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이돌
1. 개요
일본 아이돌에 관한 개괄 문서이다.
2. 남녀 공통 특징
2.1. 종합 엔터테이너
한국에서는 아이돌이라고 하면 일단 가수의 한 부류를 의미한다.[1] 하지만 일본에서는 아이돌이라고 하면 가수 보다는 종합 엔터테이너로 통한다. Idol이라는 단어를 일본 대중 문화계에서 쓰게 된 이유는 청소년들에게 마치 우상처럼 열광적인 애정을 받는 현상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지, 꼭 가수라는 직업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즉, 가수 활동은 본업이 아니라, 예능, 드라마, 모델 등 다양한 연예계 활동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어린 배우나 성우가 다방면에서 활동하면 아이돌 배우, 아이돌 성우로 불린다. 아이돌 생활을 마치고 가수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배우나 모델, 버라이어티 탤런트 쪽으로 나가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일본 아이돌은 가창력이나 춤 실력보다는 개개인의 캐릭터나 컨셉의 매력, 방송에서의 예능감을 중심으로 육성된다.(한국에서 비슷한 사례라면 틴틴파이브나 가수로 활동했던 손지창, 김종민 같은 케이스를 생각하면 된다. 그냥 앨범도 겸사겸사 내는 예능인이나 배우 정도의 느낌이다.)
일본 아이돌이 미성숙한 아이가 노력하는 일종의 '''서사'''를 세일즈 포인트로 삼는다면, 한국 아이돌은 '''뛰어난 퍼포먼스'''가 세일즈 포인트다. 강도 높은 연습생 생활을 지속하고 대다수는 데뷔의 문턱조차 밟지 못하는 한국과 다르게, 일본은 빠르면 초등학생부터 활동을 시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여자 아이돌은 데뷔하고도 연습생 생활을 지속하는 것과 다를 것 없는 상황이다 보니 졸업 제도로 꾸준히 데뷔와 졸업이 반복되고, 졸업 이후에는 프로페셔널로서의 기준치를 넘지 못하고 은퇴하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참고로 이러한 일본의 아이돌 문화는 최초의 현대적 아이돌이라 불리는 프랑스의 예예걸스가 그 기원이고, 혹은 스모나 가부키에서 왔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2.2. 주로 발매하는 장르
장르적으로는 다양하고 유행의 변화가 빠르다. 여자 아이돌의 경우 프로듀서 층쿠의 헬로 프로젝트의 그룹들, 대표적으로 모닝구 무스메는 펑크와 복고적인 댄스음악으로 크게 인기를 끌었다. 그 후 나타난 것은 여자아이들이 밴드 풍의 노래를 부르는 '걸즈 락'. 대표적으로 AKB48이 크게 성공했다. 또 Perfume이 인기를 끈 이후 디스코 풍의 신스팝이 잠깐 유행하기도 했다. AKB48이 예전같지 않은 지금은 다양한 장르의 다양한 그룹들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선 한류의 영향으로 힙합 댄스를 하는 그룹도 있다. 다만 서태지와 아이들을 비롯하여 블랙뮤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한국과는 달리 노래에 랩이 거의 들어가지 않으며, 대신 밴드맨 출신 프로듀서들의 영향인지 샤우팅이 들어가는 곡이 제법 된다.
남자 아이돌의 경우 쟈니스 사무소 소속의 그룹이 장악하고 있다. 80년대의 콘도 마사히코, 소년대, 히카루GENJI의 인기를 이어받아 SMAP이 이전까지의 아이돌과는 다른 친근한 이미지로 큰 인기를 끌었고 이를 이어 아라시가 국민적인 인기를 물려받으며 독과점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스타더스트 프로모션, EXILE 등도 남자 아이돌 그룹을 런칭하였으나 사실상 쟈니스 사무소 원탑 체제라고 보아야 무방.
장르적으로는 다양하지만 총체적으로는 '일본 아이돌스러운'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것도 특징이다. 상대적으로 리얼세션이 자주 기용되며 '이해하기 쉽고, 따라부르기 쉬운 멜로디 중심의 음악'이라는 것이 전반적인 특징이다. 보컬적으로는 대다수가 강한 비음과 좁은 음역대가 특징으로, 트로트나 엔카가 연상되는 창법으로 팝을 부른다는 평가를 듣는다[2] .
2.3. 공연 실력
원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 아이돌은 솔로 위주였다. 80년대까지 활동하던 솔로 아이돌들은 오늘날의 아이돌과는 달리 가수로서의 실력을 갖추고 활동했다. 스스로 작사에 참여하는 등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아이돌도 있었다. 쉽게 말하면 재색을 겸비한 가수들인 것이다. 예를 들어 시대를 풍미했던 나카모리 아키나는 뛰어난 음악성이 인기 비결이었고, 당시에는 미모와 스타성을 주로 평가받았던 마츠다 세이코역시 탄탄한 발성과 연기력을 지닌 보컬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야마구치 모모에에 이르면 엔터테이너적 성격보다는 '아름다운 뮤지션'이라는 인식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한때 아이유가 일본에서 데뷔를 했을때, 80년대 일본 여성 아이돌을 연상케 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던것은 이러한 당시 아이돌들의 상황에서 기인한다.[3]
그러나 오냥코클럽의 데뷔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음악쪽으로 경험이 없는 일반 여중고생들이 전략과 마케팅의 승리로 인기를 얻은 것이다. 오냥코클럽의 성공은 이후 모닝구 무스메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모닝구무스메 1기의 경우에도 락보컬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인재들인만큼 가수로서의 실력은 준수했으나, 인기를 얻는 데에는 ASAYAN이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힘, 그리고 친근감을 무기로 내세운 마케팅의 견인이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모닝구무스메는 후기기수를 받아들이면서 상당히 적극적으로 예능방송활동을 펼친 그룹에 속했다.
이런 형태의 아이돌이 주류를 이루게 되면서, 실력도 있고 아이돌성도 있는 정통파 여성 아이돌의 계보는 끊어졌다.[4][5] 하지만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여성 가수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모모에-세이코-아키나로 이어지는 여성 솔로 가수의 계보는 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아무로 나미에, 하마사키 아유미, 오오츠카 아이, 코다 쿠미 등 여성 솔로 아티스트로 이어졌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시기부터 '여자 유망주들'에게는 예능감을 살려 아이돌이 될지, 음악성에 집중해 가수가 될지 양자택일이 강요되는 상황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코다 쿠미는 모닝구 무스메 오디션에도 지원했던 바 있으나, 결국 강한 컨셉의 솔로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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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의 개요 문단에도 쓰여있지만 일본의 아이돌은 가수라기보다는 방송가의 모든 예능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는 종합 예능인[6] 두 집합이 비록 온전히 분리된 집합은 아니지만 활동 양태에서 차이점을 지적하는 것은 가능한데, 일본에서는 외모능력(외모,패션감각 등)가수능력(가창력,음악실력 등),퍼포먼스(춤,공연실력 등),방송인능력(연기력,캐릭터 등),예능인능력(개그감,입담등),아이돌능력(팬서비스,이미지관리등) 등등 방송에서 써먹을 수 있는 엔터테이너능력 전반을 아이돌에게 요구하고 전방위로 써먹는다. 정말 천재급이 아닐 다음에야 당연히 이 능력은 타고나는 것+경험누적과 실전으로 찾아내 익숙해지는 것이고, 기획사가 엔터테이너 한명 키우는데 들이는 수고와 리스크 생각하면 아직 뭘 제대로 잘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 어리고 값싼 지망생들을 모아 패키지를 만들고 몇년동안 이것저것 다 시켜보면서 낙오자는 도태시키고, 어느 한쪽이라도 자립할 능력을 발견하면 그때 집중적으로 키우자는 의미가 강하다. 마치 유럽축구의 유스 시스템 운영과 비슷한 원리인 것. 따라서 아이돌과 아티스트는 상하관계가 아닌 일부 영역을 공유하며 아이돌중 아티스트로의 가능성이 생기면 독립해서 아티스트쪽으로 돌려보는 '''완전한 별개의 직업군'''이 된다. 반면 한국 시장은 아이돌에 다방면의 실력을 요구하긴 하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능력은 가수고 가수의 일부분으로 보는 시각이 더 많으며, 아이돌에게도 대중가요 가수로서의 실력을 요구한다. 이 차이를 간과하거나 반대로 너무 집착하면 양국의 아이돌 시장을 올바른 눈으로 볼 수 없다.
흔히 일본의 아이돌을 '성장형 아이돌', 한국의 아이돌을 '완성형 아이돌'로 나누고 일본 아이돌 오타쿠들은 완벽한 모습보다는 부족한 모습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본에서 아이돌로 성공하려면 오히려 실력이 부족해야 한다고 분석하지만, 아이돌로서의 성공 여부는 개인의 실력보다는 기획사의 능력과 콘셉트, 곡의 질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7][8] 도쿄죠시류, 9nine, 페어리즈, DiVA 등이 실패한 것은 콘텐츠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이지, '높은 실력 때문에 오타쿠가 감정이입을 못 해서 실패했다'와 같은 시각은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9] 큐트, 모닝구 무스메 등도 실력과 퍼포먼스를 내세워 활동하고 있지만 건재한 오타쿠 팬덤을 자랑한다. E-girls와 페어리즈, 모모이로클로버Z와 9nine의 결정적인 차이는 콘텐츠의 질이 높다는 점 뿐이다. 게다가 일본이 아이돌의 실력에 대해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아키모토 야스시와 쟈니스[10] 의 등장 이전에는 일본 아이돌 또한 실력에 큰 비중을 두었었고, 현재도 실력없는 아이돌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11] 2000년대 후반 한류 아이돌 러쉬로 인해 대중들의 눈도 같이 높아졌기 때문에, 소속 아이돌의 트레이닝에 투자하는 경우도 많아지는 추세다.[12] 정리하자면 일본의 아이돌은 실력이 부족해'''도''' 괜찮은 것은 사실이나, 실력이 부족해'''야'''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한때 트위터 상에서 '일본은 버블 경제 붕괴 이후 국민들이 탈력에 빠졌고,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실력이 없는 아이돌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라는 분석이 유행했던 적이 있는데 '''실상은 정 반대다'''. 거품이 무너지고 난 후인 90년대 중후반에는 걸출한 가창력과 댄스 실력을 갖춘 SPEED가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였고, 반대로 거품경제의 최전성기였던 1980년대 후반에는 실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오냥코클럽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건 경제적 상황이 아닌 연예계의 트렌드에 따른 것으로, 하단의 1990년대 항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오냥코는 80년대 아이돌 호황기의 막차를 탄 격이었고, 스피드는 90년대 댄스가수 붐에 다리를 걸친 걸그룹이었다[13] . 그리고 그 오냥코 클럽도 결코 음반판매량이 높다거나 콘서트 규모가 큰 그룹도 아니었다.[14] 경제적 지표를 섞어 분석하자면, 오히려 경제 호황기였기에 저런 기획도 소비해줬으나, 불황이 되자 얄짤없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불황인 시기에 기획된 오냥코의 후예들(체킷코와 아이돌링!!!)은 모두 실패했다.
'일본 아이돌은 미숙한 아이돌이 연예인으로서 커나가는 스토리를 중시한다'라는 분석은 초창기 모닝구 무스메나 퍼퓸, 모모이로클로버Z와 같은 몇몇 그룹을 분석하는데는 도움이 되는 설명이지만, 일본 아이돌 시장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스토리성은 성공한 아이돌 그룹 일부의 모델일 뿐이고 스토리성이 없어도 성공하는 경우는 많다. 이전 판본에서 예로 들었던 E-girls만 해도 특별히 활동에 스토리성이 있는 그룹이 아니다. 스토리성이 있다면 인기를 얻는 데 큰 도움이 되지만, 사실 이건 만국공통 모든 분야에 다 적용되는 사항이다. 다만 일본은 아이돌의 성장에 대한 주목도가 높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 비해 스토리성의 도움을 더 많이 받을 수는 있는 편이다.
2.4. 상술
기본적으로 적으면 3가지, 심하면 10여종이 넘는 수많은 사양으로 나누어 음반을 발매한다. 물론 거기까지는 그냥 팬서비스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돌그룹들은 이 음반에 멤버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이벤트권을 집어넣어 엄청난 수의 복수구매를 유도한다. 이러한 접촉상술의 대표주자가 바로 '''악수회, 하이터치회, 샤메/체키회'''이다.
악수회는 말 그대로 그룹 멤버와 악수를 할 수 있는 이벤트로, 음반에 이 악수회에 응모할 수 있는 악수회권을 동봉한다. 악수회에 참가하면 그룹 멤버와 짧게는 10초에서 길면 1분정도 악수를 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악수회 상술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것이 바로 AKB48을 비롯한 48사단 자매그룹들로, 이들의 음반판매량의 약 90%는 이런 악수회 참가를 위한 복수구매이다. 오리콘 기준으로 AKB48의 싱글은 100만장이 넘게 팔리지만, 악수회권이 들어있는 극장반이 제외되는 사운드 스캔 기준 판매량은 보통 20만장 내외다. 자매그룹들은 더 심해서 60만장 넘게 나간 싱글이 사운드스캔에선 겨우 6만장 잡히는 수준. 반면 상술을 덜 쓰거나 쓰지 않는 가수들의 경우 사운드스캔 판매량과 오리콘 판매량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개중에는 도리어 사운드스캔이 오리콘보다 높게 나오는 경우까지 있다.
하이터치회는 악수회와 비슷한데, 음반을 구매하면 이벤트장에서 멤버와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는 하이터치회권을 음반에 동봉한다. 이쪽을 가장 적극적으로 구사하는건 쟈니스로, 쟈니스 소속 그룹인 Sexy Zone은 사실상 3인조 유닛 활동하던 2014년 하반기 ~ 2015년 상반기에 Sexy Zone '''5인 완전체'''[15] & '''Sexy Family[16] 합동''' 하이터치회를 개최해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체키회, 혹은 샤메회, 투샷회는 악수회나 하이터치회보다 많은 수의 음반을 복수구매했을 때 참가 가능한 이벤트로, 멤버와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티켓을 음반에 동봉해서 판매한다. 사진이라는 물질적인 증거가 남는 이벤트이다보니 인기도 매우 크다. 현장에서 폴라로이드로 찍어주는 경우도 있고, 입회자의 디카나 폰카로 찍어주는 경우도 있다. 보통 발매된 사양 전부를 한데 묶은 박스셋에 동봉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박스셋 하나를 사면 차트에는 시디 여러장 구매로 찍힌다.''' 이 상술은 48사단, 하로프로 등등 많은 아이돌 집단이 사용하고 있다.
지하 아이돌이나 인디즈 아이돌까지 내려가면 아예 멤버들과 껴안을 수 있는 기회를 파는 '허그(hug)회', 벽치기를 해 주는 '카베동회', 껴안고 귓속말을 해주는 이벤트, 무릎베개 등 캬바쿠라보다도 더 악질적인 이벤트도 매우 많다.(사실 허그회까지만 가도 캬바쿠라보다 심하다고 볼 수 있는데, 원칙적으로 대부분의 캬바쿠라는 '''신체접촉이 금지'''다. 허그회도 말이 허그회지 대놓고 멤버들을 만지작 거릴 수 있게 풀어놓은 이벤트나 다를바 없다. 물론 개중에는 '음반전달회'라고 매장에서 CD를 구입하면 멤버가 그걸 소비자에게 건네주는 이벤트라던가 시디를 사면 미니 라이브에 초대한다거나 하는 비교적 건전한 이벤트도 있긴 하다.) 그 외에 EXILE, E-girls 등의 LDH 소속 그룹들이 쓰던 뮤직 커넥팅 카드 상술이나 콘서트 티켓 첨부 상술도 있었는데 오리콘측에서 이러한 상술이 첨부된 음반은 차트에 반영하지 않기로 하면서 폐지되었다.
이런 상술은 그룹의 멤버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경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AKB48이 밀리언을 기록할 수 있는 이유는 무려 300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손을 팔기 때문이다. 2015년부터 급성장한 노기자카46 역시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피지컬 판매량은 악수회로 인한것이다. 그 외에도 개개인의 떨어지는 가창력을 떼창을 통해 감추려는 기술적인 의도도 있겠지만 2010년대 이후 현재 일본 아이돌의 인원수는 사운드 보완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술로 판매량을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상술을 통해서 음반 판매량을 불리다 보니, 음반이 몇십만장 넘게 팔려 오리콘 차트 1위를 해도 일반 대중들은 그 노래, 그 가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오리콘 차트는 이미 '인기의 척도'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였다. 개중에는 이름을 알리기 위해 음반가격을 낮추고 갖가지 상술을 떡칠해서 인지도 없는 아이돌이 차트에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한다. 이벤트를 계속 추가해서 떨어지는 낙폭을 가리는 눈속임 수법도 나왔다. 반면 Perfume이나 모모이로클로버Z 같이 실제 팬덤과 대중 관심도는 훨씬 더 높은데도 상술을 쓰지 않기 때문에 음반 판매량은 적게 나오는 가수들도 매우 많다.(Perfume 싱글이 70,000~80,000여장, 모모이로클로버Z의 싱글은 보통 4~5만장 정도 팔리는 정도로, 48사단의 자매 그룹의 10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Perfume이나 모모이로클로버가 '48사단 자매그룹'보다 인기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때문에 오리콘 차트 이외의 다양한 지표를 사용해야 그 그룹과 곡의 실제 인기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순수한 곡의 인기는 iTunes 다운로드 차트, 레코초쿠 착신음(벨소리) 차트, 노래방 차트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E-girls가 이 부분에서 강세였다. 콘서트 관객 동원력은 대중들의 관심과 팬덤의 규모를 확인하는 새로운 척도로 각광받고 있다. 접촉 이벤트를 통한 중복구매로 눈속임을 하지 못할 뿐더러[17] , 일단 규모가 크고 '공연'이라는 가수 본연의 능력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Perfume과 모모이로클로버Z는 음반 판매량은 높지 않지만 돔 투어 정도는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정도로 인기가 있다. 또한 티켓이 잘 팔리는 지역을 통해 '''이 가수의 인기가 전국구인지'''도[18]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또한 비디오리서치, 닛케이 파워 랭킹, 오리콘의 '2만명이 좋아하는 아티스트 순위' 등 공신력 있는 설문조사도 인기 척도로서 사용되는 중. 특히 닛케이의 경우 인지도와 호감도를 동시에 조사하기 때문에 그 가수의 유명세가 '악명'인지 여부도 알 수 있다. 때문에 기업의 광고모델 선정에 중요한 참고자료로 사용된다. 닛케이 파워랭킹의 경우 여성 그룹은 2019년까지도 수 년째 Perfume이 독보적인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개인별 파워랭킹에서는 사카미치와 48그룹 천지가 된지 오래. 46, 48 외에는 모모이로클로버Z 멤버들만이 그나마 개인 랭킹에서 선전하고 있다. 남성 아이돌은 따로 집계하지도 않고 아예 쟈니스 랭킹으로 발표한다. 물론 일본 현지에 거주한다면 주변의 분위기나 TV 등을 통해 '''체감 인기'''를 알 수 있으므로(길거리에서 노래가 많이 들린다거나, 주변의 대화에서 화제가 된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는 한국에서 팬질을 할 때 신경쓰게되는 부분이다.
다만 오리콘 차트가 지표로서 기능하는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팬덤의 화력'을 측정하는데는 도움을 줄 수 있다. AKB48이나 노기자카46의 판매량이 거의 악수회 티켓으로 판 물량이어도 인정을 받는 것은 그걸 감안해도 현역 걸그룹 중에서 팬덤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PASSPO☆의 사례처럼 극단적으로 상술을 몰빵해서 실제 팬덤의 구매력보다도 판매량을 뻥튀기하는 사례도 있지만 그런 경우 다음 싱글의 판매량이 극단적으로 떨어지는 등 결국 티가 나게 된다.
여담으로 일본 아이돌은 CD를 사면 반드시 악수회를 갈 수 있는 반면 한국 아이돌 그룹 싸인회는 완전 추첨제라 오히려 상술이 심한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오해이다. 일본에서도 CD를 사면 반드시 악수회를 갈 수 있는건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을 표방한 AKB48 그룹과 그를 본딴 아이돌 그룹들뿐이다.[19] 일본의 다른 아이돌 그룹들도 하이터치회나 팬이벤트를 하기는 한다. 쟈니스 같은 아이돌도 때때로 할 때가 있다. 단지 대중적인 이미지 때문에 AKB처럼 대규모 악수회를 잘 열지 않을 뿐이다. 이 경우 인원이 제한되어 있으니 당연히 한국과 비슷한 추첨제다. 쟈니스 소속 King & Prince로 예를 들면 CD에 들어있는 하이터치회 응모용 시리얼 넘버를 전용 예약 사이트에 입력해 추첨한다. 당연히 한 장으로 추첨될 확률이 낮으니 여러장 음반을 사는게 기본이다. 물론 비인기 아이돌은 경쟁이 심하지 않으니 무조건 갈 수 있지만 이건 한국도 같다.
2.5. 기획사의 갑질로 인한 이지메 악습
BBC의 보도를 인용한 연합뉴스의 기사.
아이돌의 소속 연예 기획사들의 과도한 권력남용에 대한 비판을 가한 영국 BBC 보도를 인용했던 연합뉴스의 기사를 링크한 것이다. 기사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일본에서 연예기획사들의 '갑질'에 대한 우려는 최근에 부각되기 시작한 문제이지만 그 이전에도 아주 없었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물론 한국이나 일본이나 소속사들의 갑질은 비판과 논란이 되고 있지만 일본은 상당히 심하다는 문제가 있다.#
왜냐면 한국에서는 별 일이 아닌 것도 일본 소속사들의 입장에서는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단적인 예로 위의 기사에서 일본 아이돌인 SMAP와 AKB48 소속 멤버인 미네기시 미나미의 예를 들었는데 이 둘을 예시로 일본 연예기획사들의 횡포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기무라 타쿠야를 제외한 SMAP의 멤버들이 '탈퇴'를 결정하자 기획사가 이들을 막아 생방송에 검은 옷차림으로 출연시켜 사죄하게 한 것에 대한 것에 BBC는 고용주의 '갑질'로 간주, 이들을 '회사의 노예'로까지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AKB48 소속 멤버 미네기시 미나미가 남자친구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이유로 '''삭발'''을 하게되는데, 삭발을 본인이 한것이라고 말하긴했지만 그 상황으로 내몬것은 그간에 연애를 막아온 소속사의 횡포에 의한것이다. 미네기시는 방송에 출연, 대중에게 역시 사과를 했다는 것 역시 '개인생활까지 간섭'하는 소속사의 횡포로 볼 여지가 있다. 특히 일본 소속사들이 소속 연예인들의 연애활동을 금지하는 규정을 강조한다는 점을 비난하고 있다.
무엇보다 일본 연예기획사의 행태는 반드시 옳다고 옹호해 줄 수도 없는 일이 많다. SMAP의 경우, 타쿠야를 제외한 4명의 멤버가 기획사 대표와의 불화로 탈퇴를 결심했다고 기사화 했는데 이는 한국의 경우에도 쉽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힘들어서 그렇거나 더 나은 해결책으로 보는 입장이 일반적이다. 때로는 후에 연예인들이 전 소속사에서 '부정직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져 그 연예인이 비난받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의 경우 전 소속사의 '갑질횡포'가 원인인 경우가 많다. SMAP의 경우도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나(작성 위키러의 입장에서) 개인적인 결정권까지 박탈하는 기획사의 행태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게다가 일본은 아이돌의 연애생활을 철저하게 엄금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연예인들의 경우 직업의 특성상 같은 직종계열의 사람들과 만날 수 밖에 없고 그렇다보니 여성 아이돌들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대개 프로듀서들, 소속사 직원들이나 매니저, 혹은 해당 기획사 소속 이성 아이돌 또는 타 기획사 소속 아이돌, 또는 다른 연예인들인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연예인도 사람이기에 연애라는 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고 이를 막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라고 할 만하다. 일단 개인의 선택이나 판단이라고 존중하는 편이고 결과적으로 책임은 개인이 져야 하는 것이니까 기획사가 규정까지 지어가면서 컨트롤하는 것은 부당하고 봐야한다.
결국 궁극적으로 기획사들이 해당 연예인들을 '동등한 위치에서의 동업자'라는 인식보다는 '갑과 을의 관계'로 여기고 이를 바탕으로 대하려는 태도로 인해 벌어지는 문제다. 일본 아이돌계가 사실상 오타쿠화한 인지도 때문에 이들을 무시할 것은 아니지만 권력화 되어가는 소속사들의 횡포는 문제가 아닐 수 없으며 이는 일본 아이돌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문제이다. 항목에도 서술되었으나 일본 아이돌이 사실상 캐릭터화, 비디오 게임에서 볼 수 있는 '육성화 캐릭터'성의 아이돌 컨셉으로 인해 일본 아이돌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는 것에 부작용으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문제를 제기한 측이 영국의 BBC라는 점을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일본에서는 소속사들의 횡포를 문제시 여기고 있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개인적인 선택권과 행복권을 중요시 여기는 서구권에서 단체의 이익을 더욱 중요시하는 아시아권 문화를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건 사실이나 소속사가 개인의 연애활동까지 강압적으로 컨트롤하는 것은 명백한 인권침해이기에 일본 내에서도 비판적인 여론이 있는 것도 맞다.#
심지어 범죄에 연루된 아이돌이 피해자 위치에 있어도 피해자마저 퇴출시키고 입을 막는 관행을 악용하는 악랄한 아이돌마저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야마구치 마호 자택 습격 사건으로 야마구치 마호를 타 아이돌 파벌이 교사사주하였다는 증거가 명백함에도 운영진 측에서 묻어버린 사건이다. 상대방을 교사사주한 가해 아이돌들은 입만 싹 닫으면 피해 아이돌이 사망하는 완전범죄를 저지를 수 있고, 피해 아이돌은 억울하게 살아남지 못한 채 숨을 거두는 것이다.
사실 BBC에서 지적한 점은 한국 아이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부분이 있다. 한국 아이돌 역시 소속사 아래에서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쳐 상품으로서 만들어지는 구조로, 일부 성공한 그룹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아이돌들이 회사의 방침에 눌려서 개인의 주체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구조이기 때문. 다만, 한국 아이돌들의 연애생활도 일부 비판여론이 있는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일본처럼 강압적인 터치까지는 하지 않고 팬들도 그럭저럭 용인하는 편이다.[20] 적어도 한국 아이돌은 일본처럼 열애설만으로 연예계에서 은퇴하거나, 그룹에서 탈퇴당하거나, 지방으로 쫓겨가거나, 삭발하거나, 손해배상 청구당하지는 않는다.[21] 원래 한국도 2002년까지만 해도 박준형이 한고은과 열애설 발각으로 탈퇴까지 거론되었으나 이 때 무렵을 기점으로 대중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2.6. 월급제
일본 아이돌의 특징은 월급제다. 정확히 말하면 월급+수당. 사실 아이돌 뿐만 아니라 일본 연예계 전체의 특징이다. 물론 한국처럼 수익분배제를 시행하는 회사도 있고, 초기엔 월급제지만 연차가 쌓이면 수익분배제로 재계약하는 경우도 있다. 탑스타나 인디 출신 밴드[22] 처럼 활동영역에서 소속사보다는 연예인 본인의 영향이 크다면 한국처럼 수익분배제지만[23] , 회사의 투자비용이 크고 수명까지 짧은 아이돌 그룹은 특성상 대부분 월급제다. 특히 일본은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소속사가 절대적인 갑의 위치라 한국 같은 정산시스템이 거의 없다.[24] 방송에서 모닝구 무스메 전성기 시절 멤버인 야스다 케이가 CD판매량 인세같은건 한 번도 받아본적이 없고, PASSPO☆의 멤버였던 마스이 미오는 CD 판매 1장당 0.91엔(9원)을 받았다고 밝힌바 있다.[25]
그래도 인기 아이돌이 되면 활동에 따라 수당을 꽤 쳐주기 때문에[26] 몇 천만엔 이상 받는 아이돌도 드물지는 않다. 일본 아이돌의 연간 수입은 발표되지 않으나 납세액은 어느정도 파악가능한데[27] 일본 연예 기자들이나 스포츠 기자들은 이를 추정해서 연간 수입이 얼마인지 기사를 작성한다. 일본에서 당대 최고 인기 아이돌은 여성은 4천에서 8천만엔 정도이며 쟈니스 소속 아이돌이 간혹 1억엔 이상 받는 경우가 있다. 또한 음반의 작사나 작곡에 참여했다면 판매량에 따라 인세를 받지만, 아이돌에게 작사, 작곡 시켜주는 사무소는 매우 드물다. 정확하게는 음반작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면 '''아이돌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가수'가 된 것으로 대우한다.
한국은 기본 월급이 없어서 데뷔 초기엔 사실상 무급 노동자 취급을 받지만, 어느정도 위치에 오르면 정산을 하기 시작하며 이는 수익의 n%를 받는 것이다. 따라서 탑 아이돌이라면 건물 하나씩은 갖고 있을 정도로 큰 부를 쌓지만, 그렇지 못한 무명 아이돌들은 수입이 한 푼도 없어서 부업을 할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해야 한다. 또한 기획사에 따라 인지도를 얻자마자 바로 정산을 해 주는 곳도 있지만, 투자비용을 회수할 때까지 한 푼도 정산해주지 않는 곳도 있다. 흔히 말하는 3대 기획사(SM, YG, JYP) 포함 일부 돈이 많은 대형기획사는 연습생들에게 투자한 금액을 데뷔 후에도 청구하지 않기 때문에, 데뷔하자마자 바로 정산을 받는다. 그래서 3대 기획사로 많은 아이돌 지망생들이 몰리지만 당연히 경쟁률이 엄청나게 높다.
반면, 일본 아이돌은 탑급이 되어도 월급제라 인기 아이돌은 한국과 비교하면 수익이 적다. 그러나 안 팔리는 비인기 아이돌도 월급제로 생활할 정도는 된다. 하지만 비인기 아이돌에게 많은 월급을 줄리는 없고 대부분은 일반 회사에 취업해 받는 급료보다 훨씬 낮다. 그나마 이정도라도 받는 것은 대형 기획사 이야기로, 일본 중소 기획사 아이돌은 월급이 거의 없거나 매우 적어서 먹고 살기 힘든건 마찬가지다. 탑급은 아니더라도 바다건너 나무위키에도 항목이 있을 정도인 걸그룹 멤버가 받는 연봉이 한화로 2천만원대다. 일본 유명 기획사 중 호리프로나 업프론트 프로모션의 급료가 비교적 높다고 알려져 있으며, 반대로 요시모토 흥업의 급료가 짜기로 유명하다.
한국과 일본 기업의 차이 중 하나가 숙소와 교통 시스템인데, 이는 연예기획사도 동일하다. 한국은 숙소 비용을 지출로 처리해서 매출에서 제하고 정산하지만, 일본 기획사는 회사에서 복지비용처럼 숙소 임대료와 교통비를 처리해준다. 그러다 보니 인기있는 아이돌은 월급만큼 비싼 월세집을 회사에서 해 주는 케이스도 있고[28] 회사까지 오가는 대중교통 정기권이나 신칸센 티켓 등을 지급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인기에 따라 대우가 달라서, AKB48 전성기 시절인 마에다 아츠코가 졸업한 2012년에는 월세만 30만엔~100만엔에 달하는 고급 맨션을 제공했지만 하락세로 접어든 2018년에는 집세는 일절 제공하지 않는다고(전액→반액→10%에서 현재는 없음) 한다. 이외에 귀가시 버스나 식대 등 대우도 전성기와는 크게 다르다고 한다. 출처는 주간문춘 디지털
3. 여자 아이돌 특징
3.1. 유사연애와 종속성
80년대부터 현재까지 일본 여성 아이돌은 철저한 '유사 연애대상'이라는 컨셉에 묶여있다. 이는 연애 경험이 부족한 소년이나 청소년들에게 마치 실제로 아이돌과 연애를 하고 있는 듯한 감정을 들게 함으로써 장사를 하는 수법이었다. 그런데 여성 아이돌들이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이런 수법은 써먹을 수가 없으므로, 아이돌 기획사들은 아이돌 스타들이 연애를 전혀 모르는 순수한 소녀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켜야 했다.
80년대에는 청순함, 순정과 같은 깨끗한 이미지와, 첫사랑이나 짝사랑 등을 다룬 풋풋한 소재의 노래를 들고 활동하였다. 또한 방송 인터뷰에서도 '애인 같은 거 없어요'라고 대답하며 연애와는 거리가 먼 순수한 이미지를 쌓았다. 아예 '연애 금지'를 내건 소속사도 많았다. 물론,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처자들이 연애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요', '관심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7~80년대 일본인들은 순진했던 건지 이런 상술이 통했다.
그러나 80년대에 지속적으로 아이돌 스캔들이 터져버렸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츠다 세이코의 경우이지만, 마츠다는 이것을 역이용해서 '자유롭고 당찬 여성 스타'의 이미지를 구축, 당대의 여성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또한 90년대 들어 사회적으로 '여성의 성욕'이 인지되면서 '순결하고 청순한 소녀'라는 것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반인들도 잘 알게 되었다.[29] 지금까지의 여성 아이돌이 추구하던 '유사 연애대상' 상법은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는 90년대 초반 불어닥친 여성 아이돌 빙하기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한가지 특이사항은 이러한 사건과 로망 포르노 등 성적 콘텐츠가 증가하면서 기존의 여성 아이돌 팬덤을 구축하고 있던 소위 친위대 남성들이 대거 다른 콘텐츠의 소비층으로 이동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소위 말하는 초식남 계열 오타쿠들이 채우게 되었다. 일본의 락커이자 음악평론가 오키테 포르쉐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언제까지 그런 젖비린내 나는 걸 좋아할거냐'는 분위기가 생긴것이라 표현했다.
기존의 아이돌 팬덤은 아이돌을 자신의 우상이자 지켜줘야할 상징적 여성으로 여기는 외향적인 남성들이 많았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노는' 부류에 들어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아이돌에 대한 환상이 깨진 이들이 '현실의 여성'을 소비하러 이탈한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이상적인 순결한 소녀'에 대한 갈망을 가진 오타쿠층이 현실도피의 일환으로 아이돌이라는 허상에 목메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이는 후술되는 '왜곡된 유사연애 모델'의 범람으로 이어지게 된다.
마침 1990년대가 오면서 아무로 나미에 같은 카리스마적인 여성 아티스트들이 더욱 돋보이게되면서 아이돌이 활약할 장소는 더욱 없어진다.
그렇게 아이돌 빙하기가 끝난 90년대 후반 등장한 모닝구 무스메는 이전의 여성 아이돌과는 달리 친근하고 부담 없는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어필했다. 모닝구 무스메는 우타방 등의 예능 방송에서 거침없이 망가지면서 친한 친구같은 이미지로 다가갔다. 한정된 계층에게만 어필할 수 있는 '상상 속의 연애대상'이라는 컨셉 대신 '재미있고 웃긴 여자애들'이라는 컨셉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덕분에 모닝구 무스메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등장한 여성 아이돌들 역시 성애 감정보다는 친근감으로 승부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는 Perfume이 있다. 퍼퓸은 퍼포먼스의 화려함이나 높은 퀄리티의 곡으로도 인기를 얻었지만, 멤버들이 예능 방송에서 보여준 어딘가 부족해보이는 모습(특히 아~쨩) 역시 퍼퓸이 인기를 얻은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렇게 여성 아이돌의 컨셉이 변함에 따라 오늘날에는 일본 여성 아이돌을 단순히 '유사 연애대상'으로만 분석하기는 힘들어졌다. 아이돌이라고 해도 포지셔닝이 전부 다 다르기 때문이다. 48그룹 재적시절 스캔들을 네타거리로 썼던 사시하라 리노는 유사연애가 아닌 주체적인 예능인이자 거의 준 프로듀서의 포지션에 있고, Perfume 멤버들은 되려 스캔들이 없는 멤버에게 팬들이 되려 '가장 예쁠 나이인데 연애도 좀 하고 그래라'고 응원을 하고 있다. 걸즈 퍼포먼스 유닛을 표방하는 이걸즈는 여초팬덤과 K-POP 아티스트에 가까운 컨셉으로 아예 소속사 사장이 나서서 연애를 장려하고 있을 정도다. 물론 이런 사례들은 일본내에서도 아이돌보다는 아티스트로 간주되며 유사연애 노선을 포기해도 지지해주는 대다수의 팬들을 확보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으면 얄짤없는게 일본의 현 상황이다. 일본에는 여성 아이돌의 환상에 그대로 넘어가버리는 극성 오타쿠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안타깝게도 일본에서는 아직도 이런 유형의 소비자들이 '아이돌 시장'의 주요 소비자층으로 자리하고 있어서 소속사도 무시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상술된 아이돌 팬덤의 성향 변화와 맞물려서, '유사 연애대상'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일본 여성 아이돌 업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유사 연애대상 모델이 일본 여성 아이돌 업계에 남긴 가장 큰 악습으로는 '연애 금지'를 들 수 있다. 과거의 여성 아이돌은 연애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이었는데, 그런 관습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1970~1980년대의 아이돌 팬들은 '나의 아이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해서는 안 된다'라고 인식했다는 것이지만, 2010년대의 아이돌 팬들은 '여자 아이돌은 연애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연예계의 오랜 규칙이니까 그냥 지켜야 한다'라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인기 아이돌 성우였던 히라노 아야의 스캔들때나 토요사키 아키의 스캔들이 대표적인 사레다. 굳이 한국에서 비슷한 예를 찾자면 아이유와 은혁의 스캔들 당시 과도할 정도로 아이유를 비난했던 일부 남성 팬들이 있다.[30] 재미있게도 오히려 한국에서는 남성 아이돌에 대한 유사연애 풍조가 심한 편으로, 대표적으로 "변백현 돈 내놔" 사건이라든지, 최근에는 연애했다는 이유로[31] 소속사에서 잘린 이던-현아 사건이 있다.
AKB48의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는 2013년 들어 'AKB48에 연애 금지 룰이란 건 애초에 없었다.'고 밝혔다. 물론, 이것은 미네기시 미나미 삭발 사건에서 온 연애금지 규칙에 대한 비판 때문에 나온 변명에 가깝지만 실제로 그런 말을 하기는 했었다. 실제로 사시하라 리노가 연애 금지 룰이 없어지고 자기 책임제로 바뀌었다고 증언하는 등, 연애에 대해서 어느 정도 관대해진 것은 사실이다. 팬들도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넘기는 분위기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가지 큰 논리적 모순이 존재하는데..."아이돌의 연애가 왜 금지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변도 없이 '아이돌이니까'라는 두루뭉술한 얼버무리기로 그냥 넘어간다는 것이다. 이는 아이돌이라는 직업이 '여성'이 아닌 '순결한 아이돌'이라는 허상 그 자체를 소비하는 형태로 변화하였음을 의미한다.
일본 아이돌들은 어린 나이에 데뷔하고, 대부분의 노래는 짝사랑이나 상대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 혹은 이렇게 부족한 나지만 사랑해달라는 피동적이고 종속적인 형태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이는 서툰 노래와 안무와 어우러지면서 철저하게 아이돌을 존경할만한 '우상'의 위치에서 완벽하게 끌어내려버렸다. 과거 한국의 여자 아이돌도 큰 차이가 없었으나,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널 좋아하니 내가 반드시 쟁취한다', '헤어질거면 찌질대지 말고 떠나라', '너 없이도 난 당당하다'와 같은 내용의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가사 내용의 노래가 나오며 대조를 이룬다. 실제로 해외시장에서 호평을 받는 K-POP 여자아이돌은 2NE1이나 블랙핑크 같은 '''걸크러쉬'''형 그룹들이라 해외진출을 노리는 한국 기획사들이 갈수록 이런 컨셉에 주목하는 반면, 일본에서는 아직까지도 어중간한 국내 초식남 시장을 노리면서 교복을 입고 학창시절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어린애 흉내나 내는 여린 소녀 컨셉이 각광받으면서 활발히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애초부터 남자들에게 어린 소녀와 손잡고 이야기할 기회(악수회)나, 껴안을 기회(허그회)를 돈받고 파는 시점에서 '아이돌은 유사연애가 아니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을리도 없다.[32]
AKB48을 비롯한 48사단과 자매그룹처럼 인식되는 노기자카46 등의 경우, 악수회나 투샷회처럼 팬들이 아이돌을 직접 만나 접촉할 수 있는 이벤트를 주력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유사연애 마케팅이다[33] . AKB48의 멤버들은 악수회에서 팬들에게 대하는 태도에 따라 팬들로부터 평가를 받고, 그 평가에 따라서 인기에 영향이 크게 미친다. 와타나베 미유키나 하타 사와코처럼 악수회에서 오타쿠들에게 웃음을 잘 지어주고 말을 잘 해주는 멤버들은 소위 '神'이라고 불리며 큰 인기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제 아무리 춤이나 노래가 뛰어나고 미모가 빼어나도 악수회에서 오타쿠들에게 아양을 떨고 비위를 맞춰주는, 소위 '설탕/카미 대응'을 제대로 못하면 인기를 얻는게 거의 불가능하다. 실제로 48사단에서도 악수회에서 팬들따위는 신경도 안쓰는 소금대응으로 유명한 시마자키 하루카만 예외였는데 전성기 비주얼이 아이돌 탑급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비주얼이 압도적이지도 않는데 악수회 반응이 더럽다고 소문나면 아이돌 생활은 무명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수백명에서 수천명까지 상대하는 악수회에서 지치지 않고 연기를 하는 것도 실력이라면 실력이지만 정작 본업인 가창력과 댄스 실력보다는 이런 부수적인 곳에서 인기가 좌우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고 말할 수 있다.
2010년대 들어서는 Perfume의 브레이크와 곧 이어진 한국의 걸그룹의 일본 진출과 러쉬로 인해 유사연애보다는 가수로서의 능력을 전면에 내세운 아이돌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큐트, 9nine, DiVA, 페어리즈, 도쿄죠시류, E-girls 등이 대표적 케이스다. 아울러 모모이로클로버Z도 있긴 하지만, 완벽하게 앞의 케이스에 부합하진 않는다. 이들이 공연 위주로 활동하고 있긴 하지만, 유사연애 노선을 약간 변형한 쪽이거나 성공해서 이제는 유사연애 노선을 버리는게 가능한 것에 가깝다.
유사 연애보다는 가수로서의 능력을 앞세운 이런 그룹들은 자신들이 '''아이돌임을 자칭'''하고 아이돌이라 볼 수 있는 속성들을 분명히 가지고 있긴 하다. 10대 초중반 어린 나이에 활동을 시작했고, 어느 정도 예능 활동을 겸업하며, 자신들의 비주얼도 또한 적절히 활용한다. 이들은 기존의 AKB사단을 비롯한 유사연애를 바탕으로 오타쿠들을 집중적으로 상대하는 아이돌 산업에 염증을 느낀 대중들이나 혹은 비주얼과 가무를 겸비한 여성 가수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면서 비록 폭발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차츰차츰 팬층을 확보해 가고 있다. 한일관계의 냉각으로 인해 한국 아이돌의 인기가 식어가는 중이라 비슷한 니즈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이들의 성장이 기대되는 중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비주얼과 남성팬' vs '가창력과 음악성'을 무기로 한 노선의 대비가, 이미 마츠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때 이미 이뤄진 구도라는 점이다. 이런 황금기 시절 아이돌 노선을 잇는 아이돌로는 대표적으로 큐트의 스즈키 아이리가 있다. 문제는 아이돌 위주로 음반시장이 재편된 한국과 달리, 일본 음반시장은 아이돌의 비프로화가 겹치면서 아직도 비아이돌 아티스트들이 폭넓게, 활발히 활동중이라는 것. 일반 대중들 입장에서는 실력 있는 아티스트의 '좋은 노래'를 소비할 기회는 충분하다보니 이러한 퍼포먼스 노선을 타기 위해서는 아티스트에 준하는 가창력과 무대 퍼포먼스 실력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다. 자연히 이 컨셉을 쉽사리 선택할 수 있는 그룹도 드물고, 설령 실력이 있다고 해도 콘텐츠가 대중들의 눈높이에 들 정도로 훌륭하지 않다면 애매한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34] 무엇보다 이런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수년간 피나는 트레이닝이 필수적인데[35] 소속사 입장에서도 당장 현금을 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 AKB식 운영을 포기하고 실력있는 멤버를 수년간 숙성시켜야 한다는 선택지를 쉽게 택할 수 있을리가 없다. 이때문에 메이저 기획사들 중 한국같은 연습생 시스템을 갖추고 데뷔 전후 트레이닝에 투자하는 회사는 뛰어난 자본력을 지닌 아뮤즈와 하로프로 딱 두곳 뿐이다.[36] LDH의 경우 연습생으로 소속시켜 육성하기 보다는 산하 뮤직스쿨 등에서 훈련된 인재를 오디션으로 발탁해오는 미국식 시스템을 사용해서 성과를 냈다.
3.2. 아키모토 야스시 계열 위주의 시장 구도
모닝구 무스메 → Perfume까지의 구도는 확실하게 곡의 성공에 초점이 맞춰졌으나, 이 후에 비롯한 인기 아이돌의 계보는 상당히 독특하게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아키모토 야스시가 프로듀스한 2010년대에 가장 성공한 걸그룹인 AKB48 스타일의 시스템에서 대다수의 아이돌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AKB48는 지하아이돌의 활동수단인 상시극장공연을 기반으로 기존 아이돌과 달리 '만나러 가는 아이돌'로 팬들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방법을 도입해 대성공을 했고 총선거, 악수회 시스템을 최초로 만들어서 높은 매상을 기록하는 멤버를 메인으로 올려주는 지표로 활용했다.
거기에 파생적으로 자매그룹인 48그룹을 만들었는데 이 흐름은 프로듀서인 아키모토 야스시가 제창한 거점 아이돌 + 대단위 아이돌 그룹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도쿄이외에 나고야, 오사카, 후쿠오카 등의 다른 대도시까지 확장을 해서 일본 전국의 아이돌 팬덤을 48그룹의 브랜드로 흡수하겠다는 것. 또한 체급을 불려서 인원이 많아지면 아이돌 오타쿠들의 취향에 맞는 멤버가 그룹중에 생길테니 이득이 될거라는 계산이 들어있다. 그리고 이 계획은 나름 선방해서 아이돌에 관심은 있지만 도쿄에 상경할 엄두를 못내던 재능있던 인적자원들이 자매그룹에 가입하는 것으로 기존에 활동하던 로컬 아이돌의 수요를 상당수 빼앗아버렸다.
이후 전성기가 끝난 48그룹의 다음에 나타난 노기자카46의 히트는 AKB48가 기틀을 다진 악수회 시스템 + '오죠사마(아가씨)' 컨셉의 아키모토의 작품이다. 48그룹과는 분명 다르지만 크게 시스템이 다르지 않으며 자매그룹으로 침묵하는 아이돌, 웃지 않는 아이돌 기반인 케야키자카46을 만드는것을 보면 48사단 시스템의 변형에 불과하다는것을 알 수 있다. 결국 2010년대 내내 48/46 그룹, 즉 아키모토 야스시가 프로듀스한 그룹이 여성 아이돌계를 독과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련의 아키모토 야스시가 인기 그룹을 만들 때는 '기존에 없는 아이돌'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점. 하로프로나 아이돌링 같은 기존 아이돌 시스템을 벗어난 독특함이 그들의 성공의 비결이었다. 무엇보다 아키모토는 자신의 인맥과 스폰서를 이용해 TV를 적극 활용했다. 종래의 아이돌의 성공에는 그가 만든 시스템이 기본 베이스일 정도로 시장의 선두격인 인물. 다만 그룹을 띄울 때 가창력을 배제하고 그라비아, 악수회 등 여성의 성상품화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비판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AKB48만 해도 '얘들이 술 안 파는 캬바쿠라 직원이지 아이돌이냐'는 극단적인 비판에도 반박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러 있다.[37]
물론 아키모토 야스시와 무관한 48그룹 시스템을 벗어나 인기를 만든 그룹으로는 Perfume, 모모이로클로버Z, E-girls, BABYMETAL 등이 있다. 다만 이 그룹들이 일본내에서는 일반적인 아이돌로 분류하기는 애매하거나 스스로 아티스트를 자처하는 그룹들이라 일반적인 아이돌 오타쿠들에게 의존하는 그룹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 2013년 이후에 데뷔한 그룹 중에서는 좀처럼 빅히트하는 아이돌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나마 덴파구미.inc나 BiSH가 그나마 메이저 음방 출연이나 아레나급 콘서트 정도의 성과를 보인 것이 전부. 종래의 컨셉을 벗어나지 못하는 양산형 아이돌이 늘어나고 있고 대부분이 소규모 라이브 등의 로컬이나 지하 아이돌의 활동 방식을 따르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어필하기가 힘들다. 오히려 러브라이브 같은 아이돌 성우가 노래하는 가상 아이돌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 홍백가합전같은 메이저 방송에 진출하거나 대규모 라이브를 성공하는 중이다. 그리고 이런 아이돌 성우의 파이가 커지자 아키모토 야스시는 성우가 연기하는 가상 아이돌 22/7을 밀어주는 시도를 하고있다.
4. 남자 아이돌 특징
4.1. 쟈니스 사무소의 독점
일본 내 남성 아이돌은 90년대 이래로 쟈니스 사무소가 독점하고 있다. 쟈니스가 지금처럼 탑급 기획사가 아니었던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쟈니스에 경쟁할 만한 남성 아이돌 기획사가 있었다. 70년대의 신 고산케, 80년대를 풍미한 그룹 체커스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콘도 마사히코, 소년대로 이어지는 부활기를 거쳐 히카루GENJI와 SMAP의 히트로 인해 쟈니스는 남성 아이돌계의 1인자로 성장하였다.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에 걸쳐 라이징 프로덕션에서는 w-inds., Lead 등의 남성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켰고 w-inds.는 실제로 큰 인기를 얻었으나, 언제부터인가 방송 출연이 뜸해지면서 인기가 떨어졌다. 이를 두고 쟈니스의 외압이 들어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설사 그런 현상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쟈니스의 적극적인 외압을 통한 결과인지는 입증할 수 없다.
2000년대 들어서 동방신기가 일본에서 크게 성공하고 이에 힘입어 슈퍼주니어, 빅뱅, 샤이니, 2PM 등의 한류 아이돌이 일본에서 어느 정도의 팬덤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면서 이런 쟈니스 중심의 시장에 변화가 오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한류 아이돌의 인기는 어디까지나 ‘한류 팬’이라는 특정 계층에 한정된 것이라는 한계점도 있었다. 게다가 2012년 들어서 한일간의 정치적 관계가 냉각되었고, 이에 따라 한류 아이돌에 대한 일본인들의 호응도 사그라들었다. 일본의 음악이나 오락 방송에서 한류 아이돌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음반 판매량도 폭삭 주저 앉았다.
그 대신 2012년 무렵부터는 EXILE, J Soul Brothers를 필두로 한 LDH 계열 그룹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이들 그룹은 쟈니스에 비해 남성적인 이미지와 대중의 취향에 부합하는 곡을 들고 나오면서 기존 쟈니스와는 달리 남성층에서도 호응을 얻었다. 이를 두고 기존 한류 아이돌의 수요를 어느 정도 흡수했다는 분석도 있다. 정확하게는 일본 대중이 가지고 있던 ‘남성미’, ‘강인함’에 대한 수요를 한류 아이돌들이 채워 주다가 자국 그룹인 EXILE, J Soul Brothers 등이 등장하면서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고 추측한다. 이는 여자 아이돌판에서 역시 LDH 소속인 E-girls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해석. 실제로 한류 아이돌들이 하던 광고를 LDH 계열 그룹들이 이어받은 경우가 종종 보인다.
반면 쟈니스는 TOKIO, KinKi Kids, V6는 안정적인 활동을 보여 주고 있음에도 쟈니스가 데뷔시킨 아이돌 중 '''국민 아이돌'''이라고 부를 만큼의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1999년 데뷔한 아라시가 사실상 마지막이다. 그 이후 데뷔한 NEWS, Kis-My-Ft2, KAT-TUN, Hey! Say! JUMP 등은 그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실제로 쟈니스 신규 그룹의 팬덤은 대부분 다른 그룹 팬질을 하다가 치비 주니어 시절부터 곁다리로 봐 온 멤버들이 데뷔했을 때 팬심이 이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그룹들이 활동하면서 판매량이 느는 게 아니라 정체되거나 줄어들고, 아예 KAT-TUN이나 Hey! Say! JUMP처럼 데뷔 싱글이 디스코그래피 최고 판매량인 경우도 왕왕 있다.
그러나 '''국민 아이돌'''이라는 칭호를 얻는 그룹이 매번 나올 리가 없기도 하다. 위에 언급된 쟈니스 그룹들도 국민 아이돌급이 아닐 뿐이지 모두 오리콘 차트 주간 1위곡이 20개 이상 있는 크게 성공한 아이돌들이다. 비판과 염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 남자 아이돌 시장은 '''“방송국에서 쟈니스 소속 연예인을 빼면 방송이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 돌아다닐 정도로 쟈니스 사무소가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기우 역시 쟈니스와 쟈니스의 대결에 불과하다. 사실 LDH 계열을 제외하면 쟈니스 치고는 인기가 많지 않은 편인 A.B.C-Z와 비교할 만한 타 사무소 출신 남자 아이돌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2010년대 초반 이후 사그라들었던 K-POP의 일본 내 인기가 2017년 즈음 이후 다시 살아났다. 특히 방탄소년단을 필두로 2차 한류 때보다 한 차원 더 업그레이드 된 실력과 해외에서의 인기 등 쟈니스 그룹들과 비교되는 모습이 계속 연출되고 이로 인한 기존 팬덤의 이탈까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에 쟈니스 측은 크게 위기감을 느꼈는지 유튜브 채널 개설, 안무 영상 업로드, 아라시의 영어곡 발표, 신인 그룹들의 해외 진출 선언과 같이 K-POP 아이돌들을 의식한 듯한 행보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5. 역사
5.1. 1970년대 이전
일본에서는 1960년대 이전까지는 가수나 배우를 대상으로 아이돌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다. 미소라 히바리나 요시나가 사유리처럼 인기가 있는 여성 스타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그냥 '청춘 스타'라는 이름으로 불리곤 했으나, 1970년대에 젊은 층을 대상으로 대중가요를 부르는 청순파 가수를 가리키는 의미로 '아이돌 가수'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다.
일본의 아이돌의 경우 단어 등장 초기에는 남성을 지칭하는 것보다는 주로 여성을 지칭하는 데 쓰였다. 50~60년에 당시 프랑스 영화와 스타들이 일본인들에게 굉장한 붐을 끌었다. 그들은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아이돌을 찾아라'(Cherchez Idole!)와 같은 영화들과 영화스타들, 그리고 당시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여가수들인 ye-ye GIRL들의 붐이 일었다. 그들은 일본에서 앨범도 내고 잠깐 동안 활동하기도 하였다. 실제 당시 일본 여가수들, 엔카가수들을 제외한 LP판들의 폰트, 디자인, 패션등 많은 면에서 ye-ye GIRL의 LP판 디자인 컨셉과 유사했다.
이들은 프랑스에서 "ye-ye GIRL"이라고 불리며 패셔니스타로 지칭되는 등 수영복 화보를 찍기도 하였다. 그리고 1963년에 데뷔한 "65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수상자인 프랑스갈 등이 인기가 많았다.
당시 유럽가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세트구성과 룰이 비슷한 일본의 <스타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이 생겨나게 되는데. 실질적인 여자 아이돌 스타들이 이곳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아마추어 가수든, 데뷔하지 않았든, 프로가수든, 신곡을 가지고 노래를 불러서 경쟁하는 룰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프랑스 출시 아이돌의 득세로 일본에서는 아예 '프랑스갈(걸)' 이라는 용어로 통칭에 여자 아이돌을 부르기도 하였다. 이후 등장했던 마츠다 세이코 류의 아이돌들이 프랑스갈 스타일의 전형.
5.2. 1970년대
고 히로미, 사이조 히데키, 노구치 고로, 야마구치 모모에, 사쿠라다 준코, 모리 마사코, 아사오카 메구미, 핑크 레이디, 캔디즈 등이 대표적인 70년대의 아이돌로 아이돌 붐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시기였다.
핑크 레이디가 일본 여성 아이돌 붐의 시초를 열었다고 기록되고 있으며, 이 시절은 야마구치 모모에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는데 야마구치 모모에는 아이돌의 필수 덕목(청순함, 가련함, 적당한 가창력, 외모)을 확립하며 여성 솔로 아이돌의 시작점을 열었다.
5.3. 1980년대
쇼와 시대에는 아이돌 산업이 엄창나게 번창하여 수많은 아이돌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아이돌 붐 현상이 일어났다. 특히 80년대는 70년대부터 시작된 아이돌 붐이 절정에 달한 시기로 아이돌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대표 격으로 마츠다 세이코, 나카모리 아키나, 콘도 마사히코, 타하라 토시히코, 오카다 유키코, wink, 히카루GENJI 등을 꼽는다. 1980년에 마츠다 세이코, 카와이 나오코, 카시와바라 요시에, 타하라 토시히코, 콘도 마사히코 등이 데뷔한 아이돌 풍작을 기반으로 82년에는 엄청난 수의 아이돌이 데뷔해, 당시 데뷔한 아이돌들을 '꽃의 82년조'라고 불렀다. 나카모리 아키나, 코이즈미 쿄코, 하야미 유, 호리 치에미, 이시카와 히데미, 마츠모토 이요가 그 중에서도 유명하다. 하지만, 버블 경제 시절처럼 엄청나게 수많은 아이돌이 쏟아져 나왔고 그들 대부분 거품같이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돌인 마츠다 세이코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은퇴하고 바통 터치를 하듯 데뷔해 아이돌이 어떻게 롱런 아티스트로 변해갈 수 있는지 그리고 당시 아이돌로서 치명적인 스캔들이 터져도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보여주면서 후대의 일본 여성 아티스트의 길을 제시했다.
한편, 이 마츠다 세이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라이벌로 나카모리 아키나가 있다. 한편 나카모리 아키나가 정점에 오른 것은 마츠다 세이코가 결혼과 출산으로 활동을 무기한 정지한 와중이었기 때문에, 나카모리 아키나를 모모에-세이코를 잇는 후계자 격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나카모리는 82년에 데뷔한 이래 꾸준히 커리어를 쌓아, 마츠다 세이코가 결혼과 출산 등으로 주춤하던 시기에 여성가수 최초로 일본 레코드 대상 2연패를 달성하고, 가수별 연간 매상 순위에서 총 4회의 1위를 차지해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나카모리는 대세였던 기존 아이돌의 밝고 귀여운 음악에서 탈피, 특유의 프로듀싱 능력과 아티스트로서의 실력을 길러 마츠다와 대적하는 것이 가능했다. 마츠다와 나카모리는 각각 2900여만, 2500여만의 총 판매량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80년대 아이돌 중 최고에 달하는 수치이다. 최근의 아이돌들까지 합해도 SMAP나 AKB48, 아라시 정도가 이 위에 있다. 애초에 2000만장 이상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7~80년대 아이돌은 이 두 사람이 유일하다.
80년대 중반에는 키쿠치 모모코, 오카다 유키코, 혼다 미나코, 사이토 유키 등이 전성기를 맞이했다. 후술할 '아이돌 4대 천왕'은 전원 85년도에 데뷔했다. 또한 80년대 후반에는 4대천왕 외에도 사카이 노리코, wink, 모리타카 치사토, 와타나베 마리나, 와타나베 미나요, 오기노메 요코 등 무수히 많은 거물 급의 아이돌이 춘추전국시대를 이끈다.
한편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와 후지 테레비의 기획 프로그램을 통해 만들어진 오냥코클럽이 국민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평범한 여고생들이 아이돌로 데뷔한다는 컨셉을 통해 남자 중고생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쿠도 시즈카도 이 그룹 소속이었다. 비록, 오냥코클럽 자체는 3년밖에 가지 못했지만 오냥코클럽의 성공은 현재의 모닝구무스메와 AKB48 같은 아이돌 그룹의 초석을 완벽하게 다져 놓았다. 그러나, 실력이 없어도 전략과 상술만 좋으면 성공한다는 전례를 남김으로써 아이돌 전체의 품질 저하를 야기했다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또한, 이런 식으로 양성된 아이돌은 '성공의 과실'이 본인들이 아니라 '전략가'들이 가져가게 된다는 선례도 남겼다.
80년대 후반에는 포스트 마츠다 세이코 세대로서, 같은 해에 데뷔했던 쿠도 시즈카, 아사카 유이, 나카야마 미호, 미나미노 요코가 '''아이돌 4대천왕'''이라 불렸다. 음반 총 판매량은 나카야마 미호(1497만)>쿠도 시즈카(1487만)>미나미노 요코(563만)>아사카 유이(297만) 순이었다. 그리고 드라마나 영화 등으로의 진출까지 하면서 확고한 산업체계가 구축된다. 이 아이돌 4천왕이라는 칭호는 90년대 초반까지 사용되었다.
80년대말 아이돌 4대천왕 메들리
이 즈음에 인기가 높았던 또 다른 아이돌이 코이즈미 쿄코. 쿄코는 사실 '꽃의 82년조'의 일원으로 나카모리 아키나와 데뷔 동기인데, 데뷔 후 점점 인기가 높아져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최전성기를 맞았다. 이 때 그녀는 "CM의 여왕"이라 불리며 '코이즈미 쿄코를 광고에 기용한 상품은 무조건 팔린다'는 이야기까지 만들어냈다. 일설에는 상품의 매상이 10%가량 올랐다고 한다. 90년대 이후로는 여배우로 사실상 전향.
그러다가 80년대 말부터 J-ROCK 밴드와 싱어송라이터들의 부상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해 기존 아이돌의 인기는 저하하고, 90년대의 반 아이돌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5.4. 1990년대
80년대 말에 이르면서 엑스 재팬이나 LUNA SEA같은 락 밴드를 필두로 '밴드 붐'이 크게 유행하며 아이돌 붐이 가라앉아 '아이돌 암흑기'라는 말이 생겨났다. 80년대까지 대형기획사에 의해 만들어진 아이돌에 대한 반감은 인디즈 시장의 확장 및 매니아 시장의 확대로 이어지고, 비쥬얼계의 끝물과 함께 GLAY, LUNA SEA 등의 밴드가 강력한 여성팬층(+록 음악의 팬인 남성팬들)을 확보하면서 사실상 아이돌의 지분을 침식한다. 사실상 CoCo와 Ribbon의 해체년도인 1994년을 마지막으로 70-80년대식 정통 아이돌의 시대는 끝났다고 봐야 한다.
대신 아이돌이라는 말 자체에 '특정한 집단을 대상으로 인기를 얻는 연예인'이라는 의미가 붙었다. 그래서 아이돌 여배우, 아이돌 성우, 그라비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그라비아 아이돌, CF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CM 아이돌 등의 단어가 생겨났다. 90년대 중반부터는 이러한 아이돌 마케팅의 히로스에 료코가 국민 여동생급의 인기를 얻으며 80년대 이후 위축되어 있었던 여자 아이돌 시장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한 주로 노래도 부르면서 댄스, 작사, 연기와 예능 등에도 강한, 엔터테이너적인 성향을 중시하는 '1인 아이돌'이 대두되었던 시기기도 하다. 이 때 인기를 얻은 아이돌은 시노하라 료코, 치넨 리나, 우치다 유키, 미즈키 아리사, 마키세 리호 등이 있다.
이렇게 배우, 모델, 그라비아 아이돌 등 여러 형태의 아이돌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여성 아이돌 가수 시장은 90년대 초반 잠시 위축기(아이돌 빙하기)를 맞았다. 90년대 초반 활약했던 아이돌 중 가수만을 전업으로 하는 것은 CoCo가 유일하다.
90년대 중반에는 코무로 테츠야가 프로듀스한 솔로 아이돌 가수인 카하라 토모미와 아무로 나미에가 등장하여 서로 경쟁하였으며,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스즈키 아미와 하마사키 아유미가 인기를 다투었다. 한편 그룹 아이돌 가수로는 SPEED가 음반 판매량 180만 장을 기록하며 거의 전설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는 일본에서 반 아이돌 기류가 가장 팽배했던 시기로, 여자 아이돌의 주고객층인 남성팬들은 애니메이션, 만화, 인디즈 시장의 고객으로 변하게 된다. 반면 남자 아이돌은 쟈니스 사무소 계열로 대표되는 특정 회사의 독식이 아주 크게 나타나며 SMAP, KinKi Kids, TOKIO, V6 등이 주류가 되었다. 그중 SMAP이 기존 아이돌의 단편적인 이미지를 깨 버리고 버라이어티에 나가며 망가지거나 진행을 하면서 '멀티 엔터테이너' 아이돌로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국민 아이돌로 성장하게 된다.
또한 KinKi Kids가 26년만에 아이돌 데뷔 싱글 판매량을 <유리의 소년>으로 179만장으로 갱신하면서 SMAP의 뒤를 이은 국민 아이돌로 평가받으며 5개의 고정방송이 시작하고 CD 데뷔 전부터 출연한 드라마가 시청률이 29%가 나올 정도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또한 두번째 싱글인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고 싶어>가 164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면서 2번 연속의 밀리언 싱글을 내는 등 음반 판매량에 있어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
특이하게 이 시기에 유행이 지난 정통파 아이돌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전성기를 구가한 여가수가 있는데, 바로 모리타카 치사토. 사실 모리타카 치사토는 80년대 후반 아이돌 4대 천왕들과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으나 오히려 전성기는 그들의 시대가 막을 내린 90년대 초반에 와서야 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모리타카 본인이 원래부터 밴드 음악을 추구하였고, 마침 그러한 경향이 90년대의 사조에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38] 그러면서도 아이돌 이미지를 유지하였으니, 어떻게 보면 이분이 진정한 최후의 정통파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겠다.
5.5. 2000년대
2000년대에 들어서 솔로 여성 아이돌이라는 개념은 거의 사라졌다. 2001년 데뷔한 마츠우라 아야는 히로스에 료코의 계보를 잇는 마지막 솔로 여성 아이돌로 평가받는다. 노래 실력도 있고 외모도 출중하며 연예 감각도 뛰어나서 각종 오락 방송과 CM을 독차지하면서 소위 '국민 여동생'의 지위에 올랐다. 음악성도 있고 스타성도 뛰어난 정통파 여성 아이돌이 차지하던 시장은 하마사키 아유미, 오오츠카 아이, 코다 쿠미 등 솔로 여성 아티스트가 차지하였다. 이로서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경계선이 더욱 명확해졌다고 볼 수도 있다.
정통파 여성 아이돌이 사라진 자리를 모닝구 무스메와 같은 헬로! 프로젝트 아이돌이 메웠다. 모닝구 무스메는 친근한 이미지와 방송에서 거침없이 망가지는 모습 등을 통해 기존의 아이돌 팬층 뿐만 아니라 같은 여성들에게도 인기를 얻으며 국민 아이돌의 자리에 우뚝 선다. 모닝구 무스메의 대성공 이후 여성 아이돌에게는 가수로서의 실력보다 방송인으로서의 센스를 더 많이 요구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한국보다 약 10년 정도 빠르게 내 생애 마지막 오디션 같은 컨셉의 '과거 아이돌 재데뷔 프로그램'이 나왔으나 역시나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이미 아이돌의 개념이 많이 바뀐 상황이기 때문에 예전 암흑기에 스러져간 유망주들을 발굴해 봤자 방송 트렌드를 따라가기 쉽지 않기 때문.
한편으로 새로운 아이돌 컨셉을 제창하며 등장한 4인조 밴드형 여성 아이돌 그룹 ZONE이 2000년에 메이저 데뷔하며, 밴드라는 여성 아이돌계에 새로운 블루오션 영역을 개척하며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홋카이도의 사무소에서 결성되어 SPEED를 롤모델로 하는 댄스 그룹을 목표로 연습하던 ZONE은, 인디즈 시절에 발표한 밴드 컨셉의 PV제작을 계기로 아예 밴드 아이돌로 노선을 튼다. 그리고 소니뮤직을 통한 메이저 데뷔 이후 이게 제대로 먹혀서 100만 장에 육박하는 판매고를 올리기도 하는 등 크게 성공했다.
활동 당시 소니뮤직은 밀레니엄에 맞춘 아이돌 그룹이라며 밴돌(밴드 + 아이돌)이라는 컨셉으로 그룹을 소개했었다. 댄스 아이돌로 연습생을 시작했던 탓에 처음에는 악기 포지션만 서로 나누어져있고, 악기를 들고 핸드싱크와 함께 춤을 추는 등, 연주력은 없다시피했으나, 본인들의 노력으로 연주력과 음악성을 점차 강화했고, 무엇보다 안정적인 댄스 퍼포먼스를 내세우는 순수 댄스곡도 이따금씩 발표하는 등 복합적인 컨셉으로 형태를 유지했다. 아이돌이지만, 아티스트적인 요소를 어느정도 갖추고 있었고, 점차 그러한 실력이 두드러졌다는 점에서는 한국의 아이유와 비슷한 포지션으로 생각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이후 에이벡스와 비전팩토리 등에서 시도했던 SweetS, dream, Folder5 등의 댄스 걸 그룹들은 인기를 얻지 못했다. 또한 모닝구 무스메도 2002년 이후 판매량이 급감하고, 모닝구 무스메 소속사의 장기의 포석이었던 헬로! 프로젝트도 방송을 통한 대중적인 접근보다는 투어, 굿즈 위주의 수익성을 추구하면서 황금기보다는 매상이 떨어지게 된다. 이후 일본 내의 여자 아이돌은 오타쿠 전용 연예인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고 대중적 관심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로 일본 내에서 여성 아이돌이 침체기를 겪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한국 여성 그룹의 침체기와 겹친다.
다만 모닝구 무스메 이후 침체기에 빠진 것인지, 아니면 90년대 이후 계속 침체기가 이어졌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다. 사실 80년대 말부터 2000년대 말까지 계속해서 여성 아이돌 시장은 암흑기였다. 2000년대 초반에 모닝구 무스메가 엄청난 인기를 끌기는 했지만 그 인기는 여성 아이돌이라는 시장 자체의 부흥이 아니라 모무스라는 '''그룹 하나의 인기'''에 지나지 않았던 데다가 그 기간도 매우 짧았기 때문.
2007년을 기점으로 Perfume이 7년 무명 끝에 큰 인기를 끌어 50여만 장에 달하는 음반 판매와 무도관 입성을 이루고, 뒤를 이어 모닝구 무스메 이상으로 까이던 AKB48이 연달은 히트, 싱글 20만 매 이상 판매라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리며 여성 아이돌계 탑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이 두 그룹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이돌 업계 전반적으로는 대중들로부터 외면을 받았으며 2020년대인 현재에도 J-POP의 주류는 아이돌 컨셉이 아니라 싱어송라이터 컨셉이나 J-ROCK이다.
이 시기 쟈니스 사무소로 대표되는 남성 아이돌은 90년대의 전성기를 이어서 안정적인 흐름을 이어갔다. 특히 데뷔 이후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던 아라시가 2000년대 중반부터 <Love so sweet> 등의 곡을 히트시키며 대중과 팬덤을 모두 잡았으며, 이후 2018년까지 10년 연속 선배들의 뒤를 이은 국민 아이돌로서 멈추지 않는 상승세를 보여주고 있다.
새롭게 데뷔한 KAT-TUN이 팬덤의 지지에 힘입어 100만 장이나 되는 판매고를 올리는 등의 성과를 올렸고, 이를 통해 쟈니스는 여성 아이돌에 비해 매우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에 맞서 라이징 프로덕션에서는 윈즈, 다 펌프, 리드 등의 남성 아이돌을 데뷔시켰지만 쟈니스의 독점 등으로 인해 활동에 제약을 받으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성우 업계에서는 이 시기에 미즈키 나나, 타무라 유카리, 호리에 유이 3명이 애니메이션 음악 쪽에서 크게 활약하면서 성우 아이돌 고산케로 불렸으며 현재도 높은 인기를 가진 채로 성우 가수로서 활동 중이다.
5.6. 2010년대
일본 여성 아이돌계는 2010년대 중반까지 '아이돌 전국시대'라는 말이 미디어에서 통용될 정도의 호황을 이루었다. 이는 2010년 폭발한 AKB48 붐에 따라 여성 아이돌 시장 자체가 커진 덕분이었다. 모모이로클로버Z 등 스타더스트 소속 그룹은 콘서트 위주의 활동으로 막강한 동원력을 자랑하고 있고, E-girls 등 LDH 소속 그룹은 EDM 위주의 음악과 퍼포먼스성을 내세운 무대로 주로 1~20대 여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아뮤즈 소속 Perfume과 BABYMETAL은 각각 특유의 음악성으로 롱런하였다. 또한 이 시기 여성 아이돌 업계는 지하 아이돌과 로컬 아이돌이 대두된 것도 특징이다.
아무리 멀리 잡아도 2018년에는 걸그룹 전국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에이벡스, 소니 뮤직 등 대형 기획사에서 제작한 그룹들과 중견급 그룹들이 줄줄이 해체하였고, 2016년 BiSH 이후로 이렇다 할 신인 그룹도 없다. 히나타자카46, =LOVE, BEYOOOOONDS 등은 기존 4846/하로프로 팬층이 수평이동했을 뿐 대중적으로 히트한 곡은 한 곡도 없다. 이미 일본 음악 시장에서 걸그룹은 대중과 유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라이징 프로덕션의 여성 아이돌은 AKB처럼 극장공연 위주의 하라주쿠 에키마에 파티즈 그룹들이 데뷔 직후 반짝 주목을 받았지만[39] , 이후 큰 성과는 없다. 크게 성공적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에이벡스의 iDOL Street도 활동중이다. 또한, 2010년대 들어 덴파구미.inc, BiSH, Little Glee Monster 등 48, 46, 스타더스트, LDH, 아뮤즈, 하로프로 같은 기존 여성 아이돌 주요 사무소 이외의 신인이 두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남성 아이돌은 여전히 쟈니스의 독주가 이어지고 있다. 아라시가 국민 그룹으로 활동하는 한편 후배 그룹들도 비록 아라시와 같은 대중적 인기를 얻은 그룹은 아직 없지만 쟈니스라는 기반이 워낙 탄탄하다 보니 별 문제 없이 활동을 하고 있다. SMAP의 해체와 TOKIO, NEWS의 잇따른 미성년자 음행 사건과 더불어 기대주였던 KAT-TUN이 멤버 탈퇴 등의 내홍을 겪으며 부진했지만, Kis-My-Ft2, King & Prince 등 2010년대 이후 새로 데뷔한 쟈니스 아이돌들이 인기를 끌었다. 아이돌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많지만 KinKi Kids, V6, 칸쟈니∞ 등 데뷔 15년이상 지난 쟈니스 그룹들도 201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인기가 많다.
LDH의 EXILE 계열 그룹은 원래는 아이돌이 아니었지만, 젊은 멤버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아이돌성이 강화되고 있다. 한편 라이징 프로덕션 남성 아이돌은 활동이 많이 줄어들었는데, 2018년 뜬금없이 데뷔한지 20년 이상 지난 DA PUMP가 터졌다. 스타더스트 프로모션에서 이 시기 남성 아이돌 그룹을 여럿 데뷔시켰지만 뚜렷한 성과는 내지 못했다.
2010년대 일본 아이돌 시장을 한국 아이돌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201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의 2세대 아이돌 그룹들이 일본에서 큰 활약을 했다. 2010년 소녀시대, 카라가 큰 성공을 거둔 이후 K-POP에 관심이 있는 일본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져서 '한류'의 폭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2년 한일관계가 냉각되면서 한류 붐은 냉각기에 들어갔었지만 한류의 고정 팬층과 한국의 아이돌 가수들이 지속적인 일본 진출로 인해 고정적으로 시장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서 2010년대 중반부터 iKON, 샤이니, EXO, 빅뱅을 비롯한 다양한 그룹이 안정적으로 활동을 했다. 빅뱅은 멤버들의 솔로 투어마저 흥행할 만큼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고[40] , 이후 일본인 멤버들을 내세운 현지화 전략을 사용한 트와이스, 세계구급 인기를 바탕으로 한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등이 차세대 한류 아이돌로 인기를 끌고 있다. 라이트팬 성향이 명확한 일본 한류팬 특성상 상당수 그룹들이 괜찮은 티켓파워를 기록했고[41] 2세대 그룹 때보다 인기나 팬층이 명확히 넓어졌다. 오히려 TV가 아닌 라인뮤직, 유튜브 같은 매개체 위주로 TV 프로모션의 영향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기에 외교적인 문제로 인한 영향도 줄어들고 있는 편이다. 한국에서 히트한 K-POP 노래는 10대~20대 일본 젊은층들 사이에서도 전파가 빠른 편이다.[42]
5.7. 2020년대
코로나19로 인해 아이돌의 주요 밥줄인 공연(굿즈 판매)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여러가지 큰 차질을 빚고 있다. 이 문제는 아이돌 뿐만이 아니라 공연계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특히 악수회 등의 접촉 상법으로 수익을 내던 아이돌 쪽은 타격이 더 크다. 대규모 행사장에서 수천 명이 모이는 악수회를 개최하던 48/46 그룹은 악수회를 연기하고 있는데, 악수회가 쌓여있으면 다음 싱글을 낼 수가 없으니 지속적으로 악영향이 갈 것이다. 특히 케야키자카46은 빈사 상태. 규모가 작은 그룹들은 온라인 사인회 등으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48사단은 여기에 야마구치 마호 자택 습격 사건[43] 의 여파가 계속해서 영향을 끼쳐 대외활동에 제한이 걸려버렸고, 결국 2020년 홍백에 낙선하고 그 자리를 사카미치 시리즈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한국 기획사 JYP엔터테인먼트가 일본 레코드사 소니 뮤직과 협업하여, 박진영이 직접 일본에서 그룹을 만드는 오디션 프로그램 Nizi Project에서 탄생한 걸그룹 NiziU가 2020년 12월 2일 정식데뷔했다. 일본에서 일본어로 부르는 K-POP을 모토로 하는 한류의 현지화 전략이다. 이미 오디션 방송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선데뷔곡이 피지컬 음반없이 디지털 음원만으로 각종 기록을 갱신하면서 돌풍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데뷔싱글을 첫날에만 20만장 팔아치우며 슈퍼루키로 떠올랐다.
6. 한국에서의 역사와 영향력
해당 문단에서는 설명을 돕기 위해 아이돌의 정의를 조금 더 폭넓게 사용하였고, 또 정치와 대중문화의 전반적인 흐름도 함께 서술하였다.
참고문헌: 《Jpop 연대기, 김상환, 음악세계》를 뼈대로 여러가지 당대 신문기사들을 종합하여 서술하였음.
6.1. 1970/80년대 초반: 태동기
일본 대중음악이 대한민국 제도권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정부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정책이 실시된 1990년대 후반부터다. 하지만 음성적으로는 청계천 빽판 시장등을 통해 유통된 일부 음악들이 다운타운가에서는[44] '''이르면 70년대부터는''' 매니아층을 형성하며 일부 소비자들에게서 지속적인 관심을 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더욱 세련된 멜로디를 찾는 청년층과 일제시대 때 들었던 멜로디를 찾는 일부 장년층 사이에서 매니아적 인기를 끌기 시작했는데, 80년대초에 들어서면 일본 대중문화에 물드는 현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기사들도 쉽게 찾을 수 있다. #
이러한 현상은 쓰시마 섬을 통해 넘어오는 일본 tv와 라디오 전파가 잡히는 경상남도 해안 인근 지역에서 특히 발달했는데, 일반인들도 한국 tv가 방영되지 않는 시간에 그 대체재로 일본 tv를 시청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쉽게 접촉하며 자연스럽게 일본 대중음악의 인지도도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이때 부산은 일본 대중문화와 한국을 이어주는 일종의 창구 역할을 하였는데, 70년대에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던 이시다 아유미의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역시 처음 유행한 곳은 부산과 인근 경상남도 지방이였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불법 복제판 시장에서 유통되는 물건의 거의 '''50%가 일본의 것'''이며 대부분 부산 부근에서 녹화된 것의 복사본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 80년대 중반에는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명목으로 정부에서 직접 일본 방송과 동일한 주파수 송신, 위성방송 수신이 가능한 안테나 국내반입 억제, 방송 시간 연장, 방송 출력 증가, 방송망 확장, 고성능 안테나 자진 철거 홍보등 일본 전파월경에 다각적으로 대응하였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
이 시기 비록 음성적이지만 매니아들 사이의 인기를 넘어서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던 노래들 중에는 아이돌 음악도 소수 포함되어있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미국 진출까지 했던 핑크 레이디와 일본 음악 팬들 사이에서 '긴기라기니'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콘도 마사히코의 '화려하지만 자연스럽게(ギンギラギンにさりげなく)'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80년대 중반까지는 그 인기가 일본 아이돌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일류(日流)의 영향으로 홍콩등 타아시아 국가나 미국에서 인기를 끌던 곡 몇 개가 어쩌다 한국에 재수입되어서 생긴 단발성 인기인 측면이 강했다.
6.2. 1980년대 후반: 상승기
일본 아이돌 문화가 본격적으로 한국의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8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다. 일본에서 도입된 레이저디스크가 한국으로 넘어오며 단순히 음악만 듣는 것이 아닌 영상 형태로 볼 수 있게되어 아이돌 공연이 제공하는 '''시각적 즐거움'''이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거기에 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문화 산업이 전반적으로 전보다 국제화되며 80년대 후반부터는 '''아예 한국에 진출까지 했던''' 소녀대를 필두로 한국 10/20대 사이에서 차츰차츰 알려지게 된다. # 물론 아직 반일 감정이 살아있는 한국에서 이러한 일본 대중음악의 '침투'에 대한 사회적 저항도 있었다. #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본국에서 80년대 초중반에 전성기를 누렸던 마츠다 세이코도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진건 이미 전성기가 지난 80년대 후반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지만 이처럼 당시 한국에서의 일본 가수/아이돌 인지도는 본토에서의 인기도와 일치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일본 음악은 한국 음악시장의 소비자들 뿐만아니라 생산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한국 댄스 음악은 60-70년대 박정희 정부의 퇴폐풍조 퇴치라는 미명 하에 극도로 폐쇄적인 환경에서 억압되며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나마 전두환 정부의 3S정책 덕분에 어느정도 숨통이 틔인 80년대 한국 댄스 음악 시장에는 음악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보고 배울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때 문화적 이질성이 강한 영미권 팝 트렌드보다도 일본 대중음악은 한국의 음악가들과 '''특히 음악 관련 사업가들에게''' 좋은 참고서가 되었다.
실제로 한국에서 80년대 중후반부터 등장하는 시초격 아이돌들을 뜯어보면 일본의 80년대초 아이돌 문화를 어느정도 밴치마킹 했음을 알 수 있다. 여자 솔로를 예로 들어보자. 일본 80년대 여자 솔로 아이돌계는 마츠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가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다시 80년대 중후반 한국으로 돌아와서 보면 청순컨셉의 강수지, 이지연은 마츠다 세이코와, 좀 더 강하고 아티스트적인 김완선은 나카모리 아키나와 어딘가 닮아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소방차 같은 댄스 그룹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비교를 해보면 영미권 댄스 그룹들보다 소년대를 비롯한 일본 아이돌 그룹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는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말 그대로 컨셉을 밴치마킹 했다는거지 표절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라''' (물론 이 시기 본토에서 인기 있던 곡들의 표절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했다)
6.3. 1990년대 초반: 전성기
90년대에 일본 대중음악의 완성도는 마침내 전성기를 맞는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노태우 정부의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문화의 밀수가 쉬워진 것 그리고 파라볼라 위성 안테나의 보급(정확히 말하자면 국내수입의 자유화)으로 접근성이 낮아진 것이 톱니바퀴처럼 맞몰리며 "일본 문화 홍수" "왜색 비상"과 같은 말이 신문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일본 문화의 전파가 빠르게 전개되었다.
과거 부산 정도를 제외하면 부유층과 매니아층에 국한되었던 인기가 파라볼라 안테나를 통해 전국에서 일본 위성 방송 시청이 가능해지며 안방에서 일본 tv를 시청하는게 가능해졌고, 영미권 팝을 듣는 곳이었던 '영상 음악 감상실'에서 일본 음악 방송이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대중음악은 '''청소년/청년층 사이에서 말그대로 폭넓게 보편화 되어 '유행' '열풍'등의 단어도 헤드라인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기사에 따르면 당시 서울 시민의 '''무려 37.4%가''' '질 적으로 우수한' 일본 위성 방송을 시청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물론 이러한 '저질'적인 일본 문화의 인기를 경계하는 시선 역시 여전히 존재하였다. # [45]
본국에서도 전성기를 맞은 일본 대중음악, 그 중에서도 특히 락밴드와 댄스 팝(좁은 의미로 보자면 이때 일본 댄스팝은 아이돌 음악과는 색이 조금 다르다. 90년대 초반 정통적인 아이돌은 일본에서 거의 빙하기 수준으로 인기를 잃는다)의 경우 '''일각에서는 그동안 세계 대중음악의 선두주자였던 영미권의 수준에 마침내 도달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에 반면 아직 비교적 촌스러웠던 한국 댄스 음악을 대신해 더 세련된 음악을 찾는 일부 소비자들 사이에서 90년대 중반에는 아무로 나미에, SPEED등 일본 가수와 아이돌들이 소규모 팬클럽까지 형성될 정도로 인기를 얻는다. # 특히 비주얼계 락밴드 X JAPAN의 경우 동시기 영미권에서 쇠락하던 헤비메탈을 원하던 소비자들에게 대체재로 소비되며 '''그야말로 폭팔적인 인기를 누리기도 했는데,''' 이는 그 동안 청소년/청년 세대와 부산 지역을 제해하면 마이너한 수준에 머물러있던 일본 대중음악 전반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기와는 별개로 여전히 소비자들은 대부분 용산 전자상가나 세운상가등을 통해 유통된 해적판으로 우회하여 들었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일본 대중음악 밀수의 난이도가 대폭 내려가 전파 속도 자체는 때로는 몇달씩이나 걸렸던 70, 80년대에 비해 비약적으로 빨라졌으나 가장 큰 장벽은 가격이었다. 아직 중소규모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에 비해 미국 바로 다음의 경제대국이었던 일본, 게다가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의 여파로 인한 당시 한일간 경제 격차덕에 물가 차이가 상당했고, 때문에 앨범 한장 가격이 '''정가로 계산해도 몇 배였는데 거기에 밀수 프리미엄까지 붙으니...''' 이러한 문제 때문에 이 시기 밀수되어 유통되었던 정식 앨범들은 대부분 일본 본토 발매판이 아닌 일류(日流)의 영향으로 일본 대중음악이 인기가 많았던 대만등 경제 격차가 크지 않은 타아시아 국가에서 현지 라이선스로 발매된 로컬 정발본이 들어왔다.
6.4. 1990년대 후반: 대망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
90년대 후반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정책으로 조선총독부 청사를 비롯한 일제 잔재 청산이 시작되고 독도 영유권 분쟁등 일련의 사건들로 한일 갈등이 고조되며 국민적으로 반일 정서가 고취된다. 이로인해 후일 일본 대중문화 개방 반대 의견이 힘을 얻는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일본 대중문화 개방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이유가 단순히 반일감정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아직 발전 단계에 있었던 한국 대중문화가 꽃을 피우기도 전에 이미 완성된 '선진' 일본 대중문화에 잠식당해 종속될 것'''이라는 우려도 컷다. 이러한 인식이 여전히 지배적인 상황에서 김대중 정부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정책을 밀어붙인다.
하지만 개방 이후 그러한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중음악계에서의 파장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잠식당하기는 커녕 오히려 한국 대중음악에서 일색(日色)이 점차 옅어지는 효과를 가져왔다. 사실 개방 직전 한국에서는 단순한 밴치마킹 수준을 넘어서 한국 음악가들의 일본 음악 표절이 극에 달할 정도 였으나 일본 음악이 제도적으로 양성화되며 오히려 많이 사라졌다. 대표적인 예로 대부분의 수록곡들이 표절로 들어난 룰라의 3집 <천상유애>와 나가부치 쯔요시의 대표곡 '톤보(とんぼ)'를 표절한 홍수철의 '보고싶다 친구야'가 있다. 추가적으로는 표절/공식 판정, 빽판등 문서 참조. 상황이 이렇다보니 국내 대중음악계에서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올 정도였는데, 다음은 1998년 일본 대중음악 개방 직전 표절을 자제해야한다는 내용의 기사이다. #
반대로 이 개방정책은 오히려 일본에 한국 대중문화와 가수들을 소개하는 계기가 되어 보아, 배용준등 초기 한류의 발판이 되었다. 그동안 한국인들은 일본 대중음악을 음성적으로 들어볼 사람은 다 들어봤다 할 정도로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던 반면 일본인들은 본 정책을 통해 '전혀 새로운' 한국 문화를 접하며 발생한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조 아래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변덕스러운 한일 관계에 따라 경색과 재개를 반복하며 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져 매듭지어진다.
사실 대중문화 개방 전에도 90년대 후반에 이르면 제도권에 진입을 못할 뿐이지 일본 대중음악 팬층은 '''이미 자체적으로 일정수준 양성화되어 양적, 질적으로 모두 발전되어있는 상태였다.''' 전자통신기술의 발전으로 PC통신이 활성화되며 수많은 관련 동호회들이 개설되어 반일감정에 눈치보지 않아도 되는 '팬들만의 공간'이 탄생했고, 또 이 사이버공간을 통해 일본 음악 관련 정보들이 과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국내에서 전파되었다.
초기 한국 아이돌들의 일본 아이돌 밴치마킹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일으킨 대중음악적 혁명 이후 계속되는 발전과 넓어지는 다양성, 또 한국 음악시장 자체가 커지며 점차 줄어들지만 적어도 90년대 중후반의 H.O.T., 핑클 등 한국 1세대 아이돌까지는 동시대 일본 아이돌들과 패션 스타일, 음악적 색체, 방송적 콘셉트 등에서 여러가지 유사성을 보인다. 산업적으로도 이 당시 일본 아이돌 업계로부터 밴치마킹하여 구축한 여러가지 시스템은 한국에서 지금까지 유용하게 잘 쓰이고있다. 대표적인 예로, SMAP이 88년 결성 후 3년 간 육성기간을 거친 것을 SM엔터테인먼트가 H.O.T.를 키울 당시 연습생 시스템으로 처음 이식하여 한국에 전파되었다. 또 현재 굿즈라고 흔히 불리는 아이돌 관련 파생상품들도 당시 일본 기획사들의 마케팅 수법을 밴치마킹하여 탄생한 것이다. # 이외에도 대한민국 아이돌 기획사들은 일본의 거대 아이돌 기획사 쟈니스 사무소의 아이돌 운영 방식을 많은 부분 참조하였는데,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6.5. 2000년대 이후: 쇠퇴, 암흑기
2000년대 이후에는 일본의 웰메이드 대중음악 시장이 락밴드 위주로 흘러가며 90년대부터 점차 침체기에 접어들던 아이돌 음악은 본격적으로 시장에서 도태되기 시작한다. 위 '3. 여자 아이돌 특징 - 3.1. 유사연애와 종속성' 문단에서 소개된 이유로 인해 우상이 될 수 있는 정통 아이돌이 몰락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모닝구무스메, 좀 더 이후에는 AKB48으로 대표되는 '성장형 아이돌'이라는 친오타쿠적인 컨셉으로 열화되며 채워진다.
남자 아이돌도 역시 쟈니스 사무소의 독점 정책으로 인해 다수의 중소규모 아이돌 기획사가 몰락하며 경쟁이 약화된다. 또, 일본 경제의 버블 붕괴로 방송사의 사정이 나빠져 음악 프로그램이 줄줄이 폐지된 이후, 소속 아이돌을 그 대체재로 예능에 내보냈는데, 기획사는 아이돌이 예능에서 망가지는 모습을 통해서도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이로 인해 경영진이 투자비용이 높은 음악과 퍼포먼스보다는 저예산으로도 가능한 예능 활동으로 친근감을 보여주는데에 주력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하다 보니 남자 아이돌도 여자 아이돌과 함께 열화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해 동시기 한국 아이돌 산업은 보아를 시작으로 동방신기,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 등 연습생간의 철저한 승자독식 시스템을 갖춰 '완성형 아이돌'을 표방, 발전하며 일본 아이돌과 완전히 분화된다.[46] 과거와는 반대로 일본 아이돌 시장이 한국 아이돌 추세에 크고 작게 영향을 받는 편이며 아이돌을 꿈꾸는 일본인 지망생 중 자신이 원하는 노선에 따라 일부는 오히려 한국 기획사로 넘어와 연습생 생활을 하며 데뷔를 하는 추세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JYP엔터테인먼트의 걸그룹 TWICE 출신 일본인 멤버들이있다.
이러한 아이돌 완성도의 질적 역전 때문에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인터넷의 발달로 일본 아이돌에 대한 접근성이 과거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좋아졌음에도 현재 대한민국에 일본 아이돌 팬은 극소수이며 그들의 음악을 찾는 소비자도 거의 없다.
2018년에 엠넷과 아키모토 야스시의 합작으로 방영된 프로듀스 48의 영향으로 AKB48이 한국 대중 사이에서 잠시 인지도를 얻기는 하였으나 해당 프로그램이나 이를 통해 데뷔한 프로젝트 걸그룹 IZ*ONE의 인기가 일본 아이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7. 목록
8. 관련 문서
- 응원문화
[1] 물론 한국에서도 아이돌은 가수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실력 차원에서 아이돌을 디스하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이돌의 직업이 일단 가수임은 인정한다. 이런 비판은 이들에게 '''가수로서 자격이 충분한가''', 즉 아이돌의 본분=가무 실력이라는 전제 하에서 나온다. 마치 이게 나라냐 드립에서도 한국이 나라가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않는 것처럼.[2] 한국식 표현을 빌자면 '뽕끼 있는 비음창법'. 이런 '일본식 여자 아이돌 창법'의 최정점으로 평가받는 보컬이 마츠우라 아야와 후지모토 미키다. 후지모토는 실제로 그룹 졸업 후 엔카로 전향했다.[3] 물론 그 많은 80년대 아이돌이 다 실력이 좋았을 리가 없다. 얼굴은 괜찮지만 가창력은 애매한 아이돌 가수들은 80년대에도 꽤 많이 있었고, 심지어는 70년대에도 적잖게 존재하고 있었다. 허나 당시에는 아이돌도 엄연히 가수였고, 가창력이 부족한 가수는 '가수로서' 비판받고 롱런이 어려웠다.[4] 등장하지 않았다는게 아니다. 유사연애 아이돌들에게 밀려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을 뿐. 단적인 예로 진정한 의미의 '정통파' 솔로 아이돌을 지망했던 무토 아야미는 악수회도 하지 않고 방송활동도 거의 하지 않아 인지도가 거의 없다. 이렇게 빛을 보지 못한 케이스는 셀 수 없이 많다.[5] 사실 2010년대 현재에도 '정통파'를 자칭하는 아이돌들은 많지만, 이들이 말하는 '정통파'는 7080년대의 진짜 정통 아이돌의 '컨셉 이미지'에 48사단이 구축한 '악수회형' 스펙을 섞은 아류인 경우가 많다. '''진짜 정통 아이돌이 지녔던 뮤지션으로서의 능력은 그녀들에게 없다.'''[6] 다만 아이돌들은 이것저것 많이 하지만, '아직 서투르지만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세일즈 포인트다. 때문에 실력이 별로라도 다른 방송인들이 웃으면서 귀여워해준다. 그런데 만약 아이돌 졸업하고 혼자 나오면? 그때부터는 부족한 실력과 실수에 대해 가차없는 평가와 비판이 가해진다.[7] 한국도 이점은 마찬가지이다. 다만 일본은 '''실력이 뛰어나든 못하든 상관이 없다는 것이고''' 한국은 '''기본적인 실력 이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미 한국은 90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을 지나오며 점점 상향평준화가 되어 평균수준이 일본보다 높다. 한국은 작사, 작곡해서 곡을 내는 아이돌도 흔하고, 그룹 내 메인댄서쯤 되면 안무도 직접 짜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역시 실력보다 기획사의 역량에 따라 뜨느냐와 못 뜨느냐의 차이가 굉장히 크다. 실제로 가창력, 춤, 외모가 출중한데도 곡 선정 및 컨셉이 이상하거나 기획사의 능력 부족으로 못 뜨는 아이돌이 허다하다. 중소 기획사에서 나온 정상급의 인지도를 자랑하는 아이돌이 몇 팀이나 있었는지 보면 안다. 아이돌만이 아니라 연예계 전체가 이렇지만 말이다.[8] 애초에 상술한 듯이 일본과 한국은 아이돌에 대한 개념과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선상에서 성장형/완성형 아이돌로 분류하는 것 자체에 어폐가 있다. '성장형'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마치 아이돌이 성장하면서 점점 실력이 발전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만, 일본 아이돌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오랜 기간동안 아이돌을 한 인기 그룹도 한국식 아이돌 기준으로 바라보면 춤이나 노래의 실력에 있어서 기준에 한창 못미치는 경우가 많아서, '이게 성장한거라고?' 라고 느낄 수도 있다.[9] 실제로 한국 아이돌 S.E.S.의 일본진출 실패의 큰 원인은 일본소속사의 역량부족이었다.[10] 그중에서도 특히 SMAP.[11] 단적인 예로 AKB48과 쟈니스는 일본에서도 '안무하나 안맞는 립싱크 군단' 등 저조한 퍼포먼스에 대해 비판받고 있다.[12] 이전부터 자체적인 트레이닝 시스템을 구축하고 아이돌을 제작하는 회사는 일본에도 있었다. 하로프로는 '에그' '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연습생 제도를 운영했고, 아뮤즈는 실용음악 학원인 액터즈 스쿨과 결연을 맺고 트레이닝된 인재를 데려오거나 사쿠라 학원 같은 견습팀을 운영하고 있다.[13] 음악스타일만 봐도 알겠지만 말랑말랑한 아이돌용 걸팝에 아키모토 야스시가 만든 선정적인 가사를 얹은 오냥코와 미국 팝씬, 특히 R&B의 영향을 받은 스피드를 동일선상에 놓는건 무리다. 다만, 스피드도 소속사에서 대놓고 아이돌로 홍보하지는 않았지만 보통 일본에서 대중적으로는 아이돌로 분류된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데뷰당시 멤버가 초등학생 2명(5학년, 6학년), 중학생 2명(중1, 중2)이라 진짜 일본의 아티스트라고 불릴정도 실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14] 데뷔곡은 20만장이 팔렸지만, 해체직전 오냥코 클럽의 싱글은 십만장도 채 안팔렸고 마지막 콘서트도 3만명 규모인 요요기에서 단발성 공연이었다. 당대 인기 가수들과 비교하면 결코 대단한 수치가 아니다 까놓고 말해 85년 말에서 87년 초까지 '''일년정도 반짝하고 끝났다.''' 지금까지 회자되는 건 컨셉이 준 충격과 당시 오냥코의 팬이던 60~70년대생들이 나이가 들어 추억보정을 받았기 때문이다.[15] 2명은 싱글 활동도 못하고 있는 와중에 하이터치회 셔틀 취급이냐며 논란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16] 이들은 쟈니스 주니어다![17] 일례로 SUPER☆GiRLS는 각종 접촉 이벤트를 통해 싱글을 10만장 가까이 팔기도 했으나, 각종 이벤트와 티켓 떨이판매를 동원했음에도 무도관의 절반정도밖에 채우지 못했다.[18] 예를 들어 관서지방은 홀 규모 공연장이 모두 매진인데 관동지방은 제프도 어렵다면 그 가수의 인기는 관서지역 한정이라고 볼 수 있다.[19] 정확히 말하면 AKB도 개별악수회의 경우, 지정부수를 완판시키는 인기멤버들은 인터넷 추첨이다. 다만, 추첨에 떨어지면 예약이 취소되므로 돈을 많이 쓰고도 악수회를 못가는 경우는 없다. 전국악수회는 음반을 사면 무조건 갈 수 있지만, 엄청난 대기시간에 비해 시간이 매우 짧다.[20] 소속사가 사귀거나 사귄적 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유명한 한국 아이돌 커플의 예시이다. BLACKPINK 제니-EXO 카이, AOA 설현-블락비 지코, 소녀시대 태연-EXO 백현, 소녀시대 윤아-이승기, 소녀시대 수영-정경호, 소녀시대 티파니-2PM 닉쿤, f(x) 크리스탈-EXO 카이, EXID 하니-JYJ 김준수, 티아라 소연-클릭비 오종혁, 카라(아이돌) 구하라-비스트 용준형, 걸스데이 혜리-류준열, 나인뮤지스 경리-2AM 정진운, (여자)아이들 수진-펜타곤 후이, TWICE 지효-강다니엘, TWICE 모모-슈퍼주니어 희철 등. 이 중 누구도 열애설만으로 소속사 차원에서 공식적인 사과 성명을 발표(SNS 등에서 팬들에게 도의적으로 미안하다고 말한 아이돌은 있다.)하거나 탈퇴 등 불이익을 겪은 아이돌은 없다. 탈퇴당한 경우는 소속사의 공식발표를 다음날 SNS로 뒤엎은 현아와 던뿐이고 그 밖에 탈퇴한 경우는 결혼, 임신 등으로 아이돌 활동 자체가 어려워진 경우이다.[21] 손해배상 청구당한 일본 아이돌은 메챠하이(정식 명칭은 아오야마세인트 하챠메챠하이스쿨, 오리콘 차트 주간 7위까지 해본적이 있어 완전 무명은 아니다.)의 멤버인 미우라 세나로 소속사에서 연애금지규정 위반을 이유로 소송을 걸었는데, 놀랍게도 2015년 소속사가 승소해서 65만엔의 배상판결을 받아냈다.# 물론 그룹에서도 탈퇴당했다.[22] 인디 밴드로 라이브 등으로 활동하다가 인디즈 앨범을 내고 이게 메이저 음반사 눈에 띄어 계약하고 메이저 앨범으로 데뷔해, 여기서 더 인기를 얻어 스타가 되었다면, 소속 레이블(음반사)은 있어도 소속 기획사는 없거나 본인 기획사이므로 월급제가 아니고, 수익을 계약에 따라 음반사와 %로 분배한다. 일본 인디 밴드 중 이렇게 성장한 경우는 흔하다. 대표적으로 SEKAI NO OWARI 등등. 하지만 일본의 인기 아이돌은 대부분 전부 기획사의 프로듀싱을 받고 유명해졌다.[23] 이것도 엄밀히는 한국처럼 '총 순익'에서 배분하지는 않고 기본급+수익에 따른 일정비율의 성과금을 지급받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는 매년 한해동안 해당 연예인의 매출과 순익을 바탕으로 갱신된다. 쉽게 말해 직장인들처럼 연봉협상을 한다.[24] 기무라 타쿠야는 특이하게도 아이돌 출신임에도 수익분배제로 소득을 지급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기무라 타쿠야는 이미 아이돌이라기보다 배우, 그것도 시청률 30%를 숱하게 찍은 국민배우에 가까운 입장이라 매우 특수한 케이스고, 다른 거의 모든 아이돌은 월급제이다. 심지어 기무라 타쿠야가 속한 최고 인기그룹인 SMAP조차 월급제라고 쿠사나기 츠요시가 직접 밝힌 바 있다. 출처 일본 여성 아이돌들도 최정상급이라도 수익분배제로 알려진 사례는 없다.[25] 다만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도 회사마다 월급책정과정이나 계약조건은 천차만별이다. 야스다 케이가 소속된 업프론트는 소속가수에게 가창인세를 따로 지급하지 않는 대신 기본급과 인센티브 비중이 다른 회사보다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당연히 반대로 요시모토 흥업처럼 노예계약 수준으로 착취당하는 경우도 있다.[26] 악수회 수당, 콘서트 굿즈 게런티, 방송 및 행사 출연료, 여자 아이돌은 그라비아 촬영 등은 기본급과 별개로 추가수당을 지급받으며 콘서트는 수익 대부분이 가수에게 떨어진다. 즉 음반을 많이 파는 아이돌 멤버보다 공연을 많이 흥행시키는 아이돌 멤버가 더 많은 돈을 버는 구조.[27] 일본에서는 2005년까지 고액납세자명부 공시제도가 있어서 고액납세자들의 세금 납부 내역이 공시되었다. 2006년 이후 이 제도가 폐지되지만, 공시되지만 않을 뿐이지 명부는 여전히 만들어지는데 기자쯤 되면 간단히 입수할 수 있다. 참고로, 일본 야구나 축구 등 프로선수들의 연봉도 대중에 공개되지 않는데, 기사에 나오는 연봉은 대부분 이 방식으로 기자들이 추정한 것이다.[28] 일례로 48사단 자매그룹 소속인데 본점 활동도 병행하는 인기멤버들은 월세만 수십만엔인 숙소를 도쿄와 지방 두곳에 모두 잡아주는 경우도 있다. 이때문에 황색언론에서 찌라시로 툭하면 아이돌 멤버들이 사는 집 월세 찌라시가 올라온다.[29] 같은 시각 한국은 여성의 성욕이라는 개념이 조금 더 늦은 2000년대에 와서야 인식되었지만 한국의 아이돌은 애초에 방향성 자체를 유사 연애 대상으로 잡지 않았으므로 이것에 대해선 별다른 말은 없었다.[30] 이건 사실 단순히 연애 스캔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욕을 먹은 게 아니라 '''은혁이 상의탈의한''' 사진 속 상황이 일을 키운 측면이 컸다. 정작 이후 아이유가 장기하와 공식적으로 연애를 시작했을 때는 이런 반발이 거의 없었다.[31] 물론 팬이나 소속사 측은 태도, 거짓말 문제를 구실로 삼지만 결국 그 발단은 연애 문제였으니.[32] 사실 소거법으로 계산하면 간단한데 일본이라는 나라는 유사성매매와 AV(Adult Video)가 합법인 나라다. 성인여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은 얼마든지 직간접으로 해소할 수 있지만 유일하게 금기시되는게 미성년자에 대한 성적욕망이다. 즉, 합법적으로 남자를 모르는 순결한 미성년자-사회초년생에 대한 연애욕망을 대리만족할 수 있는 수단이 아이돌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33] 엄밀히 말해 구조 자체는 캬바쿠라 시스템과 동일하다. 이러다보니 이런 일본 여아이돌의 마케팅 방식이 '''손X년'''이라 부르며 비하되기까지 한다. 손을 그냥 파는 것도 아니고 그 방식 자체가 윤락업소와 다를 게 없으니...[34] 예를 들어 큐트가 아직까지 실력파 그룹이라는 이미지로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은 곡과 콘텐츠의 방향성이 대중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며, 페어리즈 역시 그룹만의 특유한 음악성이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는 문제점이 있다. 결정적으로 일본인들은 아이돌의 실력에 대해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35] 정식으로 데뷔하는 순간부터 아이돌은 각종 무대와 방송출연 속에서 하루하루 신곡을 소화하기에도 벅찬 일정을 수행해야 하며, 특히 48계열처럼 상시 공연을 핵심으로 하는 그룹은 더더욱 그렇다. 프로운동선수들이 시즌 중에 아무리 웨이트를 해도 추가적으로 몸을 불리기는 커녕 비시즌에 만들어놓은 몸을 유지하기도 벅차하거나, 사회인들이 회사를 다니면서 학업을 병행하기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돌 역시 한 번 데뷔한 이후에 '''실력을 한 단계 향상시키는''' 것은 어지간한 공백기를 가지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하다. 과거 정규앨범 중심의 활동시절에는 한 번 활동을 종료하면 족히 1년여의 공백기를 가졌기 때문에 그나마 이게 가능했는데 최근에는 싱글앨범 위주로 활동주기가 짧아지고 있는데다가 인원이 많은 그룹들은 유닛활동이나 각종 부업성 음원들도 잔뜩 내기 때문에 더더욱 힘든 환경이다. 그런 점에서 48류 아이돌 팬덤이 주장하는 '성장 스토리에 대한 지지' 따위는 사실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한국의 1세대 아이돌들이 괜히 실력을 향상시키겠다며 몇년씩 활동을 중단하고 해외유학길에 오른 것이 아니다. 까놓고 48계열의 수많은 졸업생들 중에서 성인 아티스트로 성공적인 전환을 이룬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게 현실이다.[36] 주기적인 오디션을 통한 인재선발, 트레이닝과 자체평가, 공개평가를 통해 데뷔인원 발탁 등. 다만 유명 안무가를 비롯해 업계에서 손꼽히는 트레이너들을 붙여 관리하는 아뮤즈와 달리 하로프로의 사내 트레이너들은 팬들의 평가가 좋지 않다.[37] 애초에 운영측도 캬바스카 학원 따위를 찍음으로서 이런 비판을 오히려 인정하는 수준.[38] 게다가 모리타카 치사토 본인이 자기 자신의 앨범에 직접 관여하는 등 음악적으로도 욕심이 있는 가수였기에 뚜렷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할 수 있었고, 이 덕분인지 큰 침체기 없이 99년 결혼 직전까지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였다.[39] 2016년 AKB48의 10주년 극장공연에서 사시하라 리노가 "지금은 하라주쿠 쪽이 뜨거운 듯 하다"고 말했을 정도. 일본유선대상에서 후와후와가 신인상을 받기도 했다.[40] 다만 빅뱅은 14~17년까지의 활약과 달리 연이은 멤버들의 사건사고로 일본활동이 사실상 중단되었다.[41] 특정 그룹을 파기보다는 케이팝 자체를 파는 이들이 대부분이다.[42] 2018년 라인뮤직, 착신음 등의 차트에서 모모랜드의 뿜뿜이 그해 연간차트 상위권을 차지하기도 하였다.[43] 일본 아이돌계가 마음에 안 드는 무고한 아이돌의 인기를 빼앗기 위해 질식사 사주를 넣은 것이 명백함에도 운영진이 은폐하기 급급하는 등 자정작용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걸 보여준 적나라한 사건이다.[44] 현재의 언더그라운드/인디 정도로 보면 된다. [45] 다만 실제로 일본 대중음악은 현재까지 한국에서 '''단 한번도''' 한국 대중음악의 위치를 위협할 정도로 주류의 수준까지 올라오지는 못했다. 청소년/청년 세대와 부산을 중심으로 인기가 어느정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당대 신문 기사들의 경우 반일감정에 호소하거나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뽑기 위해 실제 인기보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한 경우가 많으니 주의하자.[46] 다만 한국 아이돌/비판 및 문제점 문서만 봐도 한국 아이돌도 문제가 굉장히 많다.