이나 아키코를 메인으로 세운 유닛. 해산 후에도 활동할 목적이었으나 쿠도의 솔로 데뷔로 자연 소멸되었다.
- ニャンギラス (키하라, 타츠미, 나고야, 시라이시)
: '유우야케 냥냥'의 한 코너로 결성된 유닛으로 음치 취급이었던 타츠미 리카가 메인.
- おニャン子クラブB組 (요시미, 스기우라, 미야노, 토미나가, 야마자키)
: 원래 기존 오냥코클럽이 아닌 새 멤버 다섯 명을 뽑아서
B반이라는 이름으로 데뷔시킬 예정이었으나 토미나가와 야마자키가 탈퇴하였다. 요시미, 스기우라, 미야노 세 명만 가지고 'いつだってイレギュラー'라는 곡으로 데뷔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하였지만 발매가 무산되었다. B반 데뷔가 무산된 이후 세 명의 멤버는 각각 오냥코클럽 멤버로 들어갔다.
B반이라는 이름으로 데뷔시킬 예정이었으나 토미나가와 야마자키가 탈퇴하였다. 요시미, 스기우라, 미야노 세 명만 가지고 'いつだってイレギュラー'라는 곡으로 데뷔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하였지만 발매가 무산되었다. B반 데뷔가 무산된 이후 세 명의 멤버는 각각 오냥코클럽 멤버로 들어갔다.
9. 싱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이돌이지만 음반 판매량은 그리 높지 않다. 일본 음반 판매량의 전성기는 90년대 중후반이고, 80년대 중후반에는 아직 음반 시장이 크지 않아서 밀리언 셀러라는 개념은 낯설었다. 물론 일본 연예계나 사회에 끼친 영향은 이루 대단하지만, 음반판매량 자체만 놓고 봤을때 80년대 중후반의 기준으로 보아도 오냥코클럽의 음반 판매량은 큰 수치는 아니었다. 일본에서 80년대의 주류 음악은 아이돌이 아닌 J-ROCK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냥코클럽이 활동할 당시에는 LP나 카셋트테이프 형태로 음반이 나왔기 때문인 것도 없지는 않다. 단, 솔로가 더 잘 팔리기도 했던것이 오냥코 클럽의 특징이다.
기타 유닛, 솔로 멤버들의 음반 목록은 오냥코클럽/디스코그래피를 참고. 판매량에 대해서는 이 문서를 참고하면 좋다.
[1] 멤버들은 촬영장에 학교 숙제를 가져와 서로 공유하면서 공부하기도 하였으며 학교의 시험 기간에는 방송을 쉬었다. 한 멤버는 활동을 위해 학교를 자퇴했다가 오냥코 클럽에서도 탈퇴당했다. [2] 멤버였던 쿠도 시즈카와 15년만에 재회한 TBS 테레비 방송에서 이시바시가 밝힌 비화로는 녹화 도중에는 같이 웃고 떠들어도 실제로는 이미 베테랑 개그맨이었던 톤네루즈와 쌩신인 일반인들이었던 멤버들 사이에 벽에 컸기때문에, '누가 너희들같은 애들이랑 떠들까보냐! 가슴은 만지고 싶었지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쿠도 시즈카와는 사이가 좋았던 모양이라 후에 사이좋게 콜라보 싱글도 내는 등 친분을 이어왔지만 다른 멤버인 타츠미 리카와는 정말로 사이가 안 좋아서 녹화장에서 싸우기도 했다는 후일담이 존재한다.[3] 공식적으로는 '와라베'라는 아이돌 그룹의 전 멤버였던 타카베 토모코(高部知子)가 일으킨 스캔들에서 유래했다. 15세 미성년자였던 타카베가 이불 속에서 벗은 채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FOCUS라는 찌라시를 통해 보도되었다.[4] 오쿠다를 비롯한 당시 미성년자였던 멤버들이 커피숍에서 흡연을 하고 있는 사진이 찍혀 퇴출당한 사건이다. 이 시기는 아직 방송초기라 큰 화제는 되지않았으며 오냥코가 절대적인 인기를 얻게 된 이후로는 공기 취급받으며 터부시되었다. 사진에는 키하라 아키도 찍혔으나 본인은 피우지 않았다고 하여 며칠 뒤 다시 복귀하였다. 그러나 사진에는 손에 담배를 쥐고 있었는데 안 피웠다는 말도 꺼림칙하고 소문으로는 빽이 있었다느니 등의 이야기도 당시에 돌았던 걸 보아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진실은 당사자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10번 사토 마유미는 사진에서 치마만 찍힌것처럼 증거가 불충분하다는것도 성립 되는데 어찌됐든 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