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다 세이코

 

'''마츠다 세이코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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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다 세이코
松田 聖子 | 𝐒𝐄𝐈𝐊𝐎 𝐌𝐀𝐓𝐒𝐔𝐃𝐀
'''

''' 본명 '''
'''蒲池 法子(かまち のりこ (카마치 노리코, Noriko Kamachi) '''
''' 출생 '''
1962년 3월 10일 (62세)
일본 [image] 후쿠오카현 [image] 구루메시 [image]
''' 신체 '''
160cm, A형
''' 가족 '''
아버지 카마치 츠토무
어머니 카마치 카즈코
오빠 카마치 미츠히코(1954년생)
''' 배우자 '''
칸다 마사키[1](1985 – 1997)
하타노 히로유키(1998 – 2000)
카와나 히로마사[2](2012.06.13 결혼 – 현재)[3]
''' 자녀 '''
칸다 사야카[4]
''' 학력 '''
호리코시 고등학교(졸업)
''' 직업 '''
가수, 작곡가, 작사가, 프로듀서, 배우
''' 데뷔 '''
1980년 싱글 맨발의 계절
'''D16067일'''
''' 소속사'''
펠리시아 클럽 (フェリシアクラブ)[5]
''' 레이블'''
| EMI RECORDS[6]
''' 링크 '''

1. 개요
2. 연예계 활동
2.1. 데뷔까지
2.2. 데뷔 후 ~ 90년대
2.3. 2000년대 이후
3. 성격 및 캐릭터
3.1. 희대의 아이돌
3.2. 스캔들
4. 여담
6. 필모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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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가수198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돌이자 배우이다. 후쿠오카 지방 유지인 치쿠고노쿠니 다이묘의 자손 집안의 딸로 본명은 '''카마치 노리코'''.[7][8]
1980년 4월, 18세의 나이에 <맨발의 계절>로 데뷔. 1970년대 전설의 가희인 야마구치 모모에의 은퇴와 함께 바톤 터치를 하듯 데뷔하여 끊이지 않는 히트곡과 화젯거리로 한 시대를 풍미한 아이돌 가수였다. 한국에서의 별명은 세이코(聖子)를 음독한 '''성자''' 이모.
음반 총 판매량 '''2,963만장'''으로 역대 가수 중 15위를 차지하며 '''쇼와 시대 역대 가수 중 총 판매량 1위'''를 기록했다.[9]

2. 연예계 활동



2.1. 데뷔까지


''' 마츠다 세이코의 유년시절-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시절 사진 '''
1962년 3월 10일 후쿠오카현의 소도시 구루메 시의 중산층 가정에서 공무원인 아버지 카마치 츠토무와 지역 PTA 회장인 어머니 카마치 이치코 사이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8살 연상인 오빠 카마치 미츠히코는 명문으로 유명한 와세다대학 출신. 태어날 당시에는 난산이었기 때문에 가사 상태였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소아 천식이 있었다고 한다. 아라키 중학교를 나와 미션스쿨인 신아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도쿄로 상경해 연예 활동이 가능한 호리코시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1978년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유수한 연예인들을 배출한 '미스 세븐틴 콘테스트'에서 사쿠라다 준코의 데모 테이프를 보내 지방 예선에서 우승. 데뷔 당시의 캐치 프레이즈는 ''''끌어안고 싶어! 미스 소니''''. 엄격한 집안에서 자라 가수 데뷔에 대한 부모의 반대가 심하였지만 세이코의 노래를 들은 소니 측에서 "이 아이는 반드시 팔린다."고 확신하여 스카우트되었다.
처음에는 가수로 데뷔할 생각이 없었으나 어릴 적부터 놀이터와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막대기를 마이크 삼아 노래를 불렀고, 직접 카세트테이프에 학창 시절 유행했던 캔디즈나 이시노 마코 등의 아이돌 노래를 모창하는 것을 녹음할 정도로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결정적으로는 1977년 고향인 구루메 시의 사진관 촬영 모델에 응모하여 선출된 것을 계기로 연예계를 목표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데뷔 이후의 탄탄대로와는 다르게 앞서 언급했듯 데뷔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1978년 '미스 세븐틴 콘테스트'에서 사쿠라다 준코의 '気まぐれヴィーナス'(제멋대로 비너스)를 불러 규슈 예선에서 우승했으나 엄격한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로 데뷔가 무산된 것. 그리하여 1년간 부모님을 설득하여 허락받은 끝에 고교 졸업 이후 데뷔하여 보통 데뷔 시기가 10대 중반이었던 여타 아이돌에 비해 다소 늦게 데뷔하였다.
규슈 예선에서 그 목소리에 감탄해 세이코를 발굴해 낸 CBS소니의 음악 프로듀서 와카마츠 무네오(若松宗雄)의 소개를 통해 1978년, 대형 연예 기획사인 와타나베 프로덕션 산하인 음악학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소속사 측은 본사에서 보내져온 데모 테이프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고 O자 다리에 스타일이 안 좋았던 당시의 프로필 사진만 보고 사무소 채용을 불합격시켰다고 한다.
1979년, CBS소니의 와카마츠 무네오는 그녀가 다른 5개의 소속사에 거절당하자 마지막으로 이후 세이코의 커다란 인연이 되는 선뮤직 프로덕션의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10]를 직접 만나 세이코를 적극 추천하였다. 그러나 아이자와 사장과 중역이었던 후쿠다 토키오[11] 또한 그녀의 계약을 보류한 상태였다. 최초에 선뮤직 측은 마츠다 세이코를 아이돌로서 세일즈하려는 생각조차 없어서 다른 소속사와 같이 거절하려고 했고, 데뷔하고나서도 CF에 얼굴을 비추는 대신 다른 연예인을 기용할 정도로 기대치가 낮았다고 한다. 하지만 데모 테이프를 들은 소속사 측은 좋은 목소리와 가창력을 높히 평가하여 후쿠다 전무가 세이코가 사는 구루메 시의 자택까지 찾아서 완강한 부모님을 설득[12]해냈고, 이후 그해 고등학교 3학년 여름에 직접 도쿄로 상경한 세이코 본인의 가창력과 의지를 보고 나서야 극적으로 계약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가족이 있는 고향을 떠나 1979년 도쿄로 상경한 세이코는 소속사를 선뮤직 프로덕션으로 옮겨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요시의 집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연예활동이 허가되는 호리코시 고등학교로 전입. 우여곡절 끝에 소속사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후에 대형 기획사로 발돋움하는 이 당시의 선뮤직은 사쿠라다 준코를 배출해냈긴 하지만 비교적 소형 기획사였고, 또다른 스카웃으로 발탁되어 2년 동안 다른 신인을 데뷔시키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 정도로 사활을 걸었던 나카야마 케이코(中山圭子)[13]라는 기대주의 대형 신인이 데뷔를 앞둬 세이코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언제 데뷔할지 불투명한 상황이었으나 정작 세일즈 성적이 좋지 않아 사무소가 난관에 빠지자 다음 타자라는 카드를 꺼내든 사무소 측과 세이코 본인의 강한 의지를 본 나카야마 케이코가 양보를 해주어 겨우 데뷔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후는 다들 아는 대로 '''그녀는 그렇게 전설이 되었다.'''

2.2. 데뷔 후 ~ 90년대



'''1980년 4월, 역사가 쓰여지는 18세 마츠다 세이코의 데뷔 무대 '''

''''일본의 음악을 바꾼 4인, 궁극의 아이돌 마츠다 세이코' 편의 방송'''

'''세이코의 대표곡 '푸른 산호초' (1980년)'''
2번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3번째 결혼, 출산, 수많은 스캔들을 거치면서도 데뷔부터 43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아이돌'''이라 불리고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 '''영원의 아이돌'''.
음반은 1980년부터 1988년까지 '''24곡 연속'''으로 오리콘 차트 1위를 달성. 이는 당시 9곡 연속 오리콘 1위를 달성했던 핑크 레이디의 신기록을 화끈하게 갱신한 것으로, 이후 B'z가 25곡 연속 1위로 갱신하기 전까지 초유의 기록이었다. 1980년대는 일본의 경제적 호황에 힘입어 아이돌 붐이 장기간 지속되었던 시기였는데,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아이돌 중에서도 인기는 그야말로 당해낼 자가 없을 만큼 압도적이어서[14] 단순히 가수로서뿐만이 아니라 본인의 이름을 딴 머리스타일, 일명 '''세이코쨩 컷'''과 세이코의 방송 이미지에서 유래된 말인 '''부릿코''' 등 여러 가지를 유행시키며 수많은 전설들을 남겼다.
그녀가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음악은 전형적인 1980년대 아이돌의 음악으로 밝고 화사한 목소리만으로 많은 팬을 끌어모으기 충분했다. 마츠다 세이코를 발굴해 낸 와카마츠 프로듀서는, 그녀를 발탁한 이유가 무엇보다 목소리의 '투명감', '세기', '오락성', '지성'이라고 얘기했으며 데뷔 초기의 힘 있고 스트레이트한 창법은 당시 활동했던 시기보단 후대에서 재평가되고 있다. 또한 오타키 에이치, 호소노 하루오미 등등 일본의 음악씬에서 빼놓을 수 없는, 1980년대 당시 일본 뉴뮤직의 선구주자였던 각종 최고의 뮤지션들의 역량이 집결된 정규 4집과 5집 앨범은 일본 팝 역사에 남을 명반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데뷔 초기의 악곡들은 주로 현재도 현역으로 활동중인 작사가 미우라 요시코(三浦徳子), 작곡은 오다 유이치로(小田裕一郎)로 밝고 풋풋하며 활기찬 소녀의 이미지를 그렸고, 이후부터는 작사가 마츠모토 타카시(松本隆)[15], 작곡은 마츠토야 유미[16]가 맡아 섬세하고 달콤한 감정의 여성의 이미지를 그리며 수많은 곡들을 만들어 내고, 또 히트시켰다. 목소리는 데뷔 초 일정한 무게감이 있는 시원스런 목소리였으나 엄청난 스케줄로 목을 혹사당해 허스키한 목소리로 변하였다가 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부터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변하게 되었다.[17] 전성기에는 매우 하드한 스케쥴을 감당해야 했기에 곡을 받아서 연습을 할 시간이 없이 음반 녹음 당일날 데모곡을 듣고 바로 레코딩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겨우 2~3번 데모곡을 들었음에도 곡을 이해하고 금새 불렀기때문에 프로듀서들로부터 '감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0년 4월 '맨발의 계절'로 데뷔하여 데뷔 3개월여만인 7월 5,000여명의 팬클럽 인원이 모였고, 동년 8월 '푸른 산호초'로 일본 레코드 대상 신인상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10개의 각종 신인상을 독차지하며 데뷔 1년이 채 지나지않아 당시 전국 아이돌 인기의 바로미터라 불린 브로마이드 포스터 판매량이 1위로 오르게 되었다. 일본의 국민 MC 아카시야 산마는 그녀에게 "그 많은 스캔들을 견디면서도 지금까지도 활동하는 걸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라고 발언하였는데 데뷔 이전의 에피소드로, 그녀를 발굴한 CBS 소니의 와카마츠 프로듀서가 "이 아이는 반드시 스타가 될 것이다"라고 극찬하자 "거짓말하지 마. 이런 시골 소녀같은 애가 인기 있겠냐!"이라고 농담조로 이야기하였으나 마츠다 세이코가 데뷔하고 약 3개월이 지나자 아카시야 산마가 직접 그녀를 찾아가 "나 알지? 기억하지?"라고 아는 체하며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이렇듯 마츠다 세이코는 데뷔하자마자 일약 최고의 인기가도를 달리며 톱아이돌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1985년 결혼과 1986년 출산 이후에는 부모님께 딸을 맡기고 활동했는데, 보수적이었던 당시 사회에서는 무책임한 어머니, 드센 아내라며 숱한 돌려까기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해외 진출을 하는 등 멈추지 않고 마츠다 세이코로서 당당한 모습을 보였으며 이후 많은 여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성공한 여성의 아이콘이 되었다. 선뮤직의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가 말하길 그때의 세이코는 "마음만 먹으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성격이었다. 나도 그런 면이 있긴 했지만 세이코는 그 이상이었다."고 표현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작사와 작곡, 프로듀싱까지 본인이 직접 하며 아티스트의 영역으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96년 본인이 직접 작사를 맡은 싱글 'あなたに逢いたくて〜Missing You〜'(당신과 만나고 싶어서~Missing You~)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밀리언셀러를 달성하며 역대 최고 판매량인 110만장 판매는 물론, 약 8년만의 초동 1위 달성으로 셀프 프로듀싱 또한 재능을 빛냈다. '소중한 그대', '빛나는 계절로 떠나자', '이별의 순간' 등을 작사하고 히트시켜 셀프 프로듀서의 능력도 인정받았다.[18] 작사가로서는 개인적인 감정을 적나라하게 투영하는 가사, 아니면 매우 긍정적인 가사를 자주 쓴다. 작곡가로서는 장조의 곡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2.3. 2000년대 이후


2006년 이전에 발매한 74매의 CD를 엮어 만든 10만엔대의 초고가 앨범 'seiko matsuda'의 판매량은 '''2억엔'''을 기록.[19] 이 전까지 앨범 판매량에서 최고액의 앨범으로 기록된 건 전설적 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6만엔대 앨범이었는데 이 기록을 16년 만에 갱신하였다. 발매 예정이었던 1만 세트를 모두 완매시켜, 판매량만 10억엔이 넘었다고 한다.
2010년에는 일본 게닌그룹 야지마 미용실과의 콜라보로 '아이돌처럼 노래하게 해 줘'를 발매. 뮤비에서 당시 47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컨셉(!)으로 역시 영원한 아이돌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SMAP×SMAP, 뮤직페어 등에 출연해서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마츠다 세이코는 2013년(64회) 홍백가합전에 복귀하여 2020년(71회)까지 8회 연속 출전 중.
게다가 2014년에는 겨울왕국의 안나 역을 더빙한 딸 칸다 사야카와 홍백가합전에 함께 출전하게 되어 딸의 무대를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부른 곡은 본인의 작사곡이자 최대 히트곡인 'あなたに逢いたくて〜Missing You〜'(당신과 만나고 싶어서~Missing You~)로 출연 시 '''47.5%'''라는 순간 최고 시청률로 1위를 기록해 50대 중반에도 식지 않는 인기를 자랑하였다. 이때, 동시대에 활동하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2010년대 들어 활동 휴지를 선언한 나카모리 아키나가 시련을 딛고 홍백가합전에서 복귀를 선언해 80년대의 가희 두 사람이 오랜만에 한 무대에 서게 되었는데[20] 시청률이 뜨자 '세이코, 아키나에게 압승'이라는 등의 헤드라인을 뽑아냈다.
2014년, 2015년에는 홍백가합전 첫 출장이었던 1980년 이후로 한 번만 맡아도 영광이라는 NHK 홍백가합전의 오오토리(마지막 무대)[21]를 2년 연속으로 맡는 영예를 안았다.
2016년에는 이례적으로 X JAPANYoshiki에게 제공받은 곡인 '薔薇のように咲いて 桜のように散って'(장미처럼 피어나 벚꽃처럼 지네)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인기몰이를 했다. 2017년부터는 새로운 도전으로 'SEIKO JAZZ'라는 이름의 재즈 콘서트를 열고있다. 기존의 재즈 넘버들을 커버하여 부르는 콘서트라고 한다.
2020년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40주년을 기념하여 여러 이벤트를 준비하였으나, 코로나 19로 인해 콘서트가 전면취소되는 등 악재를 겪었다. 9월 30일 정규앨범을 발매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대신하였다. 또한 '''37년만에''' 여름의 문과 같은 여러 히트곡을 작곡한 자이츠 카즈오와 재회하여 "바람에 맞서는 한 송이의 꽃(風に向かう一輪の花)"을 발매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만 18세에 데뷔한 이래로 60세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매년 콘서트를 열고 있다. 90년대 말에는 '''디너쇼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공연마다 많은 관객을 끌어모으고 있는 세이코는 1992년부터 매년 12월 31일의 연말 디너쇼를 진행하고 있으며, 그 티켓 또한 한화 48만원, 4인 세트는 무려 220만원(!)에 이를 정도로 일본의 모든 연예인들 중에서도 탑클래스의 부류에 들지만 발매하는 즉시 '''완매'''하며 끊이지 않는 인기를 과시하고 있다. 매년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투어를 돌고 앨범을 내는데, 쇼와 아이돌의 대명사인 만큼 여전히 최전성기 시절과 다름없이 2만 명 가까이 수용할 수 있는 무도관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공연을 할 정도로 충성심 깊은 팬층이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 것이 특징. 콘서트의 마지막 순서인 '80년대 히트곡 메들리' 코너에서는 그 충성심 높은 팬들의 떼창을 감상할 수 있는데, 젊은 여성팬들의 목소리도 꽤 많이 들린다. 세이코가 여름의 문을 가창하면서 무대의 좌우를 뛰어다니며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마무리되는 것이 최근 10년 간 콘서트의 의례이다.

3. 성격 및 캐릭터



3.1. 희대의 아이돌


마츠다 세이코는 단순히 노래뿐만 아니라 패션 및 스타일링 또한 당시 여성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헤어스타일 등의 생김새나 행보 하나하나가 커다란 화제를 일으켰다.
그런 세이코의 80년대 전성기 당시 인기와 그녀의 캐릭터를 짧게 요약할 수 있는 단어로는 '''세이코쨩 컷'''과 '''부릿코'''가 있는데 세이코쨩 컷은 말 그대로 머리를 바깥으로 넘겨 부풀린 세이코의 머리 모양을 의미하는 뜻으로 일반 여성은 물론 후일 '꽃의 82년조'라고 불리는 코이즈미 쿄코, 마츠모토 이요, 하야미 유 등 당시 아이돌들 또한 그녀의 헤어스타일을 일제히 따라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세이코 본인은 '세이코쨩 컷'이 한창 유행하던 1981년 연말에 숏컷으로 스타일링을 바꿈으로서 실제로 그녀가 세이코쨩 컷을 하고 있었던 시기는 채 2년이 되지 않는다. 그녀가 숏컷을 하자 숏컷 열풍이 불기도 하였다.[22]

'''세이코의 부릿코 대명사로 꼽히는 영상인 "앗, 죄송해요~! (あっ、ごめんなさ~い!)"'''
특히 무대에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귀여워 보이게 행동하는 '부릿코' 이미지는 유행어가 되며 크게 화제가 되었다. 70-80년대 일본의 국민 음악방송이었던 더 베스트 텐에서 1980년 9월 18일 '푸른 산호초'가 1위를 하고 감격하여 우는 모습이 비춰졌는데 얼굴만 열심히 찡그리고 있지 눈에선 눈물이 전혀 나지 않아 '부릿코'라는 단어가 유행어가 될 정도로 세간의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후에도 각종 신인상을 수상할 때마다 눈물이 나지 않는데 억지로 울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마츠다 세이코=거짓눈물''''이라는 이미지가 팽배했다.[23]
1982년 FNS 가요제에서 '들장미의 에튀드'로 대상을 수상하였을 때 세이코가 마스카라까지 번져가며 눈물을 펑펑 흘리는 의외의(?) 모습을 본 사회자가 "이번엔 진짜 눈물이 나오나 봅니다"라는 발언을 하여 팬들에게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결국 사회자는 1년 뒤 FNS 가요제에서 당시의 멘트에 대한 사과를 했다고 한다. 잡지 등에서는 이러한 세이코를 "거짓눈물 세이코"라고 신랄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부릿코 컨셉은 무대 위에서의 컨셉으로, 라디오 등 자신 본연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곳에서는 꾸미지 않는 털털한 모습을 보였다. 한편 왜 '부릿코라는 별명을 얻어도 이러한 무한 귀척(...)을 고치지 않는가'에 대해 묻자 '''"아이돌이라는 직업이 대중들에게 꿈을 주는 일이기 때문에 고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소속사 사장이었던 아이자와 히데요시는 '''"팬들이 원하는 걸 즉각적으로 판단하여 그 자리에 맞는 분위기를 만드는 머리의 비상함과 프로 근성이 만든 '교묘한 자기연출'이 마츠다 세이코라는 가수를 만들었다"'''고 얘기하였으며, 그녀를 키운 후쿠다 전무는 '''"마츠다 세이코는 스스로 운을 붙잡았다. 더욱이 그녀가 성공한 이유는 목소리가 뛰어난 것과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이야기 했다.
이러한 그녀의 스타성은 당대 일본의 다양한 서브 컬처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순정 만화는 물론이고 애니메이션, 영화, 소설 속에도 실제의 명의로 언급되거나 본인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들이 탄생되곤 하였다. 나카야마 미호 주연의 명작 영화 러브레터에서 주인공인 후지이 이츠키가 '푸른 산호초'를 죽기 직전 불렀다고 간접적으로 언급한 장면이 있었으며 전설적인 고전 애니로 남겨진 마크로스의 주인공 린 민메이도 공식적으로 마츠다 세이코와 라이벌 나카모리 아키나를 모델로 만든 캐릭터이고, 일본의 국민 순정 청춘만화이자 응답하라 시리즈가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터치의 여주인공 아사쿠라 미나미가 그녀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인 등, 80년대에는 그야말로 모두가 '마츠다 세이코'라는 존재에 푹 빠져 있다고 해도 무방했을 정도.
그런 그녀의 팬이라 자처하는 연예계 종사자들도 매우 많은데, 라이벌이자 데뷔 후배인 나카모리 아키나도 그녀의 팬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닐 정도였으며 80년대 중반 일본의 국민 아이돌 그룹이었던 오냥코클럽의 주요 멤버 유우유는 팬이었던 마츠다 세이코와의 만남으로 감동받아 그 자리에서 울었다고 하며, 와타나베 마리나, 이시바시 타카아키, 히라이 켄, 린드버그의 보컬 와타세 마키, 뉴하프 연예인 하루나 아이, Every Little Thing의 모치다 카오리, 모닝구 무스메이이다 카오리, 미치시게 사유미, AKB48카시와기 유키NMB48와타나베 미유키, 오덕계의 아이돌 나카가와 쇼코가 팬으로 유명. 성우 타무라 유카리도 그녀를 동경하여 아이돌을 목표로 삼다가 현재의 성우 아이돌이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나카가와 쇼코는 다수의 세이코팬 중에서도 매우 열광적인 세이코팬으로 유명하여 자신의 개인 방송에서 세이코의 전 앨범 곡을 전부 나열하며 찬양하거나 마츠다 세이코를 방송에서 처음 만난 자리에서 본인이 부담스러워 할 정도로 엄청나게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항상 어딘가에서 세이코를 언급할 때 '신', '세이코 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건담 누나로 유명한 가수 모리구치 히로코는 자신이 게스트인 방송에서 세이코의 베스트 앨범 자랑과 종이로 90%이상이 가려진 세이코의 자켓 사진만 보고도 어떤 싱글인지와 수록곡까지 맞추는 등 10분 가까이 세이코에 대한 덕심을 열렬히 표현했다.#
2014년 NMB48와타나베 미유키는 자신의 첫 솔로곡을 '마츠다 세이코의 오마주'라는 방식을 차용하여 앨범 자켓도 세이코의 '여름의 문'을 흉내내고 세이코쨩 컷까지 똑같이 따라했다.
1980년대 중후반에 데뷔한 여성 아이돌들의 대다수는 인터뷰에서 '마츠다 세이코를 동경해 아이돌이 되었다'라고 인터뷰한 경우가 많았으며[24]후대의 아이돌들 또한 세이코의 팬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마츠다 세이코의 팬이 되었다고 밝히는 경우도 굉장히 많다.
여타 방송에서는 따로 코너를 만들어 그녀에 대한 에피소드에 대해 인기 연예인들이 코멘터리를 나누거나 연예계 내에서 그녀의 팬이라 자처하는 방송인들을 모셔놓고 누가 더 세이코 덕후인지 맞추는 퀴즈를 진행하는 등 그야말로 연예인들의 연예인. 동시대와 현대의 음악 평론가들 또한 세이코를 '대아이돌'이라 부르며 라디오와 방송 등지에서 그녀가 끼친 영향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세이코 매니아 퀴즈, 세이코를 너무 좋아하는 연예인들 모임, 마츠코 디럭스가 말하는 세이코, 아카시야 산마가 말하는 데뷔초의 인상, 요시다 타쿠로의 세이코 예찬, 이토 아사코가 되고싶은 아이돌
이처럼 마츠다 세이코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엄청날 만큼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심지어, 전설의 최초 2차원 아이돌로 불리는 마크로스 시리즈의 린 민메이 역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25] 마츠다 세이코와 같은 가수가 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4월 8일
친구들과 쇼핑…… 정말 오랜만이야.
아키나도 세이코도 여전하구나.
나는 어떨까……? 걱정이 돼.
너무 꾸미는 게 아닐까 하고.
언제나 카메라 앞에서 준비하고 있는 나…….
진짜 내가……, 아닌 걸요…….
미키모토 하루히코가 그린 린 민메이와의 콜라보.

3.2. 스캔들


[image]
''' 1996년경 우리나라 신문 기사에 실린 세이코[26]'''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와는 다르게 스캔들이 많았다. 대부분이 찌라시지만 그 중에서 고 히로미와는 공공연하게 데뷔 2년째부터 사귀어 왔고 결혼을 약속했을 만큼 공식 연인이었으나[27] 1985년 1월 단독 기자회견을 열어 고 히로미를 일방적으로 차 버렸는데 당시 호텔 방 TV에서 이 장면을 보게 된 고 히로미는 어이가 없어 의자에서 데꿀멍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명대사는 '''"다시 태어나면 꼭 함께 있자고 맹세했습니다."'''

'''기자회견에서의 마츠다 세이코'''
후에 고 히로미 측은 기자회견이 사전에 예정된 것도 몰랐으며 그런 대사조차 한 적이 없었고 '''"내가 다시 태어날 때 벌레가 되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이라는 발언도 하였다(...). 여담이지만 고 히로미와 세이코는 2000년에 화해하여 듀엣곡 <True love story>을 작업하고, 매우 다정하게 뮤직비디오도 찍었다.
{{{#ffffff ''' 85년 1월 고 히로미와의 결별 기자 회견 모습. '''
''' 옆에는 '정말 슬플 때는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혀져 있다. ''' }}}
고 히로미와의 이별 1달 후 세이코를 친동생처럼 여겨온 스폰서 이시하라 유지로[28]에게서 소개받은 12살 연상의 배우 칸다 마사키와의 교제를 인정했고, 2개월 후인 1985년 4월, '''23세'''의 나이로 '''전격 결혼을 발표했다.'''
''' 칸다 마사키와는 영화 카리브・사랑의 심포니#를 촬영하며 가까워졌다. '''
1985년 6월 24일 이루어진 결혼은 언론에선 마츠다 세이코(松田'''聖'''子)와 칸다 마사키(神田正'''輝''')의 이름을 따 세기(聖輝, 동음이의어인 '세이키')의 결혼으로 칭할 만큼 화제가 되었다. 이 결혼식은 TV 아사히에서 독점으로 방송권을 획득하여 10시간 동안 피로연부터 모든 것을 생방송으로 중계, '''34.9%'''라는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다.
칸다 마사키와는 결혼한 지 약 12년 후인 1997년 이혼했고, 슬하에 성우로 활동하고 있는 외동딸 칸다 사야카를 두었다. 아래는 둘의 이혼 성명문.
이번에 저희들은 12년 간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서로를, 그리고 서로의 재능을 존경하고 서로 도와가며 힘내왔습니다만
최근 두 사람 모두 가정과 일 사이의 양립과 그 어려움을 고민하고 부부로서의 밸런스를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 원하는 것만이 많아져 조금씩 배려를 잊어버린 걸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서로 떨어져 각자를 그리고 각자의 인생을 다시 고치고 싶어졌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 저희는 딸이라는 엄청난, 바꿀 수 없는 것을 얻었습니다.
이 소중한 딸을 이 같은 형태로 상처 입히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딸을 위해서도 조용히 평화롭게 끝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도 보통 사람의 마음을 가진 인간입니다.
서로 서로 고민하며 수많은 눈물도 흘렸습니다.
부디 여러분의 이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들은 앞으로도 배우로서 또 가수로서 멋진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열심히 하고 싶습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1997년 1월 10일 칸다 마사키, 마츠다 세이코
1989년 6월에 뉴욕의 호텔에서 마츠다 세이코와 본디 절친했던 쟈니스 사무소 소속 아이돌 콘도 마사히코와의 밀회 보도가 잡지 프라이데이를 통해 한바탕 소동이 일었으나 '일 관계로 만났으며 주변에는 다른 스탭들도 있었다, 교제따윈 있을 수 없다'고 완전 부정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번역된 내용은 아래

"콘도 마사히코 씨와는 오랜 친구죠. 레코드 회사도 같고요. 관계자분이 콘도가 뉴욕에 왔으니 다같이 한 잔 하자고 만났을 때 사진이 찍힌 거예요."

"여러분(기자들)이 가장 잘 아시겠지만 교제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다 아시면서 자꾸 물어보시네요."

"그냥 가볍게 들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다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저희 자리 바로 앞에 커플이 있었어요. 남성 분은 외국인에 여성 분은 영어를 쓰시는 일본인 같았고요. 두 분이 굉장히 끈적하게 스킨쉽을 하셔서 놀란 맘에 콘도 군이랑 '저것 좀 봐~','저 사람들 대단하다~'이런 얘기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어요. 찍힌 사진을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그게 안고 있거나 키스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들 하시더라고요. 아무튼 그러고 저희 일행이 이만 그 바에서 나가기로 하고 현관으로 쪽으로 나갔는데, 그때 사진찍는 소리가 났고 콘도 군이 '그만해주세요!' 라고 했어요. 저흰 그때 찍힌 줄 알았죠 그런데 이미 전에 안에 있던 상황을 찍은 모양이더라구요. 그러고 바에 다시 들어가서 그 얘기를 하고 있는데, 아까 그 커플이 기자한테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일본어로 인사하고 가셨어요. 저희를 자극하려고 한 거겠죠? 덫이었어요. 요즘 주간지의 기자들은 그런 수까지 쓰시네요."

{{{#ffffff '''미국인 제프 니콜스가 1994년경 출판한 폭로본에 게재된 사진.'''
'''제목은 '진실된 사랑'.[29]''' }}}
아이를 낳은 후 1990년대에 꾀한 미국 진출 길에서는 당시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멤버와의 염문설, 뉴욕 로케에서 알게 된 미국인 청년 제프 니콜스(영화 감독과는 동명이인)와 백댄서였던 알란 리드와의 열애설이 대두되었다.

'''제 2의 전성기를 알린 타카노유리(たかの友梨)의 CM'''
1994년 미국인 제프 니콜스와 뉴욕에서의 불륜 보도로 인해 모두의 아이돌에서 희대의 스캔들 여왕으로 미디어와 세간의 비판을 받았으나 논란의 연예인을 광고 모델로 기용하여 역으로 화제를 만들어내는 뷰티 클리닉 '타카노 유리'의 이미지 캐릭터로 채용되어, 서양인과의 대담한 스킨십과 노출을 선보여 미디어의 비난을 육탄전으로 이용해내고 '제 2의 전성기'라 불릴 만큼 크게 부활한다.
1998년에는 6살 연하인 치과의사와 재혼 당시 기자회견에서 발언한 'ビビビッときた(비비빅하고 (느낌이) 왔다)'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는 등 세이코의 마수는 어마어마했다. 지금까지도 당시의 결혼을 "ビビビ婚(비비빅콘)"이라고 칭할 정도. 가히 사생활 면에서 '일본의 마돈나' 라 불리울 만도 했다.
위와 같은 일례로 대중들의 질투와 비호감을 적립했던 마츠다 세이코였지만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결혼 후에도 은퇴하지 않고 출산 후 가수 일을 지속하면서,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아이돌 출신의 아이가 있는 탤런트를 말하는 '''마마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등의 꾸준한 활약으로 여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현재 일본의 인명색인 랭킹에서는 '마츠다 세이코'가 1위를 하고 있으며, '''일본 잡지에 제일 많이 등장한 유명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1995년 집계 당시 무려 3,300건 이상의 등장 횟수를 자랑하였다. 1984년의 앙케이트에선 '결혼하고 싶은 여성 NO.1'에 선정되었다.
90년대에서 2000년대에 걸쳐선 '동경하는 인생의 연예인', '반짝이는 여성 유명인' 랭킹에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편에서는 매년 앙케이트하는 '싫어하는 여자 연예인' 랭킹, 월간지 'SPA!'에서 「1998년 남자가 용서할 수 없는 여자」 1위, '주간여성'에서 「2000년도 독자가 뽑는 싫어하는 여자」 5위, '주간문춘'에서는 「2005년도 여자가 싫어하는 여자」 5위의 위엄을 시전. 2007년에는 NHK 스페셜 '마츠다 세이코 여성 시대의 이야기'라는 마츠다 세이코의 삶과 그녀를 보며 살아온 동세대 여성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방송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4. 여담


  • 데뷔 이전에는 핑크 레이디의 춤을 따라추고 지각을 자주 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지각을 자주 한 이유는 집에서 중학교 후문까지 10m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업 종이 울리고서야 집을 나가고는 했다고(...). 재학 당시 테니스부 소속으로 미션스쿨이었던 고교에서 학교 행사 때 모두의 앞에서 성경을 읽는 학년 별로 1명씩 뽑는 '여신'이라는 역할에 선출된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데뷔하기 전에는 의사가 꿈이었기 때문에 더 높은 편차치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했으나, 생각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아 교복인 점퍼 스커트와 볼레로를 동경했던 미션스쿨에 입학, 약대를 지망하고 있었다고 한다. 중학생 시절의 꿈은 스튜어디스보모.
  • 데뷔 계기가 된 '미스 세븐틴'에 응모를 한 이유는 "너무 좋아하는 미키 마우스를 볼 수 있으니까."[30]라는 이유였고 대회의 게스트 심사위원이 데뷔 전부터 동경하던 고 히로미였다는 사실에서였다고 한다. 다 함께 응모하였는데 친구 2명은 불합격하고 본인만 합격했다는 듯. 가수를 동경하게 된 계기도 후쿠오카 행사 때 직접 보러 갔던 그의 모습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동경하던 사람과 교제 성공이라니. 오디션을 받으러 왔을 때의 본인에 대해 선뮤직 사장과 남성 스탭들은 시골에서 막 상경한 별다른 인상이 없는 모습에 흥미를 갖지 않았으나 여성 스탭들이 맹렬히 그녀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데뷔할 수 있었다고 한다.
  • 데뷔곡인 '맨발의 계절'은 시세이도의 세안 용품 'EKUBO'('보조개'라는 의미)의 CM송으로 쓰였는데# 세이코는 볼에 보조개가 없기 때문에(...) 광고 모델을 다른 탤런트로 채용했다.[31] 노래가 알려지긴 했으나 지명도가 낮았기 때문에 광고 모델과 함께 가진 사인회장에서 "저 앤 뭐야?"라며 자신에게 아무도 줄을 서지 않았기에 분했었다고 나중에 회상하였다. 그러고 얼마 안 가서 세이코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치솟으면서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고.
  • '마츠다 세이코'라는 예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비화가 있었다. 하나는 당시에 잘나가던 자동차 기업 마쓰다주식회사와 지금도 유명한 시계 브랜드 세이코를 본따 두 기업처럼 성공을 바라는 의미로 소속사 사장이 작명소에서 직접 받아온 이름이라는 것. 2번째는 맨 처음 결정된 예명이 아라타 아키코였으나,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아서 데뷔 전에 출연한 드라마 <おだいじに>에서 본인의 배역명이었던 마츠다 세이코 쪽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데뷔 전 소속사가 뽑아온 아라타 아키코와 마츠다 세이코라는 예명 중에 본인이 직접 마츠다 세이코 쪽을 골랐다고 한다. 아라타 아키코라는 예명은 앞서 언급한 기대주의 신인 나카야마 케이코를 위해 만들었으나 불채용된 것이다. 이에 5개월 뒤인 12월 출연이 결정난 드라마 <おだいじに>에서 예명이었던 마츠다 세이코를 배역명으로 써줄 것을 부탁한 것이라고 한다.
  • 1984년 갑작스럽게 하와이에 단기 유학을 다녀왔는데, 그 시기부터 쌍꺼풀 테이프를 떼고 성형수술을 받기 시작했으며 90년대의 모습은 성형에 당시의 진한 화장 트렌드까지 더해져 데뷔초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니코니코 동화의 세이코 관련 동영상에서는 성형 이전까지의 영상엔 무한 찬양 코멘트가 달리지만, 성형 후의 영상은 영 좋지 않은 반응을 보인다(...). 성형이 자연 미모를 바꾼 특이한 케이스. 그러나 풋풋하고 청량한 느낌의 외모가 진하고 빡센 인상이 된 것 뿐이지 못생겨진 건 결코 아니다.
> "종종 '어떤 곡을 가장 좋아하시나요?'라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요, 당시엔 싫던 곡도 지금 들어보면 정말 좋다고 생각하는 게 있어요. 처음 1위를 했던 '바람은 가을색' 같은 경우에는 저도 참 좋다고 생각했던 곡이에요. 그다음에 낸 게 체리 블로섬이죠. 실례지만, 너무 싫었어요. 이 곡. 제가 이런 곡 부르는 거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너무 싫어했어요. 그래서 다들 '왜 싫어해?'라고 하는데 그래도 싫었어요. 싫다. 하지만 결국 레코드 발매했더니 대단하게도 1위가 되어 버렸었죠."
> "지금까지 나왔던 곡들은 밝은 느낌의 노래가 많았죠? 그래서 이 곡을 처음 받았을 때 굉장히 어둡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건 부르고 싶지 않다고나 할까, 저랑 분위기가 안 맞는 노래라고 생각했죠 레코딩을 해도 맘에 들지 않았고요."
>
>
> "지금은 좋아하지?"
>
>
> "정말 좋아해요."
  • 현재는 세이코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된 'SWEET MEMORIES'지만 발매 초기에 CM으로 쓰였을 시엔 영어 가사 부분만 흘러나왔고 자막으로 '곡:마츠다 세이코'라는 표기도 뜨지 않았기 때문에 "누가 부르는 건가?" 하는 질문이 속출했다. 그리고 발매 2개월 뒤 음악 방송에서 처음으로 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 80년대를 대표하는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시대적 배경을 나타내는 장치로 문학 소설이나 미디어 매체에서 종종 언급되고는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오쿠다 히데오의 <스무 살 도쿄> 등의 책에서도 그녀의 이름이 등장하는 등등.
  • 천사가 가진 순수성을 좋아하여 콘서트에선 천사의 날개를 단 코스튬을 자주 입는다.
  • 전세계 K-1 경기장 프리패스권을 갖고 있다.
  • 1988년 도쿄 지유가오카에 부티크 '플로레스 세이코'를 개점하며 사업가로도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는 오모테산도에 자신의 팬클럽 이름을 따 리뉴얼하여 영업 중이다. 해당 숍에는 세이코의 굿즈 등이 판매되고 있다.
  • 1990년대 초에는 미국 진출을 위해 철저하게 영어를 공부하였지만 아시아의 가수들이 으레 그렇듯 별다른 성과는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 뒤로도 몇 번 미국 진출을 노린 앨범을 발매하였고 90년대 후반에는 할리우드 데뷔를 목표로 하여 오디션을 통해 청춘 코미디 작품에도 출연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영어는 상당히 수준급이다.
  • 친한 연예인으로는 데뷔 동기인 이와사키 요시미, 하마다 쥬리, 카와이 나오코 등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특히 같은 호리코시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던 이와사키 요시미와는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으며 데뷔 이후로는 동기인 하마다 쥬리와 가장 친했다고. 하지만 데뷔하고 얼마 안 되어 격차가 너무 벌어져서 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술을 잘 마시지 않아 인간관계를 넓힐 기회가 적었지만, 배우인 모토 후유키와는 가족 모두와 친분이 있어서 사적으로 밥을 먹거나 노래방에 간 적도 있다고 한다.
  • 데뷔 동기인 쟈니스 사무소의 남자 아이돌 타하라 토시히코와는 연인 컨셉으로 CF도 찍거나 잡지 표지에도 함께 게재되거나 각종 방송에서 같이 노래부르는 공연, 활동이 매우 많았던 탓에 현재도 친한 사이이나 활동 당시에는 타하라 토시히코의 여성 팬들이 질투하여 '토시 짱과 세이코를 따로 떨어뜨려달라'는 항의 편지가 쏟아졌을 정도였다. 그러나 여자 아이돌 킬러였던 타하라와 수많은 남자 연예인과 염문설이 있었던 세이코였지만 드물게도 서로 간의 스캔들은 없었다. 같은 쟈니스 사무소의 활동 시기가 겹쳤던 콘도 마사히코와도 친한 누나 동생 관계였다고.
  • 인기 절정기였던 1983년, 오키나와 공연에서 갑자기 난입한 팬에게 구타를 당한 사건이 있다. 범인은 19세의 정신병을 가진 팬으로, 30cm의 쇠몽둥이로 3회 머리 부근을 구타당해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알려졌지만,.# 영상에 나오듯 3대 이상이었고 플라스틱 파이프라고 전해진다. 생방송으로 진행된 콘서트였는데, 이 사건의 트라우마로 인해 오랜 시간 오키나와에서 공연을 하지 못하다가 23년이 지난 2007년에서야 복귀 공연을 하였다.
  • 칸다 마사키와 이혼한 후 6살 연하의 치과의사와 2번째로 결혼하였으나 다시 이혼하고, 2012년 2살 연하인 대학 조교수와의 3번째 결혼을 발표하자 같은 시대에 친분이 매우 깊었던 아이돌 타하라 토시히코는 블로그에서 "다음 번 결혼은 나랑 하자"고 드립을 쳤다.
  • 아라시오노 사토시가 "연예계에서 들어와서 뵌 분 중에 압도적으로 가장 귀여웠다"고 언급하였다.
  • 1982년에 데뷔한 세이코쨩즈(聖子ちゃんず)란 3인조 여성 아이돌 그룹이 있었다. 3명 모두 세이코쨩 컷을 한 게 특징. 마츠다 세이코 본인도 닮았다고 말했었다고. 데뷔 직후 멤버 1명이 은퇴하는 바람에 싱글 하나만 내고 사라진 비운의 그룹이다.
  • 본명이 '카마치' 노리코여서, 본명이 '카마치' 사치코인 자드의 사카이 이즈미와 친척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다. 족보의 기록이 옳다면, 적어도 에도 시대부터 갈라진 먼 친척이라는 설이 다수설이나, 현행법으로서는 친연관계는 없는 셈. 우리나라로 치면 두 사람이 김해 김씨에 하위 계파까지 같은데 족보가 십수대 이상까지 거슬러 올라가 전혀 남남인 경우인 경우와 비슷하다.
  • 후쿠오카 출신이어서 그런지 후쿠오카 사투리, 일명 하카타벤을 사용할 수 있다. [32] 하지만 데뷔 이전 출연한 드라마에서 하카타 사투리가 너무 심한 나머지 몇번이고 촬영을 NG내어 대선배였던 배우들에게 민페를 끼쳤다고 본인이 이야기했다. 데뷔 초 테츠코의 방에서 사용한 적이 있고 비트 타케시의 방송에 나가서도 21세기 들어서는 소프트뱅크 CM에서 을 쓰거나, 고향에서 열린 본인의 콘서트 MC 도중에 짧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 링크가 삭제되었다.)
  • 1987년 일본에서 가수 활동을 하던 조용필의 인터뷰 상대로 KBS 가요대상에 출연한 적 있다.# 당시 국내에서 일본 대중문화가 금지였기에 대중들은 그녀가 누군지 거의 몰랐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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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을 묘사한 그림이 있는데, 상당히 잘 그렸다. 그리는 과정
  • 임신 당시에는 13kg 이상 쪘다가 출산 이후 1주일 만에 10kg이나 빠져서, 의사가 주의를 주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고 한다. 또 자신은 꼭 여자아이를 낳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사야카를 낳고 매우 기뻤으며, '역시!(やっぱり!)'라는 느낌이었다고.
  • 80년대 활동 당시 음악 방송에서 국내외 가수의 노래 커버를 굉장히 많이 했다. <Moon River>[33]나 <When You Wish Upon a Star>[34]등의 외국 노래뿐 아니라 야마구치 모모에의 <한여름의 경험>, 마츠바라 미키의 <한밤중의 문〜Stay With Me>, 사쿠라다 준코<제멋대로 비너스>[35], 등을 불렀다.
  • 딸인 칸다 사야카, 그리고 그의 아버지이자 첫 번째 남편인 칸다 마사키, 마츠다 세이코 모두 호랑이띠이다.

5. 디스코그래피




6. 필모그래피


===# 영화 #===
<rowcolor=white> '''연도'''
'''제목'''
'''배역'''
'''비고'''
1981년
<colbgcolor=#ffeaea><colcolor=black> ''' 들국화의 무덤
野菊の墓 '''
타미코
(民子)
<colcolor=black> ''' 주연 '''
1983년
''' 플루메리아의 전설
プルメリアの伝説 '''
하야사카 에미코
(早坂恵美子)
''' 주연 '''
1984년
''' 하복의 이브
夏服のイヴ '''
후지에다 마키코
(藤枝牧子)
''' 주연 '''
1985년
''' 카리브・사랑의 심포니
カリブ・愛のシンフォニー '''
사와키 아야
(沢木彩)
''' 주연 '''
''' 펭귄즈・메모리 행복 이야기
ペンギンズ・メモリー 幸福物語 '''
마츠다 세이코
(松田聖子)
특별출연
''' 조연 '''
1990년
''' 거기서 거기
どっちもどっち '''
카도와키 아유코
(門脇亜由子)
''' W주연 '''
1996년
''' Final Vendetta
サロゲート・マザ '''
나오미 노무라
(直美野村)
''' 주연 '''
1997년
''' 아마겟돈
Armageddon '''
카메오
특별출연
''' 조연 '''
1999년
''' 드롭 데드 고저스
Drop Dead Gorgeous '''
카메오
특별출연
''' 조연 '''
2000년
''' GEDO The Final Blade '''
사에미
(サエミ)
''' 주연 '''
2001년
''' 천년의 사랑 히카루 겐지 이야기
千年の恋 ひかる源氏物語 '''
아게하노 키미
(揚げ羽の君)
''' 조연 '''
2007년
''' Shanghai Baby
上海ベイビー '''
마돈나
(マドンナ)
''' 주연 '''
2008년
''' 반딧불이의 무덤
火垂るの墓 '''
유키코
(雪子)
''' 조연 '''
2010년
''' 야지마 미용실 더 무비: 꿈을 이루는 네바다
矢島美容室 THE MOVIE 〜夢をつかまネバダ〜 '''
프린세스 세이코
(プリンセス・セイコ)
''' 조연 '''
2018년
''' 우리가족: 라멘샵
ラーメンショップ '''
미키
(ミキ)
''' 주연 '''
===# 드라마 #===
<rowcolor=white> '''연도'''
'''방송사'''
'''제목'''
'''배역'''
'''비고'''
1979년

<colcolor=black><colbgcolor=#ffeaea> ''' 건강하세요
おだいじに '''
마츠다 세이코
(松田聖子)
<colcolor=black> ''' 조연[36] '''
1981년

''' 양파를 벗긴다면…
玉ねぎむいたら… '''
사이토 아즈사
(斎藤梓)
''' 특별출연 '''
(제1화, 제2화)
1982년
[image]
''' 후지 멍청이 제 6화 '충격! 무서운 소년 방화광!'
フジ三太郎 第6話「衝撃! 恐るべき少年放火魔!」 '''
게스트
(ゲスト)
''' 특별출연 '''
1983년

''' 스무 살 텔레비전 시티 '마츠다 세이코의 첫 정사'
日立テレビシティ「松田聖子のはじめての情事」 '''
이시이 케이코
(石井恵子)
전2화
''' 주연 '''
1987년

''' 마츠다 세이코의 스위트 메모리즈
松田聖子のスウィート・メモリーズ '''
미즈노 카오루 / 미즈노 카요
(水野薫・水野佳代)
''' 주연 '''
1989년
[image]
''' 바람에 사랑을 해
風に恋して '''
사에구사 아야코
(三枝あやこ)
''' 주연 '''
1990년

''' 엄마 엄마 전쟁
ママ母戦争 '''
이쥬인 나나코
(伊集院ななこ)
''' 주연 '''
1992년

''' 어른의 선택
おとなの選択 '''
타니구치 미키
(谷口未希)
''' 주연 '''

''' 철 지난 바닷가 이야기 '92 가을
季節はずれの海岸物語'92秋 '''
유카코
(優香子)
단편
''' 주연 '''
1993년

''' 나 못난이였어?
わたしってブスだったの? '''
카에리야마 유코
(帰山夕子)
''' 주연 '''
1994년
[image]
''' 가족 네트워크
家族ネットワーク '''
타케우치 미도리
(谷口未希)
''' 조연 '''

''' 철 지난 바닷가 이야기 파이널
季節はずれの海岸物語ファイナル '''
유카코
(優香子)
단편
''' 주연 '''
1997년

''' The Big Easy '''
게스트
(ゲスト)
''' 출연 '''
2000년
''' 아메리카
TV 무비 '''
''' Partners '''
게스트
(ゲスト)
''' 출연 '''
2004년

''' 단 하나의 소중한 것
たったひとつのたからもの '''
사토 유미
(三枝あやこ)
''' 주연 '''
2005년

''' 세계에도 기묘한 이야기 2005년 가을 특별편 '과거가 닿는 오후'
世にも奇妙な物語 2005年 秋の特別編『過去が届く午後』'''
유코
(優子)
단편
''' 주연 '''
2007년

''' 아름다운 그대에게 ~미남♂파라다이스~
花ざかりの君たちへ 〜イケメン♂パラダイス〜 '''
츠바키
(椿)
''' 특별출연 '''
(제1화, 최종화)
2008년

''' 와다 아키코 이야기
和田アキ子物語 '''
선배 여성가수
(先輩女性歌手)
단편
''' 조연 '''

''' 아름다운 그대에게 ~미남♂파라다이스~ 졸업식&7과 1/2화 스페셜
花ざかりの君たちへ 〜イケメン♂パラダイス〜 卒業式&7と1/2話スペシャル '''
츠바키
(椿)
특별편
''' 특별출연 '''
2010년

''' BONES '''
이와나가
(イワナガ)
''' 조연[37]
(시즌5 15화) '''
2012년

''' 타이라노 키요모리
平清盛 '''
기온노 뇨고/오토마에
(祇園女御 / 乙前)
''' 조연 '''

[1] 1950년 12월 21일생.[2] 1964년생.[3] 남편 또한 재혼이다.[4] 첫번째 남편인 칸다 마사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5] 마츠다 세이코 본인이 세운 개인 사무소. 대표는 본인의 어머니였으나, 고령으로 인해 퇴임 후 현재는 친오빠인 카마치 미츠히코가 대표직에 위임.[6] 동세대를 풍미했던 나카모리 아키나하고 같은 유니버셜 소속이지만 정확히는 메인 레이블이 마츠다 세이코는 EMI, 나카모리 아키나는 유니버셜 J로 다르다. 더 정확히는 나카모리 아키나는 유니버셜 J 산하의 歌姫(가희)레이블이다.[7] 칸다 마사키와 이혼하기 전에는 남편의 성을 따라 칸다 노리코였다. 이혼을 했으니 다시 카마치 노리코가 되어야 옳으나, 딸의 원만한 학교 생활을 위해 표기와 읽는 법만 동일한 칸다라는 호적을 새로 만들었다고. 현재는 재혼하였기 때문에 본명은 알 수 없다.[8] 노부나가의 야망을 플레이할 때 규슈 서북쪽을 보면 카마치 성의 인물들이 나오는데, 설명에도 지쿠고의 호족으로 나온다.[9] 2015년 8월 뮤직 스테이션의 발표에 의하면 쇼와시대에만 2,254만장을 기록했다고 한다.[10] 세이코를 비롯해서 오카다 유키코, 사카이 노리코 등을 배출하여 1980년대 아이돌계를 휩쓴 인물. 2013년에 사망하여 장례식장에서 세이코가 눈물을 보였다.[11] 아이자와 사장과 투탑 체제로 선뮤직을 설립하여 회사를 이끈 인물. 소속이었던 오카다 유키코가 회사 건물에서 자살 직전 마지막으로 면담했던 것도 후쿠다 전무이다. 현재는 선뮤직의 명예고문을 맡고 있으며 회사 설립 50주년을 맞았다.[12] 이 과정에서 집으로 찾아온 소속사 측과 부모님이 대면했을 때, 직접 부엌에서 차를 내어 가져왔고 부모님이 허락할 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고 한다.[13] 1980년 2월 데뷔한 레슨 동기로 마츠다 세이코의 2살 연하였다. 선뮤직 측은 야마구치 모모에고 히로미를 담당했던 프로듀서와 히트 메이커인 미나미 코우세츠라는 황금 작곡진을 배경으로 두고 데뷔 프로모션까지 찍는 등 만발의 준비를 했으나 데뷔곡으로 쓰인 외국산 샴푸 CM에서 유해한 성분이 검출되어 방송이 중지되는 등 불운의 연속이 계속되어 자연스레 푸쉬에서 밀려났다고 한다. 마츠다 세이코가 대히트를 얻어 주가를 달리던 1981년 결국 사무소를 나와 은퇴. 이후 배우, 라디오 성우, '서정곡'(추억 음악) 콘서트 가수로 지금까지도 소소하게나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홈페이지[14] 당시 대항마라고 할만한 유일한 인물로는 나카모리 아키나가 있다. 두 사람의 음악적 스타일이 판이하게 달라서 더욱 부각되었고, 이들은 지금까지도 일본 연예계의 대표적인 라이벌로 손꼽힌다. 다만 방송계가 만들어 낸 라이벌이 으레 그렇듯이 본인들은 사이가 좋은 편. 어쨌든 이 둘은 80년대 아이돌의 대명사로 당시 아이돌들 중 2~3천만장 가량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다.[15] 핫피엔도드러머 출신으로, 국내에는 마크로스 프론티어의 OST 성간비행의 작사가로 유명하다.[16] 쿠레타 카루호 명의, 단 전성기 시절의 작사는 1984년 발매한 시간 나라의 앨리스 싱글이 마지막.[17] 특히 고음 부분에서 큰 차이가 나는데, 데뷔 초엔 시원하고 묵직하게 뻗어나가는 고음이였다면, 이후로는 고음을 흘려보내는 듯한 느낌이 난다.[18] 사실 80년대에 소속사 후배 아이돌 오카다 유키코에게 입술 Network란 곡의 가사를 선물해 오리콘 1위를 기록한 바 있으나, 정작 이 시기 본인의 곡을 작사/작곡 하지는 않았다.[19] 한화 약 20억원.[20] 정확히 말하자면 아키나는 뉴욕 스튜디오에서 이원생중계로 공연했으니 한 무대에 서지는 않았다.[21] 각 팀의 마지막(トリ) 무대 중에서도 모든 가수들의 제일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을 부르는 명칭[22] 그녀는 세이코쨩 컷을 그 이후에도 한번 더 하였는데, 이는 출산 후 인터뷰에서 볼수 있다.[23] 2000년대 이후에는 더 베스트텐 특별판, 우타방 등의 음악 방송에서 당시 부릿코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던 '거짓 눈물의 부릿코' 자료화면 등을 보여줄 때마다 본인도 매우 민망해하며 보기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인다.[24] NHK에서 방송된 아사도라 아마짱에서 아마노 하루코 (아역 : 아리무라 카스미, 성인역 : 코이즈미 쿄코)가 어린시절 아이돌을 꿈꾸며 상경했을 때 동경하던 대상이 마츠다 세이코였다. [25] 정확히 말하면 린 민메이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라는 컨셉으로 만들어진 앨범인 "Miss D.J"에서[26] 나이가 잘못 표기되어 있는데, 1996년 당시의 나이는 만 34세이다.[27] 사귈 당시 히로미와 세이코의 전화 음성 유출본. 살살 녹는 세이코의 애교가 압권이다. 여담으로 고 히로미는...차일 만 했다.[28] 1950~1980년대의 전설적인 영화배우. 현재는 사망. 망언 정치인으로 유명한 이시하라 신타로의 친동생이다![29] 미국에서 있었던 3년간의 밀화나 러브레터 등을 공개하였으나 만들어낸 이야기라거나 대필 작성이라는 논란도 있었다.[30] 당시 일본에는 도쿄 디즈니 랜드가 지어지기 이전이었으며, 응모 상품이 미국 디즈니 랜드 초대권이었다.[31] 소속사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요시는 세이코에게 비주얼적인 측면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래만 노출시키자는 생각으로 CF에 출연시키지 않았다고 한다.[32] 하카타벤은 일본 내에서 여자가 쓰면 가장 귀엽다고 생각한다는 사투리라고 한다.동남 방언이랑 비슷한 지위라고 보면 된다.[33] 영상[34] 영상 평소와 다른 창법이 인상적이다.[35] 데뷔 전 오디션 접수할 때에도 이 노래를 녹음해서 제출했다고 한다.[36] 데뷔 전에 출연하였다.[37] 나레이션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