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베스트 텐
ザ・ベストテン
1978년부터 1989년까지 방송된 TBS 계열의 음악 프로그램으로, 후지TV의 밤의 히트 스튜디오와 함께 2강 체제를 이루며 쇼와 시대를 대표한 음악 프로그램이다.
더 베스트 텐이 방송한 시간대인 목요일 밤 9시에는 길에 차도 안 다녔고, 걸어가는 사람도 없었다는 설화가 존재했던 만큼[2] 그 정도로 더 베스트 텐은 일본 전체를 열광시켰다. 더군다나 당시 일본은 버블경제 시대였으니까.....
대표적인 사회자로 초기에 활동한 쿠메 히로시(당시 TBS 아나운서)와 쿠로야나기 테츠코[3] 가 있으며 그 외에도 쿠메 히로시의 하차로 인해 코니시 히로유키, 마츠시타 겐지[4][5] , 콘도 마사히코, 타모리 등이 대리 진행을 맡았다.
연출 프로듀서는 야마다 슈우지(山田修爾)가 맡았다. (생몰년도 1945년 ~ 2013년)
라디오처럼 당시 40엔의 엽서에 사연과 신청곡을 적고 보내는 것이 시청자들과 더 베스트 텐의 소통창구.[6] 그 외에도 음반매장에서 기록되는 매주 음반 판매 데이터, 라디오 방송국의 신청곡 횟수[7] , 유선방송 신청곡 랭킹 등 이 모든 데이터를 컴퓨터로 계산해 종합 랭킹 순위를 결정한다.
출연하는 가수들은 1위~ 10위 이내에 선정된 가수들만 출연한다. 간혹 가수들이 새 싱글 녹음이나 행사, 일정으로 나오기가 곤란한 상황도 있어 쿠메 히로시가 죄송하다고 90도로 숙여 사과한다.
첫 회에 야마구치 모모에가 11위에 오르자 CP가 다른 가수와 바꿔서 모모에를 출연시키자고 연출 프로듀서에게 제의했지만 연출 프로듀서는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구로야나기 테츠코가 진행자로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순위 조작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이 붙어져 조작을 할 수가 없었다.
매해 연말에는 연간 차트를 집계해 발표했는데, 집계 방식은 빌보드와 오리콘 연간 차트처럼 한 해 동안 순위권에 진입한 모든 곡들의 총 득점을 합산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따라서 단기간에 엄청난 임팩트를 남긴 곡보다 오랜 시간 사랑 받은 곡들이 높은 순위에 들었고, 특히 잔잔하지만 인기의 주기가 긴 엔카에게 유리했다. 실제로 그 해 최다 1위곡이 베스트 텐 연간 차트 1위를 차지한 경우는 단 3번에 그쳤고,[8] 엔카가 연간 1위에 오른 경우는 무려 6번에 달한다.[9][10] 심지어 1987년에는 1년 동안 단 한번도 10위권에 들지 못한 노래가 연간 2위를 차지한 적도 있었다.[11][12]
플랩 식 현황판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진 랭킹 보드는 더 베스트 텐의 상징으로 일컬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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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베스트 텐의 플랩 식 랭킹보드.
더 베스트 텐의 명물로 연출 프로듀서가 출장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하네다 공항에 갔는데 어떻게 순위를 발표할거냐는 선배 PD의 질문에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곤란해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본 것이 바로 플랩 식 공항 현황판을 보고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고 한다.
쇼와 시대의 대표적인 음악 프로그램인 만큼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출연했다.
마츠다 세이코, 야마구치 모모에, 카와이 나오코, 나카모리 아키나, 오카다 유키코, 오기노메 요코, 핑크 레이디, 타하라 토시히코, 콘도 마사히코, 히카루 겐지, 코이즈미 쿄코, 체커스 등 웬만한 하이틴 스타들은 다 더 베스트 텐에 나왔다. 심지어 더 베스트 텐에 나오지 않은 연예인은 연예인이 아니라는 말까지 있었다. 그만큼 더 베스트 텐은 스타 인증을 하는 곳이었다.
당시 에피소드
더 베스트 텐은 무대의 혁명을 시도하였다. 드라마 촬영장, 빌딩 옥상, 동물원, 스키장[13] , 심지어 신칸센 안과 공항 트랩에서도 더 베스트 텐의 무대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뉴스 프로그램 밖에 촬영을 허가했던 히로시마 원폭 돔에서도 관계자를 설득해 겨우 생중계를 했다.[14]
구메의 하차 이후 승승장구했던 더 베스트 텐은 과거의 인기를 이어받지 못하고 그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15] 전성기에는 40%도 넘나들었던 시청률은 급전직하하여 10% 초반대까지 내려앉았고, 라이브 가요프로그램 특성상 무대 제작비 등 상당한 예산소모가 있었으나 낮은 시청률로 인해 적자를 커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위에 나와 있듯이 차트 순위 상위 10위까지의 가수들을 불러 한시간을 채우는 방식이었는데, 전성기에는 못 나와서 안달인 프로그램이었으나 이 시기에는 출연을 고사하는 가수들이 많아져 웬만하면 6개팀 체제로 방송하고, 심할때는 고작 3팀만 나오는 때도 있는 등 가요계에서의 위상이 많이 추락하기도 했다.
각 출연자들의 간단한 근황 토크 후 1절만 부르고 넘어가도 한시간이 꽉 차던 프로그램이 토크 시간도 대폭 늘리고 2절까지 완창시키는 방식으로 시간을 때우게 되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그러던 와중 1989년 6월 29일 TBS의 재무담당 임원이었던 다나카 이즈미(田中和泉)라는 사람이 신임 사장으로 취임했는데, 재무담당이었던지라 적자덩어리 프로그램을 보고만 있을수는 없었는지 취임하자마자 폐지를 결정했고 7월 6일 생방송 중 이를 공식적으로 알린다. 그리고 9월 28일 최종화를 끝으로 12년간의 대장정을 마쳤는데 이마저도 시청률이 12.2%로 썩 좋지 못했다.
TBS의 더 베스트 텐의 폐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90년 3월에 니혼 TV의 노래 톱텐 (歌のトップテン), 1990년 10월에 후지테레비의 밤의 히트 스튜디오 (夜のヒットスタジオ) 역시 시청률 부진으로 폐지됨에 따라, 쇼와시대 일본 방송가에서 경쟁적으로 방영했던 정규편성 가요프로그램은 TV 아사히의 뮤직스테이션 하나만이 남아서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지금은 많은 일본인들에게 추억으로 회자되고 있으며 자사의 킨스마는 2번 특집 코너를 방영했으며, 자사의 올스타 감사제와 할로윈 감사제에도 특집기획으로 다시 거론된다.
연출 프로듀서 야마다 슈우지가 2013년 8월 28일, 향년 6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장례식에는 쿠메 히로시와 구로야나기 테츠코가 참석했고, 당시에 나왔던 스타들이 화환을 보냈다. 그리고, 영구차를 떠나보내는 발인 의식 때, 더 베스트 텐의 메인 테마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 뜻은 고인이 생전 더 베스트 텐에 자신의 젊음을 바쳤다는 것의 증거로 그의 영구차가 떠날 때까지 흘러 나왔고 이 때,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조문객들은 하나같이 울며 눈물을 흘렸다.
'''더 베스트 텐!(ザ・ベストテン!)[1]
'''
1. 개요
1978년부터 1989년까지 방송된 TBS 계열의 음악 프로그램으로, 후지TV의 밤의 히트 스튜디오와 함께 2강 체제를 이루며 쇼와 시대를 대표한 음악 프로그램이다.
더 베스트 텐이 방송한 시간대인 목요일 밤 9시에는 길에 차도 안 다녔고, 걸어가는 사람도 없었다는 설화가 존재했던 만큼[2] 그 정도로 더 베스트 텐은 일본 전체를 열광시켰다. 더군다나 당시 일본은 버블경제 시대였으니까.....
대표적인 사회자로 초기에 활동한 쿠메 히로시(당시 TBS 아나운서)와 쿠로야나기 테츠코[3] 가 있으며 그 외에도 쿠메 히로시의 하차로 인해 코니시 히로유키, 마츠시타 겐지[4][5] , 콘도 마사히코, 타모리 등이 대리 진행을 맡았다.
연출 프로듀서는 야마다 슈우지(山田修爾)가 맡았다. (생몰년도 1945년 ~ 2013년)
2. 랭킹 선정 방식
라디오처럼 당시 40엔의 엽서에 사연과 신청곡을 적고 보내는 것이 시청자들과 더 베스트 텐의 소통창구.[6] 그 외에도 음반매장에서 기록되는 매주 음반 판매 데이터, 라디오 방송국의 신청곡 횟수[7] , 유선방송 신청곡 랭킹 등 이 모든 데이터를 컴퓨터로 계산해 종합 랭킹 순위를 결정한다.
출연하는 가수들은 1위~ 10위 이내에 선정된 가수들만 출연한다. 간혹 가수들이 새 싱글 녹음이나 행사, 일정으로 나오기가 곤란한 상황도 있어 쿠메 히로시가 죄송하다고 90도로 숙여 사과한다.
첫 회에 야마구치 모모에가 11위에 오르자 CP가 다른 가수와 바꿔서 모모에를 출연시키자고 연출 프로듀서에게 제의했지만 연출 프로듀서는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구로야나기 테츠코가 진행자로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순위 조작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이 붙어져 조작을 할 수가 없었다.
매해 연말에는 연간 차트를 집계해 발표했는데, 집계 방식은 빌보드와 오리콘 연간 차트처럼 한 해 동안 순위권에 진입한 모든 곡들의 총 득점을 합산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따라서 단기간에 엄청난 임팩트를 남긴 곡보다 오랜 시간 사랑 받은 곡들이 높은 순위에 들었고, 특히 잔잔하지만 인기의 주기가 긴 엔카에게 유리했다. 실제로 그 해 최다 1위곡이 베스트 텐 연간 차트 1위를 차지한 경우는 단 3번에 그쳤고,[8] 엔카가 연간 1위에 오른 경우는 무려 6번에 달한다.[9][10] 심지어 1987년에는 1년 동안 단 한번도 10위권에 들지 못한 노래가 연간 2위를 차지한 적도 있었다.[11][12]
3. 랭킹 보드
플랩 식 현황판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진 랭킹 보드는 더 베스트 텐의 상징으로 일컬어 진다.
#
더 베스트 텐의 플랩 식 랭킹보드.
더 베스트 텐의 명물로 연출 프로듀서가 출장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하네다 공항에 갔는데 어떻게 순위를 발표할거냐는 선배 PD의 질문에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곤란해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본 것이 바로 플랩 식 공항 현황판을 보고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고 한다.
4. 쇼와 시대의 가수들 총출동!
쇼와 시대의 대표적인 음악 프로그램인 만큼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출연했다.
마츠다 세이코, 야마구치 모모에, 카와이 나오코, 나카모리 아키나, 오카다 유키코, 오기노메 요코, 핑크 레이디, 타하라 토시히코, 콘도 마사히코, 히카루 겐지, 코이즈미 쿄코, 체커스 등 웬만한 하이틴 스타들은 다 더 베스트 텐에 나왔다. 심지어 더 베스트 텐에 나오지 않은 연예인은 연예인이 아니라는 말까지 있었다. 그만큼 더 베스트 텐은 스타 인증을 하는 곳이었다.
당시 에피소드
5.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더 베스트 텐은 무대의 혁명을 시도하였다. 드라마 촬영장, 빌딩 옥상, 동물원, 스키장[13] , 심지어 신칸센 안과 공항 트랩에서도 더 베스트 텐의 무대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뉴스 프로그램 밖에 촬영을 허가했던 히로시마 원폭 돔에서도 관계자를 설득해 겨우 생중계를 했다.[14]
6. 1989년, 몰락의 길
구메의 하차 이후 승승장구했던 더 베스트 텐은 과거의 인기를 이어받지 못하고 그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15] 전성기에는 40%도 넘나들었던 시청률은 급전직하하여 10% 초반대까지 내려앉았고, 라이브 가요프로그램 특성상 무대 제작비 등 상당한 예산소모가 있었으나 낮은 시청률로 인해 적자를 커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위에 나와 있듯이 차트 순위 상위 10위까지의 가수들을 불러 한시간을 채우는 방식이었는데, 전성기에는 못 나와서 안달인 프로그램이었으나 이 시기에는 출연을 고사하는 가수들이 많아져 웬만하면 6개팀 체제로 방송하고, 심할때는 고작 3팀만 나오는 때도 있는 등 가요계에서의 위상이 많이 추락하기도 했다.
각 출연자들의 간단한 근황 토크 후 1절만 부르고 넘어가도 한시간이 꽉 차던 프로그램이 토크 시간도 대폭 늘리고 2절까지 완창시키는 방식으로 시간을 때우게 되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그러던 와중 1989년 6월 29일 TBS의 재무담당 임원이었던 다나카 이즈미(田中和泉)라는 사람이 신임 사장으로 취임했는데, 재무담당이었던지라 적자덩어리 프로그램을 보고만 있을수는 없었는지 취임하자마자 폐지를 결정했고 7월 6일 생방송 중 이를 공식적으로 알린다. 그리고 9월 28일 최종화를 끝으로 12년간의 대장정을 마쳤는데 이마저도 시청률이 12.2%로 썩 좋지 못했다.
TBS의 더 베스트 텐의 폐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90년 3월에 니혼 TV의 노래 톱텐 (歌のトップテン), 1990년 10월에 후지테레비의 밤의 히트 스튜디오 (夜のヒットスタジオ) 역시 시청률 부진으로 폐지됨에 따라, 쇼와시대 일본 방송가에서 경쟁적으로 방영했던 정규편성 가요프로그램은 TV 아사히의 뮤직스테이션 하나만이 남아서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7. 역대 기록
- 최장기간 1위곡(12주): 테라오 아키라 - 루비반지(ルビーの指環)
- 최장기간 10위권 진입곡(24주): 야마모토 죠지(山本譲二) - みちのくひとり旅
- 최다 1위 수상 가수(69회) & 최다 1위곡 배출 가수(17곡): 나카모리 아키나
- 최다 10위권 진입 가수(247+9[16] 회) & 최다 10위권 진입곡 배출 가수(35+1[17] 곡): 타하라 토시히코
- 연간 최다 1위 수상 가수(22회): 체커스 (1984년) & 히카루GENJI (1988년)
- 최고득점 1위곡(9999점[18] ): 사이죠 히데키 - YOUNG MAN (YMCA) (1979.4.5, 4.12)
- 최저득점 1위곡(7559점): 스기야마 키요타카(杉山清貴) - 마지막 Holy Night(最後のHoly Night) (1986.12.4)
- 제1회(1978.1.19) 1위곡: 핑크 레이디 - UFO
- 최종회(1989.9.28) 1위곡: 쿠도 시즈카 - 황사에 날리어(黄砂に吹かれて)
8. 현재의 더 베스트 텐
지금은 많은 일본인들에게 추억으로 회자되고 있으며 자사의 킨스마는 2번 특집 코너를 방영했으며, 자사의 올스타 감사제와 할로윈 감사제에도 특집기획으로 다시 거론된다.
연출 프로듀서 야마다 슈우지가 2013년 8월 28일, 향년 6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장례식에는 쿠메 히로시와 구로야나기 테츠코가 참석했고, 당시에 나왔던 스타들이 화환을 보냈다. 그리고, 영구차를 떠나보내는 발인 의식 때, 더 베스트 텐의 메인 테마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 뜻은 고인이 생전 더 베스트 텐에 자신의 젊음을 바쳤다는 것의 증거로 그의 영구차가 떠날 때까지 흘러 나왔고 이 때,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조문객들은 하나같이 울며 눈물을 흘렸다.
9. 여담
- AKB48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가 이 프로그램에서 구성작가 경험을 갖고 있다. 이 때의 인연으로 타계한 연출 PD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였다.
- 다만 아키모토 야스시가 스탭 및 작사가로 참여하던 오냥코클럽은 후지TV에서 결성된 아이돌 그룹이다보니 방송사 간에 기싸움으로 인하여 데뷔 초창기 이후론 더 베스트 텐에 출연하지 못했다. 오냥코 파생 유닛 그룹이나 솔로는 출연 가능.
- 86년부터 88년까지 진행을 맡았던 마츠시타 겐지가 가수 소개를 할 때의 멘트들이 상당히 감동적이다. [19]
- 1984년 1월 19일 방송에는 순위권에 선정된 안리가 어른의 사정으로 구마모토에 있어서 안리가 키우는 원숭이가 대신 출연하기도 했다.
-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 중계 때에도 위성중계의 특성상 방송사고가 생기는데... 1988년 1월 28일 방송분에서는 호주 애들레이드 현지에서 공연을 하던 도중 애들레이드 지역방송국의 영상으로 전환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자 당시 스튜디오에 있던 사회자인 마츠시타 겐지가 '오늘은 여러분에게 특별히 호주에서는 어떤 방송 프로그램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이분은 호주에서 활동 중인 배우분으로 일본으로 치면 모리시게 히사오 씨같은 중후한 연기가 특징입니다.' 라고 즉흥적으로 멘트를 쳤다. #
- 당시 컴퓨터 자막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사람이 작성하여 가사 자막을 내보냈다. 1980년까지는 아예 가사 자막을 안 내보내다가 81년부터 88년까지는 오직 랭킹 첫 등장 가수 무대에서만 컴퓨터 자막을 내보냈다. 그리고 베스트 텐의 몰락의 길이었던 89년이 되어서야 모든 무대에 가사 자막을 내보냈다.
- 동시기에 한국 KBS2에서 방영하던 가요톱텐[20] 이 이 프로그램을 표절했다는 얘기가 인터넷 상에 여전히 돌고 있다. 일단 두 프로그램의 구성 형식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난다. 가요톱텐은 순위를 50위까지 매긴 데에다 더 베스트 텐보다 출연 가수들도 많았고 무엇보다 1위 발표 시 긴장감이 있었다. 더 베스트 텐의 경우 출연 가수들이 사전에 모든 순위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명칭 자체는 BBC의 'Top of the Pops'와 더 베스트 텐을 적절히 짬뽕했다는 인상이 있고, 무엇보다 전체 50위 중 굳이 'Top 10'을 강조했던 포맷은 더 베스트 텐을 참고했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사실 일본에서도 경쟁사이던 니혼TV가 '더 톱텐'이라는 비슷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이 경우는 훗날 아예 이름이 '노래 톱텐(歌のトップテン)'이라고 바뀐다[21] . 가요톱텐이 이 쪽을 모방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80년대의 'Top of the Pops'도 Top 40(70년대에는 Top 30)을 소개하면서 탑텐을 강조하는 포맷이 있었다는 점이다.#
[1] 오프닝 멘트, 진행자가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 전통이다.[2]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전설의 고향이 하는 시간에 차도 안다녀서 마을이 조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3] NHK 공채 1기 탤런트 출신,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유니세프 친선대사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베스트셀러 서적인 창가의 토토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4] 생소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일본 스포츠 중계의 간판캐스터로 한때 우리나라 스포츠 중계의 전설인 송재익 캐스터와 중계 비교대결을 하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faiLd_1hnU 이 영상의 3분 08초를 보면 마츠시타 겐지의 한자 이름이 나온다.(松下賢次)[5] 1985 4-6월, 1986 하반기~1989 초. 쿠메 이후 제일 오래 활동한 사회자이다[6] 당시 음악 프로그램은 프로듀서가 섭외권을 장악하던 시대라 인기나 유명함에 상관없이 거물 연예인을 매주 출연시키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이었다. [7] 자사의 라디오 방송국이 있으니까 쉽게 수집할 수 있다.[8] 1978년, 1981년, 1985년.[9] 1979년, 1980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7년.[10] 12년 동안 주간 1위를 차지한 엔카는 단 2곡에 불과하다.[11] 세가와 에이코(瀬川瑛子)의 '命くれない'라는 곡으로, 1986년 3월 발매 후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하다가 1987년 유선방송을 중심으로 인기몰이를 하면서 1년 내내 2~30위권을 지킨 끝에 연간 2위를 기록했고, 이듬해 1월에는 주간 8위까지 상승했다.[12] 비슷한 예로 1984년 역시 한번도 10위권에 들지 못한 아시야 간노스케(芦屋雁之助)의 '딸아(娘よ)'가 연간 차트 9위에 올랐다. 이 노래는 이후에도 주간 10위권 내에 들지 못했다.[13] 그 날은 고 히로미가 모처럼 휴가를 내서 간 거였는데 제작진이 용케도 찾아냈다고...[14] 그 날, 공교롭게도 방송일이 8월 7일, 히로시마에 리틀보이즈가 떨어진 날이다. 거기에 랭크인된 가수 이와사키 히로미는 히로시마에 일정이 있었던 날이기도 했다.[15] 당시 쿠메 히로시는 TV 아사히의 뉴스 스테이션의 진행자로 발탁되었다.[16] 켄 나오코와의 듀엣곡.[17] 켄 나오코와의 듀엣곡.[18] 만점.[19] 당신의 노래는 듣는 사람들을 눈물나게 합니다. 최고의 노래 감사합니다.[20] 가요톱텐은 1981년에 방영되었다.[21] 이 프로그램은 1986년에 시작되어 더 베스트 텐보다 역사가 한참 밀리지만, 전신 프로그램의 역사까지 합치면 첫 방영이 1969년으로 오히려 더 베스트 텐보다 훨씬 앞선다. 전신 프로그램의 이름은 'NTV 홍백 노래 베스트 텐(NTV紅白歌のベストテ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